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안티페미니스트, 두 번째 이야기 3

 

* 여성의 군 징병제

 

10년 전부터 이야기했던 것이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보수주의라고 생각한다. 를 인보다 앞세운다. 자유를 평등보다 앞세운다.

 

나는 자율의 가치를 높게 사기 때문에, 징병제보다는 모병제가 나의 가치관에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서를 하면서 몇 책에서 징병제가 모병제보다 실제로 훨씬 건전한 군대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발적 참여가 건전한 군대를 만든다는 생각과 정반대였다. 물론 건전한 군내는 사회 전체에도 긍정적이다.

 

이유는 군 특성상 폭력적인 부분이 있고, 이는 건전한 자원(남자)의 지원을 감소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사회적 하류 계층의 지원은 증가한다. 한번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양성 되먹임이 작용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모병제는 군 전체의 질을 저하시키고, 징병제는 이를 방지한다. 원리적으로 뉴욕 시의 깨진 유리창의 법칙과 같다. 그래서 나는 공리주의 원리를 적용하여 모병제 지지에서 징병제 지지로 의견을 바꿨다.

 

이들 책에서는 여성의 군 입대도 같은 방식에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군 징병제는 최선인가?

 

(댓글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반론도 내가 하겠다.) 여성의 군 입대는 여성 징병제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의 군 입대는 가능하나, 부사관이나 장교로 근무한다. 선발과 복무에 관해 bias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여성 군 징병제는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이스라엘이다. 세계사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태평천국의 난당시의 여성 징병제는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고, 군사력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병역 업무를 고려하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현재 이스라엘의 여성 징병제의 효과는 어떠한가? 내가 알고 있는 바 없다.

 

여성 일각의 여성 징병제 반대의 근거는 모성의 보호다. 이스라엘의 경우 항시 전쟁을 하니 여성의 징병제가 실시되지만, 여성의 징병제가 항시 전쟁을 하는 나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충분히 고려해 볼 사항 정도이다. 찬성 50%, 반대 50% 정도. 연구가 사회 공리적 관점에서 약간의 긍정적인 결과를 보였을지 모르나 전면적인 시행에 있어 모든 여성을 군입대 시키는데 대한 비용이 과도하게 들 것으로 예상한다. 결국 국소적인 검토에서 긍정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전면적 사회 검토를 해 보면 실이 득을 상쇄할 것으로 예상.

 

모성의 보호를 전면에 내세운다면, 남성에 대해 양성 평등을 주장하는 논리의 기반에 모순을 보여준다. 아마 자유주의 페미니즘 liberal feminism이 여성 징병제를 찬성하는지 알 수 없지만, 문화적 페미니즘 cultural feminism이 반대할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두 번째 제안을 한다. 여성학을 전공하시는 분, 또는 사회학을 전공하시는 분, 이스라엘의 여성 징병제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학위 논문으로 괜찮은 주제가 아닐는지. (이미 논문이 나와 있다면, 연과 결과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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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안티페미니스트, 두 번째 이야기 2

 

원래 계획은 1) 일반인이 착각하는 통계적 오류의 양성 불평등, 2) 내가 생각하는 양성 평등과 그 계량計量, 3) 내가 양성 평등을 지지하는 이유 등을 먼저 쓰려고 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주는 관계로) 이번 댓글 대화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던 성희롱과 데이트 비용’, ‘여성의 군 입대에 문제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한다. (나머지 쓸지 말지 모르겠다.)

 

* 성희롱과 데이트 비용

성희롱, 성폭력, 성추행 등, (이 문제를 성불평등으로 생각을 하든 아니던) 성 관련 문제(이하 성문제)는 내가 아는 한, 답이 없다. 성문제가 해결책을 가지려면, 어떤 통제 변수와 상관성이 있어야 한다. 학력이 높으면 성문제가 적다 또는 많다. 경제력이 높으면 성문제가 적다 또는 많다. 그런데, 내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경제력, 학력, 지역, 정치적 보수-진보 성향에 유의한 상관관계가 눈에 띠지 않는다. 즉 통제할 변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희롱을 양성 평등의 주제로 삼으면 해결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혼을 주로 담당하는 변호사에게 물었다.

여성이 남성과 이혼하는 결정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제력 상실입니다.

그 이유가 어느 정도 차지를 합니까?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90%가 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일반화가 가능할까요?

다른 변호사와 이야기 해 봐도 비슷합니다.

 

예화 ; 어느 마을에 10쌍의 부부가 있는데, 5쌍이 이혼을 했다. 법원에 제출한 이혼사유는 남성의 외도다. (이것이 통계에 드러난 이유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10쌍의 남자는 모두 외도를 했다. 그리고 이혼하지 않은 5쌍은 남편이 경제적 능력이 있고, 이혼한 5쌍은 남편이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면 외도를 이혼의 이유로 볼 수 있을까?

 

남성이 이혼을 원하는 경우 (본이이든, 상대든) 외도가 가장 큰 원인이다. 반면 여성이 이혼을 원하는 경우는 경제력이 가장 큰 원인이다.

 

2003년 지난 얼마 후 나는 알라디너 닉네임 강쥐님과 대화에서 이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했고, 내 의견에 대해 지지의견은 있었으되, 반론은 없었다. 내 주장은 여성의 성에 대한 대척점은 남자의 경제적 능력이다. 결혼 정보 회사에서 (회사 홍보도 할 겸) 결혼이 잘 이뤄지는 조건을 발표한다. 여성의 조건은 젊음(나이 어림)과 외모다. 남성의 조건은 직업과 돈이다. (어느 분이 여성의 조건이 젊음 1, 외모 2등에서 외모 1, 젊음 2등을 바뀌었기 때문에 트렌드가 바뀐다고 주장한다면 유머로 받아들이겠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대학생 때 주장했을 때는 비웃음만 샀지만, 2000년대 어느 시점에는 진화심리학 계통의 책들을 통해 상식이 되었다.

 

이번에도 나는 비웃음을 살 추측을 제안해 본다. (주장이 아니고 추측이다.)

남성 성희롱에 해당하는 여성의 대척점은 무엇일까? (혹시 눈치를 채셨습니까?) 나는 여성의 경제적 부담의 전가(예를 들면 데이트 비용의 남성 전담)를 떠올린다. ;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원인적으로 작용할까? 잘 모르겠다. 여자가 데이트 비용을 반반씩 부담하면 남성의 성희롱이 줄어든다? 여기서 제안을 한다. 여성학을 전공하시는 분, 또는 사회학을 전공하시는 분, 성문제와 경제부담의 전가가 정말 상관관계가 있는지 학위 논문으로 괜찮은 주제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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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記錄 150430

  

<페미니즘의 도전>

 

나는 안티페미니스트다, 두 번째 이야기<페미니즘의 도전>의 독후감이 뒤죽박죽되려한다. 두 제목 하에의 글이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만 있고, 본론이 없다. 이번 <페미니즘의 도전>의 독후감 형식으로 결론부터 내리고 다른 글은 ... (되는대로 올리겠다. 안 올릴 수도 있다.)

 

먼저 비유 예화를 이야기하면 ;

기득이라는 아이가 있다. 이 기득이가 여성이라는 아이의 것, ‘유색이라는 아이의 것, 그리고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빼앗았다. 그리고 여성’, ‘유색이라는 아이를 포함하여 빼앗겼다는 의식이 생겼고, 얼마를 되찾았지만 모두를 돌려받지 못했다. 여기에 여성아이를 도와주는 페미가 등장했다. 페미는 여성이 빼앗긴 것을 되찾은데 도움을 주었던 것은 확실하다.

 

마립간의 판단은 이러하다. 페미가 기득이를 꾸짖어 여성아이가 빼앗긴 것을 찾아주는데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다. ‘유색이나 지역, ‘동성, ‘학벌이 등의 빼앗긴 모두를 포함하는 접근이 오히려 여성기득이로부터 많을 것을 돌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페미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너 마립간, 기득이와 한패지? 빼앗은 것 돌려주면서 그것이 아까워 다시 빼앗으려하는 것이지?”

 

이때 마립간의 감정은 혐오가 아니라 어이없음이다. 남성은 여성의 이야기를 여자가 감정-감성적이라는 이유로 잘 듣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가 공격적, 지배적, 기득권이라는 이유로 남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안티페미니스트다, 두 번째 이야기 - 들어가는 글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양성 평등을 평등의 하위부류로 관심이 있었다. 반면 이 책의 글쓴이는 여성의 불평등을 먼저 경험하고 여성주의자가 되었으며 여성주의를 통해 평등을 포함한 긍정적 철학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시각을 존중한다. 내게는 그리 설득적이지 않지만, 내가 맞고 상대가 틀렸다는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입장 차이의 시작은 한국에 남녀로 태어한 것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반론이다.

 

1) 여성은 여자로 태어나는가, 여자로 길러지는가? 나는 여자가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로 길러진다고 생각한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선천적 요인, 후천적 요인 모두 작용한다. 행동주의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것은 후천적 요인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행동주의으로 모든 것으로 교정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

 

행동주의 ; 행동주의 이론은 아동발달에서 아동의 내재적인 요인보다는 외적인 요인, 즉 환경적인 요인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인터넷 검색에서] 아동이 성장해서 성인이 된다.

 

(1960년대 심리학에서 유행했던 견해로 알고 있는데, 확인이 안 되다. 정확히 아시는 분 댓글 바랍니다.) 행동주의 여러 가지 이유로 여성주의와 결합하는데, 그 결과가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다.

 

p61 어머니는 여성에게 부과(강요)된 성역할 제도의 산물이지 생물학적인 결과가 아니다. ; 이 말이 맞다면, 제도를 고쳐 남성이 어머니가 되게 하자.

 

2) 남성은 공격적이며, 지배적이다.

위 문장은 한번 이야기하나 열 번 이야기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여성 중에 남성은 공격적이지 않고 지배적이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못 봤지만,) 남자 중에서도 이 사실을 반박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위 성향은 여성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 내부에서도 작동한다. 보다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이 내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다. (<왜 팔리는가>를 읽어보시라.)

가장 큰 모순은 여성이 공격적인 남성을 대적하는 순간, 공격적으로 변하고, 지배적인 남성에게서 벗어나려는 것 자체가 지배적인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여성의 장점이 모두 사라진다. 이 책에는 어느 여성 정치인이 나오는데, 글쓴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민등록번호만 2라고. 이 의견에 동감한다. 한 번도 언급하겠다. ‘억압받는 다수라는 동영상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가?

 

* 테스토스테론 http://blog.aladin.co.kr/maripkahn/7485260

 

3) 돈과 행복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저소득층에서는 돈과 행복이 상관관계를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 일정 수준에 이르면, 상관관계가 사라진다. 돈보다는 취미와 같은 자기실현이 행복과 관련이 깊어진다.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여성주의와 여성권익 신장( 또는 양성 평등) 극도의 불균형에서는 균형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일정 수준이 지나면 역할이 거의 없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2003년에는 그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개념에서 평등이라는 철학으로, 실천적으로는 사회제도 개선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주의 활동이 전폐全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무와 숲과 생태계는 대충갈기에 의해 나눠 생각해야 한다. 사회제도의 개선은 그 역할이 있고, 여성주의는 그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적인 모임은 보다 양성 평등 적인가. 이 책에서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확인해 어느 알라디너께 물었더니, 답변이 없다. 나는 답변을 안 하신 것으로 여긴다.) 이 말에 동감한다면, 남성의 역차별주장에 그 만큼의 비중으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이렇다. 양성 평등에 있어 여성 (열등) 불평등은 일정 부분 여성주의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분은 사회 제도/법규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교정할 수 있는 방법이 현재 이 세상에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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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育兒育我 150429

 

지난 육아관련 글을 올린 직후다. 지난 주 어느 날 저녁 내내 아이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 육아육아 150423 http://blog.aladin.co.kr/maripkahn/7486945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아이에게 그림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빠인 나의 미술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참 그림을 그리고 있던 중에 담임선생님께서 그림 술기를 지도하면서 그림을 직접 고쳐주신 모양이다. (나중에 듣게 된 것이지만, 선생님은 나름대로 교육 지침을 갖고 계시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그림을 고쳐 놓으니, 아이의 머릿속에 있던 그림과 전혀 다른 그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너무 억울해서 울었다고 한다.

 

아이는 본인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이 잘못된 것인지를 내게 묻는데, 나는 당연히 아이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한다. (내 의견도 그러하니.) 그렇다고 내가 아이와 함께 선생님을 비난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선생님이 아이의 그림을 고치고 나서 선생님의 팔꿈치가 아이의 가슴을 치는 일이 있었다. 아이는 분명히 그 상황을 체벌로 인식하고 있다. 나는 그냥 우연적 사고에 의한 접촉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마지막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아이의 입에서 이 학교, 폭력학교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망연자실했다.

 

나는 아이에게 자주自主적으로 살라고 훈육한다. 내가 아이로서 을이었을 때, 불만이었던 것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자로서 을은 없었다.) 그런데, 사회는 자주적인 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복종적인 을을 좋아한다. (이번 경우는 여자라는 상황보다 아이라는 것, 피교육자 학생이라는 것이다.) 아이의 친구 어머니들 중에 내 딸아이의 자신 의견 표현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막상 자신의 아이가 본인에게 의견을 표현하려 할 때, 막으려는 행동을 볼 수 있다.

 

* 학부모 면담

지난 주, 아이의 학교생활의 심각성을 확인하기 위해 담임선생님과 면담에 참여했다. 첫 대면에서 나를 보시더니 당황하셨다. 아버지가 면담에 참여하는 상황이 (최소한 올해는) 처음이었던 같다. 분명 가정통신문에는 어머니 면담이 아니라 학부모 면담이라고 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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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4-2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부모의 전화를 받을 때가 있는데(교재 준비 문제로...출판사를 물을 경우 같은 것...) 아버지인 경우가 있어요.
몇 번 아버지들의 전화를 받고 나니 문자 받는 분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늘 그것을 의식하고 단체 문자를 보내게 되더라고요. 어머님이란 호칭을 쓰지 않고 학부모님이라고 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예요.

우리는 많이 깨져야 해요. 저도 고정된 생각들을 크게 한 번 흔들어 보겠습니다.



마립간 2015-04-29 15:51   좋아요 0 | URL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죠. 저는 이 상황에서 절대적이거나 총체적 `옳음`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할 따름입니다.

cyrus 2015-04-29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선생님이 아버지가 학교에 면담하러 오는 상황을 낯설게 느껴지다니... 의외입니다. 교육도 부모가 같이 책임져야 할 의무가 되었는데 여전히 어머니가 전담하는 일이라는 고정된 인식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 2015-04-30 08:43   좋아요 0 | URL
유치원 행사는 거의 아버지가 참여했다고 합니다. 저도 아이가 학교를 불편해 하지 않았다면 참여하지 않았겠죠.

혹시나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학교성적이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정보력. 이 시스템에 맞춰지는 것은 아닌가.^^
 

 

* 讀書記錄 150429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는가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서평 별점 ; ★★★, 구매

<투게더> 서평 별점 ; ★★★, 구매

 

두 책 모두 꼼꼼히 읽으려 했고, 읽는데 시간도 오래 걸렸다. 밑줄긋기도 꽤 많았는데, (알라딘에는 올리지 않는다) 문제는 마지막 생각의 정리가 안 된다. 3/4 정도까지는 재미있게 읽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 글의 흐름을 놓친다. 책을 읽은 후 다른 분들의 서평을 읽었는데도 마찬가지다.

 

두 책 모두 사회의 좌우 (보수와 진보)의 균형점이 어디인가 궁금해서 읽었다. 그래서 왜 가난한 사람이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는가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책의 원제는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캔사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겠는데, 왜 일어났는지는 명확하게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다. 이 책의 독후감을 쓰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려 <투게더>를 집었는데, 현대 사회가 왜 보수화가 되는지를 이해하려는 순간, 그 경향을 거스르려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다.

 

일단 이 책들이 이야기하는 결론은 뒤로 미뤄두고, 꿩 대신 닭으로 <왜 팔리는가>를 읽었다. <왜 팔리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 두 책의 답변을 대신할 수 있다. 대신한 것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진보는 분열로 망해도 보수는 부패로 망하지 않는다. 분열엔 의리가 없지만 부패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작가 박민규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쓴 글 '눈먼 자들의 국가'의 한 구절이다. 통찰력 깊은 말이다. 그는 익숙한 격언 뒤에 비대칭성이 숨어 있다는 것, 그래서 진보와 보수 사이의 천칭은 보수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중략)

 

부패엔 의리가 있다. 하지만 부패와 의리의 네트워크는 분절적이고 위계적이며 갈등적이고 가장자리를 거리낌 없이 희생시키는 체제이다. (중략)

 

진보주의자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자란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원을 하나로 응집하는 것이 결정적 중요성을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노선'의 경쟁이 생겨난다. 하지만 옳음을 향한 열정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자기 확신에 대한 겸손한 성찰을 초과하게 되면 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아마도 가장 가련한 보수주의자가 부패와 의리를 동일시하는 자라면, 가장 가련한 진보주의자는 자신의 옳음 자체를 탐닉하는 자일 것이다.

 

경향신문 기사의 부분이지만, 이 글도 보수화를 잘 설명하여 글 말미에 얹는다. <눈먼 자들의 국가>도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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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5-04-29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수와 진보의 불균형은 그대로 양성 평등에도 적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