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701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 많은 예화가 있지만 나의 개인적 경험을 섞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 어느 때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편지로 사연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는데, 흉악 범죄가 있었고 방송에 범죄에 대한 방송이 많이 나온 직후에 소개된 사연이었다.

 

사연은 ; 어느 낯선 사람이 찾아와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주부는 그 객客이 불쌍하여 먹을 것을 차리고 그는 그 동안 잠이 들었다. 객은 어느 정도 잠을 잔 후 식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내용을 요약했지만, 당시 사회자는 글을 읽는 동안 눈물을 훌쩍이기도 했고, 다 읽고 난 후 탄식이 이어졌다. ‘어찌하다가 사회가 이리 각박해졌을까!’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가 훨씬 인간적인, 다정다감했던 시대다. 이후 내가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러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어른이 없다는 (혹은 남자가 없다는 이유로) 문적박대를 당했다. 완력이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다시 오라고. (당시에는 어이없었지만, 지금은 보편화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방송에서 흉악 범죄를 줄이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는데, 연구에 따르면 열린 마음과 열린 행동이 흉악 범죄를 줄인다는 것이다. 즉 낯선 사람을 집안으로 들일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흉악 범죄를 줄인다는 것이다. 사회자가 되물었다. 그렇게 열린 행동을 하다가 (마치 <방황하는 칼날>의 범인과 같은) 흉악범의 피해자가 되면 어떡해요?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얼버무리면서 대화는 끝을 낸다.

 

나는 진보의 내재적 모순을 느낄 때가 많은데, (‘관용은 불관용까지 관용해야 하는 것인가’처럼,) ‘내집단의 단결은 외집단에 배척’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는 내부적 형제애와 외부적 호전성을 비교하는데, 호전성이라는 과도한 상황과 비교한 잘못된 연구라고 생각한다. 즉 옆에 굶어 죽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동감이 강해 도와줄 정도의 진보적인 마음가짐은 먼 곳에 사는 외모가 우리와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 동감과 상충하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p295 “내집단에 대한 충성과 희생, 외부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 내부적 형제애, 외부적 호전성은 동일한 상황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의 많은 생각은 전적으로 틀렸다. ; 나는 틀렸다는 생각에 동감할 수 없다. 내집단에 대한 충성과 희생, 외부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 내부적 형제애, 외부적 호전성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생각한다.

 

<바른 마음> p46 사냥 파티 ; 여기서는 내부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 이웃 부족의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죽인다.

 

* ‘우리’라는 심리를 가장 강조는 집단을 고르라면, 군軍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동료의 도움이 전제적인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우리’라는 내집단의 강조의 역효과는 ‘우리’에 들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들’이라는 ‘낙인’을 남기고 내집단의 결속력만큼 낙인 받은 자들을 가혹하게 대하게 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군의 관심병사는 군 조직의 생태적, 구조적 문제로 귀결된다. 특히 육체적 가혹 행위나 언어 가혹 행위보다 부류의 배제는 당사자에게 더 가혹할 수 있다. 특히 폐쇄된 집단이라면 그렇다.

 

<종교는 왜 과학이 되려하는가>  p87 이것은 아니러니하다. 특별한 창조에 대한 믿음은 신자들이 생물학적 적응도가 더 높은 삶을 살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의식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특별한 비결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지 않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 ‘우리’라는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이 생존을 높인다면 우리 인류는 영원히 착각하게 되는 과정을 밟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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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日記 140630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서평 별점 ; ★★★★★

 생명 개체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는 무엇일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답이거나 가장 정답에 가까운) 답은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서 읽은 동적 평형이다.

 

* 학계 http://blog.aladin.co.kr/maripkahn/4324154

 

그럼 산山이나 강江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한 정체성 자체에 대한 답은? <소수공상>에서 읽은 상태공간이다.

 

* 독서일기 131120 http://blog.aladin.co.kr/maripkahn/6703634

 

인식의 정체성을 뭘까?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을 통해 나는 (내가 만든 용어) ‘상태의식’이라고 답한다. (인식도 존재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론으로 존재한다.)

 

수학의 토대없음은 <수학의 확실성>에 잘 설명되어 있고, 물리학의 토대없음은 <온도계의 철학>에 도덕의 토대없음은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에, 인식 특히 정형 stereotype으로 분류되는 인식의 토대없음이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짓기>에 잘 설명되어 있다.

 

본질의 본질은 무엇일까? 본질의 정의는 네이버 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본질本質 ;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2.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 3. <철학>실존(實存)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

 

통상적으로 본질은 시간적으로 본디부터 갖고 있고 영속적이며, 공간적으로 분리가 안 되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런 통상적인 의미에서 ‘토끼rabbit’ 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화론에 따르면 토끼의 (사전적 의미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토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개념도 변할 수 있다.) 토끼의 본질을 묻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적 사고가 적용되어야 할 사실에 플라톤-노자주의가 잘못 적용된 것이다. 게다가 수학도 상대주의 시각이 있다.

 

사람의 (하찮은?) 지성으로 인해 보수적인 사람은 본질주의자이며 인종주의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과학에 근거하는 본질주의자는 인종보다는 인간, 인간 보다는 생명이라는 것에 가치를 둘 것이다. (이리하여 플라톤-노자주의자는 서로 양兩 극단인 디오게네스-양주주의와 만나게 된다.)

 

나는 보수주의자로서 규칙을 깨는 것이 싫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규칙을 추구하고 그 규칙을 받아들이기 전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규칙이 절대적인지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 만약 절대적이라고 판정이 나지 않는다면 그 규칙을 받아들이기 위해 불완전한 규칙의 변화를 받아드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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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기침 님께서 주신 의견에 대한 저의 견해

 

* 독서일기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52817

 

1-1) 님도 당연히 아시겠지만 플라톤이 본질주의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본질주의자입니다. 둘의 차이는 단지(단지라고 하기에는 틈이 많지만요) 본질이 개체를 초월해 있는지, 개체 내에 존재하는 지입니다.

 

저도 일정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플라톤-노자주의는 원리(이데아 idea)에 의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세상을 통해 원리가 보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유해서 설명하면 플라톤-노자는 주리론主理論이고,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주기론主氣論에 해당합니다. 저의 이런 설명이 푸른기침 님께서 ‘본질이 개체를 초월해 있는지, 개체 내에 존재하는 지와 같은 의미입니다.’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왜 아리스토텔레스를 나는 본질주의자라고 하지 않는가?

제가 아리스토텔레스-장자를 본질주의자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생명의 진화론 때문입니다. 플라톤-노자주의자에게 토끼rabbit가 존재하는 것은 토끼 이데아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자에게 토끼가 생긴 이후 토끼의 개념 즉 본질을 부여했습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본질주의자이지만,) 저는 본질의 개념, 정의는 무엇인가를 되묻습니다. 본질은 변화할 수 있는가? 본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시겠지만 재귀적 질문을 선택이 곧 답입니다. 저는 변하지 않는 것(최소한 우리 우주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는 변하지 않는 것)을 본질로 선택했습니다. 토끼에 관해 플라톤-노자주의 개념 적용은 틀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개념 적용은 맞지만, 저의 본질의 정의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푸른기침 님이 사용하신 ‘본질주의’ 개념에 이성주의/합리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1-2) 어찌보면 서양 철학은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한 몇 개의 사조나 철학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본질주의입니다.

 

어느 과학철학자가 플라톤 이후 근세까지 서양 학문이란 플라톤이 벌려 놓은 일을 뒤처리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1-3) 물론, 님께서 플라톤을 본질주의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단기적 맥락으로 대응시킨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대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동치同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제 정형의 1) 플라톤-노자, 아리스토텔레스-장자, 디오게네스-양주2) 본질주의, 단기적 맥락, 장기적 맥락이 동치라면 한 개의 정형이 다른 정형의 틀에 흡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따로 쓰고 있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동치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일맥상통하는 면을 대응이라고 하였는데, 더 적절한 용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두 정형의 연결에 관해 불확실한 면 때문에 어색함을 느낍니다.

 

2-1) 노자의 '도'를 플라톤의 이데아에 억지로 쑤셔 넣는 학자들도 상당히 많은데, 이는 노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됩니다. 道라는 어감 때문에, 도덕경의 첫 구절 때문에 오해하기 쉬우나 道는 초월적이고 항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도道

저는 도가 이데아를 초월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기理氣론에서 주희는 주리론을 주장하면서 리理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황은 주리론을 주장하면서 리는 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리는 변하는 것일까요,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현재로서는 과학의 영역( 즉 반론이나 검증이 이뤄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선택이 존재하는 철학의 분야입니다. 주희가 주리론의 리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주장했다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순환논리의 모순이죠.

 

도가 변하는 것인가 아닌가? 저는 여기도 (과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선택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도를 뭐라고 했건 간에 저는 도를 변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그와 같은 선택을 한 배경에는 도와 악덕惡德의 관계 때문입니다. 주리론이든 주기론이든 세상을 총괄하는 것이 도인데, 도에서 악덕이 발생하는 것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도가 변하여 악덕이 발생한다면, 악덕, 악인을 포용해야하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말하는 도는 더 포괄적으로 multiverse와 metaverse를 관통하여 변하지 않는 것으로 지칭합니다. 제가 이렇게 임의적인 정의 하에 사용하여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를 초월적이고 항구적인 것으로 정의했습니다만, 도가 항구적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악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남습니다. 저는 여기에 도의 운행, 변화로 설명하고, 변화하는 도를 포함하면 도는 변화하는 것이죠. 저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지지합니다. 이기가 갈라지기 전의 것을 도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도가 이기로 갈라졌다면 도는 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2-2) 노자는 본질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有와 無의 대립 관계로 세상을 파악하는 비본질주의자입니다.

 

어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장자를 연결시키는 것도 웃길지 모르겠습니다. 비본질주의/비이성주의의 부류의 명칭으로 저는 디오게네스-노장사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노장사상은 일부는 노자, 장자와 관련이 있고, 별개의 내용도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 역시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의 주장이 제 분류로는 다른 곳에 속하기도 합니다. (동양사상은 서양사상보다도 더 명확한 구분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와 혜시의 ‘범애만물 천지일체 汎愛萬物 天地一体 (만물을 다 같이 사랑하라. 천지는 한 몸이다)’라는 것은 장자와 관련된 것이지만 저의 정형에는 디오게네스-양주주의에 해당합니다.

 

 

저는 과거에 플라톤주의자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플라톤-노자주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플라톤주의라고 하면 제가 이야기하고픈 개념이 아니라 플라톤의 책에 나온 내용 그대로를 신봉하는 의미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제가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따라서 저의 플라톤-노자주의는 본래 플라톤, 노자가 주장했던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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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가 만든 개념을 예화로 설명드리지요.

 

예화 ; 동전을 100번 던졌더니 앞면이 51번, 뒷면이 49번 나왔다.

 

이 예화에 대해 플라톤-노자주의는 확률 1/2에 맞춰 거의 반에 가까운 횟수로 앞면, 거의 반에 가까운 횟수로 뒷면이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자는 앞면과 뒷면이 거의 반반씩 나와 확률 1/2을 사건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디오게네스-양주주의자는 두 주장을 (반대하기보다) 무시한 체, 비록 앞뒷면이 각각 반반 나왔다고 하여도 위 사실로 5번째가 앞면이었는지, 101번째가 뒷면이 될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저의 정형의 핵심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명은 은유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푸른기침 님의 글을 통해 부적절한 은유였다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1) 플라톤-노자주의자 ; 세상에 앞서 원리가 먼저 존재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세상(multiverse)에서 우리와 다른 소수prime number가 존재할 수 있는가?)

2)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 세상이 있고 나서 원리가 생겼다.

3) 디오게네스-양주주의 ; 세상에는 원리(이성)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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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日記 140627

 

<너무나 인간적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당신에게> 서평 별점 ; ★★☆

 <후흑厚黑>을 읽고 내가 뭐가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제목에 홀려서 구입하고 읽은 책. 내용은 별로 없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면 읽으려면 나름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다다익선多多益善, 과유불급過猶不及은 모든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떤 상황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어느 사자성어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될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다다익선이 더 많이 사용될 것 같다. 과유불급도 정점頂點을 지나기 전까지 다다익선의 형태를 띨 테니까. 하지만 보통의 사람의 경우 과유불급의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것은 어느 글에서 읽은 것이고 어느 정도 일반화가 가능하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느끼는 바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일을 판단하기 위해 플라톤-노자주의,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디오게네스-양주주의를 사용한다. 이 정형은 나의 ‘사람과 쥐’의 글에서 본질주의, 단기적 맥락, 장기적 맥락도 1:1 상응한다. 플라톤-노자주의는 본질주의로,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는 단기적 맥락으로, 디오게네스-양주주의는 총괄적 맥락주의와 일맥상통한다. (<후흑> 내용에는 상당부분이 디오게네스-양주주의를 지향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도 많다.)

 

* 사람과 쥐 http://blog.aladin.co.kr/maripkahn/6925962

 

이 세 가지 중에서 세상일에 어느 것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정형은 무엇일까? (역시 나의 개인적 정형을 이용해 연구된 글을 읽은 바 없어 나의 개인적 견해가 되겠지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가 가장 흔하게 사용된다. 우선 생명의 진화도 단기적 맥락에서 진행한다. 주위를 돌아보면,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는 사람이 흔하다. 왜일까? 나는 자연이, 이 사회가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정형이 적용되는 상황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환경에 맞는 가치관이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해 그 비율만큼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중점을 두거나 인류애라는 총괄적 관점에 중점을 두는 것이고 이보다 현실적인 것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본질주의(플라톤-노자주의)라면, 디오게네스-양주주의(아웃사이더)라면 생존이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세상을 힘들게 살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양극단의 실천적 선택은 ‘사람과 쥐’ 우화에서처럼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된다. 맥락의 공간과 시간의 무한한 연장은 본질이 될 것이다. ‘Extremes meet’)

 

* 밑줄 긋기

p17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라 ; 필요한 사람에게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우리는 아직 지성이 이 정도 밖에 성숙되지 않은 것이다.

p70 사랑과 존경은 동시에 얻을 수 없다. ; 나는 과거에 사랑보다 존경을 앞세웠다.

p77 정의롭고 진실하게 행동하라 ; 정의롭고 진실하게 행동하려 해서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p78 망각이라는 약 ; 망각이 약이든 아니든, 나는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인데, 40년 동안 고쳐보려 했지만 잘 안 된다.

p82 선하게 살면 장수의 축복을 누린다. ; 경험적으로 전혀 동감할 수 없다.

p91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야단법석을 떨지 마라. ; 경우에 따라서는 ‘미끄럼틀’ 정형이 맞기도 한다. 사소한 시작이 큰 결과를 낳기도. 이런 일이 빈발하지 않더라도.

p111 윗사람의 비밀은 듣지도, 말하지도 마라/p112 윗사람과 경쟁하지 마라 ; 윗사람의 부도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른 척 지나가는 것은 개인에게 이익이 되고 손쉽다. 그러나 옳은 것인가?

p114 원칙을 지키는 사람과 어울려라 ; 쉬운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어려운 원칙까지 지키는 지는 미리 알기 어렵다. 또한 원칙만을 지키는 독불장군일 수도 있다.

p115 독불장군이 되지 마라 ; 자주 내가 독불장군인지, 지조와 신념을 지키는 것인지 판단이 안 선다.

p119 유연한 태도를 길러라 ; 잘 안 된다니까!

p126 충분한 능력을 갖추되, 적당히 보여주어라 ; 현대 사회는 각성제를 복용할 정도 자신을 희생해야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있는 성과 사회다. 충분한 능력을 갖추기도 적당히 보여주기도 어렵다.

p171 현실감각이 없으면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된다. ; 실감하는 바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당대에 조롱받던 사람이 후대에 위인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물론 내가 위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p217 잘 모를 때는 안전한 길을 가라 ; 그래서 우리나라 청년들이 고시에 매달리지 않는가.

p229 모든 일은 결과로 평가 받는다 ; 그래서 성과 지상주의인 우리나라가 이 모양 아닌가. 현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불편하다.

p239 확신이 없으면 행동에 옮기지 마라 ; 나는 나의 삶조차 확신이 없다. 그러면 삶을 중단? 나는 기우를 갖고 있다. 내일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p246 크게 성공하려면 오래 준비하라 ; 크게 성공한 사람은 오래 준비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래 준비한 사람이 반드시 크게 성공하지는 않는다. 가끔 환경이 바뀌어 그 오랜 준비가 쓸모없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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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6-27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인간적이지만...>은 저도 읽었는데 점수가 좀 짜군요.ㅋ
저 같은 경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좀 더 좋게 읽었던 것 같아요.
음미해 볼 말도 많고.
저는 옛 성현의 말씀이니 왠지 별점을 높게 줘야할 것만 같더라구요.ㅋ

마립간 2014-06-27 12:55   좋아요 0 | URL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음미하면서 (밑줄 긋기 이외에도) 반론만 머리에 잔뜩 떠오르더라구요.^^ '세상을 보는 지혜'를 읽으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stella.K 2014-06-27 13:29   좋아요 0 | URL
헉, 죄송합니다. 생각해 보니 <세상을 보는 지혜>였네요.
하도 오래 전에 읽어 헷갈렸어요.ㅠ
저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그 어렵다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정의, 도덕 이런 것만으로는 살아지지 안 잖아요.

저도 엊그제 <관상>을 봤는데 이종석이 바른 말하다가 눈을 잃은 것을 보면서
확실히 정치와 정의는 다른 건데 저 나이라면 저럴 수 있겠구나 싶더군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건가를 생각하면
이런 책은 확실히 읽어 줄 가치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마립간 2014-06-27 14:05   좋아요 0 | URL
저는 안 그렇게 사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정의와 도덕만으로 살겠다는 사람은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에 불편해 합니다.

저도 관상을 며칠전에 봤는데, 이종석의 역할에 대해 너무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42601

푸른기침 2014-06-2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짧은 지식과 편견으로는 노자주의를 본질주의와 연결시키지 않고, 오히려 비본질주의와 관련짓는 편이지만, 마립간님의 글을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특히 '인간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지런히 독서하시는 모습이 마냥 부럽습니다.^^

좋은 저녁요~~~

마립간 2014-06-28 07:52   좋아요 0 | URL
노자와 본질주의 연결은 제가 동양 철학에 관한 교양 도서를 읽고 제 나름대로 판한 것입니다. 처음에 알라딘 서재에서 언급했을 때, 누군가 오류를 지적하거나 반론의 댓글이 있었으면 했는데, .... 댓글이 적은 서재라서 그런지, 이에 대해 댓글의 없어 다른 분의 검정 없이 제 생각을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푸른기침 2014-06-28 11:41   좋아요 0 | URL
짧은 소견 몇 자 더 적습니다.^^ 물론, 제가 철학에 그리 능통한 지식을 갖지 못해 나름 지금까지의 오독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 치우친 생각일 수 있을 겁니다. 절대로 마립간님의 글에 딴지거는 것 아닙니다. 전 마립간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ㅎㅎ 그냥 가볍게 읽어 주세요.

1. 님도 당연히 아시겠지만 플라톤이 본질주의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본질주의자입니다. 둘의 차이는 단지(단지라고 하기에는 틈이 많지만요) 본질이 개체를 초월해 있는지, 개체내에 존재하는지입니다. 어찌보면 서양 철학은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한 몇 개의 사조나 철학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본질주의입니다.
물론, 님께서 플라톤을 본질주의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단기적 맥락으로 대응시킨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대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2. 서양철학도 잘 모르지만, 동양철학은 더더욱 잘 모르는 저입니다.
노자의 핵심 중의 하나는 당연 '道' 이겠지요.
노자의 '도'를 플라톤의 이데아에 억지로 쑤셔 넣는 학자들도 상당히 많은데, 이는 노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됩니다. 道라는 어감 때문에, 도덕경의 첫 구절 때문에 오해하기 쉬우나 道는 초월적이고 항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노자는 본질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有와 無의 대립 관계로 세상을 파악하는 비본질주의자입니다. 물론, 동양철학의 특성상, 아니 어쩌면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이렇게 노자를 보는 것만이 꼭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원전을 더 풍부하게 만드니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플라톤과 아리스트텔레스, 노자, 장자를 묶어 작은 페이퍼 하나 써 보겠습니다. 물론, 기대는 안 하셔도 좋을 만치 형편없는 글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제 댓글이 괜히 마립간님을 언짢게 하지는 않았을까 조금 걱정이됩니다.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고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꾸벅~~


사족 : 벌써 읽으셨을지도 모르지만, 노자에 대한 나름 괜찮은 책이 있어 소개드립니다. 얼핏 떠오르는 책이 이것밖에 없네요.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마립간 2014-06-29 15:57   좋아요 0 | URL
내용이 많아 페이퍼로 올렸습니다. 페이퍼 제목에 닉네임이 언급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도 계시던군요. 불편하면 제목에서는 닉네임을 삭제하겠습니다.

제가 서재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저의 생각을 다른 분을 통해 검증받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에게 일부 논쟁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저는 저 의견에 지적/반론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은 읽지 못했습니다. 좋은 책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6-30 09:37   좋아요 0 | URL
제가 읽고 있는 책에서는 도가로 대표되는 노자,장자의 도는 자연으로의 회귀'에 방점을 찍었더군요. 도가 이전 공자, 맹자는 유위有爲를 주장하며 인간이 개입해서 세상을 좋게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도가는 無爲를 주장합니다. 자연 상태 그대로가 가장 완벽하다는 주의더군요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뜯어고칠려고 하다가 일을 그르친다고 말합니다. 아, 이거 노자 장자 공부 좀 해야 하는데..... 하여튼 제가 읽는 책에서는 그리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립간 2014-06-30 11:58   좋아요 0 | URL
곰곰발님, 도가 및 황로사상은 전체적으로 디오게네스-양주주의적인 면이 있습니다. 무위는 ‘무위이무불위 無爲而無不爲 ; 애써 하려고 하지 않지만 모든 일이 때에 맞게 잘 풀린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는 양주대신에 디오게네스-노장사상주의라는 표현을 했었지요.
 

 

* 讀書日記 140626

 

<방황하는 칼날> 서평 별점 ; ★★★☆

 <용의자 X의 헌신>에 감동한 이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신뢰를 갖고 읽게 된다. 이 책은 글샘 님의 독후감을 읽고 읽게 되었다. 독후감에서 마지막 반전이 있음을 이미 알고 읽었기 때문에, 읽는 내내 반전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읽었는데 도무지 빈틈이 없었다. 만약 반전이라는 것이 있다면 A에 관한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A가 반전이 되기 위한 복선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눈에 띠질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A가 반전이었고, 여기에 복선이 있었구나라고 감탄했다. (이 장치가 이 소설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추리 소설이라기보다 범죄 심리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듯.

 

이 책의 흡입력은 소설을 잘 안 읽는 내가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하루 만에 다 읽게 만들었다.

 

(작가가 의도했겠지만,) 이 사건의 줄거리를 만드는 악덕/불법에 대한 (관용/용서를 포함하여) 처벌/징계와 그 방법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우선 악덕을 판단하는 윤리/도덕의 기반이 허약하다. 법은 한쪽은 윤리/도덕에 한 다리를 걸치고 다른 한쪽은 현실적인 실천 가능성에 다른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모양새다. 그리고 기반도 허약하지만 구조가 양 다리를 걸치고 있는 그물 모양이라 허점이 많다.

 

청소년 범죄는 청소년이라는 관용해야 하는 미숙함과 이미 행해진 징계해야 하는 행위 사이에 각각의 관점이 존재하고 두 관점의 비중을 측정할 과학적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지과학 관점에서 나는 도덕성에 관한 (어느 책에서는 코드라고 부르기도 한) 모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도덕성 모듈이 없는 사람은 사이코패스 psychopath나 소시오패스 sociopath가 된다. 이들은 보통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완전 격리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사형 여부는 또 다른 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도덕성 모듈이 미숙하지만 이후 성숙할 사람과 모듈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과학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관계, 즉 network이므로 앞으로 과학이 발전해도 명확한 구분은 불가능하리라 추정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의 판단은 개인/집단의 인식 상태에 따라 제도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가 정해놓은 법규가 과연 타당할까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 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타당한 것이고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타당하지 않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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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기침 2014-06-26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과 도덕이 분리된 이래, 법은 점점 구체화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법이 보통 사람에게는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가진 자(?)가 아닌 많은 사람이 타당하게 느껴지는 법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꾸벅^^

마립간 2014-06-27 07:41   좋아요 0 | URL
저는 법의 기원이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통제/통치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 기원적인 면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01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09661

마녀고양이 2014-06-30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성의 발달과 사회적 격리는 제가 관심이 많은 논점입니다.
성숙과 미성숙은 같은 스펙트럼 상에서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되고, 그래서 어느 점수가 성숙이다 판단하기는 어려우므로 그것으로 사회적 격리를 결정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도덕성의 발달이 타고난 뇌의 기능이 아니라는 점 역시 판단의 어려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전두엽의 어느 부분의 기능 부족이라고 말을 하지만, 과연 타고난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가 많은지, 아니면 어린 시절의 양육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서 뇌의 기능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는 말이죠.

다른 얘기인데,
ADHD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병원에서 약 처방을 많이 받는데, 아이들의 산만함은 많은 경우에 우울의 또다른 행동화이거나 반항이나 회피라는 점에서 이 부분을 과연 약으로 조절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약 처방은 효과가 있고, 아이들이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하면서 그에 따라 학습 효과가 늘어나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면 결과적으로 ADHD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 효과가 생기기도 합니다. 단,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너무 쉽게 약만 처방하던가 또는 심리상담만 하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 유사하다는 점이예요. 도덕적 발달도 비슷하게 바라보고 있답니다, 전.

그래서 법규의 타당성과 함께 관심 어린 관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마립간 2014-06-30 12:06   좋아요 0 | URL
위 독후감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도덕성 발달, 그리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을 구분할 과학적 방법이 존재할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 언급되지만, 도덕성 발달은 유전과 양육, 그 어느 한쪽도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의 저의 결론은 모순된 상황을 살아갈뿐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관용 ;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가 관용해야하는거에 대해서는 임의적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