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와 주자

 

 공자에 대한 저의 인상은 부정적인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인데, 저는 자연 철학을 인문 철학보다 더 높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다음 문장은 조심스럽습니다.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고등학생 교양 수순으로) 논어를 읽은 후 더 실망했습니다. 오히려 저는 도덕경이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유교를 가볍게 여기거나 매력이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자와 공자 중에서 선호하는 한사람을 택하고자 한다면 주자입니다. EBS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님은 공자는 나(도올)보다 훌륭한 사람이지만 주자는 나와 동급이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철학에 문외한인 제가 도올 선생님이나 공자나 주자는 모두 대단한 사람이라 뭐라 평가할 수 없지만 도올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주자보다는 공자가 철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한자/한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면 한문은 (다른 어떤 언어/글자보다도) 이중적, 중의적, 애매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으로부터 원래에 의미와 다른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

 

* 부부유별 http://blog.aladin.co.kr/maripkahn/571215

 

 이런 해석의 확장을 통한 개념의 변경은 꼭 인문학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질량의 보존의 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확장된 것과 같습니다.

 

* 호흡의 정의 http://blog.aladin.co.kr/maripkahn/469975

 

 공자가 저에게 주는 강력한 매력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 朝聞道, 夕死可矣.”의 가치관입니다.

 

<관중과 공자> p153

공자가 말했다.

“사(자공)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 나는 한 가지 도리로써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다. [一以貫之]”

 

 제가 판단하는 바는 공자가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자아의 정체성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폴리스 아테네 밖으로 확장하려 했던 것이나,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의 말씀에 비하면 공자의 보편성은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리고 논어에 생각보다 형이하학形而下學적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느꼈습니다. (형이상학의 반대말은 유물론이나, 자연학(physics)이 맞겠지만, 여기 문맥상의 딱 적합한 어감은 형이하학으로 속어를 그냥 사용합니다.) 이런 형이하학적인 것을 형이상학metaphysics적 사고로 격상시킨 것은 주자라고 생각합니다. 주자학에 대해서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특히 조선시대의 붕당 서인들이 주자에 대해 절대시 하면서 이후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제 페이퍼의 ‘부부유별’이나 ‘호흡의 정의’에서 중간의 해석에 고착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자의 잘못은 아닙니다.

 

 廐焚 子 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 마구간에 불이 났었는데, 공자께서 퇴근하셔서 "사람이 다쳤느냐?"하고 말씀하시고, 말은 물어 보지 않으셨다."

 

 주자의 해석 ; 공자가 사람의 안부는 묻고 말의 안부를 묻지 않는 것은 사람 생명을 귀히 여기고 말馬의 손실은 재산의 손실로 가벼이 여기 묻지 않으셨다.

 다른 해석 ; 공자가 말이 다쳤는지 물으시려고 했다. (또는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물으셨다.) 공자께서 물으신 연유는 말馬도 생명이라 다치지를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공자는 신분 질서를 중요시 여겼던 분으로 사람 사이에서도 차별이 있었는데, 동물의 생명 가치를 그렇게 높게 여기셨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원전으로 훼손하자는 것이 아니고 다각적인 해석으로 통해 보편성[一以貫之]을 확립할 수 있는데, 그 본격적인 일을 주자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와 논어를 잘 모르는 저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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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日記 120424

 

<우리 함께 죽음을 이야기하자> 서평 별점 ; ★★☆

 아이가 어떻게 죽음을 생각하는지, 죽음과 관련된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른이 아이에게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나 행동해야 할 것이 정리되지는 않는다. 내 가치관을 강화하는 몇 가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해를 살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솔직하고 정직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직한 이야기가 곤란하다면 차라리 적당한 이야기가 생각날 때까지 유보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도 아니다.(밑줄긋기 p 16)

 

 결론적 내용은 이렇다. ; 아이들이 맞닥뜨린 죽음에 대해 슬픔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아이가 질문하면, 솔직히 얘기해주고 함께 대화를 나누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아이가 질문을 할 때, 이렇게 반응하는 것으로 통일된다. “그러니? 그것이 궁금했구나. 그런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답에 대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잖아.

 

 죽음에 대해 항상 염두해 두고 살지만 감정적으로 두 가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하나는 TV 외화 “작은 아씨들”이다. 이 네 자매 중 막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내가 언니들처럼 성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어.” 즉 막내는 죽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대학 동기 동창의 죽음이다. 만 나이로 40세가 되던 해에 암으로 죽었는데, 머릿속에만 있던 죽음을 실감했다.

 

cf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아동용 도서로 분류해 놓았다. 맞는 분류인가?

 

* 밑줄긋기

p 16 난 엄마한테 엄청나게 화가 났어요. 무슨 일인지 곧바로 내게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p 17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말로 표현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듣기 쉬운 낱말 몇 개로 알려주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인데.

p 43 “아냐. 네가 서른 살이 되면 난 이 세상에 없어! 난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해.”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와 이런 식으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훗날 그 아이들이 조부모의 죽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아이에는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조부모는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p 52 소년의 부모는 아이의 버릇없는 표현들이 힘든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채,

p 69 이러한 사실을 알면, 식구들 중에도 개인차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식구들 모두 자기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p 74 아이들은 슬픔을 느끼는 방식이 어른들과 다르다.

p 98 하지만 이제 모든 아이들은 아빠가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 무엇을 알았다는 것이지? 죽음의 본질, 아니면 아빠가 죽었을 때의 상황, 아버지를 여읜 자녀의 감정?

p 102 상을 당한 아이들의 모임 ; 자녀를 먼저 보낸 부모님의 모임도 있다.

p 108 엄마는 아들을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아이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게 했다. ; 아이의 모든 문제가 아이가 인격체라는 이유로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지는 않는다.

p 123 아이가 죽으면, 부모는 너무나도 충격이 큰 나머지, 배우자와 부모로서의 역할에 소홀하게 된다. ; 부모는 수퍼맨이나 원더우먼이 아닌데.

p 167 우연히 듣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의식적으로 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아이들에게 사건을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주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p 178 이 세상에는 100퍼센트 완벽하게 안전하고 확실한 것은 없으며, 이 세계는 완전하지 않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기자> 서평 별점 ; ★★★★★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을 만나다. 그것도 한명의 골리앗이 아닌 여러 명의 골리앗과 싸우는. 책이 별 5개는 아니다. 그러나 주진우 기자가 별 5개다.

 

* 밑줄긋기

p 33 판사들은 세상에 판사가 있고 일반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검사들은 세상에 판검사가 있고 일반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p 79 이는 한국 경제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재벌이고 재별의 가장 큰 리스크는 총수다. 총수가 저지르는 온갖 범죄를 처리하는 데 회사는 모든 역량을 퍼부어야 한다.

p 98 “시사IN만 안 나오면 다른 언론사는 절대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모든 언론사에서 ‘1보 금지’(맨 처음 보도하지 않는다) 묵계가 되어 있다.”

p 100 내가 실수할 수 있다. 모함이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발가벗겨진 채 뒷골목에서 아주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이름값이 커질수록 추락의 깊이도 깊어질 것이다.

p 237 철학을 버려서는 안 되지만 때론 무조건 해야 하는 일도 있다. 그런데 못한 게 많다. 시대는 홀로 깨끗하고 날랜 표범이 아니라 무리를 이끌어가는 코끼리를 요구했다./p 238 축구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가 잘해서, 태클을 잘해서 골을 넣지 못했다. 이런 변경은 통하지 않는다. ; 상대 선수가 반칙을 하고 심판이 편파 판정을 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p 271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정신대에 끌려간 것과 어린 학생들을 정신대에 보낸 행위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p 294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선물은 인간 사랑이다.” “서생처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되 설천 방법에 대해서는 상인과 같이 유연하라.”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용기는 모든 덕 중 최고의 덕이다.”

 

 

 

 

 

 

 

 

 

<내가 함께 있을게> 서평 별점 ; ★★★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는 것에서 나의 가치관에 맞는다. 죽음은 뒤통수와 같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나와 함께 한다는 점에서. 그런데 해골바가지 친구, 죽음 자체라기보다 죽음의 사자使者라고 해야 하지 않나.

 

 

 

 

 

 

 

<이야기 할아버지와 이상한 밤> 서평 별점 ; ★★★☆

 학창 시절 시는 운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른들의 (현대)시는 자유시, 그리고 복잡한 사상을 담으면서 주제 면에서는 깊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직관에서 운문으로 느껴지지는 않다. 그러나 동시는 운문에 순수함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 어렸을 때의 느낌이 날 것으로 느껴진다.

 

* 어렸을 때를 회상하는 http://blog.aladin.co.kr/maripkahn/1822124

 

(이 책을 선물해 주신 한사람님 감사합니다.)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서평 별점 ; ★★★★

 김규항씨의 책을 읽다가 진중권-김규항씨의 논쟁을 읽었고, 그리고 나서 강준만-진중권 논쟁을 읽었고, 마침내 한윤형씨의 책을 읽게 되었다. 한윤형씨의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지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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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6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주진우기자 책을 별점 다섯개 주셨네요...
마립간님께서 저리 주셨다면, 확실히 읽어봐야하는 증표인데.
냉큼 장바구니에 넣겠습니다,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요. ^^

죽음에 관해 아이에게 하는 말이라고 옮겨적으신 글,
저게 정석인가봐요, 저도 저렇게 배웠거든요, 아동 상담에 나오더군요...
워낙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하는 어른이 많아서, 그리고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으며 다들 부담스러우니까, 그래서 저렇게 통일된게 아닐까 하는 불순한 상상을 해봅니다.

마립간 2012-04-26 12:51   좋아요 0 | URL
이책이 좋다기 보다 주진우 기자가 대단해 보입니다.

김용민씨는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기독교 주류에 맞서려고 할 때, 김용민씨의 아버지께서 주류에 맞설 때 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라고,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김용민씨는 (멋모르고) 네라고 대답했고, 이후 김용민씨의 아버지는 자신의 하는 일에 뭐라고 안 하셨다고. ; 김용민씨의 아버지도 대단하게 보입니다.

페크pek0501 2012-04-28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린 아이들에게 무조건 솔직하게 얘기해 줘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돼요. 그 연령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란 게 있다는 것이죠.
어릴 때 부모가 죽을 경우에,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준다면 아이는 충격에 빠질 수 있을 거예요. 숨길 것은 숨기고, 좀더 큰 다음에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실을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꼭 모든 상황에서 진실만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생각할 거리를 얻어 갑니다. ㅋ 좋은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ㅋ

마립간 2012-05-01 09:00   좋아요 0 | URL
적절한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아래 페이퍼(무제 120423)을 적용하자면 죽음의 진실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을 '의'라고 할 수 있고, 아이의 감정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정답은 없겠지만 저의 경험을 생각하면 그 당시에 저는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좋았겠다고 생각했었고 지금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저의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수는 없겠죠.

차트랑 2012-04-28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마립간님,
저기 별은 어떻게 찍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이제서야 여쭈어 봅니다.

저도 별을 찍어보고 싶어서요^^
어떤 분은 글씨도 커~~다랗게 쓰시던데
그분께도 여쭈어 보려고 합니다 ㅠ.ㅠ
어떻게 하면 글씨를 그렇게 커~ 다랗고 궁서체 비슷한걸로 쓰시는지...

아, 다른 분들이 이렇게 별을 찍는 것을 본적이 없어요~

마립간 2012-05-01 09:02   좋아요 0 | URL
저는 서재를 시작할 때 부터 언제가는 알라딘 서재가 없어질 것을 대비하여 ; 모든 리뷰와 페이퍼는 한글로 작성하고 블로그에 붙이기를 합니다. (블로그에게 게시한 후 오타를 비롯하여 문맥을 교정하지만요.)

별은 한글에서 삽입한 것입니다. 제 글에 사용한 글씨체는 한글의 바탕체를, 인용문은 굴림체를 사용하며 이것은 알라딘의 에디터를 사용해서 교정합니다.

차트랑 2012-04-3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의 말씀을 들으니
원래 궁금했던 것 보다 더 유익한 말씀을 얻어가게 생겼습니다.
저도 리뷰와 페이퍼를 백업해두어야 겠다는...
매우 유익한 팁입니다^^

저도 한글로 종종 작성하곤 했는데...
그걸 몰랐습니다.
별을 한글에서 찍으셨다는...말씀...이 거 참^^
같은 한글을 쓰면서 모르고 있었다뉘~ ㅠ.ㅠ

유익한 정보,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립간님~!!!

(보답으로 추천을 눌렀는데 이미 했다는 군요 ㅠ.ㅠ)
추천을 누르는 버릇이 들어가지고^^
 

 

* 無題 120423

 

 이 이야기를 언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알라딘에서 이전에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어느 교회(제가 다니던 교회는 아님)가 있었고, 그 교회의 직분 맡은 분(장로님으로 기억함)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큰 잘못을 하였습니다. 그 잘못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해 주신 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교회에서 분열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일부 교인들은 그분에 대해 징계를 주장합니다. 그래야 옳고 그른 것이 바로 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옳음이 바로 서야 세상 사람에게 복음(성경)을 전도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그분을 용서하자고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는 곳인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징계를 한다면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주장합니다.

 

 잘못의 내용을 안다면 작은 잘못의 경우 용서를 하면 되고 큰 잘못이라면 징계를 해야겠지만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잘못이 있다면 그 크기에 맞춰 징계하는 것이 옳지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질문을 바꿔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논란에 대해 내가 그 속에 있었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논란이 세상에 흔하게 논쟁되는 주제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옳은 것(義)을 주장하는 사람과 어진 것(仁)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말로 바꾸면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신념윤리이고 어진 것을 추구하는 것은 책임윤리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여기서 가치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의를 인보다 앞세우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그 반대가 옳은지. 저는 <남명 조식>에서 서평에서 ‘나의 경우는 의義로 주를 삼고 인仁으로 보충하는 가치관이니’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의義와 인仁이 균형을 맞춰야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이유로 의義를 전적으로 중시하고 인仁이 없는 사람이 틀리다는 판단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

 위 글은 김규항씨의 인터뷰 책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의 서평으로 준비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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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3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닐까 싶습니다.
인이 더 중요한 경우도, 의가 더 중요한 경우도, 둘 다 균형을 잡을 경우도 있겠지요.

컨버그의 도덕적 단계 이론을 보면, 6단계가 바로 이런 단계입니다.
결국 자신의 신념이 문제인거죠... 그리고 이런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극소수다, 실은 5단계에 도달한 사람도 얼마 안 된다 라고 합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마립간 2012-04-23 16:23   좋아요 0 | URL
저처럼 보수적인 성향, 논리-이성 지향인 사람은 항상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문제를 갖고 ; 일반해를 찾으려는 몹쓸 습관이 있지요. (내 안에 이 일반해의 공식을 갖고 남을 재단하려는 욕망이 숨어있다고 비판한다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탄하 2012-04-2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교회 이야기는, 그 잘못을 하신 분께서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설 때 가장 화목한 방법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어떤 종교든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하니까, 큰 잘못이라면 당사자가 가만히 있으면 안돼잖아요.

음, 의와 인은 뜻이 큰 단어라 꽤 판단하기 어렵지만 인을 사랑으로 보면 '의를 내세울 때 항상 인을 바탕으로 해야한다..'이상의 것은 확신하기 힘드네요.^^

마립간님은 종종 생각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막 휙휙 지나가는 질문들을 남겨놓으시네요.

마립간 2012-04-24 08:24   좋아요 0 | URL
위의 이야기는 잘못을 한 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보다 주위의 사람들이 잘못을 한 사람을 어떤 가치관으로 바라보냐 핵심이 있습니다. 제가 그 사건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을 한분은 사죄를 하고 깊이 반성했고 그에 맞는 행동을 했으리라 기대합니다.

의를 내세울 때 인을 바탕으로 해야하는 것은 인을 더 존중하는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취미가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순오기 2012-04-24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은 것과 어진 것~ 양립할 수는 없을까요?
옳고도 어질게 처리하고 해결한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는,
저는 그냥 내맘 편한 쪽으로 스스로 타협하거나 사안에 따라선 전사가 되기도 해요.^^

마립간 2012-04-24 08:26   좋아요 0 | URL
대부분은 옳은 것과 어진 것은 양립을 하지요. 몇몇 특수 경우에서 선택을 강요 받는데 그 결정이 어렵습니다. 비유해서 설명하지면 효자 아들이 아내에게도 잘 합니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평생의 몇번은 어머니냐, 아내냐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 育兒日記 120410

 

* 10단위 숫자 명명법

 동화책 50권을 함께 정리하면서 누고가 1부터 50까지 명명법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았다. (비록 3곳에서 틀렸지만)

 

* 교우 문제

 그 나이또래가 다 그렇다고 한다. 동년배와 어울리기보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과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일단 동생으로 대우받기고 하고 언니들이 노는 것이 재미있어 보기도 할 것이고. 그것을 감안하여도 조금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 조금의 문제는 내가 어렸을 때, 상황으로 추론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4~5명의 친구가 함께 노는데, 내가 좋아하는 놀이와 나머지 사람들(3~4명)이 좋아하는 놀이는 달랐다. 이 당시에 놀이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데, 내 생각에는 5번 중에 한번은 내가 좋아하는 놀이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0번이면 10번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결론은 내가 그들과 놀고 싶으면 그들에게 맞춰 놀고 그것이 싫으면 혼자 놀 수밖에 없었다.

 

 차선책으로 10번의 놀이 중 절반만 참여하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머지 친구들이 나를 빼고 놀 때, 유대감이 강화되기 때문에 모든 놀이를 참여하거나 모든 놀이에서 제외된다.

 

 지난 주 누고와 친구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아이에게 이제는 정리 정돈을 할 나이가 되었다고 놀고 나면 정리 정돈하라고 유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와 놀면서 친구에게 정리 정돈 친구에게 요구했고, 그 친구는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 누고는 색칠하고 오리고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함께 할 친구가 별로 없다.

 

 어린이 집에서도 가장 많이 어울려 놀던 친구 중에 남자 아이도 있었다. 유치원에 입학하고 나니 남자 아이들은 남자끼리 어울려 노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이 모임에 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여자 아이들과 놀기에는 놀이 스타일이 본인과 맞지 않는 모양이다. 누고는 언니 오빠라는 단어보다 ‘형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초록반 형님들... ”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에 보면 독서를 통해 사회성을 키웠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독서( 자체)가 사회성을 키웠다고 볼 수 없다.

 

* 동생

 누고가 동생 만들어 달라고 졸라대고 있다. 심심하대나.

 ‘동생이 네 장남감이냐?’

 동생 낳아줄 엄마와 키워 줄 할머니를 잘 설득해 봐라. 아마 교우관계의 갈등의 해결책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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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18 0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사회성이 독서로 될까..싶습니다.
그 관계의 변화무쌍한 상황성과 시간성은 그야말로 불측^^

동생: (아빠는 언제라도 OK? ^^ )
꼭 교우관계 갈등의 해결책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주변에 대한 인식의 확장 (우리집에는 왜 아이가 나 혼자 인가...뭐 이런)

주어진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자녀의 일인 듯 합니다.
아들 만 둘이 있는 집은 딸 하나 있었으면...
딸 만 둘이 있는 집은 아들 하나 있었으면...
자녀가 없는 집은, 딸이든 아들이든 하나 있었으면...
자녀가 많이 골치아픈 집은, 무자식이 상팔자여~ 뭐 이러구...

그러니...
정답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더구만요~ 마립간님^^

마립간 2012-04-18 08:06   좋아요 0 | URL
교유관계에 있어 제 경험을 보자면 자신에 맞는 친구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흔하지 않지만 없지는 않거든요. 그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슬기롭게 보내느냐가 관건인데, 아이를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없습니다. 게다가 맞벌이라서. 결국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육아에 비교적 부담이 적은 할아버지와 아빠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할 수 없고, 육아 직접적 부담이 있는 할머니와 엄마는 요즘 같은 양성평등의 시대에... ^^

키우는 부모입장에서 아들 2명, 딸 2명이 공부도 잘하고 효도하면 좋지요. 그런데 형제 수가 그 정도로 많으면 그 중에 다른 형제와 구분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조선인 2012-04-18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독서로 사회성을 키울 수 있는지는 의문.
마로의 경우 친구들과 놀기 어려울 때-가령 장난감을 가지고 경쟁해야할 경우- 독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린이집이건 유치원인건 늘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거의 늘 한쪽에서 책만 읽었다는 거. 덕분에 말도 글도 빨라 선생님들이나 언니오빠들에게 인정받는 경향이 있어,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도 같은 반 친구들보다도 생뚱맞게 같은 학원의 언니 오빠의 깍두기 노릇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지난해 드디어 같은반 단짝이 둘 생겨 좀 기뻐했는데, 5학년이 되어 반이 갈라지니 그냥 또 흐지부지.
아무래도 딸에게는 친구보다 엄마, 아빠, 동생, 사촌의 비중이 압도적인 듯 해요. 학교 선생님은 누구하고나 원만하게 지낸다며 칭찬해 주시는데, 이것 역시 누구와도 깊은 관계가 아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구요.
저의 경우 어릴적 소꿉친구와 지금도 연락하고 사는데, 딸이 그냥 나와 다른 건지, 사회성이 낮은 건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회성이 꼭 인품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긴 하죠.
하아, 제 넋두리가 길었네요.

마립간 2012-04-18 11:48   좋아요 0 | URL
정확한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푸름이는 아마 마로같은 상황을 사회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누고도 마로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 있기에 아이에게 도움이 되려 하는데, 생각나는 것이 없네요. 그래도 조선인님의 댓글이 저에게 (그리고 누고에게) 격려가 됩니다.

마녀고양이 2012-04-2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님.... ^^, 어디서 그런 호칭이 나왔나요?
듣는 이야기마다 너무 이쁜 누고입니다... ^^

마립간 2012-04-23 08:11   좋아요 0 | URL
어린이집을 다닐 때 조금 느겼던 것인데, 유치원을 다니면서 이제는 스스로 배우는 것 같습니다. 가족 대화 중에는 '형님'이란 말을 언급할 기회가 없어요.
 

 

* 讀書日記 120416

 

<천개의 공감> 서평 별점 ; ★★★★

 김형경씨가 지은 <사람풍경>, <좋은 이별>을 읽고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했는데, <천 개의 공감>이 김윤형씨의 대표작이라는 글을 읽고 주저 없이 구입에서 읽었다. 후회가 없다. 아마 김형경씨의 모든 작품을 읽게 될 지 모르겠다.

 

* 밑줄긋기

p 16 불교 수행에 ‘경전 공부 10년, 참선 수행 10년, 만행 10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p 19 정신분석 심리 치료는 자주 연금술에 비유됩니다./인간 정시도 이와 같아서 원래 타고나는 충동적인 성적 욕망과 공격성, 거기에서 파생되는 분노와 불안 등을 어떻게 보살피고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p 31 우리의 정신 속에는 원본능, 자아, 초자의 세 영역기 있습니다.

p 47 분열, 투사, 부인, 회피, 반동형성 등의 방어기제들은 모두 우리가 유아기 때 만들어 가진 생존법입니다.

p 54 달라진 자녀들의 태도에 대응하는 부모의 방식 역시 충격, 분노, 방어 등의 형태를 보입니다.

p 55 “애지중지 키운 아들은 불효자가 되고, 천덕꾸러기로 키운 아들은 효자 된다.”는 세간의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심리적 진실은 충분히 사랑받은 자식들은 부모에게서 완전하게 독립된 인격체로서 주도적 삶을 살아가지만, 사랑받기를 원하면서 부모에게 돈과 시간과 헌신을 바친다는 뜻에 닿아 있습니다.

p 68 우리에게는 이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이미지’와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자아이상’, 그리고 타인들의 내면에 비춰져서 ‘객관적’이라는 미명으로 나타나는 모습 등이 있습니다.

p 114 현대 정신분석가 수잔 포워드는 자녀와 병리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부모를 ‘유독한 부모’라 분류합니다.

p 146 **에겐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p 152 미국의 심리학자 퀴블러 로스 박사는 애착을 박탈당한 사람이 겪는 다섯 가지 감정 단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분노, 부정, 타협, 우울, 수용이 그것입니다.

p 168 사람 사이를 가볍게 건너다니며 표면적으로 이른바 ‘선수’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은 내면에서는 더 많이 불안하고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안타깝습니다. 그런 방식을 ‘쿨하다’는 용어로 미화시키는 데 사회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쓸쓸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서평 별점 ; ★★★☆

 비교적 최소한 평균적으로 독서를 하는 나는 문학 분야와 친하지 않는다. 원래 관심도 없는데다가 문학 분야의 책은 나이가 들어서도 충분히 독서가 가능하다는 변명을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있었다. 시와 수필에 관해서는 비교적 거리감이 적었고, (희곡(/시나리오)과 평론은 논외일 때,) 소설은 부담이 가는 분야이다.

 

 소설을 많이 읽은 상태에서 소설을 메타적으로 분석한 책을 읽어야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소설에 대한 관심이 유발되었다. 과연 앞으로 읽게 될 소설 ; 얼마나 이 책의 설명과 일치하게 될지...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 서평 별점 ; ★★★

다 알 것 같지만 (보편성에 관한 원칙을 정해도) 막상 구체적 상황에 닥치면 당황스럽다. 육아에 관한 책은 그만 구입하려 했는데, 최근 딸아이와 관련하여 풀지 못한 숙제가 있어 이 책을 구입했다.  책의 내용이 내가 찾던 내용과는 무관하다. 푸름이는 내가 예전에 읽었던 글에서 워낙 인상적이었기에 구입했다. (2002년에 초판 발생된 책이 절판되었다.) 기대했던 내용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이렇게 키웠는데, 이후에는 이러 하였다’라는 것을 기대했었다. 초등학교 전에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 나머지는 그 방향 그대로 유지하면 되는 가보다.

 

* 밑줄긋기

p 21 영재로 키운 태교의 비밀 ; 나는 태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태교를 잘 못하면 아이가 바르게 자라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태교가 영재를 만든다고 생각지 않는다.

p 33 책을 통해서도 사회성을 기를 수 있다. ; 그런가? 천재 중에는 사회성만 떨어지는 사람도 많다. 어떤 이는 가능하지만 모든 이가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p 그러므로 조기 교육은 때 이른 교육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교육이다. 아이가 타고난 능력을 적절한 시기에 최고로 계발시켜 주는 교육이 바로 조기 교육인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장 좋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p 69 자연 속에서 아이를 키워라 ; 근대화되기 전에는 모두 자연 속에서 살았지만 그 모든 사람이 영재는 아니었다.

p 73 칼 비테(p74 비나 교수)/ 그 결과 아이는 5세가 되었을 때 3만 개의 단어를 기억했다. 그리고 6세때부터 외구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8세가 되었을 때는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1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6세에는 법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 칼비테를 구글에서 검색하니 13세에 철학박사를 받는 사람이 인류사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나오지를 않는다. 13세에 철학박사를 받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위인전에 나오는데.

p 85 칭찬 ; 과도한 칭찬 역시 부작용이 있다.

p 105 잘 노는 아이가 공부도 잘한다. ;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잘 논다’일 수도 있다.

p 183 어릴 때부터 현실의 냉혹함을 가르치는 교육은 바람직하지 않다. ;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어른 들이 솔직하게 (비록 냉혹할지라도)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것이 좋았다.

p 199 성공의 밑거름인 ‘절제력’을 가려쳐라.

p 227 부모와 어른은 다르다.

p 238 문제아의 원인은 아빠에게 있다./p 245 칼 비테를 비롯해 육아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천재들의 교육의 주체는 아빠였다.

p 255 자녀 교육의 절반은 아이를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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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4-17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풍경>을 읽고 참 좋아서 김형경의 다른 작품도 봐야지, 했는데 아직 못 읽었어요. 저는 그렇게 꼼꼼하게 따지고 깊이 있는 심리분석이 재밌습니다. 유익해서 좋고요.

잘 노는 아이가 공부도 잘한다. ;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잘 논다’일 수도 있다. - 맞아요. 공부 잘 하는 아이가 놀기도 잘 하는 거지, 잘 노는 아이가 공부도 잘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ㅋ

마립간 2012-04-18 08:08   좋아요 0 | URL
김형경의 씨의 책 중에서 '사람풍경'을 제일 먼저 읽어서 그런지 이 책이 가장 인상 깊으나 두 책도 사람풍경 못지 않게 괜찮습니다. '만가지 행동'도 마져 읽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