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身邊雜記 131113

- 신변잡기 131106부터 신변잡기 131112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8237 의 후기

 

위 제 글 5편에 대해 몇 가지 지적 사항이 있어 해명을 하고자 합니다.

 

‘비과학적’ ;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특히 수학과 물리)을 좋아했고, 그와 대척점에 있는 비과학적이란 것, 예를 들면 점占, 굿, 유령, 이해 못할 종교 (사이비 종교) 등에 혐오감이 있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과학의 한계를 느꼈고, 그 이상을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과학적’이라는 것에 거부감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웃사이더>라는 책에서

p28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

p178 고흐의 마지막 말 “불행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는 말에 대해 이 긍정의 태도를 균형짓는 일, 이것이야말로 아웃사이더의 문제다. 이는 이미 철학 문제가 아니라, 종교 문제기 때문이다.

 위 글을 읽고 ‘비과학적’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이라고 해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논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소시지 재료를 소시지 만드는 기계에 넣었더니 소시지가 나왔습니다. 소시기 기계에 음식물 쓰레기를 넣었더니 그에 합당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경우를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소시기 기계에 넣었더니 햄이 나왔습니다.

 소시지 재료는 (통상적인) 과학 분야의 관찰, 소시지 기계는 과학적 방법, 소시기는 과학적 이론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미신이고, 어떤 것은 통상적으로 과학으로 분류되지 않는 분야의 관찰 (예를 들면 도덕)이며 햄은 그 결과물입니다. 햄에 해당하는 도덕의 결과물을 과학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다른 용어( 예를 들어 철학으)로 부르든 학문적/진리 가치는 있고 그 햄은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생명 창조의 지적 설계론 ; 저는 생명 창조에 있어 지적 설계론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 주장이 무가치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동설이 처음 주장되었을 때,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주장들을 들어봐도 꽤 과학적 반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는 그 반론을 설명할 만한 과학 지식이 없었죠.) 뿐만 이런 반론을 설명하는 과정은 지동설의 타당성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 창조의 지적 설계론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르든, 다른 것으로 부르든.) 어떤 이의 생각에는 진화론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겠지요.

 

* 칸트 ; 지난 일주일간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의 이중 잣대를 발견했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칸트도 틀렸고, 뉴턴도 틀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칸트 생각을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뉴턴은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성이론으로 확장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칸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었습니다.

 

<수학의 확실성> p404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그릇된 주장을 했지만, 이것은 당시의 철학자들과 수학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믿음이었다. 이런 오류로 인해 후세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은 칸트의 철학을 신뢰하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칸트의 저작이 3권정도 있는데, 구입을 해 놓고 전혀 읽지를 않았더군요.

 

* 신변잡기 131106부터 신변잡기 131112을 쓰기 시작한 것은 가연의 서평에서 비롯되었지만, 인용한 글들이 정확히 칸트의 생각인지, 러셀의 생각인지, 아니면 가연님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용한 출처만 표기하였습니다. (가연님께 미리 양해를 구했고 동의하에 글을 썼지만, 제 글을 읽으신 분들은 오해 없으시길. 인용된 글의 대부분이 가연님의 주장이 아닐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올리게 된 핵심을 언급하자면

러셀의 주장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에 (가연님이 동의한다고 하셨지만) 나는 이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칸트의 언급 ;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위의 언급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가연님이 동의하는지는 역시 불명확하고) 가연님의 말씀대로 칸트의 저작을 읽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인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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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3-11-1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변잡기 131107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9724 의 글은 가연님의 리뷰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지만 확실성에 대한 것, 확실성의 기반이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된 것입니다.

기관차의 예화와 공작왕의 예화는 불확실성의 논거로 제시한 것인데, (물론 공작왕의 경우 줄거리 전체를 노출시키지 않아서 더욱 논쟁의 거리를 남겼을 수도 있지만) 제가 제시한 내용만으로 논거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구체적 설명을 하자면, 그야말로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될 것 같아, 그냥 지적하신 바, 부적절한 예였다고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가연 2013-11-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만.. 동의하에 글을 썼다는 말씀엔 동의못하겠는데요... ㅎㅎ '인용한 글들이 정확히 칸트의 생각인지, 러셀의 생각인지, 아니면 가연님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용한 출처만 표기하였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대로 처음 양해의 말씀을 하실때 제 글을 '어떻게' 인용하실지에 대해서는 말씀을 안하셨던 것 같네요. 제 글의 일부만 잘라서 인용하시면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마립간님의 의견의 반대입장으로 몰리게 되죠... 마립간님께서는 오류를 집어달라고 하셨지만, 글들을 보면 오류를 집는게 아니라 반론을 원하시는 것 처럼 잘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등등등... 그래서 제가 악마의 변호인, 같은 역할을 졸지에 맡은 것 같다, 라고 말했던 겁니다. 지금에서야 인용한 글들의 대부분이 제 주장인지 아닌지 모른다, 라고 덧붙이셨지만, 사실 그런 작업은 처음부터 하셨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핵심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러셀이 왜 저런 말을 하고 있는가, 는 직접 '인기없는 에세이' 를 읽으시면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저 부분만 덩그러니 놓아두면 당연히 동의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사실 책을 직접 읽고 판단하시기를 바랬습니다. 제가 러셀도 아닌데 러셀을 대신해서 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마립간님을 설득해야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추가로, 러셀의 말에 대한 제 입장은 제 리뷰에도 적혀있지만.. 명징하게 말씀드리는게 나을 것 같아서 몇 자 적습니다. 저는 인도주의를 기억하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뒤의 문장,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은 인도주의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마립간 2013-11-13 13:40   좋아요 0 | URL
동의 관한 가연님의 지적은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한 개의 글로 작성할 계획이었다가 글이 나눠지면서 한번에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인기없는 에세이'를 직접 읽고 판단해야 했었다는 지적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첫 알라딘 게제 때, 그냥 지나쳤다가 당선작 발표 후에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글을 쓰는 내내 약점으로 인지하고 있었구요.) 아마 책을 읽지 않고, 가연님의 설명 듣고, 대충 때우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죠.
 

 

* 身邊雜記 131112

- 신변잡기 131111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6116  에서 계속되는 글

 

나의 바람은 다음 글과 같다. ;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철학자는 저렇게 말해. 철학도 수학처럼 계산해서 어떤게 답이다, 라고 알려주면 좋을텐데, 라는 마음을 품고 있던 러셀

 

그러나 내가 얻은 답은 ; 그런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 불구하고 내가 선택한 답은 ; 수학의 세계는 결국엔 불완전한 세계였었고, 사실일지도 혹은 거짓일지도 모르는 추측을 바탕으로 위태롭게 세워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체계였었다. 바로 여기서 러셀은 그가 원하는 완전한 세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사리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한다. ; 나 역시 시대를 넘을 수 없다. 시대를 넘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밝혀진 지식조차 충분히 소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원한다. 지구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는, 시간적으로 Big bang부터 big crunch까지, 공간적으로 전 우주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을 포함한, 철학 및 과학) 지식을.

 

* 사람의 생각은 (근본적 심성이라던가, 신념, 사상은 바뀌지 않을지 모르나) 조금씩 깎여나간다. 어제는 신은 있다, 라고 외치던 사람이 오늘은 안 외치고, 그 다음날은 신이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어제는 신이 없다, 라고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신이 있을까? 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은 신은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지난 주말 내가 알라딘에 올린 (주로 2003년말부터 2004년초에 게제한) 글들을 살펴보았다. 10년 넘게 알라딘에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이렇다.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옳게 판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착한 전쟁은 없다.’라고 선언한다면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우주가 소멸되는 시점까지 옳게 판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어제는 ‘신이 있다’, 오늘은 ‘신이 없다’. 내일은 ‘신이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진리는 (특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기대는) 환상인가?/ “지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지나친 영리함이다.” ; 나는 영리함에 얽매여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 어떤이는 나에게 이런 조언을 주었다. ; (요약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진화론조차 더 나은 이론을 대체되면서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또 다른 분도 ‘착한 전쟁의 유무’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는 나에게 진리/세상은 내가 원하는 방식, 이런 질문에 보편적이 답변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세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럼에 불구하고 위와 같이 상대적 진리를 생각하는 어떤 사람은 (개신교의) 신은 없다고 단언하거나, 수학에서 일반각의 3등분은 불가능하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에 미래의 바뀔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다.

 

(러셀 본인이 강조하듯이) 그 신념이 그릇된 근거를 바탕을 하고 있거나, 설령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광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이탤릭체 글 ; 가연님의 글 중에서 발췌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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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身邊雜記 131111

- 신변잡기 131108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1487 에서 계속되는 글

 

정신에 관한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도덕의 근거는 더 부실하다.

 

* 독서일기 111028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의 간단서평

http://blog.aladin.co.kr/maripkahn/5173445

*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 ; 가연님의 글 중에서 발췌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 무제 120525 http://blog.aladin.co.kr/maripkahn/5640990

* 무제 120423 http://blog.aladin.co.kr/maripkahn/5582602

 

* 나는 의를 인보다 앞세우는 사람이지만, 러셀을 나의 멘토로 삼고 인도주의를 나의 삶의 좌우명으로 삼으려 해도 언뜻 자기 확신이 서질 않는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책의 예화를 빌면 ;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차에서 그대로 달리면 10명의 사람이 사망한다. 방향을 틀면 한 명의 사람이 사망한다. 인도주의 입장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다른 예로 폭풍이 치는 바다에 요트를 타고 있는 사람이 조난을 당했다. 그를 구조하기 위해 구조대를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 10명 사망했다. 이 구조는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어떤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나?

 

* '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 가연님의 글 중에서 발췌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공작왕> 이 만화에 여자의 나체가 자주 그려져 ‘19금’으로 분류되어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있고, 전체적으로 줄거리가 있는데, 마지막에 반전?이라고 할 결론이 있다. 어째든 이 이야기 전체 줄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남긴다. ;

 

1)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행했다면 미래의 나타냈던 더 큰 악덕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피했더니, 미래의 가능성의 더 큰 악덕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2)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피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발생할 미래의 더 큰 악덕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1)번 사실만으로도 모순을 안고 있는데, 1)번과 2)번 사건이 동시에 존재하니, 뭐가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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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身邊雜記 131108

- 신변잡기 131107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9724 에서 계속되는 글

 

요즘 가장 연구가 활발한 분야가 뇌과학일 것이다. 일부는 자연 과학의 신경 생리학 책으로, 일부는 인문학의 심리학 책으로, 일부는 행동 과학을 포함한 사회과학 책으로 출판되고 있다. 출판사나 서점에서 무슨 책으로 분류하든 나에게는 ‘수학, 물리, 생명, 정신’ 이 네 개의 track의 하나인 정신에 관한 책일 뿐이다. 이 정신에 관한 나의 default는 <빈 서판black slate>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감정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없었다. 정신 중 감정에 대한 나의 default는 <스피노자의 뇌>이다.

 

* 독서일기 130923 <스피노자의 뇌> http://blog.aladin.co.kr/maripkahn/6599855

 

* 또 다른 default인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정신은 지정의知情意로 되어 있는데, 의지의 본질에 관해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의지력의 재발견>은 의지력은 유한하다, 포도당의 공급으로 증강된다라는 정도의 단편적인 이야기들만 있다.

 

* 칸트에 대한 러셀의 말도 (중략) '실천 이성에 따르면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저러한 행위를 할 능력이 내가 없다면 당신은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 라는 명령이 그릇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능력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칸트가 원하는 것은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 가연님의 글 중에서 발췌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 자유의지를 포함한 의지에 관한 나의 가치관 default는 성경을 통해 얻은 것이 없다. 의지에 관한 나의 가치관 default는 <철학에의 초대>이다. (<철학에의 초대>는 덕성여자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 원서는 Invitation to Philosophy: Issues and Options로 알라딘 해외서적에서 검색된다.) 이 책에 의하면 자유의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 연속선(spectrum)위에 있다. 나는 이 8가지 가능성을 모두 수용한다.

 

1. 결정론 (자연적 원인들, 결정성, 신적 필연성), 2. 운명 혹은 예정설, 3. 과학적 결정론, 4. 수동적 자아 결정론, 5. 가정으로서의 자유, 6. 능동적 자아 결정론, 7. 자유의지, 도덕적 자유, 실존적 자유, 8. 비결정론 (우연, 비결정성, 원인 없는 사건)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 판단으로) 칸트의 자유의지에 관한 가치관은 7. 자유의지, 도덕적 자유, 실존적 자유로 판단된다. 하지만 그 판단이 옳은가? 깨닫다. 후회, 양심의 가책이 의지에 속한 것인지, 단지 사고와 감정의 현상인지 내게는 불명확하다.

 

* 어느 알라디너는 나의 초월적 시각을 비판적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보편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초월적 위치에 있고 싶다. 그러나 초월적 위치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빈 서판> 이 제목은 우리가 정신/마음에 관하여 초월적인 것을 기대했으나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빗대어서 지운 제목이다. (초월적인 것은 없으나 인지과학은 있다. 아무것도 없다기 보다.) 초월에 대한 심상은 경우에 따라 신神, 영靈, 성性, 도道로 표현되나 실제적으로는 원형原型에 대한 동경과 창발에 대한 동경이라고 생각한다. 내 판단이 맞다면, 즉 내 판단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면 초월 역시 인위적이고 허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묻는다. “일반 정신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 있기나 한 거야?”

 

* 독서일기 131025 <무미예찬> 간단서평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58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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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09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월적 시각, 심리 상담에서도 있습니다.
"관찰하는 자기" 라고도 합니다. 또는 "Meta cognitive" 라고도 하구요, 번역하면 "상위 인지"라고도 하더군요.

상위 인지가 발달한 사람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집착이나 생각의 융합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며, 알아차림을 통한 명상으로 수련하기도 합니다. 영성 상담이 요즘 전체적인 상담에 영향을 끼치고 있거든요. 서불대의 총장님인 김명곤 교수님이 추천하신 책인데, 관심있으실지... 저는 구매하고 못 읽었습니다. 켄 윌버의 책들입니다. 마립간님께서는 저보다 빨리 책을 읽으시고, 또한 명료하게 판단하시니 관심있으시면 한번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마립간 2013-11-11 07:36   좋아요 0 | URL
사람과 동물을 구부하는 것중의 하나가 metacognitive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이 메타인식을 '지정의'와 구분된 새로운 정신(인지능력)으로 생각해야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구분 또는 초월의 단어에 대한 느낌은 양적차이가가 아니라 질적 차이입니다. 마치 위상수학에서 구분되는 것처럼요. (물론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유발하지만, 질적 변화를 유발하기 전후의 상태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직관도 사고의 하위로 놓고, 명상, 영성도 지정의로 설명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추천하신 책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시간나는 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11-12 14:25   좋아요 0 | URL
ㅠㅠ,
마립간님의 지식이 제 지식을 한참 상회하기 때문에
답을 읽다가 제 한계를 인정하고 뒤로 물러납니다. ^^, 너무 어려워요... 아하하.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마립간님과 인연이 있다는 자체에서 저는 기쁩니다.
저는 모르는 세계, 저와는 다른 세상, 세상과 인간의 유전자는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고,
오늘 읽었던 책에서 모짜르트의 음악 천재성과 살리에르의 다른 면에서의 천재성에 관한 언급을 떠올립니다.

마립간 2013-11-12 15:55   좋아요 0 | URL
저의 지식이 마녀고양이님의 지식을 상회한다는 것은 오해이며 과찬이십니다.

저는 제가 아는 것만 압니다. (정규 교육과정과 같이 빠지는 분야가 없고 전문가의 지도를 받는, 그런 것이 아닌 상태) 저는 제가 아는 것에 대해 이모저모로 살펴보면서 빈틈을 없애려는 생각때문에, 일견 깊이 또는 넓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등학교 수준을 벗어나는 것은 피상적으로만 압니다. 사실 가연님의 글을 읽으면서도 제가 칸트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칸트에 대해 모른다는 메타인식은 이미 하고 있었지만요.)

내일 페이퍼에 지난 5일 간의 글의 정리와 변명의 글을 올리려 했는데, 혹시 누군가가 마음이 상할까봐 (약간은 중복게제 논란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상대분의 댓글이 없다면 글을 올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 身邊雜記 131107

- 신변잡기 131106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8492 에서 계속되는 글

 

요즘 나의 가장 큰 철학적 (또는 종교적, 그리고 약간의 과학이 있다고 내가 주장하는) 의문은 ‘수학, 물리, 생명, 정신이 어느 정도 상호의존적인가’이다.

 

* 독서일기 121106 <혼돈의 가장자리> http://blog.aladin.co.kr/maripkahn/5944391

* 어렸을 때 궁금해 했던 것들

http://blog.aladin.co.kr/maripkahn/1576257

* 새로 정리된 문제들

http://blog.aladin.co.kr/maripkahn/3287045

 

이 의문은 꽤 오랫동안 다른 질문으로 변주變奏되어 왔다. 수학과 물리학의 관계는 성리학의 주리론, 주기론으로 생각해 봤고, 생명, 정신은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은 수학자인가>라는 책 제목과 이 책의 소개 글에 ‘일찍이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우주는 수학자의 설계에 따라 창조되었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이야기를 해 주듯, 통상적인 생각은 수학으로 물리학을 설명하고 자연physics에서 생명현상이 창발 되고 생명현상에서 정신이 창발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적 논란이 있는 생명과 정신을 빼고, 수학과 물리학의 관계에서 조차 어느 정도의 상호의존적인지 (배중률에 따르면 어느 정도 독립적인지) 궁금하다. 친구에 지적에 의하면 연구될 수 없는 수학과 물리학의 연관성에 대한 의문은 과학적이지 않다. 나 역시 과학적 의문이라고 주장하기보다 철학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단지 자료 축적으로 통해 철학에서 과학으로 이해하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이다. (책 읽는 속도가 생각보다 늦다. 어렵네) 퇴계는 주리론, 플라톤-노자에 비유되고, 율곡은 주기론 아리스토텔레스-장자에 비유된다. 주리론이 옳다면, 수학을 바탕으로 우주(물리)가 창조된 것, 모방된 것이므로 우주(물리)는 그림자寫像이고, 주기론이 옳다면 물리 현상에서 수학을 상대적으로 추론한 것이므로 수학이 그림자寫像다.

 

** 의문 2 ; 수학과 물리학이 각각 상호의존적이지 않은 영역이 존재하나?

** 의문 3 ; multiverse가 존재한다면 그 많은 우주verse 중의 하나는 우리(우리가 살고 있는 universe)와 다른 수학의 소수素數가 존재할 수 있는가?

 

* 독서일기 130620 <생명의 진화에 대한 8가지 질문>의 간단 서평

http://blog.aladin.co.kr/maripkahn/6423883

 

생명과 정신에 대한 진화론도 마찬가지다. (신의 창조했다는 의미로서가 아니고) 생명과 정신이 수학과 물리학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영역이 존재하는가?

 

* 항상 본인의 의견이 틀릴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다른 입장이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이 부분이 더 옳다, 라고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를 유추해냈지만, 만약에 경험론자라면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신은 없다' 라고 결론을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받아들이지 못한다, 라는 말은 양날의 칼이다. 증거가 없으니 일축해 버릴 수도 없다. ; 가연님의 글 중에서 발췌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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