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50225
<남명 조식 칼을 찬 유학자>
- 칼을 찬 유학자
알라딘 배너에 책 광고가 눈을 끈다. “스스로 복종한 자는 독재자의 공범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검劍이다. 내가 갖고 싶은, 상상하는 검은 양날이다. (지금 검색을 하면 도刀와 검을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예전에 내가 찾아 본 바에 의하면 도는 한쪽 날만 있는 것, 검은 양쪽 날이 있을 것으로 봤다.) 모양은 일一자이고 칼의 날밑(格, 古銅)이 없거나 작은 것이다. 한국의 정통 검보다는 중국 검이다. 실제로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것은 가격도 만만치 않고 무기류로 분류되기 때문에 법적 곤란함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의 하나가 ‘해산선학’과 ‘포의풍류도’이다.
* 해산선학 http://blog.aladin.co.kr/maripkahn/508104
칼의 기원에는 폭력성이 담겨져 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기원과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칼은 결기와 함께 절제를 느끼게 한다. 이 상징을 나는 불의 不義에 대한 저항과 의지로 여긴다. “스스로 복종한 자는 독재자의 공범이다”인 것과 같이 ‘불의에 저항하지 않다면 역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틈틈이 행동하지 않는 나를 돌아보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변명은 이러하다. 누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무오류의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정의-불의를 논하기 전에, 누가 정의-불의 판단 대상(수직적 가치관)으로 아니면 그와 같은 판단이 적용되지 않는 대상(수평적 가치관)으로 무오류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 님이 말한 ‘착각하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 이 명제에 나 역시 해당한다. 그래서 칼을 가까이하기가 두렵다.
p11 남명은 법가적 지향을 한 갈래로 가지고 있다.
p15 인仁이 사랑과 관용이라면, 의義는 정의와 절제를 말한다.
p15 그는 자신의 칼에다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겨 두었다./p16 내명자경이란 자신의 내적 본질에 대한 주시와 자각을 말한다. 외단자의란 이 지속적 파지 위에서 분명해진 사물의 시비선악에 따라 행동을 <단호히> 결단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p19 남명은 조정의 비겁하고 용렬한 대처에 대해 울분을 금하지 못했다.
p21 남명은 외적에 대한 칼을 동시에 조정의 관료들에게 들이댔다. 그는 타협과 조정을 말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의 대처는 냉정하고 험준하다. ;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타협과 조정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과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p23 사회 관계를 맺을 때는 특정한 규약과 질서의 룰을 지켜야만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 조선시대, 현 한국 사회, 왜곡된 규약과 질서의 룰로서 공동체가 유지되었다는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모순적이다.
p25 오만과 결벽 ... 벽립천인壁立千仞
p27 그의 <박한 기질>은 “돈후, 주신, 박실”과는 거리가 있었으니, 이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람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기상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시비를 각박하게 가리고 출처를 엄격하게 따진다. ; 옆에 있는 사람 피곤했겠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주의적 개인주의를 배반하면서 시민들, 특히 지식인들에게 <사회참여(engagement)>할 것을 종용한다. <서울시립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