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과 쥐

 

내가 알라디너 ‘곰곰생각하는발’ 님의 ‘착한 사람에게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글에 댓글을 남겼는데, 좀 뜬금없었다. 여기에 조악한 동화를 지었다.

 

시골에 농사를 짓는 가난한 아주머니가 살고 계셨다. 수확이 많지 않은 농사도 속상하지만 쥐가 창고의 곡식을 축내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쥐를 아주 싫어한다.

아주머니의 큰 아들은 어머니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쥐만을 멸종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있다. 거의 완성 단계이다.

둘째 아들은 형의 하는 일에 반대다. 사람이나 쥐는 같은 생명체이다. 생명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데, 멸종이라니. 쥐는 쥐로서 먹고 살려고 했을 뿐이다.

셋째 아들은 둘째 형과 같이 큰 형이 하는 일에 반대이지만, 반대하는 이유가 조금 다르다. 쥐라는 한 종이 멸종하면 생태계가 교란되기 때문이다. 그 교란은 인간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큰 형은 (둘째의 의견은 아예 무시하고,) 셋째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태계의 교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균형을 찾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인류의 피해는 미미하거나 감내할 만하다. (물론 약자가 우선적으로 피해를 받겠지만.)

 

둘째 아들의 입장은 양보다 질을, 현상보다 본질을 추구한다. 수학과도 통한다. 사과 1개 + 사과 1개 = 사과 2개. 사과에 꼭지가 있고 없고, 색깔이 조금 다른 것은 사과라는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의 공통점 외에는 무시하고 더하기가 가능하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에 관계없이 인간은 인간으로 존엄을 갖는다.’에 동의한다면, 이는 수학적 사고방식이다. 착하고 나쁜 사건/사람에 대한 맥락은 무시한다.

 

아주머니의 입장은 본질보다 현상(이를 실존이라고 해야 할까?)을 중요시 여긴다. 관심은 쥐가 (생명체인 것보다) 내가 농사지은 곡식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것이 현존하는 맥락이다. 아주머니가 농사를 짓지 않고, 글을 쓰는 작가였다면 쥐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이는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적이며 진화론적 사고방식이다.

 

셋째 아들은 어머니와 같이 역시 맥락을 중요시하나 근시안적인 맥락이 아니라, 총괄적인 (원시안적?) 맥락에서 파악한다. 이는 영혼적, 무아적, 종교적 사고방식이다.

 

첫째 아들은 어머니와 같은 입장이다. 쥐를 막기 위해 고양이를 키우거나, 쥐덫을 놓는 것으로는 쥐가 곡식을 빼앗아가는 것을 막는데 한계가 있고 (즉 효과가 미미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고 새로운 해결책을 시행할 능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점은 첫째 아들은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가 쥐를 미워하는 이유는 세 아들 양육에 책임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즉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이 네 사람의 세 가지 가치관에 옳고 그름이 있을까. 누구의 의견이 맞고 틀리는 것인가? 나는 이 세 부류의 가치관 모두 옳다고,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째든 쥐에 대해서 (방관을 하든, 쥐덫을 놓든, 바이러스를 퍼뜨리든) 어떤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고, 그 행동의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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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급조한 우화 정말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군요. 순간 어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마립간 님이 자주 언급하셔서 그런가 이 글 읽다 보니 저는 정말 수학적 인간인 것 같습니다.
이런 지적은 마립간 님이 처음이어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 왜냐하면 수학은 거의 양, 미'에서 왔다갔다 했ㄱ든요..) 이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모든 입장에는 그 입장이 가지고 있는 정당성이 있죠. 그래서 정치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조율을 하는 차원에서 말이죠. 그래서 전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지만 제 주장에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립간 2014-03-04 15:20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로 다수의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입장으로 행동을 하죠.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첫째는 대기업과 같은 이기적이면서도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둘째와 셋째 성향을 가진 사람을 합쳐도 그 수가 얼마 안 되는 소수이고, 그래서 외롭죠.

소수에 해당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가치관에 동조하는 사람도 적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소수를 인정하지도 않으니 세상살이가 버겁죠. - 그에 대한 평가로 대개 변화하지 못하는 가치관의 경직성을 비난합니다.

제가 바라기는 둘째나 셋째 아들도 자신의 가치관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 하는 것이죠. (굶어 죽지 않고.)

페크pek0501 2014-03-0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시각으로 읽었습니다.

니체가 한 말 - "모든 일은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다. 좋은 일, 나쁜 일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가 생각나네요. 동양에서도 노자? 인지 장자? 인지 이와 비슷한 말을 한 걸 읽은 것 같은데, 누구인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심지어 우리 애들이 다툴 때조차도 누가 더 옳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이런 면에서 보면 누가 옳고 저런 면에서 보면 누가 옳고 그렇죠.

마립간 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잘 풀어 놓으셨네요. 유익한 글이에요. ^^

마립간 2014-03-06 15:58   좋아요 0 | URL
저는 '모든 일이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다.'에 동의하지만, (제 글 말미에 쓴 것처럼) 선택은 있게 마련입니다. 즉 저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노자주의자로 변하지 않는 (최소한 우리 우주에 항상 통용되는) 옳고 그름(저는 이것을 수직적 가치관이라고 부릅니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위 이야기로 설명하면 둘째 가치관을 기본을 삼고, 세째 가치관으로 보충하는 형국이죠. ; 저의 이런 절대적 진리에 대한 집착은 (아마 아랫글에도 언급되어 있는) 일제 식민지와 관련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성도 없는 친일 집단이 잘 용서가 안 됩니다. (제가 용서 안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

니체와 같은 말을 했던 동양 철학자는 아마 장자일 것입니다. 노자는 절대주의, 장자는 상대주의자였으니까요.
 

 

* 書架日記 140128

- 새해 결심 세 번째 도서 ; <맹자>

 

* 어째든 2월 중에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의 책장을 모두 넘겼다. 줄거리가 기억나는 것도 아니고 등장 인물의 특징이 남은 것도 아니고, 몽환적인 이미지만 머리 속에 남았다.

 

* 어찌 어찌하여 사서四書라고 불리는 책 중, 3권을 읽었다. <논어>는 삼중당 출판의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읽기 전에 예상은 도덕 교과서와 같은 이야기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고,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난다.

 <중용>은 내가 무척 아끼는 책인데, 완독은 한번 하였지만, 중간 중간 들춰보는 책이다. <대학>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책이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맹자>를 읽으려 했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그만 두었다.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 당위sollen법칙이 아니라 존재sein의 법칙이 궁금했었다. (관심이 sein에 쏠려 있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 의義와 이利가 일치한다면 고민이 없다. 의를 위해서 이를 버려야 하는 상황이 문제다. 일제 식민지 시절, 우리나라 독립이 의라면 친일을 통해 이를 얻을 수 있다. 의를 위해 이를 포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계 위협과 같은) 생존에 위협을 받는 경우이다. 적당히 일제 식민지에 대한 독립 운동을 하면서 또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당한 친일이 가능하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p135 변절한 사람은 루시오 뿐만 아니었다. 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단순히 지난날의 이상을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열렬한 신봉자가 되야만 한다는 것이다. “라몬 씨, ...”

 

* ‘나쁜 것은 너인데, 아픈 것은 나이다.’

 

현재 사회에서 위의 명제가 강력하고 견고하다면, 맹자의 도덕주의로 위 모순을 깰 수 있을까? 위 명제에서 도덕적 관점을 뺀다면 경제학 용어 ‘외부 경제 효과’, ‘외부 불경제 효과’에 비유된다. 최소한 나의 관점으로는 외부 효과를 완벽하게 조율할 수 없다.

 

* 맹자는 공자보다 대중에게 덜 회자된다. 이런 대중성이 공자보다 못한 것은 맹자는 ‘역성혁명’을 지지했다는 것이 연관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지나친 도덕주의 때문일까?

 

* 마립간의 철학적 관점을 설명하는 단어들 http://blog.aladin.co.kr/maripkahn/3459932

* 사필귀정 http://blog.aladin.co.kr/maripkahn/494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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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3-01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를 위해서 이를 버려야 하는 상황이 문제다. 일제 식민지 시절, ~'
- 이에 공감합니다. 저도 그런 상황이라면 의만 추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어느 책에서 보니까 자존감이 높아야 끝까지 비굴해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데,
글쎄요...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면 비굴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요.

논어, 장자, 도덕경을 열심히 읽었던 생각이 나네요. 누가 제일 옳은지 알겠다는 일념이 있었죠.
그런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장자와 노자의 글을 좋아합니다만... ^^

마립간 2014-03-03 07:4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제 식민지 시절이 없었다면, 저의 철학적 고민은 훨씬 이성적인 것이에 한정되었을 것 같습니다. 일제 덕분에 고민의 예도 풍부하고 실감을 느끼죠. 우리 민족에게는 불행이지만.

저는 독서 시작도 늦기도 했지만, 시작을 서양 철학으로 했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의 책은 없기 때문에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여겨진 노장사상 때문에, 노자, 장자 책을 읽었는데, 이것이 플라톤-노자, 아리스토텔레스-장자, 디오게네스-양주 프레임을 형성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이라는 강신주 책의 서평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아는 것이 힘이다.'와 '아는 것이 병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등의 모순적인 속담에서 속담이 어떤 것을 설명하지,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철학도 결과적 측면이 아니고 원인적 측면에서 어쩌면 누가 제일 옳은지 알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철학에 대한 흥미가 반감되었고 논어나 맹자를 포함한 다른 철학서는 등한시하게 되었죠.
 

 

* 자화自和

 

<그림으로 풀어쓴 황제내경>을 읽던 중 아랫글을 읽게 되었다.

 

p 36 음양의 대립對立, 제약, 호근互根 (음양이 서로 의존함), 호장互藏 (음과 양이 각각 상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교감交感, 소장消長 (쇠하여 사라지고 흥하여 생김. 즉 음양의 대립), 전화轉化 (서로 전화함.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된다.), 자화自和 (음과 양의 부조화에서 평형을 유지함.), 평형 등

 

다른 것은 그냥 읽고 지나갈 수 있었는데, ‘자화’라는 것이 눈에 띈다. 부조화와 평형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물리학에서 과포화나 과냉각 상태가 있는데, 꼭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다.

 

사실 감정적 불편은 물리학적 비유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인문학적 비유에서 비롯되었다. 식민지나 독재와 같은 사회적 상황은 부조화에 해당하는데, 이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 평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수학적 은유로는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 4차 방정식(y = ax**4 + bx**3 + cx**2 +dx + e, a는 양수)에서 세 개의 극점을 갖고 2개는 아래로 볼록한 극점을 갖는다. (극점이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른 상태라면,) 하나의 아래로 볼록한 극점은 다른 아래로 볼록한 극점보다 높지만, 그 상태에서 안정을 한다.

 

이 사회현상에 은유시키면, 높은 아래로 볼록한 극점은 독재 정치다. 낮은 아래로 볼록한 극점은 민주 사회다. 독재 정치에서 민주 사회로 이행하려면, 위로 볼록한 극점인 언덕을 넘어야 한다. 사회적 에너지가 없으면 독재 정치에서 안정한다. 민주 사회에서 언론 장악이나 공안 통치를 통해 위로 볼록한 극점인 언덕을 넘겨 독재 정치에 사회를 옮겨 놓고 사회적 에너지를 약화시켜 버리면, 사회는 독재 정치에서 안정하게 된다.

  독재에 안정된 사회에서 더 멀리 보려하는 아웃사이더는 언덕너머 더 안정적인 극점에 동경을 갖지만, 사회는 그대로이다. 언덕이 사회에너지에 비해 너무 높고 멀다면 단지 사색에만 있는 더 안정된 극점이 의미가 있을까? 현 사회에 알맞은 파도 옮겨 타기를 하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파도 옮겨 타기 ; 기회주의자들의 행동 모습. (예를 들어 구한말에 세도정치와 야합을 하다가, 일제시대에 친일하고, 이후 독재시대에는 친親독재를 하고, 지금은 친재벌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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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2-2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쟁(수직적 관계 지향)이냐 연대(수평적 관계 지향)의 장점만 유지하는 것, 즉 경쟁 시스템을 갖추되 수평적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위로 볼록한 극점에 위치하는 것으로 은유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讀書日記 14021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다른 책 독서에 대한 흥미나 집중력조차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다. 12월말부터 현재 읽고 있는 책. (대충 읽은 책포함.) 하고 싶은 말을 많지만 결국에는 동어반복. 책 제목만.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초등 1학년 공부, 책읽기가 전부다>, <정보는 아름답다>, <처음 20 시간의 법칙>,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일하는가>, <비참할 땐 스피노자>, <오일러 상수 감마>, <몸의 인지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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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2-21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300쪽 이내의 책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완역본이 아니었겠죠.
<비참할 땐 스피노자>는 저도 보관함에 담아 놓았던 것이에요.
몇 권이 시리즈로 있더라고요. 다 사 봐야지, 했어요.

마립간 2014-02-21 11:14   좋아요 0 | URL
제가 스스로 공감 능력(눈치)이나 사회 활동에서의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소설을 못 읽는 것과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어보려 하는데. 확실히 소설은 저에게 어려워요. 거의 블랙홀 수준입니다. '슬픈 열대'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읽었는데요.
 

 

* 育兒日記 140217

 

* 7세 남아 ;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생이야. 이때는 이래서 고생이고, 저때는 저래서 고생이고, ... ”

 

* 40년 뒤 그 남아의 딸, 7세 여아 ; “사람은 그 나이에 맞는 좋은 점이 있은 것 같아. 이 나이 때는 이래서 좋고, 저 나이 때는 저래서 좋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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