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527

 

<강신주의 감정수업>

 이번 글은 감정에 대한 각론이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 대한 반론이기보다 스파노자의 <에티카>에 대한 반론일 수 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 인용된 스피노자의 감정의 정의에 대해 내가 이해 못하는 부분과 동감하지 못하는 부분을 비망록으로 남긴다. 아마 <에티카>를 읽게 되면 전후 맥락을 파악하면서 내가 이해 못한 부분이 이해되거나 오해가 풀릴 수도 있겠다.

 

1) 욕망 ; 인간이 생물로서 진화론적으로 생존을 위한 어떤 것이라면 기본적인 감정으로 인정할 수 있고 단자monad적 감정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2) 공포 ; 욕망이 본질적 감정이라면, 이 욕망 즉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단자monad적 감정으로 생각된다.)

 

p183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도 있다. ... 그래서 순간의 안위를 확보하려다가 자신의 본질을 놓칠 수도 있다.

p110 가난 때문인지, 아니면 피해의식 때문인지, 메리의 아버지는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나약하고 소시민적인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해석할 경우, 개인의 이기주의, 재벌이라는 경제 집단의 이기주의, 강대국의 이기주의 등을 비판할 도덕적 근거를 약화시킨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본질과 도덕과는 무관하다. 같게 생각한다면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기쁨과 슬픔에 대한 것은 앞글에서 이야기했지만, 기쁨과 슬픔이 본질적 감정이라기보다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대표한 제유법提喩法으로 생각할 수 있다.

p483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스피노자의 말대로 슬픔은 더 완전하다는 느낌에서 덜 완전하다는 느낌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다.

3) 슬픔 ; 스피노자와 강신주의 이야기가 비슷하지만 틀리다. 슬픔을 스피노자는 완전성 차제의 변화로, 강신주는 그런 느낌으로 이야기한다.

 

p284 무레의 겸손은 자신이 자랑하던 돈의 무기력함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4) 겸손 ; 겸손이 감정인지 확실하게 판단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의 법주로서 습관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생활에 유용한 습관. 겸손이 무력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겸손은 혼자 이뤄질 수 없다. 그런 습관의 기제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감각共感覺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겸손할 때 스스로 겸손함을 느끼는가?

 

p260 영광 우리가 ...

5) 영광 ; 영광이라는 감정은 겸손과 같이 사회/집단에서만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의 설명에는 우리라는 주어로 설명이 시작된다. 보수주의적 성향의 사람은 이 감정에 중독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명예’나 ‘영예’라는 이름으로 높은 도덕으로 판단했다. 보다 보편적인 (그러니까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시각에서 도덕적 평가가 궁금하다.

 

p66 기쁨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헤어져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발생하는지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구분된다. 슬픔이 너무 크다면, 아무리 우정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랑이다. 반면 생각보다 작다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관계라 해도 그것은 우정에 불과한 것이다.

p273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제대로 관철된다면, 친절의 행위는 사실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6) 우정 ; 나는 우정과 사랑의 차이를 정도 차이로 보지 않는다. 우정은 사랑에 없는 상호 존경을 바탕으로 한 의지가 존재한다. 이것의 유무가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부부사이에도 사랑보다는 우정과 같은 사랑이 더 높은 가치가 있다. 친구 같은 부부는 부녀父女나 모자母子 같은 부부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불경에는 어머니 같은, 누나 같은, 친구 같은, 며느리 같은, 종 같은, 원수 같은, 도둑 같은 아내가 있다.) 사랑에서는 친절이 필요 없지만, 우정에서는 친절이 필요하다.

 

p443 희망은 그것이 안겨 주는 기쁨이라는 앞면과 불확실성이라는 뒷면을 가진 동전과도 같다./희망에 따른 그 미래의 설렘이 있기 불확실성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p448 희망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 설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7) 희망 ; 희망의 가치가 설레는 것에 있다면, 왜 설레는 미래가 왜 중요한가?

 

p432 확신은 의심이 제거된

8) 확신 ; 확신의 정의는 ‘의심이 제거된’라는 말에서 동어반복임을 알 수 있다. 믿음/확신은 감정의 하나임이 맞지만, 야심이 욕망을 증진시키는 것같이, 기쁨, 슬픔의 변주가 아닌 독립된 감정으로 따로 분류되어야 맞다고 생각한다. 감정의 차원에서 확신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불신은 믿음/확신의 한 종류로 판단된다. ‘나는 내일 죽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 기쁨/슬픔을 느끼는가?

 

경멸, 잔인함 등에 대한 설명은 잘 모르겠다. 이해가 안 된다. 9) 잔인함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런가? 상대만 파괴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p491 치욕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시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p492 치욕은 슬픈 감정이지만, 수치심은 그런 슬픔 감정이 들지 않도록 하려는 원동력이니가. 그러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수치심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치욕과 수치심은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사람들이 이 책에서 말한 10) 수치심을 갖고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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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日記 140526

 

<강신주의 감정수업>

 이 책에 관해서는 별점을 메기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어느 알라디너와의 댓글 대화에서 이미 부정적 인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알라디너는 내가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 그 판단이 맞았다. 200페이지까지 읽는 동안 지루해서 끝까지 못 읽는 줄 알았다. 300페이지를 넘어서자 어느 정도 책에 적응되었는지 독서에 속도가 붙었고 완독을 하였다. (처음에 읽을 때는 발췌독을 할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독후감은 WiredHusky 님이 쓰신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이다. http://blog.aladin.co.kr/733372146/7013147

 

내가 중학생 때, 완전정복이라는 참고서 뒤에, 유명한 몇 소설의 줄거리를 각각 한 페이지에 요약해 놓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설을 안 읽는 나에게) 그럭저럭 유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그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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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대해 꽤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는데, 그 본질이 궁금했다. 우선 감정의 종류가 동양에서는 칠정七情으로 이야기하는데, 유교 쪽의 희노우사비경공 喜怒憂思悲驚恐과 불교의 희노우구애오욕 喜怒憂懼愛憎欲으로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른 견해가 있다는 것은 잘 모른다는 뜻이다. 일곱은 수사적으로 고른 숫자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감정적으로 둔감하게 태어났는데, 온정주의를 비롯하여 사회의 부패가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감정 통제하는 습관을 들여왔다. 그리고 감정은 비교적 주관에 속한다. 예전에 감정에 대한 믿을 만한 과학적 방법이 없었는데, 이는 감정을 다룬 과학책이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나는 이성理性만으로 구성된 가치관에서 허점을 보았으나 감정에 관한 본질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피노자의 뇌>를 읽게 되었고, 감정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 <이방인>을 읽게 되었는데,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감정이 결핍된 인물로 판단하고 감정의 역할과 본질에 대해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동안 미뤄두었던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었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었어야 했다.

 

이 책에는 48가지의 감정이 소개되는데, (에티카에 근거하여) 이 감정들은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두려움, 이하로 느끼는 것, 이하로 느끼는 것, 상상, 관념으로 환원된다. 자긍심, 호의, 환희 등은 기쁨의 한 형태이다. 이와 같은 분류에 속하지 않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경탄, 야심이다. 경탄은 특수한 관념으로 설명하고 있고, 야심은 감정을 키우는 욕망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이 욕망의 하나인지, 감정을 키우는 메카니즘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이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자주 언급되는 사랑은 기쁨의 한 형태이니 본질적 감정이라 할 수 없다.

 

주로 해석되는 감정을 살펴보면 1)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한다. 2) 기쁨이란 자신의 힘이 증진되었다는 느낌에서 오는 감정이라면, 2) 슬픔은 이와는 반대로 처절한 무력감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다. 스피노자가 기쁨과 슬픔은 단자monad적인 감정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대표하는 감정으로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반면 연속선상에 있을 것 같은 기쁨과 슬픔이 ‘연민’에서는 불연속적임을 주장한다. 슬픔의 한 종류인 연민이 기쁨의 한 종류인 ‘사랑’으로 이행할 수 없다고 한다.

 

욕망만큼이나 기본적인 감정으로 생각했던 공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슬픔에 한 종류이고, ‘겁’은 ‘두려워하여 방해당하는 그럼 사람’으로 설명되어 상황적 정의로 볼 수 있다.

 

* 밑줄 긋기

p66 기쁨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헤어져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발생하는지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구분된다. 슬픔이 너무 크다면, 아무리 우정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랑이다. 반면 생각보다 작다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관계라 해도 그것은 우정에 불과한 것이다.

p100 밑도 끝도 없이 치명적으로 중독적인 욕망이 바로 갈애이자 탐욕인 셈이다.

p110 가난 때문인지, 아니면 피해의식 때문인지, 메리의 아버지는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나약하고 소시민적인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p130 한마디로 연민이라는 감정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간단히 정의한 것처럼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p131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강자가 되었다는 자부심,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존재감, 이것이야말로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의 정체다.

p140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과 관련된 어떤 일도 사소한 것은 없다.”라고.

p143 기쁨이란 자신의 힘이 증진되었다는 느낌에서 오는 감정이라면, 슬픔은 이와는 반대로 처절한 무력감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다.

p155 당황의 감정을 정의하면서, 스피노자는 이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그의 욕망이 경이로움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요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을 고려하는 소심함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이다.

p162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 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p176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감정이다.

p181 욕망이란 ...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p182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p183 비극은 우리의 나약함에 있다.

p183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도 있다. ... 그래서 순간의 안위를 확보하려다가 자신의 본질을 놓칠 수도 있다.

p201 헤어지려고 해도 헤어질 수 없을 때 우리의 사랑은 낮이 밤으로, 봄이 겨울로 변하는 것처럼 완전히 상반된 감정으로 돌변하게 된다. 바로 미움이라는 감정이다.

p204 그렇지만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던 감정이 떠나자마자 상황은 180도 달라진 것이다. ... 도대체 사랑은 어디로 떠나 버린 것일까?

p213 그렇지만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보다 더 큰 절망이 한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p260 영광 우리가 ...
p273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제대로 관철된다면, 친절의 행위는 사실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p284 무레의 겸손은 자신이 자랑하던 돈의 무기력함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p304 사랑의 감정은 질투라는 감정을 낳지만, 반대로 질투라는 감정이 사랑의 감정을 낳지는 못하는 법.

p324 조롱은 묘한 감정이다. 그것은 미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p401 사랑과 끌림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우연’이란 말이다.

p422 겁남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한다.

p432 확신은 의심이 제거된

p442 희망은 ... 미래나 과거의 ... 불확실한 기쁨

p443 희망은 그것이 안겨 주는 기쁨이라는 앞면과 불확실성이라는 뒷면을 가진 동전과도 같다./희망에 따른 그 미래의 설렘이 있기 불확실성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p448 희망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 설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p465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의 삶과 단절하여 마치 천 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건너뛰려는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랑의 꿀맛을 맛볼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p470 마음과 몸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이한 전통이 있다. 마음의 기쁨만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고, 몸과 마음의 기쁨 모두를 중시하는 전통도 있다.

p476 이제 정직하게 스스로 되물어보자. 만일 몸과 마음이 함께 어울려 극한의 쾌감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면, 당신은 과연 한때 자신에게 그런 쾌감을 안겨 주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무료하게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p480 기쁨과 슬픔은 상대적이다.

p483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정성에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스피노자의 말대로 슬픔은 더 완전하다는 느낌에서 덜 완전하다는 느낌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다. ; 스피노자와 강신주 이야기가 틀림

p491 치욕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시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p492 치욕은 슬픈 감정이지만, 수치심은 그런 슬픔 감정이 들지 않도록 하려는 원동력이니가. 그러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수치심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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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5-26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리뷰 보고, 당황. @.@ 책 별점이 4~5개, 별 1개를 주신 분이 (2014년 5월 26일 현재) 단 두 분.

곰곰생각하는발 2014-05-26 13:34   좋아요 0 | URL
별 하나 준 사람이 단 둘이라면... 그중 한명은......
사실 전 이 책 종로 갔다가 서점 잠시 들렸다가 함 읽어볼까 하고 샀는데
아, 정말... 전 개인적으로 강신주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이해가 안 가더군요.
출판사를 위해 쓴 글이란 게 역력하잖습니까...
책 사면 나눠주는 출판사 카탈로그 같다는 느낌만 들었습니다.

마립간 2014-05-26 14:26   좋아요 0 | URL
핸드폰 단말기가 할인 가격으로 공급될 수 있는(, 그래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제가 구입할 수 있는) 이유는 높은 통화료와 높은 통화료에도 불구하고 쓸데 없이 (쓸데 없다는 것은 제 생각입니다.) 통화를 하는 사람 덕분입니다.

이 책으로 작가와 출판사가 에너지를 축적했다가 다음에 정말로 좋은 책(좋은 책도 제 기준입니다.)을 출간할 수 있으면 ....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게혜윰 2014-05-26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 작가의 글에 슬슬 피로해질 즈음 좋아하는 분이 이 책에 대한 신랄한 혹평을 듣고는 강신주를 끊어야겠다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또다른 좋아하는 분이 선물해주신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어째어째 읽어봐야겠지만요. 하지만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이 이네요...빌려서 발췌하여 읽어도 되겠죠?^^;;

마립간 2014-05-26 12: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그렇게혜윰 님.

저는 소설에 약점이 있는 사람이라서, 다른 분보다 이 도서를 낮게 평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평생동안 책을 내면서 (특히 다작을 하는 분이라면) 일정 이상의 책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도 쉽지 않죠.

(저의 제언입니다만,) 이 책을 읽으시려면, 이 책의 목차를 확인하여 해당 소설을 먼저 읽으신 후 본인의 감상을 강신주 선생님의 평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는 빌려 읽은 후 (읽는 도중이라도), 마음에 들면 구입합니다.

stella.K 2014-05-2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이 강신주 박사의 책을 읽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은 나쁘지 않게 읽을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구의 어떤 작품이라도 많이 읽으면 질리고 피곤하잖아요.
이 사람의 책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아도 매스컴 여기저기서 강연 많이 하던데 저거 다 자기 책에서 다룬 얘기하겠지
싶어 질리기 전에 여기서 이 사람의 좋은 기억만 가지고 관심을 끊어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사람이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면 변질된다 잖아요.
그래도 그 어렵다는 철학을 자기 언어로 감각있게 전달하는 사람도 흔치는 않겠다 싶어요.
일단 명쾌하잖아요.
저는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하는데 영 짬이 없네요.ㅋ


마립간 2014-05-26 13:43   좋아요 0 | URL
Stella.K 님, 잘 지내시죠.^^

책의 느낌은 개인 차가 있으니, 어떤 책이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죠. 이 책의 경우 호불호가 확실히 나뉘는 책이라서 평가가 낮은 분도 많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부분이 의외였습니다.

제가 강신주 선생님께 기대하는 것은 통찰이죠. 특히 내가 잡아내지 못한 통찰. 또 그만큼 기대가 높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소설을 읽지 않아, 그런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책에서 뭐를 잡아내기도 전에 이야기가 끝나는 꽤 분절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책의 구성이 저와 맞지 않는 것이죠.

서평집을 읽을 때, 가끔은 식사를 한 것이 아니고, 영양주사를 맞았다는 느낌을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의 경우는 마취 상태에서 영양 주사를 맞은 느낌입니다.^^

stella.K 2014-05-26 15:25   좋아요 0 | URL
마취상태에서 영양주사란 말에 빵 터졌습니다.
마립간님처럼 전혀 웃기지 않을 것 같은 분이 웃기면 진짜 웃겨요.ㅎㅎ

서평집에 대한 생각이 제각각이긴 하죠?
저도 예전엔 내가 직접 그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남이 평해 놓은 걸 읽어야 한다는 게
의미 있는 일인가 생각한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요즘엔 서평 잘 쓰는 사람이 워낙 많아져서 그런가?
이 사람은 이 책을 이렇게 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도 재미있긴 하더라구요.
<감정수업>그런 단점이 있었군요.
참고 하겠습니다.^^


페크pek0501 2014-05-2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을 찜했었는데, 혹평하는 페이퍼를 봐서 망설여졌지요. 님도요?
그런데 아마 저 같은 사람한테는 이 책 읽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이런 책을 읽는다고 해서 스스로 생각하길 포기하지도 않고
책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 같아서요.
오히려 제 생각과 비교하며 읽으면서 흥미롭게 읽을 것 같거든요.
48가지의 감정 소개라니... 굿 아이디어네, 그랬어요.
통찰이 담기지 않았다는 건 아쉬운 점이네요. 제일 중요한 건 '깊이가 있는 것'일 텐데요...
밑줄긋기 잘 읽고 갑니다.

마립간 2014-05-26 15:12   좋아요 0 | URL
저는 본질주의자?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것이라면 그것의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런 제가 옳다기 보다 그런 성향이죠. 제 성향을 다른 분에게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제 성향이 독특하다는 그런 일반적인 평가에 관해, 제 성향이 좀더 일반적인 사회였으면 하는 (이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2014-05-2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6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6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 讀書日記 140523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서평 별점 ; ★★★

 나는 정형화를 꽤 좋아한다. 그 중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도 있다. 도교( 문화)도 좋아하고 주역도 좋아한다. 그런데, 미래를 이야기하는 점占도 믿지 않고, 사주팔자四柱八字도 믿지 않는다. 관상에 대해서는 과거를 믿는다. 삶의 이력이 얼굴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미래에 관해서는 믿지 않는다. 그 삶의 이력을 통해 관성의 법칙을 고려하면 가까운 미래도 예측할 것으로 추정하나 신뢰도 낮은 관상에 의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p63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연의 영향을 받는다. 춥거나 더운 나라에 가보면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부터 행동까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계절에 따라 인간의 성향은 차이를 보인다. ‘천인상응天人相應’ 하늘과 인간은 서로 상응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예전에 TV 방송에서 UFO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는데, 가장 신뢰도가 높은 자료는 비행기 조종사, 특히 전투기 조종사들의 증언이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착각을 할 가능성이 적고, 과학지식도 충분하여 오판할 가능성도 적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의 책 소개에서 공학도가 명리학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을 읽어보니 ... 나의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켰다.

 

p12 사주가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헛소리일 뿐이다./나는 무엇보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사주명리학을 구성한 무의식의 코드가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 나는 이 사주명리가 어떤 원리로 구성되어 있는지 논리적으로 뜯어보고 싶다.

 

속담을 보면 ‘다다익선多多益善’과 ‘과유불급過猶不及’, ‘아는 것이 힘이다’와 ‘아는 것이 병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와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간다’ 등 많은 속담들은 반대의 교훈을 주고 있는데, 사후에 일어난 사건에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 필요한 예측을 하는 데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음양오행과 주역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이런 사주팔자 풀이가 있었다. ‘결혼을 늦게 할 것이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결혼을 빨리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특히 나와 생각/느낌을 조율해야 하는 여성을 만나는 것을 불편해 하는 내가 결혼을 빨리 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뭐?) 꾸준한 성격으로 초년보다는 노년이 좋다는 평을 받은 적도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한다.’ 그럼 고생 끝에 낙이 오지. 뭐가 오나. 고생 끝에 고생이 오면 고생이 안 끝났다고 할 것 아닌가.

 지인의 경우 (점인지 사주명리학인지 모르겠으나,) 그 결과를 돌이켜보면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있다. 나는 차라리 전부 틀리게 결과를 낸 사람을 믿겠다. 결과를 거꾸로 판단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있으니 뭘 믿으란 말인가?

 

p223 공부해 보면 알지만 주역이나 사주는 사람의 미래를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다. 예측은 오직 과학의 몫일 수 밖에 없다.

p86 “주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 순자는 이렇게 말했다./주역은 용이 말한 ‘집단무의식’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사주명리학의 비과학적인 것을 걷어내니, 대학생 때 수박 겉핥기로 읽었던 ‘주역’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나는 기회가 되면 점을 보거나 사주명리를 볼 생각이다. 이들이 나를 어떻게 현혹시킬 수 있는지 궁금하다.

 

p31 심리기법에 콜드 리딩 Cold reading이라는 게 있다. 콜드 리딩은 상대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속마음을 간파하는 기술이다./p31 콜드 리딩의 핵심은 ‘연출’이다.

p51 유명한 역술가들은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유명 역술가들의 진짜 능력은 바로 권력의 판세를 읽는 능력이다.

 

* 밑줄 긋기

p8 칼 포퍼는 점성술을 ‘사이비 과학’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어떤 이론이 과학적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준을 반박가능성 refutability, 반증가능성 falsifiability, 혹은 시험가능성 testability이라고 정했다.

p19 점술가가 일반적인 특성을 이야기해도 자기 이야기라고 믿는 현상을 ‘바넘 효과’라고 부른다.

p23 사후판단 편향hindsight biases

p26 “고통스러운 삶은 참을 수 있지만 무의미한 삶은 못 참는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의 말대로

p31 인간은 의심을 오래 할 수 없다. 의심은 뇌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믿는 것이 편하다.

p34 아포페니아 apophenia라고 한다. 잘못 연상된 소리와 이미지를 인지하는 현상을 말한다./특정한 메시지가 무의식적으로 기억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서브리미널 효과 subliminal effect’이다.

p35 ‘경험은 재현이 불가능하다.’

p37 수학 자체는 세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수학이 세계는 아닌 것이다. 수학이 아무리 훌륭한 도구라 하더라도 수학은 표현될 때부터 이미 오류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p39 어려운 세상 추종자들은 빅맨에게 안전을 약속받고 싶어 한다./p40 대중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를 선호한다.

p41 이 무의식적인 본능을 논리적으로 승화한 것이 관상학이다.

p52 권력이 세습되고 고착되면 역술가들이 설자리는 좁아진다. 세상이 변화할 가능성이 많을 때 점의 주가는 올라간다.

p53 “친절해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p70 동양에서는 수학의 개념적인 측면보다는 계산적 측면이 더 발달했다. 결국 수학이 과학으로 가지 못한 것은 개념화의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서양 수학의 개념은 바로 ‘증명’이고 증명은 논리의 통일성을 중시하고 통일성은 정확성을 가지게 된다. 무리수, 유리수 개념이 증명되어 로그로 연결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p70 서양은 절대적인 ‘참인 진리’를 찾으려 했다.

p73 그러나 동양문화의 환원은 어디까지나 경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질서한 경험이 단순해 보이는 것은 언어 때문이다. 무질서한 경험을 언어의 질서로 재단하면 단순화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다양한 경험들의 면면은 감춰지게 되는 것이다.

p74 십자군처럼 서양에서는 진정한 의인이란 절대 악을 제거하는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양은 다르다. 동양에서 현자는 절대선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호하는 것과 선호하지 않는 것에 균형을 이루는 사람을 뜻한다.

p74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 Contraria sunt compleneta’

p77 과학은 실재를 언어라고 하는 개념으로 환원한 것이다.

p78 “유럽 철학이 실체에서 실재를 찾으려고 했던 반면 중국 철학은 그것으로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는 조지프 니덤의 말처럼 동양인들은 실체는 관계에서 나오고 관계는 경험에서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p108 “만약 당신이 보지 않을 때는 파동이 존재하다가 볼 때는 입자가 존재한다면, 관찰자가 진리라고 여기고 싶어 하는 취향에 따라 진리가 달라진다.”

p108 멋지게 보았기 때문에 멋있어지기도 하고, 멋있기 때문에 멋지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패턴화’라고 한다. 패턴화는 다른 말로 ‘우연의 힘’이라고도 한다.

p111 동양의 철학은 ‘경험’이 중요하다. 그러나 경험을 절대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 인간의 심리적 경험은 주관오류에 빠지기 쉽다.

p112 수천 년간 암시효과를 갖고 있는 상징들을 중심으로 집단적인 경험들이 축적되어 왔다.

p114 사람의 사주에는 오행이 열 개가 아니라 여덟 개만 매칭되기에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기운이 골고루 배당될 수 없다. 어느 한 기운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필연적으로 2가 부족한 것이 인생으로 본다.

p115 그래서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라고 말했다.

p212 결론적으로 “믿음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은 믿음의 이유를 발명했다.”

p213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편안함과 안정감을 갈망하기 때문에 통제되지 않는 상황, 설명 불가능한 일에 혼란을 느낀다.

p213 모든 것이 불완전한 믿음이다. 과학조차도 신뢰도 높은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의 세계는 오류를 전제로 한다. 다만 과학은 오류에 대해 정직하다.

p224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p233 결국 나를 보는 나의 시선이 어떤가가 내 운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일 것이다. “사람이 나이 40을 넘기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말이다.

p233 “표정을 통해 성격을 알 수 있다. 눈에 선량함과 씩씩함, 마음의 평정이 드러나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p235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치지 않고서 생물권을 떠나거나 파괴할 수 없다. 다른 종의 생명 주기를 파괴할 수도 있고 생물권을 타락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부주의하게 밟아 나가는 한 걸음, 한 걸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갑지 않은 대가를 예외 없이 치르도록 할 것이다.”

p236 그러나 사주팔자는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불일치를 조정할 기회가 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p244 외부의 부정적인 정보에 과감하게 도전하려는 자신의 의식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불일치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운을 바꾸는 힘이다. 중요한 것은 사주나 점괘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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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5-23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고생 끝에 낙이 오지. 뭐가 오나. 고생 끝에 고생이 오면 고생이 안 끝났다고 할 것 아닌가."
- 이 말에 하하하~~~ 웃습니다. 맞는 말씀이에요.

제가 공감한 것 세 개만 고르면...
“친절해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사주나 점괘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은 믿음의 이유를 발명했다.”

사람이나 무엇을 좋아하는 것도 그래요. 어쩐지 마음이 끌려 좋아하게 되고 그 다음에 왜 좋은 거지? 하고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되거든요. ^^

마립간 2014-05-24 08:14   좋아요 0 | URL
pek0501님 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나름 유머를 지향하는데, 이 모양입니다.
 

 

* 옛날 드라마 두 편

 

- 덕보 아저씨

1981년 2월 13일에 KBS 1TV에서 ‘인간극장’이란 이름 하에 ‘덕보 아저씨’란 부제로 방송되었다.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덕보 아저씨(신구 분)가 대포집 가게를 운영하였고, 대학생들은 외상으로 술을 먹을 수 있는, 그리고 가끔은 다락방에서 잠도 잘 수 있는 이 가게를 애용하였다. 주인공 대학생 태영(고 강태기 분)은 덕보 아저씨를 무척 좋아하여 대학교 졸업 후에도 잊지 못한다. 덕보 아저씨는 고위 공무원이었고, 강직하여 뇌물과 같은 것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저씨의 아내가 선물을 받았는데, 덕보 아저씨는 이 사실을 받아들지 못하고, 사직과 동시에 집에서 가출한다. 아저씨의 아내는 선물을 돌려보내고 남편에게 사죄했지만,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용서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용서를 받지 못한 아내가 사망한다. 대학생 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태영은 같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대학 선배(정동환 분)에게 덕보 아저씨와 정의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그것은 대학생의 추억일 뿐, 네가 할 일은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것이라고 충고를 한다. 옛 기억을 잊지 못하는 태영은 덕보 아저씨를 찾으니 대포집은 망했고, 덕보 아저씨는 밀도살이라는 불법에 관여하고 있었다. 태영은 울면서 덕보 아저씨에게 이럴 것이면 뭐 하러 사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했냐 하소연을 한다. 덕보 아저씨는 자수를 하고 드라마는 끝을 맺는다.

 

- 드라마 제목 불명 (1980대 초반쯤)

두 번째 드라마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신구 주연인 드라마다.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니, 배우이름으로 대신한다. - 신구, 임동진, 고 문오장(추정), 고 이성웅(=마영달)

 

신구는 이기적인 친일파다. 독립 운동가를 잡는 일에 일조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간부 사이에 대화를 엿듣게 된다.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는 것. 신구는 독립 운동가인 임동진을 탈출시키고, 잠깐의 고초를 겪는다. 독립은 되었고, 신구는 졸지에 독립투사가 되었다. 신구는 정치에 참여한다. 독립 운동가인 임동진도 선거에 참여하지만, 신구의 선거 운동으로 부패 정치가인 문오장을 당선시킨다. 신구는 독립 운동가와 정치인은 다르다고 연설을 한다. 정치에서 신구는 문오장을 배신하고 자신이 직접 일선으로 나선다. 배신을 당한 문오장은 신구의 심복인 이성웅을 꾀어 다시 신구를 배신하게 한다. 우여곡절을 겪은 신구는 정치에서 살아남게 되고, 다음 선거를 맞게 된다. 이때 임동진은 신구의 선거를 돕는다. 신구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임동진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하면서. 신구의 당선 후 임동진은 신구에게 당부한다. “이제까지는 자신을 위해 살아왔지만, 인생의 한번 정도는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신구는 임동진의 말에 찔끔하지만, ... - 나의 드라마 줄거리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마지막에 한 동안 시간이 흐른 후 신구는 할아버지가 되어 옛날을 회상하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위 옛날 두 드라마는 정의正義는 패배하고, 불의不義와 기회주의가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내 마음 속에 각인시켜주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불의와 기회주의가 이기는 매력이 나의 욕망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대신 옳음을 붙잡고 있을 때, 패배할 수 있다는 것과 패배의 상황에서 너무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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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5-21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두번째 드라마 제목 아시는 분 계신가요?

노이에자이트 2014-05-2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영달 문오장...악역 전문이죠.성격배우이기도 하고...제목은 모르겠네요.

해방정국 당시의 부패를 그린 소설이 꽤 많죠.그러니 그런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도 많았을 거에요.

덕보 아저씨의 내용은 참 슬픕니다.정의로운 사람이 밀도살을 하게된 사연이라니...

마립간 2014-05-24 08:10   좋아요 0 | URL
두번째 드라마의 제목에 대한 답을 주실 분이 있다면 그것은 '노이에자이트'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연 배우들의 이름이 정확히 생각나 드라마 제목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인터넷 검색에는 나오지 않네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는 것은 1990년부터로, 아마 이때부터 컴퓨터 데이터 베이스가 상용화되었나 봅니다. 이전 것들은 종이 서류로 있다가 폐기되었거나 보다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하겠죠.

노이에자이트 2014-05-25 23:55   좋아요 0 | URL
가끔 80년대 드라마가 인터넷에 소개되기도 하던데 한 번 더 찾아봐야겠어요.

staboo 2022-10-0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갑자기 덕보아저씨 떠올라서. 구글 검색하니.. 선생님이 적어신 글포함 2개만 표시되었습니다
당시 덕보아저씨 방송보고 슬펐고...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무언가의 두려움도 새겨졌습니다...
직장생활 할때... 종종 덕보아저씨 삶을 살게될까.... 굴복하게 될까 싶어.. 많이 두려웠습니다
2015년도부터 자영업을 하고있고...
덕보아저씨처럼 회귀될까 싶어... 실은 현실로 다가와 직전이라.. 겁이 납니다
그렇게 무너질수는 없다는 생각은 분명합니다
이래저랴.. 갑작스러운 넋두리 죄송합니다
좋은 휴일되십시오
 

 

* 세월호 사고 03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런 말의 상당수는 후향확증편향이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17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놓고 Wien체제를 떠올렸다. 하지만 18대 대통령 선거 결과까지 보고 나서 내 이전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시민혁명’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었다고 생각했고, 17대 대통령 선거는 일시적인 반동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회는 15대, 16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오히려 일시적이며, 지속적으로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었다.

 

방향을 꺾을 수 있을까? 18대 대통령 선거를 보고 임계점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이다. 나의 이런 판단에 확신을 더하게 하는 사건이 세월호 사고다. 사고의 발생 배경부터 사고 처리 과정에서 보여 준 모습은 사회의 방향을 튼다는 것이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하게 만든다.

 

* 세월호 사고 01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09661

* 세월호 사고 02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10900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응급체계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전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S 그룹의 총수의 응급 진료를 보면 알 수 있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을 뿐이다.

 

대학생 시절, 친구가 내게 약간 ‘패배주의자’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한동안 돌이켜 보면 친구의 말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세상은 엉망이지 않다고. 다시 생각을 바꿨다. (생각보다 더하지는 않을지언정,) 세상은 생각만큼 엉망이라고.

 

내 주위에 새누리당 지지자는 요즘 분위가 심상치 않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여당의 2014 6 4 지방선거 패배를 염두에 두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이글의 결론은 2014년 지방 선거에서 ‘여당은 생각보다 선전할 것 같다.’ 왜냐하면 구조화되었으니까. (서울 시장의 비중이 크나 서울 시장이 뽑힌 것을 과도하게 계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대한민국 스케치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161071

* 경향만평 140516 http://news.khan.co.kr/kh_cartoon/khan_index.html?artid=201405152227082&code=3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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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5-1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할꺼라 예상하고 잇습니다.
젊은 사람들 일수록 이젠 돌릴수 없다. 다 끝났다, 이놈의 나라 돈만 있음 떠나고 말지.
이런 생각들이 팽배한것 같아요.
그러니 굳이 투표에 참여도 하지 않을 것이고,
솔직히 새누리당이나 새정치 연합이나 다를것도 없으니까요.
대국민 담화 뭐라고 할지 참 기대만발입니다....

마립간 2014-05-19 12:02   좋아요 0 | URL
이런 선거 결과를 예상하는 자체가 우울합니다. 딱히 제가 생각하는 정상으로 돌릴만한 가능성조차도 떠오르는 것도 없고.

마녀고양이 2014-05-1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선거는 새누리당이 승리한다 아니다의 문제로 귀결짓기가 참으로 힘든게,
야당이 제 구실을 해준다면 제대로 선거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당도 여당이나 별다른 게 없으니, 선거하기 싫겠죠. 그게 꼭 새누리당의 지지층이 두터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경기도에 사는데,
이번 경기도 지사 선거를 보면 아주 짜증납니다. 여당스러운 야당 후보와, 야당스러운 여당 후보.
머..... 오십보 백보이긴 합니다만.

마립간 2014-05-19 13:50   좋아요 0 | URL
여당스러운 야당후보와 야당스러운 여당후보는 득표를 위한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걱정했던 것은 온 국민이 (위계질서에 순응하는) 보수화가 되어 굳이 변화를 필요없다고 생각하거나 - 이 의견이 맞다면 새누리당 지지층은 생각보다 두터운 것이고. 어쩌면 야당 후보도 '세월호 사고 01'에서 제가 언급한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르죠.

대개 야당의 승리는 바람으로 이뤄지는데, 이번 사건조차 그 역할을 못한다면 희망이 없지 않을까... 최선이 없다면 차선으로, 최악을 피하는 차악으로 어느 선거에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으로 만족스러울 만한 후보는 항상 없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05-1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에 이번에 여당이 선거에서 선전한다면 정말 답이 없는 나라죠. 이번에 박근혜가 천주교 미사에 참석했더군요.
그리고 때맞춰 대주교가 내탓이다, 내탓이다, 내탓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파했고 말입니다.
이 정치쇼는 뻔하죠. 남 탓하지 마라. 내가 못나서 세월호 사건이 터졌으니 남 욕하지 말고 나나 잘하자.
이 메시지를 그대로 적용하면 박근혜 욕할 거 하나 없다. 너나 잘하라, 라는 메시지가 아닙니까.

마립간 2014-05-20 07:42   좋아요 0 | URL
위 글은 저의 우울한 선거 결과 예상에 불과합니다. 저는 정보의 수집보다는 사고의 추론에 의존하니 틀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 가족이 이런 말을 했던군요. 강남의 학교였다면 결과가 조금 달랐을 것이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석후 행동 선택에 있어서는 ; 보다 보수적인 행동, 그러니까 나만 살면된다라거나, 돈, 권력이 있는 놈이 장땡이다.라는 행동기준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시스템을 교정하기 보다 패배자가 내탓을 운운하면 복종하는 시스템을 우리 국민이 (미개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의든, 타의든) 지지하고 있죠.

여울 2014-05-20 12:14   좋아요 0 | URL
추모제를 참석하고 지인들과 향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각성과 자성, 성찰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의견들은 너무 낙관적인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내가 식구를 다챙겨야 돼라는가, 내탓이다, 어쩔 수없는 것 아니냐는 행동으로 번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견들이 있더군요.

60대, 70대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젊은이들의 삶의 이력이 조금 더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삶의 경험에 익숙한 장년층세대는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가요. 확신에 찬 행동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 것인지? 높으신 양반들은 뭐를 하든지 해쳐먹고 있는데 대통령만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드러내지 못하는 이면이 있는 것 같아 더 불안합니다.

나라의 한 걸음보다 그들이 말하는 다른 이견을 짓눌러야 나라가 잘 된다는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추론에 가까운 확증을 갖고 빨갱이, 데모...종북...자신의 신념을 사실에 비춰 생각해보지 않는 비합리가 정작 더 큰 반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존재근거를 향수와 무의식에 기대는 것은 아닐까?

정치인도 없고 정치도 없는 상황에서 너무 우울합니다. 하소연도 하지 못해 자식의 안위가 걱정돼 거리로 나선 앵그리맘의 마음도 찢어집니다. 선거가 한판 경기로 전락해 오히려 더 환멸을 더 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투표인증샷이 아니라 제발 이런 나라만들어달라는 한마디씩 인증샷을 하는 편이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시장에게 구청장에게 구의원에게 이 동네 사고나지 않게 일하다 다치지 않게 .먹을거리, .... ... 선거는 내편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지 않나요? 차이도 없는 인물이 대단한 일을 해주지 못한다는 것도 다 알지 않나요? 생명의 대의에 자기 감정을 숨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똘똘 뭉칠 거라는 우려가 더 현실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라 주장하는 분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맞죠. 야당이 당연히 이겨야 한다고 똑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하는 것이 맞죠. 선거 한판에 모든 것이 결판날 것 같은 이들에게 ...눈물과 아픔...종북이 아니라 이땅에 당신같은 사람들 노년이 정말 걱정되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그냥 푸념이네요. 마립간님 주위의 새누리당 지지자분들 이야기 더 듣고 싶네요. 논리가 아니더라도 감정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이 더 정확하겠죠. 보다 보수적인 행동기준을 가져오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요? 선거기간을 통해 그런 부분이 그림자처럼 일상에 드리워진다는 것은 더 암담합니다. 선거를 통해 정치가 더 정치다워지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우울합니다.

마립간 2014-05-20 14:12   좋아요 0 | URL
제가 속한 사회가 워낙 새누리당 지지자가 많은 사회라, 어느 한 사람의 의견보다 그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위계 질서가 있는 사회를 지지합니다. 그 중에 일부는 법 위에 군림하는 것까지 인정합니다. 그리고 법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되려 하죠. (그래서 이 위계 체제를 평등하게 바꾸려는 시도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과 공감도 못하고 공감할 필요성도 못 느끼죠. 직접적인 자신의 이익에 반할 때만 위계 질서에 반해 적극적 반대를 합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노예제도가 없어진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저는 '도덕의 정치'에 읽은 좌/우 개념을 기본 가치관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http://blog.aladin.co.kr/weekly/7014861
나이 많은 분들의 생각은 weekly 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젊은이조차 보수화가 되었다는 것이죠. 정치인과 정치가 없다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우파적 정치만이 있고, 이것으로 사회 현상이 잘 설명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기회는 불평등하고, 과정은 불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진행하여 파국을 맞을 것이냐, 임계점을 넘지 않는 선에서 불평등, 불공정, 불의를 한동안 지속시킬 것이냐만 문제로 남았다고 봅니다.

저도 넋두리입니다.

여울 2014-05-2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ekly님 올린 글은 미리 보았습니다. 성향의 차이를 지적하더군요.(합리적인 절차를 밟아나가는 일처리에 상대적으로 편안해 하는 성향과 그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성향의 차이) 정진석후보와 안희정후보가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비해 박근혜대통령과 친분을 통해서라도 복철사업을 관철 해내겠다는 비교에 대한 분석이 인상깊었습니다.

님이 말하신 위계를 중시한다는 말을 권위, 조지 레이코프가 말한 엄격함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말씀하시니 폴리티컬 마인드가 생각이 나더군요.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중심과 감정에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민주적인 아버지가 얼마든지 아이를 편안하고 자유롭게 키운다. 왜 민주적이어야 좋은가라고 논쟁하지 않고 그 바탕으로 키우면 시키는대로만 하지 않고 또래들과 더 열린마음으로 일들을 잘해결해나간다. 민주적인 가장으로서도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가정보다 느리지만 멋진 가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주장하고 말하고, 그것이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위계와 합리성을 답답하게 여기는 성향에서 보면 새누리당 지지자 가운데 권력과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보수세력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그림들이 나오지 않으면 절대 역치를 넘어서기 힘든 것은 아닌가 싶네요.

야당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조금이라도 잘 하길 바란다면. 레이코프의 논지를 쫓아가 안전에 선방도 날리지 못하면서 ... ...위계질서나 권위를 존중하고 직접적인 해결 성향을 갖는 분들을 안고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임계점도 넘지 않고 좀더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향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답글 고맙습니다.

마립간 2014-05-21 11:00   좋아요 0 | URL
언어는 제가 정의했지만,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사회적인 도구입니다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임의대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저는 제 지식에 기반한 '보수'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주류(이자 보수) 언론이 사용하는 '보수'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합니다. 제 지식에 기반한 보수가 '조지 레이코프'가 이야가한 '엄격함'이라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보수는 '이기적인 수구주의'에 가깝습니다. (비수구주의는 뭉뚱그려 '좌빨종북'이 되는 것이죠.) 실례로 '김구' 선생님은 제 가치관으로는 우파(보수)이나 사회적으로 좌파로 분류됩니다. 따라서 여울마당 님께서 질문하신 것에 대한 저의 답변은 위계질서를 중시한다는 것(수구)는 엄격함(보수)와 다르다입니다.

노년층에서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것은 국가의 정치적 위계질서를 지지함으로써 가정 내의 위계질서를 통해 기득권을 인정받으려는 감정이 다분이 숨어있다고 봅니다.

야당이 할 수 있는 일 ; 야당이 지향하는 바(야당이 진보를 지향하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가 현실화가 되려면, 약간의 환경적 요인, 운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가 오기 전까지는 기본의 가치관을 견지하는 것이죠. 만약 현 사회가 임계점을 넘었다면 야당이 지향하는 바가 자체가 이상입니다. 파국이후에 새로운 사회가 되었을 때, 밑거름이 되는 것이 전부이죠. (제 사견입니다.)

마립간 2014-06-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7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