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610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서평 별점 ; ★★☆

 책의 제목으로 기대했던 책은 (아마 읽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의 내용을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책의 대부분이 창조론에 대한 반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이 잘 알려진 내용이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나,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의 철학적인 답변은 극히 적은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글은 관심을 끈다.

p87 이것은 아니러니하다. 특별한 창조에 대한 믿음은 신자들이 생물학적 적응도가 더 높은 삶을 살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의식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특별한 비결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지 않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진보적인 어떤 문구는 자체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다. 예를 들면 ‘관용은 불관용도 관용해야 하는가?’ 관용이 불관용을 관용하면 불관용이 점차 확장되어 사회전체로는 관용적인 사회가 아닌 불관용 사회가 된다. 관용이 불관용을 불관용한다면 관용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 진화론이 옳다면, 창조론에 대한 믿음은 생존의 결과로 나타나는 경쟁에서 유리함으로 진화론에 비춰보면 소멸될 수 없다. (확률적으로 거의 0에 가까운 창조론 소멸이 이뤄진다고 해도 변이에 의해 창조론이 다시 창발될 것이다.)

 

이 책의 대표저자는 ‘리처드 도킨스’다. 이 책 다음으로 읽은 <풀하우스>의 스티븐 제이 굴드의 생각/사상과 대비된다. (<다윈의 식탁>를 통해서 이미 잘 알려진,)

 

질문 ; 진화에 있어 어떤 단 하나의 사건도 (생물학적 목적 ;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생존이 아닐까.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의 신학적 목적이 아니라도) 목적적이지 않았나?

 

이 질문에 따라 생명이나 지적생명체에 대한 출현의 확률이 매우 달라지게 된다. 보다 진보적이고 우연에 의존한 진화론인 굴드의 생각대로라면 그 확률이 매우 낮아, 창조론의 의심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밑줄 긋기

p81 그 이유는 명백하다. 물리적 세계에 있는 그 무엇도 의식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면, 의식은 물리적 세계의 원가로 존재할 수 없다./의식은 딱 그만큼-마음속에 있는 뭔가에 대한 경험-으로 존재해야 할 것이다.

p121 물고기 지느러미가 발생할 때 활성화되는 유전자의 집합을 테트라포드의 팔다리가 발생할 때 활성화되는 유전자와 비교하면, 지느러미와 팔다리의 유전적 차이 목록을 작성할 수 있다. 이 비교는 우리에게 용의자, 즉 팔다리가 생갈 때 변화했을 가능성이 있는 유전자 스위치들을 알려준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로 보면 그 목록은 짧다.

p139 다윈의 자연선택은 몸을 만드는 암호문의 무작위적인 변이들의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이다.

p139 공학자들은 컴퓨터 모의실험에서 시스템을 최적화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다윈주의적 방법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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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0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10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10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讀書日記 140609

 

<풀하우스> 서평 별점 ; ★★★

 워낙 지명도 있는 책이라 당연히 읽었을 법한 책인데, 이제야 읽었다. 이제야 읽었지만 내용이 낯설지 않다. 다른 책에 많이 인용되었고, <다윈의 식탁>을 통해, 굴드의 생각/사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책을 내용과 상관없어 보이는 2014년 6월 4일 선거 결과가 연상되었다. 이 책에 상당 부분을 야구의 4할대 타자가 사라진 것에 대한 설명으로 채운다. 전반적 야구 수준의 향상으로 변이의 감소이다. 이 이론을 우리나라 교육 현상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학생의 교육 수준의 전반적 향상으로 성적의 변이는 감소되고 성적의 변별력은 떨어진다. 몰개성화된 것, 역시 전반적인 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표준편차가 줄어든 것일 수 있다. 통계 분포상 변별력이 떨어진 시험 평가 방법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면, 사교육을 주축으로 이루고 있는 경쟁적 교육의 해소는 불가능에 가깝다. 새로운 (진보?) 교육감의 정치 철학이 교육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 밑줄 긋기

p129 포유류 계통의 진화에서 뇌의 크기와 같은 몇 가지 항목을 제외하면 페니스나 자동차와 같은 크기와 성능은 무관하다. ; 왜 뇌는 예외인가?

p180 경기의 발전이 정확성과 평균화의 확대를 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극도의 아름다움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p194 환경이 생물에 진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계속 변해간다면 자연선택에 의한 진보를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지역에서건 지역적인 환경의 변화는 지질학적 연대에 따라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

p196 에머슨의 유명한 금언 <어리석은 일관성은 소심한 바보나 할 짓이다>/내 말이 모순되나? 좋아 그럼, 모순되자,

p201 우리는 진화가 진보를 가져다 준다는 가정은 하나의 문화적 편견에 불과함을 이해하고, 진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이론이 다윈 시대에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없음을 잘 알고 있다.

p202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보가 생명의 역사에서 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진보가 생명의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경향이며 특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p210 구조적으로 한쪽이 벽으로 막혀 있는 선형적 운동계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무작위적 움직임은 그 벽의 시작점으로부터 계속 멀어져 갈 수밖에 없다.

p224 가장 큰 종의 크기 증가는, 단지 시조가 되는 종이 왼쪽 벽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크기가 오직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p225 <어디로 움직여 가는 것> ; 가게 되는 것, 생존은 목적인가, 결과인가?

p226 평균값이나 최대값에서 신체 크기의 증가(넓은 의미의 코프의 법칙)를 보여주는 대다수의 계통들이, 자연선택적으로 더 유리하기 때문에 큰 크기를 향한 정향 진화 결과 생겼다는 전통적인 해석보다는 작은 크기에서 멀어지는 무작위적인 진화의 스탠리의 법칙으로 더 잘 이해된다고 단언할 수 있다.

p228 비전문화의 법칙 law of the unspecialized/이 법칙은, 대단히 성공적으로 번성한 계통의 시조들은 폭넓은 서식지와 기후를 견뎌낼 수 있다는 점에서

p233 생명의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는 주장이 전형적인 기만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 정신의 창발성 등 불가역적 창발이 진보다. 도덕적 선과 목적성이 아니다.

p234 물리적 화학적 이유에서 생명은 최소 복잡성의 왼쪽 벽에서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물방울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원시 생명 수프에서 대번 사자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p241 즉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 생물이 지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진화의 결과라는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 필연적일까? 필연적이 아니라면 창조론을 반증할 수 있을까?

p243 시대 ; 그 종의 상대적 중요성, 발전적 결과/경향 미분값의 peak에서 시대를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는 농업 시대, 공업 시대, 정보화 시대를 거쳤지만, 농업과 공업이 멸절한 세상을 살고 있지 않다.

p264 이러한 결과들은 미생물의 증식이, 생명에 필요한 다른 조건이 충족된다면, 온도가 아니라 액체 상태 물의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는 가설을 입증해 주었다.

p268 슬라임 SLime Subsurface Lithoautotrophic Microloial Ecosystem

p273 도덕 이론은 의도와 결과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마찬가지로 훌륭한 자연사 이론은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p273 하지만 개체의 생존에 정말 필요 불가결한 특성이라고 하더라도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의도하지 않은’ 후유증이나 부작용으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p274 여러분들은 이렇게 ‘직접적인 원인에 의한 결과’와 ‘어쩌다 생긴 우연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이 생물계의 특정한 특성을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진화 일반에 대해 이해할 때 기본적인 구별을 해 준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p275 앞의 도식에서 진보는 근본적인 원인의 주요 결과이자 생명의 역사를 지배하고 형성해 가는 것이지만, 뒤의 도식에서 진보는 2차적이고, 드물게 발생하는 우연적인 부산물이며, 진보를 목적으로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없어도 형성되는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에 의한 결과와 우연한 결과를 구별하는 문제는 진화론 역사 전체에 걸쳐 문제를 야기했다.

p299 생명 전체를 봤을 때 오른쪽 꼬리가 당연하게 형성되기 때문에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 생물이 진화, 발생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전형적인 ‘범주의 오류’에 속한다. 이 경우는 올바른 일반론으로부터 특수한 결론을 추론한 오류다./특정한 시대에 어떤 생물이 오른쪽 꼬리를 점유할 것인지는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

p300 인류의 탄생은 일어날 것 같지도 않은 특수한 사건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p302 인류의 출현은 복잡성을 향한 추진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예측 불가능한 과정에서 우연하게 발생한 영광스러운 사건이었다. ; 당첨은 있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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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오게네스-양주

 

나는 어떤 것을 해석하는데, 정형의 틀을 사용한다. 많이 사용하는 정형에 1) 플라톤-노자, 2) 아리스토텔레스-장자, 3) 디오게네스-양주의 정형이 있다. 이 이야기를 ‘독서일기 121209’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의 독후감에 언급하였다.

 

* 독서일기 121209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http://blog.aladin.co.kr/maripkahn/6002708

 

언젠가 디오게네스-양주의 정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후흑학>을 읽고 있는데, ‘디오게네스-양주’의 정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후흑학>의 독후감을 쓸 때 편할 것 같아 정리를 한다.

 

내가 사용하는 정형의 ‘플라톤-노자’가 실제 플라톤, 노자의 사상과 맞는지 모르겠다. 우선 내가 읽은 책 범위에서 내가 해석한 것이다. 나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고, 검정을 위해 알라딘의 글로 나의 생각을 노출시키나 아직 반론/반박을 받지 못했다.

 

나의 동경에는 ‘안빈락도安貧樂道’가 있다. 부富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이 내용은 불교에 가깝겠지만, 나는 노장사상을 떠올렸다. 하지만 내가 독서를 한 바에 의하면, 노자도 장자도 노장사상과 크게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고 중국 민간 신앙을 기원으로 생각하는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리고 노자, 장자 각각의 사상은 서양의 자연철학에 해당함을 알았다. 반면 서양의 철학 사상에서 동양적 사상을 찾아보니 ‘디오게네스’가 해당되었다. 디오게네스에 관한 책을 찾으려 했는데 없다. 나와 있는 책은 어린이용으로 디오게네스가 햇볕을 가리지 말라고 한 에피소드를 소개한 책이 전부였다. 2011년도 출판된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보고 기뻤다. 드디어 디오게네스에 관한 책을 읽는구나하고. 하지만 이 책에는 디오게네스에 대한 내용은 없고, 글쓴이의 주장만 가득하다. 나는 오랫동안 디오게네스-노장사상이라는 정형의 틀을 사용했는데, 중국 사상가 중에 양주의 사상을 보고 디오게네스와 비슷함을 느꼈고, 이후에는 ‘디오게네스-양주’라는 것으로 정형의 틀 이름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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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와 양주는 당사자가 그리고 그의 학파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책이 없은데, 그들의 책이 없다는 것이 그들은 연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그들이 그들의 철학에 충실했다는 것으로 보여준다.

 

내가 정의한 디오게네스-양주는 이성/합리론의 한계를 넘어선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서 나의 임의적 정의가 사용되는데, 디오게네스-양주가 합리론을 포함한 이상을 포함할 수도 있으나 나는 합리론의 제외된 것만을 사용함으로써 플라톤-노자, 아리스토텔레스-장자, 디오게네스-양주의 모델이 완성된다.)

 

이성과 합리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흔히 인용되는 사건이 1,2차 세계대전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이성을 혐오하고, 이성의 주체인 사람을 혐오하고 인간 사회/문명을 거부한다. 비이성적인 자연을 선호한다. 그리고 본능을 중시한다. (디오게네스와 관련에 에피소드에 공공장소에서의 자위행위가 있다.) 인간 사회의 거부는 무정부주의나 위아爲我와 같은 주장으로 나오기도 한다. 단기적으로 이성은 꽤 잘 작동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이성은 결과는 실망스럽다. 디오게네스-양주는 장기적 안목으로 실망스러운 결과를 예상한다.

 

플라톤-노자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수학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장자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진화론이고 디오게네스-양주를 잘 보여주는 것은 카오스이다.

 

* 사람과 쥐

http://blog.aladin.co.kr/maripkahn

 

디오게네스-양주가 추구하는 철학은 아우타르케이아로 설명할 수 있다.

아우타르케이아 (고대 그리스어: αὐτάρκεια, 스스로 만족하는 것) ; 아무런 부족함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신의 특징으로,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만큼 자연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위키백과)

 

요약하면 자연적인 반문명, 반이성주의, 반합리주의, 실용지능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부류에 디오게네스와 함께 양주에 분류하는 것이 합당하는지, 후흑에서 언급한 유방도 비합리주의에 포함되는지,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지 누군가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니체는 어느 강의에서 비합리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은 들었는데, 다른 강의에서는 합리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을 들었다. 과연 어디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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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견불여일행 百見不如一行

 

1980년대 말 대학 학생 시절, 실험실에 잠깐 있었다.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도 받을 겸, 실험 기법도 배울 겸. 어느 날 저녁, 식사 후에 잡담을 나누는데, 실험에 관한 이야기가 성관계에 비유되었다. 학생 신분인 내가 있는 고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선생님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하셨고, 나는 백견불여일습百見不如一習이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웃으셨다. 성관계가 언급된 상황이라서 더 웃겼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실용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한번 보거나, 실습한 것으로도 몸의 습득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실용지능에 대한 상황을 이해만하고 실감하지 못하였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야기는 ‘백문불여일견’이라면 ‘백견불여일습’이라고 조건문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이후는 나는 내가 만든 한문 문장에서 습習이 적절한지 험驗이 적절한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습’은 능동적이지만, ‘험’도 수동적으로, 둘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 행으로 습과 험을 통합했다. 게다가 습과 험도 검색되어 조금 놀랐다.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비슷한 듯.)

 

백견불여일행을 다시 찾아보게 된 것은 어느 알라디너의 댓글 대화 때문이다. 먼저 예전에 알라딘 (댓?)글에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하나.’라는 문장을 보았다. 나는 대댓글을 달지 않았지만, 이 말이 맞나 생각해보았다. 며칠 전 본 문장은 ‘세실리아는 이런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앎에 ‘학습지능’에 의한 것과 ‘실용지능’에 의한 것이 있다. 학습지능에 앎의 경우는 모름과 앎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하다. 반면 실용지능에 의한 앎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리고 실용지능에 의한 앎을 대충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직접 경험이전에 아는 것이다. 본능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간접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한두 번의 직접 경험에 의해 아는 것이다. 백견불여일행은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도덕경에도 나오지만,) <아웃라이어>에서 언급한 (1만 시간으로 알려진) 일정 역치를 넘는 경험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살인만 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봐라’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라는 위치 때문에 절도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암시는 하셨다. 직접 경험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다른 알라디너 글에 나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저도 가끔 충고를 받습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지 말라고요.’ 나에게 이런 충고주신 분의 뜻을 새겨보면 직접 경험을 너무 경시하지 말라고, 학습지능과 실용지능은 균형을 가져야 된다는 충고로 해석했다. (역시 말은 쉬운데, 행동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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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5-2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런 뜻에서 저의 댓글에 그렇게 쓰신 거로군요.
거기에 역시 전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ㅎㅎ

마립간 2014-05-29 15:37   좋아요 0 | URL
제가 절대적 독서의 양으로 인해 부작용을 가질 만큼 독서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인 독서 부작용이죠.

충고의 해석도 저의 생각입니다. 충고를 주신 분의 뜻이 Stella.K님과 같은 생각으로 주셨을 수도 있지요.

페크pek0501 2014-05-3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너무 많이 읽지 말라" - 쇼펜하우어도 책의 부작용에 대해 언급한 바 있죠.
책만 많이 읽는 게 좋은 건 아니라는 거죠. 생각 없이 그저 남의 생각만 읽는 건 나쁘다는 것 같아요.
실제로 책을 많이 읽었으되 기본이 되지 않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책 읽기로만 사람이
완성되는 건 아닌 듯해요.
사색과 성찰이 따라야 하는 건지... 이 부분은 저도 어렵습니다. ^^

마립간 2014-05-31 08:31   좋아요 0 | URL
이 부분에 대해 pek0501님과 이야기를 나눴었죠. pek0501님과 저는 책을 읽지 않더라도 훌륭한 인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동의를 했구요.

책은 언어로 명시되었기 때문에 진리가 생략되거나 압축되었죠. 따라서 사색과 성찰이 없이 읽으면 행간의미를 놓쳐 오독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책은 사색과 성찰을 유발하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색을 동반하는 독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찰과 행동이 뒤따라주지를 않으니,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훈계만 하고 다니는 밉상(알라딘에서 제 캐릭터 아닌가요?)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제가 독서를 하게 된 이유가 사회 도피적인 면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약점을 가지고 시작했죠. 알라딘 활동 자체가 제게는 매우 예외적인 사교 활동입니다.

페크pek0501 2014-06-02 08:09   좋아요 0 | URL
아, 밉상이라고 누가 그러나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ㅋ
저는 지구 사람들의 반은 저를 좋아하고 반은 저를 싫어한다, 라고 생각해요.
다 좋아할 수도 없고 다 좋아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에요.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건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편하죠. ^^

마립간 2014-06-02 12:42   좋아요 0 | URL
pek0501님의 말씀은 저에 대한 위로와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밉상의 생각는 제 생각입니다. 누구나 훈계를 싫어하죠.

저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저를 좋아하기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사람도 있겠죠. pek0501님은 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그렇다고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지거나 저를 싫어하는 이유가 해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편하기 때문에 선택을 했다가 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 讀書日記 140528

 

<몰입의 즐거움> 서평 별점 ; ★★★★★

 내가 오랫동안 가져왔던 가치관이 ; 행복이란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고, 하는 것이 잘 할 때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가 행복이라면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어른스러움이다.

 

일을 즐길 수 있는 비결은 잘하는 것이다. 또한 일을 잘하고 싶으면 즐겨라. (펄 벅) - 누군가 내 생각과 같은 말을 했군.

 

(대개의 남자가 그렇듯이) 나는 일에서 행복을 찾기를 원했다. 알라디너와 댓글대화를 하면서 ‘몰입하면 행복해요’라고 하려 했는데, (그렇다면 몰입은 행복의 충분조건이다.) 컴퓨터 게임에 몰입한 상황을 행복으로 부르기는 어색했다. (중독과 몰입을 엄밀하게 구분하기 전까지.) 행복한 사람은 몰입을 잘 하지만, 행복하기 때문에 몰입을 잘 하는 것인지, 몰입해서 행복한 것인지 불분명했다. 그렇다고 몰입과 행복은 별개로 단순히 교집합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무엇인가 상관관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몰입에 관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뭐라고 ‘몰입’을 이야기할까?

 

일 년에 평균 네 번 정도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내려야할 역을 놓친다. 놓친 후에 대개 ‘어! 지난 역에서 내렸어야 했는데.’하고 깨닫게 된다. <몰입의 즐거움>을 읽다가 내려야 할 역을 놓쳤다. 이번에는 종착역인 다음 역에 정차하고 나서 내릴 역을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종착역이 아니었다면 몇 개의 정차역을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 (몰입에 관한 책에 몰입해서 아침 출근이 엉망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행복감과 몰입은 별개인데, (몰입할 때는 행복감을 못 느낌.) 몰입 후에 행복감이 든다. 그러니까 몰입은 행복의 원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몰입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다. 기준을 낮춤으로써 질 낮은 행복감이 가능한데, 몰입은 행복감을 줄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높여준다.

 

이 책은 상당 부분을 일에 관해서 설명하는데,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청소년 시절 내가 하고 싶던 일이 아니다. 또 내가 하는 일이 인류에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의심하고 있다. (하기야 인류에 기여를 하는 직업이 몇 개가 되고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만은 ; 배부른 소리라고. ... 하지만 지시노동자 세상의 종말을 앞둔 지금 내 직업군의 안정성도, 수익성도 미래가 밝지 않다. 곧 구조 조정이 있을 예정이다.)

 

그리고 인간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풍부하다. 인간 관계 역시 개인의 노력을 투자해야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내 경우 모든 인간 관계에 미숙한데, 오직 가족 내의 인간 관계에만 성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안해가 나에 대해 같은 판단을 하리라고 장담은 못한다.)

 

이 책은 별 5개의 평가를 주었다. (내 기억으로 실용서라 판단되는 책에 별 5개를 준 것이 처음이다.) 우선 유익하고, 재미있다. 몰입하게 만들어 출근시간을 길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권장 대상이 거의 전 국민에 가깝다. 직장 일을 힘들어하는 직장인, 학업에 힘들어 하는 학생,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 언쟁이 없는 가족(이 책에 따른 가정이 안정적이라서 언쟁이 없는 것이 아니고, 모순이 표출되지 않는 것이다. 폭발로 결론을 맺는다.) 내용이 많지 않지만 전업 주부 입장에서, 직장 맘에게.

 

생각을 정리하고 알라딘 리뷰를 보니 낮은 평점을 준 분 들의 의견은 ; 말은 쉬운데 실천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글이 책 속에도 있다. 나의 경우는 내가 몰입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모든 일에 몰입할 수 없지만, 평생 한 번도 몰입 한번 안 사람이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내가 싫어하는 분야에 몰입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몰입하는 시간의 점유율이 높아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임은 분명하다.

 

밑줄 긋기가 많다. 그만큼 인상 받은 문장이 많다는 뜻.

 

* 밑줄 긋기

p31 감정을 날조하고 조작하는 능력을 가진 동물은 인간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노래, 무용, 가면 등을 이용해 공포, 경이, 희열, 도취의 감정을 유발하였다.

p31 긍정적 감정의 전형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p31 금세기 중엽까지도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당시 사회과학을 지배한 행동주의 패러다임은 행복과 같은 주관적 감정은 너무 가변적이므로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규정하였다.

p34 하루하루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싶다는 마음먹은 사람에게 행복은 출발점으로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하다./행복의 느낌은 다른 감정처럼 사람마다 편차가 크지 않은 편이다./게다가 행복을 얼마나 느끼느냐는 주어진 상황보도 개인의 성향에 좌우된다.

p35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행복감만은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도 삶의 질을 좌우한다.

p37 심리적 엔트로피는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에서 가장 높이 나타났다. 결곡 내적 동기 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 외적 동기 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의도의 경우는 정력이 단기간에 투입되는 반면, 목표는 좀 더 장기적으로 투입된다.

p38 아이에게 자부심을 키워줄수록 좋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기대치를 낮추는 데서 얻는 자부심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p39 동양의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은 목표를 덮어놓고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저절로 생겨나는 의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궁핍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우리의 유전자는 부득불 탐욕스러워지고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을 갈망하게 되었다.

p40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p43 재능의 개발에는 집중력이 필요하다./집중력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p45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이 순간을 나는 ‘몰입沒入 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 ‘몰입’은 사람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은 운동 선수가 말하는 ‘물아 일체의 상태’,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무아경’, 화가와 음악가가 말하는 미적 황홀경에 다름아니다.

p47 그림

p48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p58 창조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언제 누구와 같이 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거기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엮어나가는 데 남달리 뛰어나다. 자연스러움과 무질서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p59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남과 어울릴 때 우리의 주의력은 외부의 요구에 의해 구조화된다.

p63 마음에 드는 경관이야말로 영감과 창조력의 샘이다./산책과 휴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관점을 바꾸고 자기의 상황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p75 그러나 청소년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건 그런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일 같지도 않고 놀이 같지도 않은 걸 할 때 가장 괴로워한다.

p76 남자가 필요한 일을 해서 얻는 만족감이 부분적으로 유전에 뿌리를 둔 것이든 아니면 몽땅 문화로부터 배운 것이든, 중요한 것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세계 어디를 가든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남자는 무능력자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p77 대부분의 여성은 바깥일을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대다수 여자들은 직장세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그래서 역설적으로 일을 즐길 수도 있다.

p79 집안일이 결혼한 여자의 자부심을 뒷받침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서적으로 크게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요리, 장보기, 자녀 뒷바라지에서는 그런 대로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집안 청소, 설거지, 빨래, 가계부 쓰기는 주부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에 들어간다.

p79 고대의 철학자들은 한가로움을 더없이 좋게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수많은 농노와 노예를 거느린 지주의 한가로움이었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한가로움만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참담함에 젖는다.

p82 역사가 존 호프 프랭클린은 일과 여가가 하나로 녹아든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기다리던 금요일이 왔구나’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은 금요일이 되면 이틀 동안 방해받지 않고 꼬박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83 저명한 심리학자 도널드 캠벨은 젊은 후학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돈에 관심이 있거들랑 과학에 뛰어들지 말라. 어떻게든 이름을 날려야 보람을 얻을 수 있겠다는 사람도 과학에 뛰어들지 말라. 명예란 것은 주어지면 고맙게 받을 일이지만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건 일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p88 이 모든 증거들은 게으름이 사람의 천성이 아님을 시사한다.

p90 몰입을 낳는 활동은 대부분 명확한 목표, 정확한 규칙, 신속한 피드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p91 복잡한 활동을 즐기려면 그런 ‘시동 에너지’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p92 그런데 몰입을 낳는 활동은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워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때가 자주 있다./수동적 여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자유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편으로 쓰이는 순간부터다.

p95 입장에 따라서는 이것을 두 가지의 전혀 상반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마르크스가 종교를 두고 한 말을 끌어오자면 여가가 ‘인민의 아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비판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아니면 뾰족한 대안이 없는 위험스러운 상황 앞에서 창조적으로 나온 반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p102 오락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회는 앞으로 직면하게 될 기술적, 경제적 난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p103 자유롭지 못하므로 의미가 없는 일과 목적이 없으므로 의미가 없는 여가로 삶이 양극화되는 위험성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p107 그러나 사회화는 행동의 틀을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의 기대나 요구에 맞게끔 사람의 의식을 조형한다.

p108 멍텅구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idiot’는 혼자 사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p109 만사가 그렇듯이 인간 관계도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 관계에서 득을 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성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사람 관계에서 마음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바람직한 질서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목표와 다른 사람의 목표 사이에서 어떤 합치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 또 하나의 조건은 다른 사람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110 우정은 늘 새로이 정서적, 지적 자극을 주어 권태나 무감각이 스며들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p111 혼자 있을 때 보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릴 때는 대체로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는 예가 드물다. 달리 깊이 사귈 만한 대상이 없는 사람은 자기처럼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데, 이 경우 우정은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p112 20세기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의 하나가 바로 삶에서 ‘좋은 섹스’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이 문제를 너무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p114 그러나 금욕도 방종도 우리에게 결코 보탬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삶의 틀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지는 것이며, 그 틀 안에서 성이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p115 인류학자들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가족의 형태가 무척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116 가정의 형태가 아무리 변화무쌍하게 펼쳐져 왔다고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곧 성이 다른 두 어른이 결합하여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자식에 대해 책임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는 사실이다.

p118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우애가 돈독한 가정에서는 오히려 언쟁을 많이 벌인다. 정말로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피하기에 급급하다./가정에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특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칙과 자발성, 규율과 자유, 높은 기대와 무조건적 사랑의 공존이다.

p123 차이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낯선 것과 이국적인 것에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현재의 다원주의 추세는 이방인의 낯섦을 줄이는 한 가지 활로가 될 수 있다.

p124 사람들이 공동체 안이나 바깥의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도우면서 평화롭게 생업에 종사하였던 시절은 그 어느 지역에서건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바꿔 말하면 화가 노먼 록월이 표사한 미국의 이상적 소도시상은 그가 그린 추수감사절 저녁 식탁에 모여앉아 마소를 지으며 기도를 올리고 있는 혈색 좋은 가족의 자태처럼 현실 속에서는 오히려 예외적인 모습이었다.

p125 사색과 행동을 동시에 추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p126 창조성이 뛰어난 개인을 연구하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은 /p127 개인성이 강한 예술의 영역에서도 교제 능력은 중요하다.

p133 쾌활함을 행복의 척도로 삼을 때만 옳다. ...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몰입 경험에서 맛볼 수 있는, 밖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내면의 즐거움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p135 일반적으로 직장 일을 고역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작용한다. 첫째는 하나마나한 일을 한다는 불만이다. ... 둘째는 지겨운 일을 밥 먹듯이 되풀이해야 한다는데서 느끼는 불만이다. ... 셋째는 직장일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는 점이다./p136 일반인의 상식과는 달리 사람이 자기 일에서 만족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보수나 안정성보다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인이다.

p136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백번 낫고 또 의당 그래야 옳다./p138 직무수칙에 규정된 수준 이상으로 생각을 하고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어느 한구석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직무에 임하면서, 이런 조치는 과연 필요한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면 더 잘,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할 수는 없는가, 어떤 조치를 곁들여야 내가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생길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p139 같은 정력을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데 쏟아붓는다면 일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커질 테고 직장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p140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자 명확히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재, 지금의 방식이 업무에 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수동적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셋째, 대안을 모색하면서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실험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p141 외적 스트레스(혼동을 피하는 뜻에서 ‘부담’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가 반드시 부정적 경험을 낳는다는 법은 없다.

p142 책임 있는 지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별하는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

p143 중요한 것은 일종의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전력을 개발하는 일이다./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일이다./그 다음은 처리해야 할 일의 성격과 자기 실력을 면밀히 비교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p143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하나라도 답을 얻을 수 있으면 스트레스만 잔뜩 안겨줄 것으로 예상되었던 상황이 몰입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탈바꿈된다. 하지만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놀라 얼어붙은 토끼처럼 부담스러운 상황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p144 통제력을 잃지 않아야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p144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해진 작업 규정에 따라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단순한 일을 하더라도 창조적인 사람들을 본받아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바꾸면 엄청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p146 삶에 질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영역이 일 외에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남들과 맺어야 하는 인간 관계다.

p146 사람의 집중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서 일단 어떤 한 가지 목표에 주의를 빼앗기면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p147 좀더 현실성이 높은 방안은 일에서 얻는 보상과 인간 관계에서 얻는 보상의 의미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p147 사람들은 입만 열였다 하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마음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남자는 더더욱 그렇다./어느 집단에서든지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은 대체로 두 가지다. ... 돈이 제공하는 물질적 에너지며,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정신적 에너지다./p148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 점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p149 오늘날 가족 관계에서서 몰입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활동에서처럼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p150 나는 결혼 생활에서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게 대화라고 확신한다. ; 섹스도 대화다.

p150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체험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런 값진 체험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정성이다.

p151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업무 만족도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p154 대화를 유익하게 나누는 비결은 따로 없다. 먼저 상대방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좋은 대화는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재즈 연주와도 같다.

p159 수동적으로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한다./문제는 물입 상황에 자주 빠졌을 때 실제로 주관적 경험을 끌어올리느냐 하는 것이다.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p164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p165 창조적인 사람은 대체로 자기목적성을 중요시한다.

p168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과 관심을 키우는 연습을 해오지 않은 사람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이 점에 신경을 써야 한다.

p169 삶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을 통제하는 힘이다.

p170 얼마나 스트레스를 느끼는가는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보다는 우리가 관심을 다스리는 방식에 좌우된다. 신체적 고통, 경제적 손실, 사회적 고립의 파급효과는 우리의 관심도에 따라 달리진다.

p175 자기목적성이 뚜렷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의식에서 무질서를 크게 줄인다. 많이 가지려고 하고 자기 영토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된 사람은 사회 전반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p175 썩은 사회를 등지고 초연하게 혼자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p175 “우주의 미래가 내 한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걸 비웃어라.”

p178 자아의 ‘쓰레기 같은 부분’을 인간 조건의 심오한 통찰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건 작가만이 아니다./말은 쉬워도 행동에 옮기기란 당연히 어렵다.

p180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는 게 좋다.

p181 반면에 아무리 하기 싫은 일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는 생각이 들면 덜 괴롭다.

p182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애를 가진 사람은 위대하다게 나의 신조다. 운명애는 살아갈 날에서도, 살아온 날에서도, 달라지지 않기를, 아니, 영원히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세다. 불가피한 것을 견디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태도다.” “나는 피치 못할 일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법을 자꾸자꾸 배우고 싶다. 그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p183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사랑할 줄 알 때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한 니체의 말은 백번 옳다.

p184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차츰 즐겨하면서 문제가 싹텄다./같은 이치로 즐거움을 주는 목표를 찾아나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세상 전체의 무질서를 줄일 수 있는 목표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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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5-28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쓰고 떠오른 생각 하나 추가 ; 몰입과 반복은 다르다. 몰입은 실력과 삶의 질 향상을 가져오지만, 반복은 그런 것이 없다.

페크pek0501 2014-05-3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183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사랑할 줄 알 때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한 니체의 말은 백번 옳다."
이 문장을 읽으니 서머싯 몸의 글이 생각나네요.

정신 수양을 위하여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매일 두 가지씩 하는 게 좋다고 충고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어떤 현자의 말인데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 나는 그 가르침을 아주 꼼꼼하게 따르고 있다. 날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밤에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 서머싯 몸 저, <달과 6펜스>, 16쪽. (제 글에서 복사붙이기 함.)

밑줄 긋기를 작성하시면서 몰입의 즐거움을 누리셨을 듯합니다.
저도 해야겠어요. 책을 읽어도 생각나는 글은 한정되어 있는데, 제가 제 글에 인용하기 위해 쓴 글만 생각나더라고요.
나머지는 생각이 잘 안 나요. 밑줄 긋기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글을 훑어보는 게 아니라
글을 씹어 먹는 작업이 제게 필요한 것 같아요. 요즘은 책을 읽어도 내용이 생각나질 않는다는... ^^

마립간 2014-05-31 08:02   좋아요 0 | URL
제가 독서 시작 이전에 들었던 내용이 책을 3번 읽어라입니다. 실천을 못하고 있죠. 워낙 책 욕심이 많아 다른 책을 읽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옮겨 쓰는 초서抄書를 하면서 얼추 책을 2번 읽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알리딘 서재 활동을 하며서 인용 문구 찾기도 편하구요.

독서 방법으로 초서를 적극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