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901
<이순신과 임진왜란 2> 죽더라도 천자의 나라에 가서 죽겠노라 서평 별점 ; ★★★☆
이 책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 대한 묘사가 없다. 책의 앞부분은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전쟁 및 전투에 대비하였나가 서술되고 있다. 무협 영화나 스포츠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무술을 연마하는 또는 스포츠를 연습하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산악을 달리거나 윗몸 일으키기, 무거운 것을 끄는 장면 등. 우리는 모두 안다. 이런 준비 과정이 고통스럽고 매우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하지만 영화에서는 짧게 처리한다. 이 괴리는 현실과 사람의 욕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성과를 위해서는 수고가 동반된 긴 준비 시간이 필요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고와 지루함이 동반된 준비 기간을 짧게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사실을 반영하기보다 사람들의 욕망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선조의 이야기와 육지 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결과는 우리나라 군대가 왜군에게 패한다. 나는 여기서 또 하나의 괴리를 본다. 직책의 권한과 능력의 괴리! 지금도 마찬가지, 군대의 통수권은 최고 권력자에게 있다. 즉 조선의 군대의 통수권자는 왕에게 있다. 하지만 왕이 전지전능, 만능일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군사학의 대가이지만, 최종 결정은 선조가 하며 결정 범위도 넓다. 지금은 대통령을 국민 투표로 선출한다. 어떤 대통령을 뽑아야 할까?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아니면 경기 침체를 벗어나게 하고 극빈층을 구호하는 사람, 아니면 군사, 외교적으로 뛰어난 사람? 미래는 알 수 없다. 전지전능 만능인 사람도 없다.
설민석 선생님의 강의에 의하면 ; 조선은 일본에게 기습을 당한 것이 아니다. 수차례 침약의 뜻을 비쳤지만, 아무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 준비를 하지 않은 이유는 준비를 강행했다가 만약 일본이 침략이 없으면 본인만 징계를 받게 된다. 준비를 하지 않아 일본의 침략이 실제 있다고 해도 (사실이 그랬지 않는가) 다른 모든 사람이 준비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으니 본인만 처벌 받을 이유가 없다. (역시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개인을 이익을 위해서는 게임의 이론에 따라, 그리고 ‘무리짓기’ 법칙에 따라 전쟁 준비를 하지 않는 다수의 무리에 속하는 것이 안전하다.
이 책의 글쓴이는 끊임없이 시문詩文놀이를 비판한다. 그리고 경經과 영營을 강조한다. 하지만 과학 지식이 지금과 같이 축적되지 않은 시대에서 시문과 같은 인문학은 전체적인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나의 의문 ; 시문놀이와 인문학은 어떻게 다른가? 경經와 영營을 공부한다는 것이 현대의 실용개발서에 집중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 밑줄 긋기
p168 그는 노모에게 아뢰기를 “생각하옵건대, 충효는 양전兩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 대개의 충효는 동전의 앞뒷면으로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마치 자유와 평등이 동전의 앞뒷면이듯이. 그러나 동전의 앞뒷면을 동시에는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양전할 수는 없는 것 같다.
p185 송상현이 주장한 도리론은 유교적인 가치관이다.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간에도 도리론을 따지지 않는다. 오직 군사학(병법)으로 대결할 뿐이다. ; 이런 사실 자체가 전쟁을 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p186 사실적 판단, 도리적 판단 ; 나는 사실판단, 가치판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p207 신립은 평소에도 성질인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신의 위엄을 세우니, 수령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백성을 동원해서 길을 닦게 하고 대접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니, 대신의 행차도 이것만은 못하였다.
p267 선조는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고, 자리를 옮겨서 문신으로서의 공을 쌓게 한 다음 다시 군의 지휘를 맡겼는데, 이들은 그 후로도 비슷한 실책을 되풀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