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사고가 내게 새로 알려 준 것 ; 응급 상황에서의 행동

 

나는 겁이 많다. 호기심이 많은 애니어그램 5형의 심리 기제에는 미지未知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고 한다. 겁이 많은 성격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을 대한 준비를 하게 만든다.

 

요즘은 일반화 되었고 영화 상영 전에 대피 방법을 알려주지만, 예전에 나는 극장을 가면 불이 났을 때 어떻게 대피해야 하나 둘러보고 했다. 실제로 도움이 안 되겠지만 <노빈손의 무인도 완전정복>, <SAS 서바이벌 백과사전, 야생편>같은 책을 읽기도 한다. 지하철을 탈 때도 문의 수동 개폐장치를 유심히 본적이 있다. (대구 지하철 사건 현장에 내가 있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가스에 중독되어 다음 행동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별 소용이 없겠지만, 아이에게도 주의를 준다. 백화점 같은 곳에서 길을 잃은 다면, 제자리에 기다릴 것. 아니면 안내데스크 같은 곳을 찾아 성인에게 도움을 구할 것. 안내데스크와 같은 곳을 발견 못하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서 부모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니, 핸드폰으로 연락할 것. 만약 길거리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당하게 되면 경찰서를 찾아가거나 경찰관의 도움을 받을 것. 집에서 화재와 같은 곤란한 경우 유선 전화로 연락할 것. 베란다로 가서 도움을 요청할 것. 베란다에 아래층으로 통하는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는 대피 공간으로 따로 마련되어 있고, 사다리가 비치되어 있기도 하다.) 등.

 역시 별 소용이 없겠지만, 이와 같은 개별 상황이 제시된 경우를 포함하여 모든 경우에 침착하게 어른의 통제에 따를 것. 재난 상황에서 침착하고 질서 있는 행동은 보다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고, 보다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상황에 속한 사람이 살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고로 마지막 ‘침착하게 어른의 통제에 따를 것’은 잘못된 교육을 판명이 났다. 실제 신문 기사에 학생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통제에 따라 움직이지 말 것을 당부하였고 학생은 사망하였다. 세월호에 이어 발생한 서울 지하철 사고에서도 승객이 알아서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고 수습 지휘부의 통제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다. 각자 알아서 움직이는 것에 일정 효용성이 증명된 것이다. 이제 아이에게 뭐라고 이야기해 줘야 되나. 통제를 잘 따르라고, 아니면 통제와 반대로 움직이라고. 재난 훈련을 한다고 하고 참석률이 적다고 비판하기도. 지휘부의 통제를 따르지도 않을 것인데, 무슨 훈련이 필요있단 말인가.

 

세월호 사고는 구조인원 0명이라는 진기록도 있지만, (대중 매체 기사에 근거하면) 혼자만 살려고 했던 승무원은 다 살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은 모두 죽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자녀들에게 뭐라고 훈계할지. ‘나만 먼저 살면 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알아서 재난 상황을 극복하라’고 아이에게 지침을 줘야 되나, 아니면 ‘의사자義死者가되라’고 이야기해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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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5-1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흑학을 추천합니다. 악인이 성공한다는 철학인데요. 읽을 만합니다.

마립간 2014-05-16 17: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검색에 신동준 저 위즈덤 하우스의 책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이 책을 바로 구매 신청했습니다. '후흑'이라는 책이 오랜동안 보관함에 있었는데, 읽기에 어떻할지 몰라 구입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구입하게 되네요.

책을 읽고 나서 판단해야겠지만, 악인도 성공할 수 있지만, 악인만 성공하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귀곡자의 경우 방법론적 접근을 이야기하던데.

곰곰생각하는발 2014-05-17 00:56   좋아요 0 | URL
음... 아, 이거 .... 급 당황하게 됩니다. 제가 말한 건 이종오의 후흑'입니다.
하지만 신동준도 후흑을 풀어서 설명했다고 하니 개론서로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마립간 2014-05-17 07:5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후흑'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후흑학'으로 이야기하셔셔.

제가 예전에 봤던 '후흑'은 검은색 표지로 기억하는데, (아마 착각한 듯) 이종오의 후흑이 붉은 색 표지라서 같은 책인지 아닌지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검색으로 나온 첫 책을 고른 것인데, 읽고 마음에 들면 이종오의 책도 구입하지요. 이종오 후흑의 번역자 신동준으로 번역 후에 개론서를 출간하신 것이네요.
 

 

* 세월호 사고가 내게 다시 알려 준 것 ; 이상과 현실

 

예전부터 느꼈던 것인데, 이번에 실감하고 있다. (뭘까? 부패. - 이것도 분명히 답이 된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국가나 정부를 보는 시각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배웠다. 나는 발달장애가 있는지 어렸을 때 배웠던 내용이 생각에 각인되어 잘 바뀌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일부가 평등하고, 일부는 불평등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평등한 일부가 예외로 무시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내가 기대하는 세상은 만인,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법 아래에 있다. (이것이 이상理想이다.) 사실 법 아래에 모든 사람이 있다고 해도 법 자체가 공정한 것, 정의로운 것인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것은 법 아래 있는 사람과 법 위에 있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리고 법 위에 있는 사람이 법을 통해 법 아래 있은 사람을 통제하면서 군림하려 한다. (이것이 현실現實일 것이다.)

 

선출직 공무원들은 선거 때, 자신이 공복公僕임을 내세우면서 선거운동을 한다. 그러나 선출직이든, 비선출직이든 공무원 일부는 법 위에 존재하고 일부는 법 위에 존재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법 아래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법을 집행한다.

 

법은 고대 시대에도 있었고, 중세 시대에도 있었다. 이 법들이 백성들을 위한 법이었나, 아니면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나. 이 당시에 백성은 군주나 귀족과 동등하지 않았다. 군주나 귀족에 입장에서 보면 백성은 소모품에 가깝다. 이 당시에 배가 뒤집혀졌을 때, 사람을 구해야 할까, 배를 구해야 할까? 배를 구해야 한다. 군주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백성보다 배가 더 희소성이 있었다. 귀족이 사건 현장에 온다면, 사람을 구해야 할까, 귀족에 대한 예우에 신경을 써야 할까? 귀족에 대한 예우에 신경을 써야 한다. 백성의 목숨은 귀족의 예우에 미치지 못한다.

이 당시에 국가와 정부, 백성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백성을 지배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중국의 군주와 귀족은 백성과 거리를 두기 위해, 백성을 폐 아래서陛下, 전 아래서殿下, 각 아래서閣下만 머물게 했다. 당연히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기 위해 다가가 안아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실언을 포함한 실수는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 예외로 인정한다. 흔하게 일어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고 현실이다.

 

나의 이러한 견해는 나에게 나름대로 많은 현상을 설명해 준다. 구조 인명이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은 해난사고, 미개한 국민 발언, 구조보다 의전에 신경 쓰는 공무원, (이 일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의혹이나 사건 조작, 재벌 총수들의 범법에 대한 구형과 사면, 무상급식 논란 등.

 

그러면 결론이 이렇게 난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수사적으로 배웠던 것을 현실로 잘못 파악했고, 그 수사적으로 묘사했던 근대 이후를 살고 있다는 착각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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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4-05-15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읽으니 빌 게이츠가 인생은 불공평하다..그것에 익숙해지란 했던 말이 떠 오르네요~ 사실 그는 인생 불공평하니 그것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한건데~

마립간 2014-05-15 12:19   좋아요 0 | URL
덕분에 빌 게이츠 명언을 찾아 보았는데, 저는 'TV는 현실이 아니다'라는 글에 주목을 하게 되네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현실이 아닐 정도는 아니더라도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학교는 승자나 패자가 뚜렷이 가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 현실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라. - 이 문장도 '사회뿐만 아니라 학교의 승패도 명확해지며 그 결과는 잔인하다'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마녀고양이 2014-05-15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것들에 대해서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저는 좀 더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의 노력으로 현실이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이상화하고 회피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청소년과 부모들, 성인들을 만나면서 많이 느끼는 부분이고, 참으로 깨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건 타당화보다 더 어렵더군요.

마립간 2014-05-15 15:11   좋아요 0 | URL
저는 명시적 규정이 있음에도 관례가 작동하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에서 현실성 있는 규정에 대해 주장한 바도 있는데, ... 그것이 우리 나라 문화에서는 설득이 잘 안 되더라구요.

의료계도 마찬가집니다. 현실적인 제도는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각자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제안조차 못합니다.

저는 이 사회에 대해 무기력에 빠져, 회피하려는 것 같군요. 현실을 받아드리는 훈련을 잘 받지 못 했고, 가끔 내가 일제 식민지하에 태어났다면,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을까 고민했겠죠. 그때도 회피했겠죠.

마녀고양이 2014-05-15 21:40   좋아요 0 | URL
적어도 인식하고 계시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립간님께서 회피만 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 讀書日記 140514

 

<교수대 위의 까치> 서평 별점 ; ★★★☆

도상학에 관한 책은 <천.천.히 그림 읽기>에서 처음 접했다. 내 스타일에 맞는 책이다. 이때 내 스타일이란 겉으로 잘 들어나지 않는 것을 지식을 통해 이면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 책 역시 도상학 책으로, 읽는 내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고 읽었다. (하지만 진중권 선생님의 독창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내 경우 도상학 책을 흔히 접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은 출판과 관련한 기사를 읽다가 눈에 띄어 읽었다. 좋은 책이라고 해서 잘 출판되는 것은 아니다. 잘 팔릴 책이 잘 출판된다. 미국의 경우 어마어마하게 팔린 <괴짜 경제학>도 처음에 출판사를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한다. 편집자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책 내용은 좋은데, 책이 잘 팔릴까요?”

 

그림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철학적 내용이 언급된다. 철학적 조명을 받은 그림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것(예를 들면 과학 ; 사실 수학, 사회과학, 정치 거의 모든 분야)에 철학을 조명했을 때의 결과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보다 총괄적인 전체적인 조명을 하면서 짜임새 있는 글은 <미학 오디세이>였고, 이 책은 <미학 오디세이>의 전체 요리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미학오디세이 완간은 2004년이고 이 책은 2009년 출판이네. 개정판 출간인 것 같다.)

 

* 밑줄 긋기

p15 아주 거칠게 분류하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크게 네 가지 수준이 있는 듯하다.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정서적emotional 감동을 받거나, 지각적perceptional 쾌감을 얻거나, 지성적intellectual 자극을 받거나, 그리 흔하지 않지만 가끔 영성의spiritual 울림을 얻기도 한다.

p133 부재하는 아동기

p144 재현의 재현

p148 바로크 시대는 세계가 헛된 가상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그런 세계 감정의 예술적 표현이 바로 ‘바니타스vanitas’ 장르이다./원본은 사라지고 복제가 자립성을 띠는 것은 17세기 바로크 세계 감정의 표상이다.

p152 자기상 지각/첫째는 자기 몸에서 빠져나와 3차원 공간 속에서 자기 몸을 보는 체험 OBE out-of-body experience, 둘째는 자기 몸 안에 있으면서 자기 몸의 바깥에서 자신의 분신을 보는 체험 AH autoscopic hallucination, 그리고 셋째는 눈앞에 자기의 분신을 보나, 그것을 보는 자신이 제 몸 안에 있는지 또는 밖에 있는 분간하지 못하는 체험 HAS Heautoscopic 이다.

p170 그때 묘사된 정물은 더 이상 ‘그림’이 아나라, ‘그림 속의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관람자의 지각 또한 ‘대상적’ 수준에서 ‘메타적’ 수준으로 올라간다.

p174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전근대적premodem 회화이며, 현대적인 회화라면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반성적reflective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회화가 현대성을 가지려면, 3차원 공간의 환영을 포기하고 평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이 2차원 평면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p195 파노프스키는 예술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p196 알레고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관념을 눈에 보이는 가식적 형상으로 표현한다./반면 근대의 엠블렘은 거꾸로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명맥한 것을 불명료하게 만들어놓는다. 어떤 의미에서 엠블렘은 수수께끼를 닮았다.

p199 미술사학자 오토 페히트 Otto Ernst Paecht에 따르면, 도상학자들의 고질병은 모든 그림의 바탕에는 원본이 되는 문학적 텍스트가 있다고 가정하는데 있다. 그들은 “조형예술은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창안할 수 없고, 그저 다른 정신적 영역에서 이미 창안된 것을 도해할 뿐이라고 선험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p211 ‘도대체 제재가 있기는 한 걸까?’

p217 이는 원래 작품에 제제가 존재했는데 조르조네가 그것을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도록 애매하게 만들어놨다는 뜻이다. 이런 것을 ‘반제제 anti-subject’라고 부르기로 하자. 반면 월터 페이터는 조르조네 화파의 작품에는 종종 ‘분절된 이야기’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조르조네가 처음부터 작품의 제제를 아예 설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른 ‘비제제 not-subject’라고 부르자.

p263 ‘검은 회화’의 구상이 속물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할 때, 깨지는 것은 작품을 감싸는 신비한 분위기다. ... 그런 종류의 아우라는 작품 차체보다는 거기에 투영된 전기와 관련이 있다./작가의 전기가 내뿜는 아우리는 실은 작품의 가치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p263 신비평의 이론에서 말하듯이, 일단 작가의 품을 떠나면 작품은 자립적인 삶을 사는 법. 작품은 작품 자체로 이해가 되어야지, 작품 앞에 작가의 유령이 어른거리면 외려 작품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p263 고야가 위대한 것은 작품에 자신의 전기를 표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 앞서 현대의 세계 감정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을 꼭 고야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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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日記 140512

 

<온도계의 철학> 서평 별점 ; ★★★★☆

 제목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온도! 온도에 관해 두 가지 궁금증을 갖고 있다. ‘온도에 관한 생각’에 이야기한 바가 있는 1) 온도의 상한선이 있느냐 하는 것과 2) 고전 물리학에서 기본 물리량에 왜 온도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 온도에 관한 생각 http://blog.aladin.co.kr/maripkahn/6422171

 

이 책이 그 답을 줄 수 있을까 없을까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대신 나를 대변, 변호해 줄 수 있는 많은 문구를 발견했다. 나는 과학을 좋아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에게 과학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부정적인 감정을 실었건 아니건 간에) 그가 지적하는 바를 내가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종교적이라는 것을 수긍하는 순간 내가 지적한 과학적 의미도 가치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종교적’보다는 더 합당한 단어를 찾고 있었다.

가장 근사한 용어는 철학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공학-수학-철학의 수순으로 학문에 탐닉했던 것처럼, 괴델이 수학에서 논리학으로 이행했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과 괴델은 과학자인가?)

 

p448 나는 과학의 모든 역사 서술은 철학적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러커토시Lakatos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이제 새로운 용어를 얻었다. ‘과사철科史哲 ; 과학사와 과학철학’

 

내가 철학에 기웃거린 이유는 과학이 내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한히 확장된) 보편성으로 볼 때, 그 토대에 관한 궁금증에 대해 더욱더 그렇다.

 

p456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과학 지식을 생산하고자 모색할 수 있으며, 이는 과학 자체가 그런 역할에 실패하는 것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상보적 기능이라고 부른다.

 

나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노자주의자이며 현실에는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로 설명된다.

 

p457 이런 다양한 감정을 모두 다 꿰어 엮을 수 있는 공통의 실이 존재할까?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p98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무언가의 믿음이 먼저 있지 않다면 어떠한 인식 활동도, 심지어 의심 행도 시작할 수 없다. “믿음‘이 여기에서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말일 수 있지만, 우리가 가장 익숙하다고 여긴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함으로써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충분히 안전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노자주의,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로써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 역시 완전히 소멸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디오게네스-양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한다.

 

p394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며 나도 완전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이 책에 관해 독후감이 많지 않음에 놀랐다. (2014년 5월 12일 현재 알리딘에 마이리뷰는 1편도 없다. 100자평과 마이페이퍼만.) 나 역시 쉽게 읽지 못했다. (어떤이는 번역을 문제 삼기도 했다.) 낯익지 않은 과학자들의 이름과 장하석 선생님이 새로 만든 철학적 용어들. (누군가 유려한 글 솜씨로 멋있는 독후감 한편 정도는 올려주기를 바란다. 이 책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 밑줄 긋기

p52 과가열, 그리고 진정한 비등이라는 신기루

p61 그리고 이런 부가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과가열이 어디까지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p92 그런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안된 고정점을 자체에 직접 기반을 두지 않는 어떤 표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표준이라는 것이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표준은 정당화되고 그 타당성은 검증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하나의 표준이 다른 표준에 의해 타당성을 검증 받고 그것은 또 다른 표준에 의해 타당성을 검증받는, 그런 과정이 계속되는 무한회귀에 붙잡힌 것인가?

p96 여기에서 우리는 경험과학의 맥락에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토대론적 정당화라는 낯익은 마지막 지점에 다다를 것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토대가 잘 다져진 믿음의 토대에는 토대가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 토대없음은 통제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p97 나는 표준의 정당화가 존중의 원리principle of respect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우리가 감각을 선행 표준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표준보다 더 견고한 정당화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이 다른 표준들보다 선행하기 때문이다.

p172 나는 엄격한 경험주의만으로는 과학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논증할 생각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p173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이 말한 “관찰가능성”은 외부 도움 없이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한 원칙상의 지각가능성inprinciple perceivability을 의미한다./맥스웰Grover Maxwell은 관찰 가능한 것과 관찰 불가능성 것이 사이에 있는 선은 과학의 진보를 거치면서 이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p175 내가 제안하는 관찰가능성의 새로운 개념은 “관찰가능성은 성취물이다.”라는 문구로 요약할 수 있다.

p183 단일값의 원리는 논리로도 경험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내가 이름 붙인 존재론적 원리의 으뜸 사례에 해당한다.

p184 존재론적 원리의 범주 ; 아마도 가장 가까운 것은 칸트의 선험적 종합synthetic a prion일 것이다. 존재론적 원리가 늘 타당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침해하는 것이면 무엇인건 실재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존재론적 원리와 칸트의 선험적 종합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하나 있는데, 나는 우리가 견지하는 존재론적 원리의 올바름에 관하여 절대적이고 보편적인며 영원한 확실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우리의 존재론적 원리는 틀리 수도 있다./p185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지식 체계의 다른 부분을 판단할 때 주요한 판단 잣대로서 관찰에 의지하는 실천practice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의 관찰을 향상하고자 한다.

p186 검증할 수 없는 존재론적 원리를 따르고 싶은 욕구와 검증할 수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경험적 가설에 의지하는 아주 사이의 차이는 주목해야 한다. 전자는 엄격한 경험주의의 근본적 한계점을 보여준다. 후자는 특정한 환경에서 실용적 편의를 위한 경우를 빼고는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존재론적 원리를 고수한다면 분명한 목표, 즉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와 이해understanding라는 목표가 충족될 수 있다.

p187 나는 그것을 “중첩결정 시도attempted overdetermination” 또는 그냥 “중첩결정”이라고 부를 텐데, 그것은 가설 검증의 방법으로서, 어떤 전제들의 집합에 바탕을 두고서 하나의 양을 여러 차례에 걸쳐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p222 얼어붙은 수은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이고 손쉬운 교훈은 우리에게 낯익은 현상의 영역 그 너머로 나아갈 때에는 예기치 못한 것들이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난다는 점이다.

p234 칼 헴펠Carl Hempel이 말했던 “자기 증거적self evidencing”

p281 브리지먼 “만일 우리의 범위를 충분히 확장한다면, 우리는 자연이 내재적으로, 그리고 원리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법칙에 순응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p282 어떤 항성이 105광년 거리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도 그렇고 개념으로도 어떤 목표 지점이 100미터 거리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kind이다./원칙적으로 말하면, 길이를 측정하는 조작마다 고유하게 상세한 조건들이 지목되어야 한다.

p283 “우리의 언어에는 붙박이로 내장된 탈락 기준built-in cutoff이 없다.”

p284 수학은 물리적 범위가 증가하면 기본 개념이 흐릿해져 결국에는 물리적 의미를 완전히 잃고, 그렇게 되면 조작 측면에서 매우 다른 개념들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그래서 브리지먼은 우리의 개념들이 애초에 정의된 그 영역을 넘어서 자동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p285 조작주의는 확장의 철학이다./p292 내가 측량 확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작적 확장의 한 가지 유형일 뿐이고, 조작적 확장 그 자체는 또는 의미론적 확장의 한 측면일 뿐이다.

p293 개념 확장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 틀을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철학적 의미 이론은 “사용으로서의 의미”라는 개념이다.

p296 합치confirmity ; 만일 그 개념이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새로운 영역에서도 계속 지니게 된다면 새로운 표준은 그런 의미에 합치해야만 한다. 겹침overlap ; 만일 본래의 표준과 새로운 표준의 적용 영역이 겹친다면, 둘은 서로 일치하는 측정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p394 일단 조작화가 이루어지면, 추상적 개념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값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그런 값이 문제의 조직화가 내놓는 결과물인 것이지 조작화 자체의 정확성을 판단할 때 비교 자료로 쓸 수 있는 독립적인 표준은 아니라는 것이다./도대체 타당성의 문제는 조작화의 과정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며 나도 완전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p447 이런 다원론은 분별없는 상대론과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p457 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인 특정한 토대와 규약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며 여러 비판에서 보호될 때에만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과학 혁심조차도 그처럼 전통에 결속된 연구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생겨날 수 있음을 강조햇는데, 나는 쿤이 옳았다고 생각한다./p458 그러나 나는 또한 과학에서 그런 닫힌 마음을 장려하는 것은 과학에, 그리고 과학을 이상적 지식 형태이며 심지어 사회문제를 관리하는 길잡이로 여기는 우리 문명에 “위험스러운 일”이라는 견해를 펼친 칼 포퍼도 옳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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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5-1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이 책 이후가 궁금했다. 정의에 관해서 이 책에서 잡아내지 못한, 또는 이 책을 뛰어넘는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이 책은 창의적 글이 아니고 정리성 글이다.)

역시 과학 철학에 관한 '온도계의 철학' 이후에 무엇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마녀고양이 2014-05-13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오랜만이세요.
여전히 마립간님의 글은 지적인 순수로 가득하네요. 그래서 저는 이 글들이 편안합니다.

좋은 봄날이네요. ^^

마립간 2014-05-13 11:4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잘 지내시죠.

바쁜 일 정리되는 대로, 알라딘 서재로 복귀하시길 기대합니다.

2014-05-14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4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 讀書日記 140508

 

<미래를 바꾼 아홉 가지 알고리즘> 서평 별점 ; ★★★★☆

  책이 많이 감동적이지 않지만, 내용이 읽고 싶었던 것이다. 읽자마자 준 별점이 이 글을 쓰면서 내용에 비해 많다고 생각되지만 (4개 적절?) 그래도 그냥 간다.

 

어렸을 때, 자동차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자동차가 굴러가게 되는 것일까? 내가 그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면 그 원리를 이용해서 놀라운 발명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라면서 자동차에 원리를 시나브로 알게 되었고, 중고교 학창시절 자동차에 대한 기본 과학기술 지식을 배웠다. 하지만 내가 놀라운 발명을 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어린 나의 마음을 돌아보면, ‘자동차가 어떻게 굴러가는 것일까’를 궁금해 한 것이 아니고, ‘저 좁은 공간(엔진룸)에 있는 기계로서 실용적이 자동차가 될 수 있느냐’였다. (자동차 역사를 보면 초기에는 자동차의 역할, 운송을 담당하기보다 부자들의 장난감에 더 가까웠다.)

 

컴퓨터를 내가 접했을 때는 내가 조금 더 성장했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해한다고 내가 놀라운 발명을 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지는 않았다. 이 당시에는 컴퓨터에 지식을 누구라도 가지고 있다면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 그랬다. 하지만 나는 컴퓨터 지식과 무관한 대학진학과 직업으로 어렸을 때의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남았다.

 

그 호기심은 바로 ‘컴퓨터가 어떻게 실용적일 수 있을까’였다. 원리는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고 착각했을지 모르겠다. (원리는 이진법에 의한 산술의 응용, 논리 회로의 적용인 것 아닌가.)

 

창조론을 주장하는 한 가지 가설에 ; 이 세상은 인간의 살아가기 위한 여러 가지 조건이 정밀하게 조율되어 있고 그 조율은 창조주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컴퓨터에서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자동차는 기계적으로 이해되어 엔진룸을 자주 보면서 이해가 되었지만, 컴퓨터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 책의 제목 <미래를 바꾼 아홉 가지 알고리즘>보다 더 내용에 합당한 제목은 '컴퓨터 발달과 관련된 아홉 가지 과학 기술이론'이다. 이 아홉 가지 기술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부족했어도 지금처럼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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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5-13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문학보다 컴퓨터에 대해서 먼저 배웠습니다. 인공지능 수업을 매우 흥미있게 들었는데, 나중에 뇌 과학과 인지 심리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정말 신기해했던게 생각납니다. 그래서 때론, 저는 인공지능이 두렵기도 하고, 영화나 SF 소설이 허무맹랑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합니다. 반도체는 정말 신기합니다. ^^

마립간 2014-05-13 11:50   좋아요 0 | URL
저는 이과계라고 할 수 있는 수학/물리학부터 독서를 시작했지만, 독서가 사고의 확장 및 통찰의 발견이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문과계/이과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독서를 하게 되더군요. (아직 소설은 저의 약점이지만요.)

제가 보기에 인공지능에 관해서는 아직 핵심적은 지식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0% 정도는 부족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미래에는 성취되기 힘들 것으로 예상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