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30617

 

* 제목에 대한 불만 <우주는 수학이다> 서평 별점 ; ★★★☆

 부제 ; 수학과 물리학

 

우주는 수학이다’라는 명제는 (증명 여부를 떠나, 진위 여부를 떠나) 그 의미가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주는 물리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나는, 물리학과 수학의 관계를 밝힌다면 학문의 종결이라고 할 수 없어도 그에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도 증명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단지 수학은 물리학을 기술하는 언어라는 정도의 관계만 알려져 있다.

 내가 이 책에 대한 내용에 대한 충실한 제목을 붙이자면 ‘물리 상수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을 것이다. 원제는 , 즉 ‘우주 (상)수’다.

 

p 152 수학은 물리학의 언어이지만, 수학기호와 실체 세계 사이의 연결은 때로 명백하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수학에 관심이 없거나 (논리합) 물리학에 관심이 없다. 그런 이유로 물리학과 과학을 혼동하거나 물리학과 수학을 혼동하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물리학과 수학의 차이는 논문과 서평의 차이보다 크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양-밀즈 이론 ; Yang-Mills and Mass Gap’의 물리학적 연구 성과를 수학적 연구(즉 증명)처럼 잘못 기술했는데, 기자가 (황색 저널리즘으로 알고도 신문 기사를 잘못 썼을 가능성도 있지만,) 수학적 의미와 물리학적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이 후에 잘못된 신문 기사에 따른 잘못된 비난을 동반한 논란이 뒤따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무관심을 보면 이런 오해/오류는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번역 제목은 이런 오류에 편승한 제목이다. 이 책에 정말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가 많지만, ‘우주는 수학이다’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책의 내용과 제목이 맞지 않을 경우, 별점을 깎는다. 그런데 이 책은 번역 책 제목이라서 별점 주기가 애매한 상황, 그래도 반개를 깎음) 옮긴이가 몰랐을까? 알고도 어울리지 않는 제목을 붙였을까?

 

* 밑줄긋기

p 157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기이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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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것, 차가운 것

 

어느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차갑다. (이 글에서 뜨겁다는 것은 높은 온도를, 차갑다는 것은 낮은 온도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 차갑다는 것이 무한히 차가울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의문을 갖기 전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점에서 절대 온도라는 개념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사람은 차가움이 무한히 있는지 없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내가 무지한 고로 의문을 갖고 있다. 차가움에는 하한선이 있다, 그러면 뜨거운 것에 한계가 있을까.

 

첫 번째 떠오른 생각은 한계가 없는 것이다. 자연수에는 가장 적은 자연수가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자연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물리학)은 수학이 아니다. 수학에서 속력은 무한이 커질 수 있지만, 물리학에서의 속력은 광속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런 비유로 보면 뜨겁다는 것이 한계를 가질 것 같다. 분자의 운동이 한계를 가질 것이니 온도도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또 하지만) 속도가 온도인가? (물론 아니다.) 나는 온도를 시간당 에너지 방출로 생각한다. 어떤 물체가 광속에 가까운 운동을 하면서 속도는 제한을 받지만 이때 (질량이 증가하므로) 필요한 에너지의 한계는 없다. 따라서 온도의 한계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또또 하지만) 물리학적으로 질량의 밀도는 한계가 있다. 임계 밀도를 넘어 버리면 블랙홀과 같은 우리 경험하는 통상적인 물리적 환경이 아닌 전혀 다른 환경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높은 온도는 (질량과 등가인) 에너지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이고 이는 온도가 의미가 없는 새로운 물리적 환경으로 변하기 때문에 뜨거운 것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뜨거운 것에 한계가 있는 것이 맞을까, 없는 것이 맞을까?

 

p 136 T=1/3*mv**2/k (중략) 따라서 만약 라돈 원자들을 광속과 같은 속도까지 가속시킬 수 있다면, 그것들의 온도는 1/3 x (3.7 x 10**-25) x (3 x 10**8)**2/(1.38 x 10**-23), 대략 2.7 x 10**14 켈빈일 것이다.

 

위 글은 뜨거움의 상한 한계가 있다는 것인데, 아직 나는 납득을 잘 못하고 있다. 글쓴이는 단순하게 속도에 광속만 대입했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정지 질량은 운동을 하면서 질량이 증가하게 된다. 위 식의 질량에 상대성 이론을 고려한 질량으로 계산하면 무한대가 나온다. ; 뜨거움의 한계가 있는 것이 맞나?

 

글쓴이의 착각(오류)으로 보기에는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깊다. 글쓴이의 착각일까 내가 잘못 해석한 것일까?

혹시 알라디너 중에 아시는 분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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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6-1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를 읽으면,
갑자기 제가 우주의 광대함 안쪽에 자리잡은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페이퍼가 너무 좋습니다. ^^

즐거운 주말되셔요.

마립간 2013-06-14 14:23   좋아요 0 | URL
특히 천문학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천문학을 연구하면서 겸손해진다'고.

일반적으로 과학은 보편성(객관성)이 어느 정도 담보하고 있기 대문에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런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주관성이나 감정의 기복을 즐기기도 하지요.

페크pek0501 2013-06-14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이 흥미롭군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요.
닭 튀김을 할 땐 170도~180도의 온도에서 튀기는 게 알맞다고 하는데, 저는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100도에서 기름이 끓다가 그 온도로 더 뜨거울 수 있는지 말이죠. 그럼 170도의 물에 화상을 입은 것과 비교해서 100도의 물에 화상을 입으면 덜 뜨거울까?
이런 생각을 해 본답니다. ^^

마립간 2013-06-14 15:44   좋아요 0 | URL
통상적인 끓는 점(온도)은 1기압하에서의 온도입니다. 압력이 다르면, 끓는 온도도 다르고 압력 솦에서는 높은 온도에서 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 분자마다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평균 100도C의 기름에 170도C 기름 분자도 존재하죠.

사람이 뜨거운 것을 느끼는 것은 열전도를 필요하기 때문에 접촉하는 물체의 온도뿐만 이나라 (물체의 밀도와 같은) 접촉 시간도 관여합니다. 그러니까 잠깐(찰나) 170도C의 물에 담갔다가 빼는 것은 뜨거운 줄도 모르고 화상을 입지 않지만, 100도C의 물에 손을 담구고 있으면 화상을 입습니다.

위 페이퍼에 오류를 지적해 주셨네요. 급 수정 들어갑니다. 윗글에서 뜨거운 것은 높은 온도를 지칭합니다로.

기억의집 2013-06-14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이 책을 안 읽어서 잘 모르겠지만,
혹 사라진 스푼라는 책을 읽어보셨어요?
그 책은 원소를 다룬 책인데, 우리 지구상에서 가장 끓는 점이 높은 원소는 텅스텐이라 합니다(작가에 말에 의하면 일차대전때 독일이 폭탄을 만들기 위해 텅스텐을 얻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고 하네요). 결국 이 말은 과학자들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 혹은 합성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물질중에서 실험해 보았더니, 텅스턴이 가장 끓는 점을 발견해 냈으니, 열역학 2,3법칙이 낮은 온도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은 증명한 것처럼, 텅스턴 원소로 끓는 점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우리가 발견한 물질 혹은 합성해 낸 물질중에서 말입니다. 우리 우주를 채운 물질중 우리가 알아낸 물질은 20%밖에 안된다고 하니 암흑물질이라고 불리우는 80%가 도대체 어떤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모른 상태니깐, 혹 모르죠. 나중에라도 무한대의 끓는 점의 원소가 나타날 수도 있을지....)

그리고 속도가 온도인가라는 말은 한참 생각했는데요,,,,, 라돈 원자의 운동을 속도로 표현한 거 아닌가요? 원자들이 움직일 때 범위를 무한대로 놓은 게 아니고 범위를 정하고 라돈 원자들이 움직이는 속도를 측정한 것 같은데요.

온도를 시간당 에너지 방출이 무슨 의미인지? 태양같은 경우 지금 수소가 핵분열을 하면서 열(온도)를 내는 것인데, 수소가 다 타고 나중에 헬륨이 타면 얼마 지나 더 에너지를 방출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태양의 수명이 150억년 정도라 하던데, 시간당 에너지 방출이기 보다는 태야이라는 별이 가진 질량의 에너지 방출 아닌가요?

마립간 2013-06-15 09:04   좋아요 0 | URL
어렵게 댓글 주신 것 감사합니다.
'사라진 스푼'은 읽어보았습니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6379606)

제 글은 '끓는 점'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높은 온도'에 촛점이 있습니다. 물에 압력을 가하면 200도에 끓는다라던가, 물보다 텅스텐이 끓는 점이 높다거나 이런 이야기보다. 예로 설명하면 H2O라는 물질은 100도에서 액체(물)에서 기체(수증기)로 상전이를 합니다. 이후 열을 계속 가하면 100도의 수증기가 200도의 수증기가 되고 더 열을 가하면서 300도의 수증기가 되는데, 이 온도가 무한이 올라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속도와 온도의 관계는 (저는 고등학교 때 물리를 배웠는데 그 때 나오는) 기체 상태 방정식과 함께 나오는 통계열역학(분자의 병진운동에너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 방정식은 고전 역학에 의한 것이고 책 속의 가정처럼 광속에 가까우면 무시되던 상대성 이론이 적용되지 하지 않을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페이퍼에 문장을 삽입합니다.)

온도를 시간당 에너지 방출 ; 이것은 엔트로피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고전 물리의 기본 물리량(차원) 그리고 열역학, 온도, 시간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생각 속의 한 단편이기 때문에 짧게 설명하기가 곤란하네요.

기억의집님께서 '열(온도)'라고 하셨는데, 통상적으로 과학 분야에서 사용된는 단어 '열'은 에너지 차원이고, 열과 온도는 다른 물리량입니다. 이것으로 생각해보시면 제가 온도를 시간당 에너지 방출로 이야기한 것에 대한 이해를 돕지 않나 생각합니다.

위 질문은 우문일 수 있습니다. 온도는 고전 물리학의 물리량(차원)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upgrade된 물리단위로 바뀌었죠. 그래서 제가 높은 온도의 한계를 책에서 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13-06-17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7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사원소설

- 부제 ; 물질의 5 상태

 

빨간색의 반대말은 파랑색일까? (답이 파랑색이라면 노란색은?) 아이의 초등학교 시험의 답을 구한다면 파랑색을 쓰라고 타협을 하겠지만, 아이와 저 만의 대화라면 녹색이 가장 빨간색과 반대된다고 이야기하겠다.

 

* 반대말 비슷한 말

http://blog.aladin.co.kr/maripkahn/5614559

 

물의 반대말은 불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개념에서 이분법적 방향이 있는 것만이 반대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원소설에는 물, 불, 공기, 흙을 말하는데, 나는 여기서 불이 끼어있는 것이 못 마땅했다. 물, 공기, 흙은 물질로 동일차원인데 반해, 불은 물질과 동일 차원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읽던 중 생각지 못했던 은유를 얻었다. 공기는 기체, 물은 액체, 흙은 고체,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물질의 3 상태를 은유하고, 불은 플라즈마plasma로 은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은유가 불만스럽다. 물질은 5상태가 존재한다. 초유동이라는 상태의 은유가 빠졌다. 초유동에 합당한 은유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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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3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중복 게재6

- 부제 ; 사과 및 변명

 

원래는 ‘중복 게재 표시가 없는 중복 게재는 옳지 않다.’라는 주제에 대해 근거(제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생각하고 글감을 마련했습니다. 그 글감은 중복게재부터 중복게재5까지 글을 썼고, 이번 글은 새로운 내용 없이 가연님이 질문하신 것과 주장이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후기 형식으로 중복 게재와 상관없지만, 후기처럼 알라딘 논란과 관련하여 관찰된 현상을 묻는 글을 쓰려했습니다.

 

오늘 글은 사과의 말부터 하겠습니다. 어느 알라디너가 제 글로 상처를 받았다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께 공개적으로 사과드립니다. 악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악의가 없었다는 것이 모든 결과에서 면책되지 않습니다. 과실치상/과실치사라는 형사 법조문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악의는 없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님께서 ‘정말 ******님이 떠나실 거라고 생각안해보셨습니까.’라는 댓글을 주셨는데, 왜 예상하지 못했겠습니까, 하지만 충분히 남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확률이 많이 낮아졌지만) 지금도 동일합니다.

 

두 번째는 ‘눈먼독서가’라는 용어입니다. 저는 ‘인식하지 못했다’는 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비록 긍정적인 표현이 아닐지라도 비교적 가치 중립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료계에서 무지는 부도덕하게 여겨집니다.) 반면 눈먼독서가라는 단어는 비판/비하의 뜻이 다분히 있는데, 무의식적으로 이 둘을 연결시킨 것은 저의 불찰입니다. 사과드립니다.

 

세 번째는 ‘관철’과 ‘공격’입니다. 저는 저의 생각을 관철하거나 누구를 공격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첫 번째의 사과 마찬가지로 의도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중요하기 때문에 사과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대화 없이 저만의 글로써 이야기기 끝날 것 같은 상황에서 어제 한 분은 먼댓글로, 한 분은 비밀댓글로 의견을 주셨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구절구절 반론하고 싶지만,) 이 두 글의 중복 게재 표시가 없는 중복 게재에 대한 의견에 반론을 하지 않겠습니다. 반론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중복게재'부터 '중복게재5'까지의 글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적으로 보아 이 두 글은 5편의 제 글을 읽고 쓰신 반론인데, 제가 다시 반론한다는 자체가 자기주장, 동어반복, 중언부언에 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공개 댓글을 통해 설명을 요구하시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제 글에서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추가적으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이 논쟁이나 제 글 5편을 읽어 오신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관철’이라는 단어를 쓰신 분은 정황으로 그렇게 생각하신 것이 이해가 됩니다만, 다른 분은 (물론 직접 언급은 아니었지만, 관철과 내용상 같은) ‘절대화하고 상대방에게 강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 글이 왜 설득이 아니고 관철이나 강요가 되는 것이죠?

 

다른 또 한 가지는 ‘공격’인데, 이 ‘공격’이란 단어를 두 분의 글에 보았습니다. 역시 한 분의 언급은 이해가 되나 다른 한 분의 눈에도 공격으로 비춰진 모양입니다. 제 글이 왜 ‘저의 가치관의 서술’이 아니고 공격이 되는 것이죠?

 

당사자 아닌 다른 분에게도 그렇게 비췄다는 것은 제 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인데, 문제점이 잘 파악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 의견을 바랍니다.

 

(원래 쓰려고 했던 가연님이 질문하신 것의 답변과, 제 글에 댓글로 남겨주신 논문과 서평에 관해서 다음 글에서 정리하려 하였으나 그냥 이야기를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못 다한 이야기는 기회가 있으면 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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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6-1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이와 관련해서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었는데 정리하기에 시간이 모자르네요.
감히 마립간님의 친우를 자청하면서, 순수하게 사유를 하셨던 마립간님의 열정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런데요, 아무래도 누군가 상처를 입었던 사건과 관련된 글이나 말은,
글 자체에는 공격이나 상처를 입히는 말이 없다 하더라도 자꾸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이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게 되거나 그냥 묻어두는게 되는 부분도 있구요.

네, 이해할거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힐 위험성에 대해서 지난번 페이퍼에 언급하셨고
그것에 대해서 조심스러워 하시는 마음과, 순수하게 어떤 문제에 대해서 깊이 있는 토론을 하시고자 하는 마음의 갈등을요.

그래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란게, 그다지 이성적이지 못하여 마립간님의 순수한 사유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격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고 제 경험상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랬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글에 문제점이 있던게 아니고, 제 생각에는 글을 올리는 행위 자체에서 아픔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런 사유를 시도하시는 마립간님을 좋아하고 그 부분으로 인해 존경합니다. 하지만
중복 게재 문제는 이즈음에서 덮으시는게 어떨까 하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제 마음을 참고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밀 댓글로 드릴까 하다가, 공개 댓글을 더 선호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올립니다. ^^

마립간 2013-06-12 14:46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마녀 고양이님는 제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계십니다. 한 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그냥 그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2013-06-12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2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2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2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2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2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2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2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2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3 0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중복 게재5

 부제 ; 자기 표절 - 중복 게재 표시가 없는 중복 게재는 자기 표절이다.

 

자기 표절 ;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정확하게 ‘자기 표절’로 검색되는 않는다.

 구글 검색에서 다음의 웹 페이지가 가장 먼저 검색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1%9C%EC%A0%88

 

이 글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있습니다.

1) 자신의 저작에서 훔친다는 말이 자체로 형용모순이라는 이유에서이다.

2) 이전 저작에서 따와서 다시 사용하는 정도가 얼마나 되어야 자기표절에 해당하는지는 경계가 모호하다.

3) 저작권 침해와 같은 법률적인 문제를 수반하지 않는 한,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되는 시사적, 문화적, 전문적 평론에서는 자기표절이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 문장에 동의하시는 분은 아예 ‘자기 표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최소한 아마추어 독서가로서 서평의 중복 게재 표시가 없는 중복 게재는 자기 표절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의견은 위 웹페이지의 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위 글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법률적이나 실용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겠죠.

 

논문에서 중복 게재는 자기 표절입니다. 논문에서 자기 표절의 금지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A 교수가 한 개의 연구로 10개의 잡지 투고하면, 10개의 논문 게재 실적이 나오는데, B 교수가 5개의 연구를 하고 각각 한 번씩 투고를 하면 게재 실적이 5개가 됩니다. 논문 게재 실적으로 연구 실적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실제 연구는 5개 많이 B 교수가 했지만, 논문 실적은 A가 더 좋습니다.

 

새벽님은 댓글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애자 ; http://dvd.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234762460 이것 맞나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문득 애자,라는 영화의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거기서 주인공이 모 출판사 공모전에 학생때 백일장에서 상 받았던 글을 다시 다듬고 늘려서 출품(?)하거든요./그런데 그게 표절로 걸려서 출판사 편집장에게 약점으로 잡혀 대필작가로 착취당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리뷰 대회 (예를 들어 물만두 추리 소설 리뷰 대회)에서도 이미 발표된 리뷰는 심사대상에서 제외합니다. 하지만 실용적인 이유 이외에 보다 제가 선택한 근원적 이유(철학?)는 ; 작품이 발표되는 순간, 작품은 작품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엄마가 자살을 하면서 아이를 함께 살해하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면 2013년 3월 11일자 기사 가장 먼저 나오지만, 이런 자녀 동반 자살 사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와 같은 행동에는 자식은 부모의 소유라는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 소유인가? 부모의 사랑으로 (다른 나라에서 보면 아동학대로 생각할 수 있는) 과도한 사교육을 시키고 가끔 사망 사고 발생하는 것(어떤 이는 이를 교육 살인이라고 부른다.)은 부모와 자녀간의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이 관계를 소유의 관계로 보는 것보다 긍정적인 가치관은 자녀를 독립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글도 발표되는 순간 글로 존재하기 때문에 중복 게재 표시가 없는 중복 게재는 자신의 글을 함부로 대한다는 생각입니다. 글에 관하여 저작권이 있기 때문에 글이 저자의 소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그렇죠.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친권이 있기 때문에 자녀가 부모의 소유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2곳에 게재 예정이라면 제가 보는 긍정적인 가치관은 처음 게재하는 곳에서부터 ‘이 글은 추후 다른 곳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라고 밝히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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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복게재
    from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2013-06-11 11:34 
    나는 곰곰발님이나 마립간님의 의견표명(그게 공격이든 집요한 태도든 간에)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내용이 잘 납득이 되지 않을 뿐인데애초에 나로서는 이게 무슨 논쟁꺼리가 될까, 오늘날 사람들은 각자 옳다고 믿는 바가 다르고 저마다의 행동방식이 있게 마련이니, 그러면 마립간님은 그렇게 하세요~ 라고 하면 될 일인것 같았다(내심 드림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했는데 ... ) 그래도 알라디너나 네티즌 여론을 반영한다고 볼 때, 중복 게재의 찬
 
 
마립간 2013-06-11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부터 느낀 건데 당신 편집증 있지
논문과서평 구분도 못하면서 무슨 이따구 궤변울 늘어놓는지
당신은 논문과 서평의 차이점 부터 연구해봐

마립간 2013-06-11 13:03   좋아요 0 | URL
우선 전부터 느낀다고 하시니, 제 서재에 자주 방문해 주시는 분인가 봅니다. 방문객이 매우 적은 서재인데, 방문과 댓글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정신증의 편집증이나 신경증의 편집성 인격 장애는 아니고요. (진단 기준에 못 미칩니다.) 성격에 강박적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강박적 성격 장애도 진단 기준에 못 미칩니다.)

알라딘에서는 중복 표시가 없는 중복 게재에 동의를 하지 않는 분들이 많으시고 (그러니까 중복 게재 표시가 없는 중복 게재에 찬성하는 분들이 많으시고) 이 글이 앞의 글과 달리 공감이 적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습니다. 동감/공감하지 않는 분들이 궤변으로 판단하신 것에 이견은 없습니다.

논문과 서평의 차이에 대해 연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 생각은 하고 글을 쓴 것입니다. 논문이 보다 공적이고 독후감은 보다 사적인 글이라는 차이점이 있다면, 둘 다 창작 글이라는 공통점이 있지요. 저는 공통점에 주목을 한 것입니다. 논리의 비약이라 하시면 반론은 없습니다.

그너저나 마립간이라는 닉네임을 쓰시네요.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다른 블로그에 저와 같은 닉네임을 본 적이 없는데요.

2013-06-11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1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3-06-1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연달아 올려주신 글들 모두 잘 읽었습니다.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1. 저작권과 표절
제가 어떤 글을 쓸 때, 그 글의 저작권은 제가 갖고 있습니다.
해당 글을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다고 한다면 그것을 배포할 권한을 주는 것이지,
저작권 자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모 신문에 기고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표절일까요? 아닙니다.
중복게재에 대한 문구를 넣지 않았다고 자기표절일까요?
아닙니다!
그 글의 저작권은 제가 갖고 있고, 그 글을 개인적인 용도로 배포하는 것은 제 자유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 글이 이런 신문에 실렸다고 문구를 넣는 것이 일반적이겠죠.
블로그 방문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차원도 있고,
내가 여기에 기고했다고 자랑하는 마음도 있겠지요.

같은 글을 인터넷 매체에서 싣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때는 전에 실었던 신문과 협의가 필요합니다.
배포처를 늘리는 것에 대해 사전에 알리는 것은 배포권을 가진 신문사에 대한 예의지요.
대개 같은 위상의(일간지, 주간지 등) 매체가 아니라면 허용이 되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 경우에 인터넷 매체에서는 먼저 나갔던 신문과 중복게재라는 사실을 알려야겠지요.

만약 실수로 인터넷 매체의 담당자가 실수로 중복게재 문구를 빠뜨렸다면,
자기표절에 해당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때에도 자기표절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말그대로 중복게재라는 문제이지, 표절이란 단어는 쓸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글의 저작권은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표절이란 단어를 사용하려면 예전에 썼던 글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다 썼을 때 해당하는 것이겠지요.
이때에도 자기가 쓴 글에 대해 언급한다면 표절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서 쓴 글이 발표된 논문이나, 발행되거나 출간된 글이라면 당연히 그 공식 기록을 언급해야겠지요.
단순히 개인 블로그나 트위터에 쓴 글이라면 찾아서 언급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구자이거나 작가라면 이런 작업은 필수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서평을 쓰면서 예전에 쓴 글을 일부를 그대로 가져다 쓴다고 표절이라고 해야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립간님께서도 자기표절에 대해 좀 더 고민을 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마립간 2013-06-12 12:3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댓글 감사합니다. 일단 자기표절에 대해 고민을 해 보겠지만, 감은빛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몰랐던 사실을 지적해 주셔서 생각의 수정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감은빛께서 출판업계에 계신 것으로 추정되는 글을 언뜻 본 것 같아. 더 혼란스럽습니다.) 신문에 기고를 할 때, 글에 대한 저작권 양도서를 쓰지 않나요. (어쩌다가 쓴 몇 안 되는) 제가 쓴 글은 하다 못해 베너 광고에 들어가는 글 한 줄도 저작권 양도서 쓴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다른 서류를 착각했나요?) 저작권과 배포권의 이원화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표절이라는 단어는 표절을 뜻하기도 하고 광의로 출판윤리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표절에 관해서 제가 링크한 웹페이지서도 나왔지만, 자기표절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저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실생활에서 어려운 것은 협의의 표절의 판정인데, 이것은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갖는가를 객관적으로 판정하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가요 표절 논란은 많지만 판정이 나는 경우는 드물고 끝임없이 반복되지요.

어째든 저의 생각의 오류를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은빛 2013-06-12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매체와 사람의 입장 차이, 논문과 서평의 차이

매체와 사람에 따라 중복게재에 대한 표시를 반드시 해야 할 입장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건 중복게재가 허용되느냐? 안되느냐의 차이로 볼 수 있겠지요.

마립간님께서 예로 드신 것처럼 논문의 경우 중복게재는 허용이 안됩니다.
하지만 서평의 경우 제가 여기 알라딘에 쓴 글을 교보나 예스에 올러거나,
다음이나 네이버에 올려도 관계 없지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논문을 싣는 학술지의 위상과 온라인서점과 포털사이트의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또 논문을 누구나 쉽게 쓸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의 연구와 식견이 따라야 하는 문제이고, 해당 논문에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이지요.
그러나 서평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쓰는 만큼 책임의 무게도 적을 수 있습니다.

논문이나 문학작품이라면 아무리 연구자나 작가가 원한다해도 여러 매체에 중복게재할 수 없습니다.
매체에서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평은 대개의 경우 여러 매체에 중복게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온라인서점과 포털사이트와 블로그전문 서비스 등 모두 합해 10여개의 블로그를 갖고 있다면,
그 모두에 제 서평을 올려도 관계 없습니다.
운이 좋아 모 매체에서 제 서평을 실어준다면, 그때 그 모든 블로그에 중복게재했음을 명기해야할까요?
대개 매체에서는 블로그에 실렸다는 사실을 명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평을 쓰는 이가 자신의 서평을 여러 블로그에 중복으로 올렸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표절이라는 말씀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모든 블로그에 올릴 때 중복게재에 대한 문구를 넣으라는 말씀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맨 처음 서평을 쓴 후 10여개의 블로그에 차례로 글을 올렸습니다.
그럼 각각의 블로그마다 제가 글을 올린 모든 블로그 주소를 명기해야할까요?
저는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사람은 해도 관계없지만, 안하는 사람에게 강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글을 여러 매체(블로그를 포함하여)에 올리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혹은 아무 이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누군가에게 그것이 잘못된 행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마립간 2013-06-12 12:38   좋아요 0 | URL
매체와 입장의 차이는 다음 글에 쓸 예정이었습니다. 저는 주장의 관철보다는 제 가치관의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동감하고 설득되었다면 좋겠지만요. 저도 그렇지만, 몇 블로거는 강요하지 않더라도 중복 게재를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