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425

 

책세상 출판 <이방인>의 독후감을 쓰고 다른 분의 감상문을 읽었다. 나는 내가 그 책을 읽지 전에 다른 사람의 독후감을 읽는 것은 꺼려한다. 감동마저 모방될 것 같아서. 여러 사람의 독후감을 읽었다. 알라딘에서 몇 편을 읽고 Yes24까지 건너가서 독후감을 읽고 왔는데, 거의 비슷하다. 느낀 바가 너무 달라 다른 분의 독후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이방인> 독후감에 관해서는 마치 내가 뫼르소나 이정서가 된 느낌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독후감에는 공감이 없을지언정 정오正誤가 없다는 것.

 

책세상 출판 <이방인> p166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책의 주제를 나타내는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하면 바로 위 문장을 고를 것이다. 뫼르소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세상이 또한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 투사projection다. 마지막 죽기 전에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면서 아직 투사된 세상에 관해서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으로 문학적 표현을 한다. 아직 완벽하게 마음에 문을 연 것은 아니다.

 

1) 많은 독후감에서 뫼르소를 소수자로 판단하고 있다. 이방인은 분명 소수자이다.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원주민이 왔다면 그는 우리나라의 이방인이며 소수자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에서 ‘이방인’은 ‘적다’는 것보다 ‘다르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다르다는 점은 소통이나 교감이 이루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것은 ‘이인’으로 내가 읽은 감상에 맞은 제목 같다. 무관심-무감동-무기력한 사람, 뫼르소가 소수자인 것은 맞으나 다수-소수의 대립이 이 글의 주제라고 보기 어렵다.

 

2) 뫼르소는 감정이 절제된 것이라는 평가도 봤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감정의 분출을 억제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없었다. 어머니 장례식 다음 날 뫼르소의 행동은 슬픔 감정을 억누른 것이 아니고 슬픔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3) 뫼르소의 솔직한 태도, 자기 자신의 감정 그대로의 표현을 나는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 역시 자기 보호 본능과 감정이 결여된 상황에 이루어진 행동이다. 자폐증 환자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아이의 자폐증을 치료하여 호전되던 중 어느 날 아이가 거짓말을 하였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끌어 안고 울었다. 거짓말을 한 것이 속상하여 운 것이 아니고 감격하여 운 것이다. 거짓말을 할 만큼 자폐증을 극복한 것이다. 거짓말, 배신 등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지만, 어느 정도의 인지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속담에 동물을 배신하지 않는데, 배신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동물 배신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4) 뫼르소가 재판을 받는 과정을 통해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그리고 권력에 희생당했다는 감상을 봤다. 살인자에게 재판을 하고 형벌을 내리는 것이 부조리한 것인가?

 

5) 뫼르소가 자유롭거나 태양이나 자연을 사랑했다거나 관조적이란 표현도 동감할 수 없다. 뫼르소는 정방방위가 아닌 살인을 저질렀다. 이런 행동이 우발적, 우연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어머니 장례식 다음 날의 일들을 서술한 것이다. 어머니 장례식만큼 강렬하지 않지만 친구의 폭력행사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에서 나는 그런 복선을 느꼈다.

 

솔직히 <이방인>이라는 책을 읽을 때는 쉽게 읽었는데, 다른 분의 독후감을 읽으면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감상에 맞고 틀림은 없지만 내 판단과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비판적 댓글을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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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4-25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에선 다의성이란 특징 때문에 어떤 해석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쉽지 않은 것 같고,
게다가 다른 나라의 언어로 씌어진 작품에 있어선 번역이란 게 하나로 명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번역할 수 있으므로) 특정한 사람을 겨냥해 번역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문제 같아요.
기존의 번역이든 새 번역이든요.

그냥, 독자들이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겠다, 정도로 인지하는 정도면 좋겠고,
누구의 번역이 틀렸다고 인지하게끔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마립간 2014-04-26 07:53   좋아요 0 | URL
pek0501님의 어머니 마음에서 나오는 포용성이 느껴지네요.^^

저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노자, 보수주의자로 평균적인 사람보다 옳고 그름에 얽매여 있습니다.

문학의 다의성을 저도 인정합니다만, A라는 문학작품의 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반면 (예를 들어 10개 정도) B라는 작품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적게 (예를 들어 3개 정도) 나올 수도 있습니다. 또 A 작품의 a부분에서는 정답이 없는 반면 b라는 부분에서는 한 가지 해석만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국어 시험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지요.

번역, 감상 모두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오역, 오답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에 관해서는 제가 언급할 입장이 아니고요. 감상에 관해서는 남이 틀렸다기 보다, 제가 틀렸나 (물론 제 스스로는 제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검정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분의 독후감을 찾아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이방인'에 관해 독후감도 별로 없고, 내용도 비슷비슷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갖은 글은 하나도 없고.

페크pek0501 2014-04-2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왔어요. 생각해 보니 제가 몇 년 전에 <이방인>과 연결시켜 쓴 글이 있어요.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 보시길...

http://blog.aladin.co.kr/717964183/4227695




마립간 2014-04-28 07:32   좋아요 0 | URL
새움 출판 '이방인'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연달아 두번 읽은 경우가 흔하지 않은데, pek0501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읽겠습니다. 정상-비정상이란 것, 제가 반복적으로 옳고, 그름/다양성의 중간에 있는 용어 같습니다.
 

 

* 讀書日記 140424

 

<이방인> 서평 별점 ; ★★★☆

 나의 독서는 소설만 빼고 이루어지는 듯하다. <이방인>도 소설이고 독서의 동인動因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책세상에서 출간된 <이방인>(김화영 옮김)이 꼽혀있었는데, 내가 구매한 것은 아니다. <이방인> 번역 논란이 처음 있을 때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번역 논란이 처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알라딘 마을에서의 논란은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논란이 있기 전에 <이방인>이 난해하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어려운 책이 한 두 권 있는 것도 아니고.) 논란으로 유발된 호기심은 김화영 번역본과 이정서 신번역본을 모두 읽어야겠지만 일단 집에 있는 책부터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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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어 보셨다. 질문이 없다. 이런 상황의 해석은 내용이 쉽고 강의가 좋아 학생들이 너무 잘 이해를 했거나 아니면 질문할 만큼 강의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번역 논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하면 아직 읽지 않은 새움에서 출판된 <이방인>이 얼마나 가독성이 좋은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책세상에서 출판된 김화영 번역의 <이방인>이 특별히 난해하게 번역되었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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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내용에 집중을 해 보자. 이 책을 읽는 내내 인터넷에서 읽었던 기사(책의 소개로 fiction으로 기억되지만 정확하지 않다.)를 떠올렸다. 간단히 요약하면 ;

 

한 남자가 자동차 운전 중 여성을 치었다. 여성은 많이 다쳐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남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고 통화를 하지 못한다. 남자는 여성을 내버려두고, 집으로 갔다가 다시 사건현장으로 돌아온다. 현장에는 여성이 아직 살아 있었고 남자는 여자를 강간하고 이후 죽은 여자의 시체를 길가로 숨긴다. 남자는 범인으로 체포되었고, 경찰의 취조가 있었는데 여러 질문 중 마지막에 왜 죽어가는 사람을 강간했느냐 물음에 ‘어차피 죽을 사람, 그냥 죽게 놔두는 것은 낭비잖아요’라고 답했다.

 

위 글의 핵심은 ‘낭비’에 있다. 이성적 논리만으로는 범인이 말한 ‘낭비’에 대해 항변을 할 수 없다. 항변을 위해서는 논리 이외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공감각이 필요하다.

 

내가 평생에 경계해야 할 것 5가지를 꼽는데, ‘무지無知’, ‘무례無禮’, ‘무관심無關心’, ‘무감동無感動’, ‘무기력無氣力’이다. 내가 이해한 <이방인>은 난해하지 않았다. 주인공 뫼르소에게 무관심, 무감동, 무기력이 있었을 뿐이다. (나 역시 이와 같은 성향이 있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까뮈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된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방인>은 이성만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이없는 결과만 낳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하면 나의 너무나도 편의적 해석일까? 위 5가지는 무책임, 무의미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회적 적폐積弊때문에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때에 가수 이정씨가 분개했다고 한다. 나는 그 분개한 대상을 찾아보고 싶지 않다. 예능 방송 결방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과거에 9. 11. 사건 때 프로야구 결방에 불만을 터트린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 있는 뫼르소이다. 뫼르소는 가해자이며 사회에서 적절하게 인간으로 양육되지 못한 피해자다.

 

궁금증 1 ; 살인 장면에서도 나오는 ‘두통,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함’의 묘사가 정신착란을 포함한 정신과, 신경과 영역의 질환을 암시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궁금증 2 ; 첫 발포 후 2~5번째의 발포에 간격을 두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로 해석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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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4-2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물론 완전히 뫼르소에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지구 상의 (아니면 이 우주의) 모든 환경과 생명과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

마립간 2014-04-24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적 적폐가 가장 큰 곳은 정치권과 정부 아닌가 ; 선거와 어느 정부 기관이 떠오르니 말이다.

마립간 2014-04-2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세상의 '이방인'이 까뮈의 '이방인'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알라딘에서 게제된 '이방인'의 마이리뷰는 책보다 더 어렵다.

그 리뷰들 중의 몇 구절은 동감이 안 된다. 대개 '이방인=아웃사이더, 소수자'의 개념으로 평가한 글도 많다.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것인가?

서평에 관해서는 내가 뫼르소나 이정서인 듯. (새움의 이방인의 서평에 다른 분과 다른 생각을 간략하게 서술할 예정)

페크pek0501 2014-04-2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 이방인을 읽었어요. 책세상의 것으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내용을 잘 기억해요.
문학이란 어떤 문장이든 한 가지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 즉 다의성이 있는 것이라서
무엇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저는 주인공을 이해하며 읽었어요.
인간은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 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그러나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니까 아랍인에게 총을 쏜 동기가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가 아니라 새 번역본에 따르면
아랍인의 칼날에 비친 햇빛이 위협적이어서 정당방위로 쏘았다고 하던데, 만약 그렇다면 이 작품은 명작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당연한 행위인데 그야말로 평범한 작품으로 떨어지고 말지요. - 제 생각임.

제 친구 중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A가 B에게 전화를 했는데, A가 어떤 말을 했죠. 그런데 평상시엔 웃음으로 받아 넘길 수 있는 내용인데 B가 배가 고프고 짜증스러울 때 전화를 받은 거였어요. 그래서 엉뚱하게 그 짜증을 A에게 쏟아 부었죠. 마구 화를 낸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B가 사과를 하더랍니다. 배가 무지 고프고 짜증스러울 때 전화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론 뜨거운 태양 때문에 총을 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그런 일 있었죠. 공중전화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앞사람이 통화가 길어서 짜증이 난 거예요. 햇볕이 무지 뜨거운데 그래서 서 있기도 힘든데 앞사람이 통화가 길어지자 화가 치밀어서 그 앞사람을 칼로 찔렀다는 사건입니다. 신문에 났었죠. 인간은 이렇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뫼르소를 다 이해할 순 없지만(이건 가능하지도 않고) 저는 이런 맥락으로 이해했어요.
해석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에 동의하며 써 봤습니다. 뫼르소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자신의 마음도 모를 때가 많은데... 그저 뫼르소의 마음을(또는 생각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마립간 2014-04-25 14:49   좋아요 0 | URL
pek0501의 감상은 저와 공감대가 있네요.

저도 햇빛에 의한 살인으로 봅니다. 그래서 솔직한 뫼르소나 유죄판결을 내린 법정/사회는 부조리가 아닙니다.

저는 알라딘과 Yes24까지 가서 독후감을 봤는데,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새움에서 출간한 '이방인' 독서일기에서 다른 분 서평과 제 감상과를 비교할 예정입니다. 뫼르소의 마음도 알기 어렵지만, 서평을 쓰신 다른 분의 마음도, 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마립간 2014-04-3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경우 우리의 고정관념은 사실과 잘 맞아 떨어집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Q9EJezBBCk
 

 

* 讀書日記 140423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서평 별점 ; ★★★★

 이 책을 읽으면서 키득 웃기도 했다. ‘꼭 내 말투잖아.’ ; 훈시와 같은 느낌으로 틀린 점을 지적질 하는 것, 1970년대의 어렸을 때를 회상하는 것. 잘난 체하는 것 (아니면 남들이 보기에 잘난 체를 한다고 판단할 소지가 있는 것). 문학적 냄새를 제외하고 평가서와 같은 문체. 등등. 일단 반가웠다. 나와 같은 욕을 먹는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아서. 게다가 과학 지식에 대한 이해도가 나와 비슷하다. 이과계가 아닌 문과계에서 이 정도로 대화가 되는 사람을 처음이었다. 또 하나의 처음은, 이 책은 서평집으로서, 그 대상이 과학책이라는 것이다. (혹시 다른 과학도서 서평집이 또 있나요?)

 

읽은 책도 있지만, 읽지 않은 많은 책들이 알라딘 보관함으로 갔다. 서평집은 나름 좋은 점이 있으나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원래의 책을 읽는 것이 식사를 하는 것이라면, 서평집을 읽는 것은 영양주사를 맞는 기분이랄까.

 

문과계에서 있으면서 이 정도의 과학지식이 있는 분은 뭐하고 사시나 봤더니, ... 고인이 된 분이다.

 

나 스스로 알라딘 활동을 하면서, 수학/과학 도서독서 홍보인을 자처하고 싶은데, 과학에 흥미 있으신 분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궁금한 점 ; 문과계열에 있는 분도 이 정도 내용은 자연스럽게 내용을 이해하는지.)

 

* 밑줄 긋기

p31 그는 실험에 대한 혐오감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낸다. “실험을 통한 검증 없이 경쟁 중에 있는 가설들의 우열을 가릴 수 없으므로, 과학은 실험에 의존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큰 오점인 실험을 천시하는 생각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실험에 대한 혐오감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p70 물리학자 카를-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체커의 ‘은밀한 고백’처럼 소극적 협력적 협력은 이미 나치와 타협한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는 사실 (저항자로서) 강제수용소가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쪽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지요.”

p72 내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이 사화주의(자)의 무기력함을 드러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과학(자)의 힘없음을 노출한 것 같다.

p75 “진화는 무목적이며, 비진보적이고 유물론적이다.”

p78 굴드는 과학자에게 물질적 기반의 중요성, 다시 말해 먹고 살 만해야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에 유의한다.

p135 어는 과학 전문기자가 제시하는 과학 뉴스의 다섯 가지 기준은 ‘매력도’ 혹은 흥미로운 정보의 제공, 주제에 대한 ‘기본 청중’의 크기, 중요도, 결과의 신뢰도, 시기 적절함 등이다.

p137 그것이 ‘과학’임을 보장하는 것은 ‘무언가를 발견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 보이는가“에 있다.

p138 과학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었다.

p145 상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불신감은 냉정하기까지 하다. “사고파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쉽게 구별되었다. 그들의 시선은 빈틈이 없었고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으며, 사기를 당할까 두려워하거나 그에 대해 유념하고 있었으며, 해질녘의 고양이처럼 경계심을 늦추기 않았다. 그 직업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었다. 궁정 철학자, 렌즈를 가는 철학자, 심지어 엔지니어이거나 전략가인 철학자도 있었지만, 내가 알기로는 도매업자나 소매업을 하는 철학자는 없었다.”

p158 사람은 혼자 있을 때 가장 평화롭다. 둘이 모이면 싸우고, 수백 명이 모이면 군중 심리에 휩쓸려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수천 명이 한데 모이면 그들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p192 수학의 어느 두 분야도 산술학Arithmetric과 정수론Theory of Numbers보다 더 대조적이지 않다./산술학은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을 포함한 모든 수학의 토대이다. 이것은 과장 중에서 가장 유용하고, 아마도 이보다 더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한편, 정수론은 가장 응용력이 적은 수학 분야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술적인 진보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순수 수학 분야에서조차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일반 과학 분야와도 아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p194 수학자는 단지 정신의 활동만 다루고 있음을 꺼리지 않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독창적인 고안물이 그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동일시하는 감각에 의한 인상에서 유래했음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때때로 이 고안물이 그들이 태어난 현실과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알고도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깔끔함을 수학자들은 그들이 이룬 성과의 기준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의 창조적인 상상력으로부터 나온 것의 가치는 그것이 현실 세계에 적용되는 범위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수학적 성과는 수학 자체의 척도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과학자는 이 세상이 그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과는 무관한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절대적인 완전체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놀랍도록 단순한 법칙이나 전적으로 일반적인 것 혹은 우주의 완벽한 조화를 지적하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그의 생각이 그 발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의심하고, 영원한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본 아름다운 이미지가 이 영원한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는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생각의 반향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p198 연구자 개인의 영웅적인 헌신과 지속적인 자금 지원뿐만 아니라 자연의 협조라는 엄청난 운까지 따라 주어야 한다.

p201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입증된 과학보다 더욱 힘이 세다는 뜻

p206 과학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이다.

p215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예측은 예언과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p219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본질적 (근본적, 발본적)이고 강력하며 압도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적으로 옳은 단 하나의 이론은 있을 수 없어서다.

p230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를 지시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가 될 수 없습니다.”

p232 나는 양자역학은 다분히 직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엄밀함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철학에 가깝다는 의미다.

p234 우리가 죽음을 불쾌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드물게나마 사람 몸 내부에서 세포 수준의 생명을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뜻한다.

p242 분기점에서 실제로 행한 선택은 본질적으로 미리 결정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선지先知의 불가능성의 문제다.

p243 어떤 조건하에서 엔트로피 그 자체가 질서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통합하자는 그의 한발 앞선 제안과 시도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p245 열이 ‘기계적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만큼 열의 본성에 관해서 염두에 두지 않았다.

p258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게 가능한 까닭은 삼라만상에 내재한 ‘폭발성bust’ 덕분이다./“우리들 인생의 매력은 소소한 세부 사항에 있을지 몰라도, 과학의 장기는 결국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p260 전쟁의 시기는 무작위적이며, 폭력이 더 줄어들거나 더 늘어나는 역사적 경향성 같은 것은 없다는 리처드슨의 결론을 지지하는 결과였다.

p266 오염 책임자들은 크게 네 가지 전략으로 규제 조치를 허물어뜨린다. 먼저 ‘사실을 입증하기에는 정보가 불충분하다’는 비난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들의 공격적 방어 전려이다. 둘째, ‘희생자 비난하기’ 역시 선례가 많다. 셋째는 ‘기계파괴자’ 같은 딱지를 붙여 몰아세운다. 끝으로,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보호 규제에 반대하는 가장 현대적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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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日記 140422

 

<들어가서 보는 그림 동양화> 서평 별점 ; ★★★

  나는 서양식 사고가 있어서 그런지, 수학이 좋다. 그런데 음악을 놓고 보면, 서양 음악과 국악의 선호도가 딱 반이다. (선호이지 내가 잘 안다거나 많이 접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회화를 놓고 보면 동양화의 선호도가 서양화 선호도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합당한 설명을 얻었다.

 

p43 동양의 옛 그림에서 그림자가 그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 물체가 본질이고 그것이 비추어진 그림자는 본질의 반영으로서 본질에 비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기 때문에 비본질적인 자투리에 마음을 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죠. 근본을 중요시하고 자투리에 마음을 두지 않는 사고방식을 본말론本末論이라고 합니다.

 

나는 힘이 닿는 데까지 이 서재에서 중후장대심원重厚長大深遠(구광고다久廣高多?)을 추구해야지라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적인 내용은 생각보다 가볍다. 책도 가볍다. 책값도 가벼웠다. (나는 50%할인 구매했는데, 그 동안 20% 할인으로 가격이 올랐다.) 가벼운 것도 괜찮다.

 

* 밑줄 긋기

p47 선우후락先憂後樂

p51 홍운탁월烘雲托月/이러한 방식은 세상에서 말하는 ‘쓸모 있음’은 ‘쓸모 없음’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설파한 <장자> ‘서무귀徐无鬼’편을 회화적으로 반영한 느낌입니다.

p109 “역적치고 명필 아닌 이 없다”/역적 노릇도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p111 이때부터 많은 노력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漸修 신수의 북종선과 단박에 깨우침頓悟을 주장하는 혜능의 남종선으로 나누어집니다. ; 남종선을 ‘생활의 선’, 북종선은 ‘사색의 선’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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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에 관한 생각

 

번역에 대해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일간지 신문기사(이미도씨 등의 대담)를 읽고 나서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한다. 창작/창의성이 없는 나에게는 번역도 대단하게 보였다. 한참 뒤 번역에 대한 다른 글을 읽었는데, A라는 원문이 B와, B와는 다른 의미 C로 번역되었을 때, B와 C가 동시에 맞을 수 없다는 글을 읽었다. 언뜻 보기에 모순처럼 보인다. 창작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런데 창작으로 여겨지는 번역이 옳고 그름은 있다고 주장한다.

 

예문 ; 학생들이 흡연을 하다가 선생님이 오시는 것을 발견했다. 한 학생이 친구들에게 “토끼자!”라고 외쳤다.

 

위 글을 영어로 번역한다고 할 때, ‘토끼자’라는 문장을 “Let's be the rabbits!”라고 번역했다면 옳은 번역일까. “Run away!”라고 했다면 뜻에 맞게 번역했을지 모르겠지만, ‘토끼자’의 비속어 어감을 살릴 수 있을까. 살릴 수 없다면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영사전에는 ‘도망가다’에 show one's heels, cut one's lucky, haul it 등의 어구도 보인다. 어느 것이 이 상황에 맞는 번역인가?

 

나는 ‘죽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어구에 ‘die’, ‘pass away’, ‘kick the bucket’ ‘expire’ 등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책을 읽을 때, die는 ‘죽다’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pass away’는 돌아가시다. ‘kick the bucket’은 ‘뒈지다’, ‘expire’는 ‘사망하다’를 떠 올린다. 나는 ‘pass away’에 대한 번역을 ‘죽다’로 하였다면 미숙한 번역으로 생각할 것이다. (시각에 따라서는 이 미숙함을 틀렸다고 판단할 것이다.)

 

사실 번역의 창작성이나 다양성은 <Real speaking Manual 리얼 스피킹 매뉴얼 ; 정치편>을 책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국어로 된 한 문장이 다양한 영어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paraphrase라고 하여 영어 공부에 꽤 도움이 되는 방법) 그러나 이 paraphrase도 원래 글의 의미를 바꾸면 안 된다.

 

<한시미학산책>에 어느 한문 문장의 오역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한문은 띄어쓰기도 않고, 한자가 중의적으로 사용되고, 땅도 넓고, 역사도 오래되어 당시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오역된 내용이 원문보다 더 문학적/철학적인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역을 권장하거나 오역을 맞다고 할 수는 없다.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와 이경숙의<노자를 웃긴 남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번역이 어려운 것은 원문의 언어(출발어), 번역된 언어(도착어)를 모두 잘 알아야 한다. 잘 안다는 것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문화, (사건 당시, 글을 쓸 당시) 상황도 이해해야 한다. 번역할 적절한 단어가 없기도 하다. (이 경우 정답에 근접한 번역만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고문古文을 학교에서 배운다. 하물며 외국 서적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가수 이승철 씨는 TV 오디션 방송에서 음학音學은 없고 음악이 있다고 했다.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번역은 음악에 가까울까? 내가 보기에 번역은 원작자의 의도에 얼마큼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글을 기준으로 정답이나 정답에 가까운 글이 있다고 생각한다. (원작가가 죽었다면 원래의 의도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논란을 일으키는 이유일 것이다.) 원작자의 의도를 변경하여 더 좋은 글을 썼다면 그것은 번역이라기보다 새로운 글로 봐야할 것이다.

 

논쟁을 하다보면 원래 논점 이외에 파생되는 논점이 발생한다. 익명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비판을 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나, 비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완벽할 때만 비판이 가능 하냐 (거칠게 표현하면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할 수 있나,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비판할 수 있나.), 비록 도덕적 해이(?)가 있지만 기득권에 대항하는 부수적 효과를 볼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나, 등. 불공정은 명성이 있는 기득권과 비기득권 사이에도 있고, 선발번역과 후발번역에도 있다. 각자의 선호에 의해 공정성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아닐까.

(201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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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움에서 출판된 <이방인>이 알라딘 도서 판매 1~2위를 하였다. 판매에 비해 서평/독후감이 별로 없다. (두 분의 글만 많다. 다수가 꼭 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소수가 믿는 믿음, 잘못된 믿음(리플리 증후군?)일 수도 있다.) 번역 논쟁을 통해 호기심 때문에 판매되었거나, 책이 어려워 독서가 진행이 안 되거나, 읽고 나서 글로 정리할 만큼 해독이 안 되거나 ...

 

현재까지 높은 평점을 준 독자는 비교적 읽기가 쉽고 전체의 내용이 파악할 수는 글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내 의견을 이야기하면, 가독성이 좋은 글이 옳은 번역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권위에 대한 도전도 긍정적이다. 반면 이런 분들조차도 역자 노트에 관해서는 (오류의 지적이 아니라 공격이라는) 부정적 판단을 하는 것 같다. 이왕? 많이 팔린 책이니 알라딘 마이리뷰나 풍성하게 올라왔으면 좋겠다. 이 책을 구입할지 안 할지 모르겠지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이즈 마케팅에 휘둘린 것인가.)

 

(새움 <이방인>의 역자 노트와 알라딘에 jaibal 님이 올린 새움 <이방인>의 역자노트에 반론도 정리되어 두 글을 묶어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한다. 결국에는 독자가 판단하게 되지 않을까.)

 

‘싸이렌-뱃고동’, ‘요청하다-요구하다’에 관해 (내용을, 특히 문맥, 상황을 이해하여 어느 단어가 더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겠지만,) 논란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정당방위’ 논쟁은 번역 논쟁이라기보다 책 자체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논란이 된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된 ‘이방인’을 읽고 뭐라고 이해했는지 보면 금방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은 한국어와 무관하니 말이다.)

(201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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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2014-04-2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5. 다시 한 번 놀랍다. 그러한 해석의 측면에서 이 소설의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태양 때문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이 소설 전체를 흔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여전히 남은 것 같다. 한 네티즌은 만약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태양 때문이 아니라 정당방위였다면, 뫼르소는 이방인이 아니라 일반인이 된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참 센스 있는 지적 같네요. 그러나 이 소설이 이방인인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닙니다. 제대로 번역된 소설을 읽어 보면 이해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뫼르소는 더욱 이방인스러워져 있기도 합니다. 그와 맞물린 ‘부조리’에 대해서는 앞서 인터뷰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20년 오역의 폐해가 그만큼 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6. 의아한 건, 이 세계적인 작품의 근간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사이 한국에서는 그렇다 치고, 프랑스에서 한국의 유학생과 교수들이 그곳 사람들과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다 보면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사람을 쏘았다는 것은 피해갈 수 없는 주제였을 텐데, 어떻게 아무도 그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좋은 질문입니다. 거기에 이 소설 오역이 20년 이상 지켜져 온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뫼르소가 총을 쏜 것은 ‘태양’ 때문이었다는 말도 다른 의미로 보면 완전히 말이 안되는 게 아니니. 프랑스인과 그 부분에 대해 토론을 벌이더라도 전혀 갈등할 게 없었던 것입니다.


17. 무슨 소린가?


- 앞선 인터뷰에서 2시의 태양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정신없이 달려 2시 버스 속에서 맞는 태양, 엄마의 장례 행렬을 따라갈 때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었던) 머리 위에 떠 있던 2시의 태양, 그리고 마침내 뫼르소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만드는 해변가의 2시의 태양은 모두 같은 햇볕인 것입니다. 그 같은 태양의 수식을 연결시키면 바로 뫼르소가 총을 쏠 수밖에 없게 되는 ‘태양’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없는 가운데’,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는’,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 총을 쏜 이유는 분명이 문학적으로 보면 ‘태양’ 때문인 것입니다. 자,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첫 발을 쏘았다는 사실에 대해, 또한 그것이 문학적 레토릭을 가진다는 점에서 프랑스인들과 우리는 전혀 부딪칠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갈리는 것은 이후부터입니다. 뫼르소가 태양의 영향을 받아 총을 쏜 것은 맞지만, 우리는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 현실 속의 ‘정당방위’라는 의미가 거세된 것이고, 프랑스인들은 그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건 논쟁의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을 겁니다. 저들은 그런 기본적인 걸 우리가 오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요. 다시 말해, ‘태양 때문에’ 뫼르소가 총을 쏘았다고 말하는 우리의 주장을 그들이 아니라고 지적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정서 인터뷰중에서 http://saeumbook.tistory.com/427


마립간 2014-04-22 07:34   좋아요 0 | URL
뫼르소님, 댓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위 이정서님 인터뷰 글이 그렇게 설득적이지 않네요. 우선 이정서님이 스스로 자신의 번역에 확신을 갖고 계신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이 맞는 느낌은 주지 못합니다.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자신의 의견으로 삼는 순환논리의 모순이 보입니다.

저는 이런 글을 설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로 ; 나(이정서)는 소설 '이방인'을 번역하면서 기존 번역에 오류가 있었고 그로 인하여 한국 독자들이 '이방인'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역을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된 이방인을 읽은 10명의 프랑스인에게 문의를 하니, 놀랍게도 이방인을 사건을 정당방위로 이해하고 있었다. - 이런 글 말입니다.

그들이 아니라고 지적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 이제 한국(사실 알리딘 마을이라는 표현 더 적합할 것 같은데)에서 번역 논쟁이 있으니, 지적할 이유가 생긴 것 아닌가요.

마립간 2014-04-23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in.co.kr/761535117/6986311
가독성이냐 충실성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