* 민주화  ->  실용주의  ->  Homo Desid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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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아니라 학교가 문제다 - 현 교육 시스템에서 아들을 성공시킬 학습 전략 8가지
마이클 규리언.캐시 스티븐스 지음, 고정아 옮김 / 큰솔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 나이가 들었다고 하기에는 어른신들이 야단치실 것 같고, 하지만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조금이 있는 저의 나이에서... 스스로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생활태도와 사고방식에 변화를 느낍니다. 지금 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왜?’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살았는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로 관심이 이동되었습니다.


 많은 책에서 남녀의 차이, 신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사고체계 차이에 대해 언급하였고, 이것은 후천적 요인뿐만 아니라 태어날 적부터 차이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 방법에서 있어서도 남녀(아들과 딸)에 차이를 두고 교육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는 차이와 차별의 한계를 명확하게 긋기 어렵다는 점에서 차별적 교육, 불평등 교육으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교육제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평균화 정책의 유지든 아니면 평준화 폐지든, 그리고 최근 논란이 된 ‘고교 배정 개정안’도 목적은 학생들을 잘 가르쳐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가르치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50 만명 넘는 수험생 하나 하나에 맞추어 50만개에 해당하는 교육제도가 필요할까요? 우선 남녀가 다르니 남학생을 위한 교육제도와 여학생을 위한 교육제도로 둘로 나눈 것이 타당할까요?


 주위의 아이들(또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 아이의 재능은 어떠어떠하니 어떻게 교육을 시켜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눈에 띄는 아이가 많던가요.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평범합니다. 또한 모든 부모님들 현명하여 자신의 아이들의 장단점을 알고 이에 맡게 키울 능력을 가졌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 때문에 제도권 하에 안전한 직업(속된 말로 ‘사’가 들어가는 직업)을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사막에도 석유(에너지)를 사용하면 정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장점과 동시에 단점을 갖고 있는데 적절한 노력(부모님의 돈, 시간, 정성을 포함한)이 더해진다면 모든 아이들은 훌륭한 성인으로 자랄 것입니다. 서구에서 교육을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학생들에게 이런 교육 방법은 (이 책의 ‘학습 전략 5 ; 언어 과목 성적부터 올리자’와 유사) 구체적으로 적용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갖고 견해로는 현대 사회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적합합니다. 아들, 딸의 교육 제도뿐만 아니라. 결론적으로 아들의 교육은 에너지는 더 소모되는데 성공의 확률은 불확실하다. 어찌하겠습니까? 여성만으로 사회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많은 부모가 아들을 자식으로 갖고 있으니... 저는 다른 결론으로 ‘학교가 문제다’가 아니고 ‘좋은 부모가 됩시다.’가 옳은 결론으로 생각합니다.


 이 책은 아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으니 좋은 부모가 되도록 합시다. 특히 아들에게는 더욱 더 필요한 조건입니다.


 밑줄 긋기 ; p 20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하자’ 
                
 p 63 ‘애착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학습도 가능하다.’


(알라딘 서평단에 뽑혀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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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6-12-21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미리 읽어 놓고도 게을러서 이제 서평을 올려 책을 보내주신 '큰솔' 출판사에게 죄송합니다.
아들 교육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마침 이에 해당하는 책이 나왔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기대가 많았는데, 주제의 적합성에 비해 내용이 2% 부족한 듯합니다.
 
질병 판매학
레이 모이니헌.앨런 커셀스 지음, 홍혜걸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서 언급된 GSK(글락소 스미스 클라인), 로슈Roche, 쉐링푸라우Schering-Plough등의 제약회사 이름이 너무나 친숙하며 과민성 대장 증후군Irritable bowel syndrome, 고혈압Hypertension의 의학적 용어에 파묻혀 사는 제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의료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관점으로 의료계를 보나 이 책을 포함한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인들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제목만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는 짐작이 갑니다. 질병의 홍보가 제약회사의 약 판매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너무 빨리 죽어요> (폴 방키몽 저/김미선 역/서해문집 출판)라는 책을 통해 이미 제약회사의 비판을 읽은 바 있는 저는 이 책의 내용이 충격을 주거나 새롭지 않았습니다. 담담하다는 것이 도덕불감증일까요?

 

 이 책의 맹점을 지적하고자 저의 알라딘 블로그 통해 몇 가지 의학적 내용을 올렸고 비판을 기다렸으나 눈에 띄는 댓글은 없었습니다. 의사유발수요의 단편적인 예를 보여 주기 위해 제왕절개에 관한 투표를 실시하였는데, (단 네분이 투표하였지만) 100% 수술을 하겠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책의 구절구절에 대한 반론을 글로 쓴다면 작은 책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틀린 내용(사실)을 써 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보고서를 읽은 적은 없지만 이 내용의 진실성에 동감합니다.


 한 방송 토론에서 의사의 감기(상기도 감염)에 대한 항생제 처방을 보고 시민 단체 대표자분이 의사들의 비도덕성을 비난하였습니다. 의료 체계의 개선보다 의사의 도덕성이 더 중요한 것이라면 학교 운영의 투명성 공정성을 위한 법률 보다는 학교 운영자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이 책을 읽고 제가 걱정하는 것은 가치판단입니다. 저도 어렵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잘 모르겠는데, 이 저자는 당당하게 비평을 합니다.


 - ‘이류 유권자가 삼류 정치를 만든다.’ ; 저의 주위 사람이 정치를 비판할 때 저는 위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류 환자(?)가 삼류 의료 체계(의료인)를 만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류 환자가 아닌 일류 환자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완벽한 도덕성을 갖은 의사를 기대한 것과 뭐가 다른가?’ 이야기하면 역시 저도 논리의 모순에 빠집니다. 그래도 이 책을 읽는 다수 독자가 의료인이 아닌 환자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면 다음 몇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의료인은 학문적으로 완벽하지 않으며 의학 역시 학문적으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물**라는 별명을 갖은 분이 저에게 ‘의사들도 잘 모르데요.’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교과서를 한 줄로 쌓아 놓으면 저의 키보다 높습니다. 그 많은 내용을 다 이해하고 암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의사는 보통 사람입니다. 성인군자와 같은 의사, 극소수 있습니다. 나쁜 의사, 안타깝지만 역시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는 ‘환자를 잘 치료하고, 그러다 보면 좋은 의사로 소문이 나고, 많은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돈도 벌고.’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진단 - 이것을 원하면 검사가 많이 시행될 수 있고, 완벽한 증상의 호전 - 이것은 과도한 투약을 포함한 치료를 가져오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현대의 질병은 환자의 생활 습관을 바로 잡는 것이 기본입니다. 고혈압은 중풍이나 심장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투약이 필요한데, 더 중요한 것은 금연, 적절한 체중 조절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 책의 저자가 비판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전혀 생활적인 면이 조절되지 않는 상태에서 약은 그 치료효과가 매우 미미합니다. 약으로만 치료받으려는 환자, 환자에 동조하는 의사, 환자-의사에게 동조하는 제약회사 그리고 이제는 그 역순.


 노화와 사망에 대한 수긍이 필요합니다. - 이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인데,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늙는다는 것은 슬프고, 죽는다는 것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첨단의 현대의학으로도,  어떤 훌륭한 의사도 노화와 사망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의학으로 도움을 받을 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라딘 서평단에 뽑혀 이 서평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 이 책에서는 제약회사의 후원을 받아 약을 파는 의사들이 묘사되고 있는데, 나는 출판사의 후원을 받아 (이 책을 무료로 받았으므로) 서평을 쓰고 이 서평은 책을 판매의 홍보자료로 쓰일 테니 정말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제약회사 직원들에게 다음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 상대편의 반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반격은 미미하였다.

cf ; 알리딘 블로그 ; 마립간 마이페이퍼 글 ; 질병판매학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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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6-12-0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투표는 4명 참가, 또 다른 투표는 1명 참가... 인기 없는 서재가 서글프다.

marine 2006-12-0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옳은 소리는 원래 인기가 없는 법이죠^^
전 의사들이 대중적인 글들을 더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책은 안 읽어 봤지만 일종의 음모론도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서평을 용감하게 쓰신 마립간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마립간 2006-12-08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격려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의 견해가 옳은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인기가 없는 것은 사실인 것 같고, 외면한다고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알라딘 서평단에 선발되어 책을 얻게 되었고  책을 막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대했던 것 보다 마음에 드는 책이라....서

 <아들이 아니라 학교가 문제다.> 마이클 규리언, 스티븐스 저/고정아 역/큰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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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2-0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에게 아들이 있었나 의아해서 클릭함. 잘 계시죠????

마립간 2006-12-0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어느새 연말이 되었습니다. 연말연시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결혼도 안 한 저의 사주팔자에 아들 둘이 있답니다. (어느 점쟁이의 말, 믿지도 않지만.)
미래의 저의 아들들 교육보다는 갈등의 해결점을 찾는다는 점에서 흥미 있는 주제였는데,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2006-12-17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1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파란여우 > 12월, 歲寒圖는 歲閑渡로 재구성하며

세한도를 교과서 그림으로 처음 본 10대 때 국사 선생님이 아무리 완당의 그림을 걸작이라 말해도 나는 콧방귀만 꿨다. 마네와 모네의 빛의 구도와 피카소의 권력에 길들여진 아이들의 서양회화에서 세한도는 초라한 그림이었다. 붓질 몇 번 하고 왼쪽에 한자로 가득 찬 그림이 뭐가 잘 그렸다는 것인가. 집을 보자. 지붕선과 벽선은 희미하게 끊어질 듯 이어지고 대문은 따로 안 보인다. 동그랗게 앞 벽에 뭔가 구멍 뚫린 게 보이긴 하지만 우리가 양반가에서 볼 수 있는 위엄 높은 솟을대문이나 최소한 반듯한 대문의 형체는 아니다. 어찌 보면 중국식 문처럼 둥근 그것과 더 해독 불가능한 소나무. 왼쪽의 나무 두 그루는 비쩍 마르고 키만 컸지 잎이 성글다. 다 늙어 머리털 몇 올 숭숭한 늙은이의 모양새다. 더 기이한 나무는 오른쪽 나문데, 맨 오른쪽 나무는 제법 기둥이 묵직해 보인다. 그런데 가지가 한쪽으로 휘어있다. 휘어 있는 가지 끝에 잎이 몇 개 겨우 보인다. 꼭 분재에서 볼 수 있는 변이종의 형태를 띤다. 잘 생긴 나무는 없고, 울타리 없는 집도 초라하고, 갓 쓰고 문 앞에 서 있는 노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렘브란트의 대작에 길들인 내 10대의 기억은 말한다. 이 그림이 당췌 어디가 걸작이라는 건가.


이십대에 들어서자 세한도는 약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치장하지 않은 집과 단출한 소나무는 소박하다. 생략법을 사용한 그림의 소박함은 고상했다. 왼쪽여백을 가득 메운 글씨와 한 쌍의 완벽한 ‘커플’이다. 안정감 있고, 착한 그림. 세한도가 내 가슴 앞까지 확 다가온 것은 그로부터 십 년이 더 흐른 후의 일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디고 나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양분으로 성장을 한다. 비로소 내 안의 군더더기들이 죄다 버리고 싶어진다. 알고 보니 금과옥조라 여긴 내면의 부피와 현실의 눈요기들은 침 한 번 뱉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쓰레기더미였던 것이다.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한 순간 여긴다. 그런 일을 몇 번, 좀 더 빨리 깨우치는 사람이라면 단 한번의 시련만으로도 무상함을 알게 된다. 무상하다고 하니까 무슨 염세주의를 논하는가 하지만 그건 완전 왜곡의 오류다. 무상은 아무 집착 없는 세계를 말한다. 집착을 줄이고 나면 마음이 고요하다. 태풍이 '사우론'처럼 들이닥쳐도 서두르지 않는다. 요긴하게 써야 할 자신의 '무기'(지혜와 용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런 경지가 언제쯤, 얼마나 많은 불의 산맥을 넘어야 가능할까. 알 수 없지만 세한도를 세 번째 발견한 나의 삼십대는 내 친구들하고는 좀 달랐다. 그 때 내가 입에 달고 다닌 말 중의 하나가 “내 전 인생에서 겪어야 할 일들의 8할을 삼십대에 겪었다”라는 오만 투성이의 성화를 부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저 말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자기기만이 전혀 없는 육담(肉談)이다. 그렇다고 내가 남달리 고생을 더 많이 했노라는 ‘인간 극장’투의 관심은 사양한다. 누구나 나름의 고유한 세계가 있는 법이다.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상, 하가 아닌 ‘다를 뿐’의 시각으로, 밀레의 풍경과는 판이 다르게 짜인 세한도는 그 당시 '나의 세계'의 그림이 된다. 삼십대에 사회적 성공의 욕망에서 미끄러져 본 사람은 이 세한도가 남달리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던가. 한창 고속도로에 몸을 싣고 달리다가 어느 날 그게 미끄럼틀 위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너무 늦었다. 뭐 달리 방법 없다. 아래로 뚝, 떨어져야지. 그게 속 편하다. 세한도의 주인공도 그걸 알았다. 세상 밖으로 한 번 밀려서 경계 안을 관찰하고 공부를 하는 일도 괜찮았다. 제주도의 바람은 지독하게 사납지만 아무렴, 너와 내가 생각이 다르므로 너는 내 적이라는 배신보다 더 차갑겠냐.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받은 추사 150주년 기념전 도록인 ‘간송 문화 제71호’에서 최완수 선생은 말한다.


“오히려 환로(宦路:벼슬길)와 속사(俗事:세속일)에 급급 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책들을 차분히 읽게 되고 익히지 못했던 서화의 제체(諸體:여러 체)를 체득할 수 있어서 그의 학문과 예술은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곳 제주에 있으면서 사우(師友)간에 경의(經義)와 금석고증 및 천문, 지리, 역사, 음운, 문자, 서화 등 각 분야에 걸친 학리(學理)의 토론을 서신으로 주고받으며 당시 불교계의 거장인 백파(白坡, 1767-1852)와는 선리를 왕복 토론함으로써 70년 수도를 자부하는 노덕(老德)을 격동시킨다. 그가 이 시기에 얼마나 독서에 열중했던가는 막내아우 상희에게 보내 줄 것을 독촉한 편지에 수록된 서목으로도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간송 문화 71호 144쪽)

 




 

 

 

 

 

 

 

 

 

 

 

세한도는 졸박무속(拙樸無俗:서툴고 꾸밈없고 속기 없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원래 이 그림은 제주 대정읍의 유배지 거처를 그렸으나, 현재 제주의 추사적거지에는 그림처럼 소나무나 잣나무가 성성하지 않다. 세월의 유고함을 속인들의 재단으로만 추측하건데 적거지는 멀쑥하게 단장한 이층짜리 기념관에 입장표를 끊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기념관은 흰색 벽돌로 지은 정방형으로 길에서 볼 때 뒤 쪽의 적거지를 완전차단하고 있다. 옆에 주차장이 조촐하게 마련되었는데 더 볼썽사나운 것은 그 옆에 화장실 건물이 세한도와 마주 보고 있다는 점이다. 비바람이 몹시 부는 날, 가이드와 단 둘이 찾아간 추사 적거지에서 펄럭이는 우산을 쓰고 한 시간 남짓 돌아보고 나왔다. 적거지 후미에 있는 ‘추사다원’은 폐가가 되어 흉물로 방치되었고, 이층에 마련한 기념 전시관에서는 이렇다할 설명이 배제된 모조 작품으로 이백년의 시간을 침묵하고 있다. 나중에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우르르 파리 떼처럼 몰려 들어와 시장판을 열었다가 폐장하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바닥은 흙물로 얼룩졌고 카운터에서 졸고 앉았던 젊은 이십대 아해는 얼룩 자국을 보며 얼굴을 찌푸린다. 다시, 세한도 앞으로 다가갔다. 마흔이 넘어서 보니 완당도 나도 얼굴이 두루뭉술해졌다. 각진 얼굴은 둥글게 되고 날 선 언어는 세한도 붓질처럼 희미하게 변했다. 인정이란 무엇일까. 문득, 전 날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만난 세 명의 공연자가 생각난다. 먼 이국땅까지 찾아온 그들의 21세기 세한도는 어떨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게 다 세월의 은덕이다.


완당의 제자사랑과 그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지면상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문인 이상적은 연경을 다녀올 때마다 완당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부탁을 잊지 않고 책을 구해다 주었다. 그 중『만학집(晩學集)』,『대운산방집(大蕓山房集)』,『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은 완당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이게 내가 완당의 <불이선란>과 <세한도>목판화본을 판화가 류연복님으로부터 받고 며칠동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기뻐했던 일과 거의 동격이다. 좋은 그림을 얻는 일과 좋은 글을 얻는 일, 둘 다 천복(天福)이며 천은(天恩)이다. 일은 사람이 했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인연 닿기 어렵다. 그래서 인연이란 무릇, 물건과 사람을 구분 짓지 아니하고 하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한 감격으로 이어진다. 현상과 실체의 모습만을 논할라치면 이런 감동이란 모른다. 그래서 내가 미국의 ‘실용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실체 그 뒤의 ‘무언가’를 캐보는 일, 옛사람들의 만남은 고아(高雅)하다. 완당은 <만학집>을 남다른 감회로 만났다. <만학집>의 저자는 ‘계복’이라는 사람으로 완당의 둘 도 없는 금석학의 지기이자 학문 동반자인 ‘옹방강’과 교류할 때 익히 알고 있던 사람이다. 비록 바람 부는 유배지에 위리 안치된 몸이지만 옹방강과의 우정까지 바람에 날려 보낸 것은 아니다. 고달픈 시절에 따듯한 정(情)은 ‘희망’의 불씨를 품고 있는 화톳불이다. 완당은 이상적의 노고에 감격했다. 우정의 산물, 나도 그거 좀 아는 나이가 되었다. 마흔이 넘으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십대의 시련이 나에게 마흔을 예찬하게 만들었다고 늘 떠벌린다. 완당의 감격은 세한도의 발문에 또박또박 정자(正字)로 예의 뜻을 밝힌다.


“지난해에는『만학』과『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세상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완당 평전1, 유홍준.394-395쪽) 


유배지의 9년 동안 완당은 책읽기와 학문 연구로 바빴다. 귀양살이는 정적의 책략으로 오래 갈 것을 예감하고 아예 절체절명의 시간을 ‘기회’의 시간으로 역전한 것이다. 고난을 겪어봐야 고난을 극복하는 법을 알고, 변방으로 밀려나봐야 변방의 소외와 한가함을 체득한다. ‘요령’이라는 것은 베이컨이 말을 안했어도 일정한 경험치와 관계한다. 경험철학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고약하게도 경험으로 알게 되는 진리가 많다. 세한도는 완당의 마음속에 이미지로 그린 그림이다. 이상(理想)과 현실(現實)의 조화로운 구도다. 속인의 남루함에서 신선의 삶을 동경하는 것이라 해도 좋다. 어느 쪽 해설을 차용하는가는 그림을 보는 관찰자 시점이다. 단, 주의할 사항이 있다. 세한도는 마음으로, 세월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봐야 한다. 구도와 묘사력이 어쩌고 하는 미술사의 측면은 이때 완전히 그림을 보는 시각 밖으로 튕겨 나가고 없다. 지식은 과거에 얻었으니 이제 마음의 눈으로 그림을 보는 일만 남았다. 눈을 뜨는 일, 그게 관건이지. 


세한도(歲寒圖). 차가운 세월의 그림

세한도(歲閑渡). 한가한 세월을 건너다.


비로소 마흔이 넘자 완당의 세한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무 늦게 알았다는 질책 대신에 이제나마 알기 시작했다는 위로를 한다. 다행이지 뭔가. 영 모르고 살다가 갈 뻔했는데. 완당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불혹의 나는 촌구석으로 일찍 숨어 들어와 ‘한가한 세월’을 건너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안빈낙도나 청빈의 미학을 대입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런 허무맹랑한 상찬은 배고픈 뜬구름에게 던져 주자. 내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완당의 ‘엄정한 정신’은 오늘도 공부 중이다. 고졸(古拙)의 세한도에 연필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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