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512
<온도계의 철학> 서평 별점 ; ★★★★☆
제목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온도! 온도에 관해 두 가지 궁금증을 갖고 있다. ‘온도에 관한 생각’에 이야기한 바가 있는 1) 온도의 상한선이 있느냐 하는 것과 2) 고전 물리학에서 기본 물리량에 왜 온도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 온도에 관한 생각 http://blog.aladin.co.kr/maripkahn/6422171
이 책이 그 답을 줄 수 있을까 없을까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대신 나를 대변, 변호해 줄 수 있는 많은 문구를 발견했다. 나는 과학을 좋아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에게 과학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부정적인 감정을 실었건 아니건 간에) 그가 지적하는 바를 내가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종교적이라는 것을 수긍하는 순간 내가 지적한 과학적 의미도 가치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종교적’보다는 더 합당한 단어를 찾고 있었다.
가장 근사한 용어는 철학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공학-수학-철학의 수순으로 학문에 탐닉했던 것처럼, 괴델이 수학에서 논리학으로 이행했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과 괴델은 과학자인가?)
p448 나는 과학의 모든 역사 서술은 철학적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러커토시Lakatos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이제 새로운 용어를 얻었다. ‘과사철科史哲 ; 과학사와 과학철학’
내가 철학에 기웃거린 이유는 과학이 내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한히 확장된) 보편성으로 볼 때, 그 토대에 관한 궁금증에 대해 더욱더 그렇다.
p456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과학 지식을 생산하고자 모색할 수 있으며, 이는 과학 자체가 그런 역할에 실패하는 것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상보적 기능이라고 부른다.
나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노자주의자이며 현실에는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로 설명된다.
p457 이런 다양한 감정을 모두 다 꿰어 엮을 수 있는 공통의 실이 존재할까?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p98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무언가의 믿음이 먼저 있지 않다면 어떠한 인식 활동도, 심지어 의심 행도 시작할 수 없다. “믿음‘이 여기에서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말일 수 있지만, 우리가 가장 익숙하다고 여긴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함으로써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충분히 안전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노자주의,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로써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 역시 완전히 소멸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디오게네스-양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한다.
p394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며 나도 완전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이 책에 관해 독후감이 많지 않음에 놀랐다. (2014년 5월 12일 현재 알리딘에 마이리뷰는 1편도 없다. 100자평과 마이페이퍼만.) 나 역시 쉽게 읽지 못했다. (어떤이는 번역을 문제 삼기도 했다.) 낯익지 않은 과학자들의 이름과 장하석 선생님이 새로 만든 철학적 용어들. (누군가 유려한 글 솜씨로 멋있는 독후감 한편 정도는 올려주기를 바란다. 이 책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 밑줄 긋기
p52 과가열, 그리고 진정한 비등이라는 신기루
p61 그리고 이런 부가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과가열이 어디까지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p92 그런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안된 고정점을 자체에 직접 기반을 두지 않는 어떤 표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표준이라는 것이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표준은 정당화되고 그 타당성은 검증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하나의 표준이 다른 표준에 의해 타당성을 검증 받고 그것은 또 다른 표준에 의해 타당성을 검증받는, 그런 과정이 계속되는 무한회귀에 붙잡힌 것인가?
p96 여기에서 우리는 경험과학의 맥락에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토대론적 정당화라는 낯익은 마지막 지점에 다다를 것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토대가 잘 다져진 믿음의 토대에는 토대가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 토대없음은 통제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p97 나는 표준의 정당화가 존중의 원리principle of respect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우리가 감각을 선행 표준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표준보다 더 견고한 정당화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이 다른 표준들보다 선행하기 때문이다.
p172 나는 엄격한 경험주의만으로는 과학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논증할 생각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p173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이 말한 “관찰가능성”은 외부 도움 없이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한 원칙상의 지각가능성inprinciple perceivability을 의미한다./맥스웰Grover Maxwell은 관찰 가능한 것과 관찰 불가능성 것이 사이에 있는 선은 과학의 진보를 거치면서 이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p175 내가 제안하는 관찰가능성의 새로운 개념은 “관찰가능성은 성취물이다.”라는 문구로 요약할 수 있다.
p183 단일값의 원리는 논리로도 경험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내가 이름 붙인 존재론적 원리의 으뜸 사례에 해당한다.
p184 존재론적 원리의 범주 ; 아마도 가장 가까운 것은 칸트의 선험적 종합synthetic a prion일 것이다. 존재론적 원리가 늘 타당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침해하는 것이면 무엇인건 실재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존재론적 원리와 칸트의 선험적 종합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하나 있는데, 나는 우리가 견지하는 존재론적 원리의 올바름에 관하여 절대적이고 보편적인며 영원한 확실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우리의 존재론적 원리는 틀리 수도 있다./p185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지식 체계의 다른 부분을 판단할 때 주요한 판단 잣대로서 관찰에 의지하는 실천practice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의 관찰을 향상하고자 한다.
p186 검증할 수 없는 존재론적 원리를 따르고 싶은 욕구와 검증할 수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경험적 가설에 의지하는 아주 사이의 차이는 주목해야 한다. 전자는 엄격한 경험주의의 근본적 한계점을 보여준다. 후자는 특정한 환경에서 실용적 편의를 위한 경우를 빼고는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존재론적 원리를 고수한다면 분명한 목표, 즉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와 이해understanding라는 목표가 충족될 수 있다.
p187 나는 그것을 “중첩결정 시도attempted overdetermination” 또는 그냥 “중첩결정”이라고 부를 텐데, 그것은 가설 검증의 방법으로서, 어떤 전제들의 집합에 바탕을 두고서 하나의 양을 여러 차례에 걸쳐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p222 얼어붙은 수은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이고 손쉬운 교훈은 우리에게 낯익은 현상의 영역 그 너머로 나아갈 때에는 예기치 못한 것들이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난다는 점이다.
p234 칼 헴펠Carl Hempel이 말했던 “자기 증거적self evidencing”
p281 브리지먼 “만일 우리의 범위를 충분히 확장한다면, 우리는 자연이 내재적으로, 그리고 원리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법칙에 순응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p282 어떤 항성이 105광년 거리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도 그렇고 개념으로도 어떤 목표 지점이 100미터 거리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kind이다./원칙적으로 말하면, 길이를 측정하는 조작마다 고유하게 상세한 조건들이 지목되어야 한다.
p283 “우리의 언어에는 붙박이로 내장된 탈락 기준built-in cutoff이 없다.”
p284 수학은 물리적 범위가 증가하면 기본 개념이 흐릿해져 결국에는 물리적 의미를 완전히 잃고, 그렇게 되면 조작 측면에서 매우 다른 개념들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그래서 브리지먼은 우리의 개념들이 애초에 정의된 그 영역을 넘어서 자동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p285 조작주의는 확장의 철학이다./p292 내가 측량 확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작적 확장의 한 가지 유형일 뿐이고, 조작적 확장 그 자체는 또는 의미론적 확장의 한 측면일 뿐이다.
p293 개념 확장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 틀을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철학적 의미 이론은 “사용으로서의 의미”라는 개념이다.
p296 합치confirmity ; 만일 그 개념이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새로운 영역에서도 계속 지니게 된다면 새로운 표준은 그런 의미에 합치해야만 한다. 겹침overlap ; 만일 본래의 표준과 새로운 표준의 적용 영역이 겹친다면, 둘은 서로 일치하는 측정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p394 일단 조작화가 이루어지면, 추상적 개념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값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그런 값이 문제의 조직화가 내놓는 결과물인 것이지 조작화 자체의 정확성을 판단할 때 비교 자료로 쓸 수 있는 독립적인 표준은 아니라는 것이다./도대체 타당성의 문제는 조작화의 과정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며 나도 완전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p447 이런 다원론은 분별없는 상대론과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p457 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인 특정한 토대와 규약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며 여러 비판에서 보호될 때에만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과학 혁심조차도 그처럼 전통에 결속된 연구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생겨날 수 있음을 강조햇는데, 나는 쿤이 옳았다고 생각한다./p458 그러나 나는 또한 과학에서 그런 닫힌 마음을 장려하는 것은 과학에, 그리고 과학을 이상적 지식 형태이며 심지어 사회문제를 관리하는 길잡이로 여기는 우리 문명에 “위험스러운 일”이라는 견해를 펼친 칼 포퍼도 옳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