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526
<강신주의 감정수업>
이 책에 관해서는 별점을 메기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어느 알라디너와의 댓글 대화에서 이미 부정적 인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알라디너는 내가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 그 판단이 맞았다. 200페이지까지 읽는 동안 지루해서 끝까지 못 읽는 줄 알았다. 300페이지를 넘어서자 어느 정도 책에 적응되었는지 독서에 속도가 붙었고 완독을 하였다. (처음에 읽을 때는 발췌독을 할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독후감은 WiredHusky 님이 쓰신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이다. http://blog.aladin.co.kr/733372146/7013147
내가 중학생 때, 완전정복이라는 참고서 뒤에, 유명한 몇 소설의 줄거리를 각각 한 페이지에 요약해 놓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설을 안 읽는 나에게) 그럭저럭 유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그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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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대해 꽤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는데, 그 본질이 궁금했다. 우선 감정의 종류가 동양에서는 칠정七情으로 이야기하는데, 유교 쪽의 희노우사비경공 喜怒憂思悲驚恐과 불교의 희노우구애오욕 喜怒憂懼愛憎欲으로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른 견해가 있다는 것은 잘 모른다는 뜻이다. 일곱은 수사적으로 고른 숫자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감정적으로 둔감하게 태어났는데, 온정주의를 비롯하여 사회의 부패가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감정 통제하는 습관을 들여왔다. 그리고 감정은 비교적 주관에 속한다. 예전에 감정에 대한 믿을 만한 과학적 방법이 없었는데, 이는 감정을 다룬 과학책이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나는 이성理性만으로 구성된 가치관에서 허점을 보았으나 감정에 관한 본질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피노자의 뇌>를 읽게 되었고, 감정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 <이방인>을 읽게 되었는데,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감정이 결핍된 인물로 판단하고 감정의 역할과 본질에 대해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동안 미뤄두었던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었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었어야 했다.
이 책에는 48가지의 감정이 소개되는데, (에티카에 근거하여) 이 감정들은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두려움, 이하로 느끼는 것, 이하로 느끼는 것, 상상, 관념으로 환원된다. 자긍심, 호의, 환희 등은 기쁨의 한 형태이다. 이와 같은 분류에 속하지 않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경탄, 야심이다. 경탄은 특수한 관념으로 설명하고 있고, 야심은 감정을 키우는 욕망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이 욕망의 하나인지, 감정을 키우는 메카니즘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이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자주 언급되는 사랑은 기쁨의 한 형태이니 본질적 감정이라 할 수 없다.
주로 해석되는 감정을 살펴보면 1)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한다. 2) 기쁨이란 자신의 힘이 증진되었다는 느낌에서 오는 감정이라면, 2) 슬픔은 이와는 반대로 처절한 무력감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다. 스피노자가 기쁨과 슬픔은 단자monad적인 감정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대표하는 감정으로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반면 연속선상에 있을 것 같은 기쁨과 슬픔이 ‘연민’에서는 불연속적임을 주장한다. 슬픔의 한 종류인 연민이 기쁨의 한 종류인 ‘사랑’으로 이행할 수 없다고 한다.
욕망만큼이나 기본적인 감정으로 생각했던 공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슬픔에 한 종류이고, ‘겁’은 ‘두려워하여 방해당하는 그럼 사람’으로 설명되어 상황적 정의로 볼 수 있다.
* 밑줄 긋기
p66 기쁨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헤어져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발생하는지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구분된다. 슬픔이 너무 크다면, 아무리 우정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랑이다. 반면 생각보다 작다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관계라 해도 그것은 우정에 불과한 것이다.
p100 밑도 끝도 없이 치명적으로 중독적인 욕망이 바로 갈애이자 탐욕인 셈이다.
p110 가난 때문인지, 아니면 피해의식 때문인지, 메리의 아버지는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나약하고 소시민적인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p130 한마디로 연민이라는 감정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간단히 정의한 것처럼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p131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강자가 되었다는 자부심,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존재감, 이것이야말로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의 정체다.
p140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과 관련된 어떤 일도 사소한 것은 없다.”라고.
p143 기쁨이란 자신의 힘이 증진되었다는 느낌에서 오는 감정이라면, 슬픔은 이와는 반대로 처절한 무력감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다.
p155 당황의 감정을 정의하면서, 스피노자는 이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그의 욕망이 경이로움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요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을 고려하는 소심함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이다.
p162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 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p176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감정이다.
p181 욕망이란 ...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p182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p183 비극은 우리의 나약함에 있다.
p183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도 있다. ... 그래서 순간의 안위를 확보하려다가 자신의 본질을 놓칠 수도 있다.
p201 헤어지려고 해도 헤어질 수 없을 때 우리의 사랑은 낮이 밤으로, 봄이 겨울로 변하는 것처럼 완전히 상반된 감정으로 돌변하게 된다. 바로 미움이라는 감정이다.
p204 그렇지만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던 감정이 떠나자마자 상황은 180도 달라진 것이다. ... 도대체 사랑은 어디로 떠나 버린 것일까?
p213 그렇지만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보다 더 큰 절망이 한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p260 영광 우리가 ...
p273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제대로 관철된다면, 친절의 행위는 사실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p284 무레의 겸손은 자신이 자랑하던 돈의 무기력함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p304 사랑의 감정은 질투라는 감정을 낳지만, 반대로 질투라는 감정이 사랑의 감정을 낳지는 못하는 법.
p324 조롱은 묘한 감정이다. 그것은 미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p401 사랑과 끌림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우연’이란 말이다.
p422 겁남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한다.
p432 확신은 의심이 제거된
p442 희망은 ... 미래나 과거의 ... 불확실한 기쁨
p443 희망은 그것이 안겨 주는 기쁨이라는 앞면과 불확실성이라는 뒷면을 가진 동전과도 같다./희망에 따른 그 미래의 설렘이 있기 불확실성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p448 희망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 설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p465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의 삶과 단절하여 마치 천 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건너뛰려는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랑의 꿀맛을 맛볼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p470 마음과 몸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이한 전통이 있다. 마음의 기쁨만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고, 몸과 마음의 기쁨 모두를 중시하는 전통도 있다.
p476 이제 정직하게 스스로 되물어보자. 만일 몸과 마음이 함께 어울려 극한의 쾌감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면, 당신은 과연 한때 자신에게 그런 쾌감을 안겨 주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무료하게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p480 기쁨과 슬픔은 상대적이다.
p483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정성에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스피노자의 말대로 슬픔은 더 완전하다는 느낌에서 덜 완전하다는 느낌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다. ; 스피노자와 강신주 이야기가 틀림
p491 치욕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시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p492 치욕은 슬픈 감정이지만, 수치심은 그런 슬픔 감정이 들지 않도록 하려는 원동력이니가. 그러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수치심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