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映畵鑑賞 150702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두 번째 이야기

 

이 영화에서 눈에 띠는 것은 자동차다. 마치 자동차의 모습이 연기력이나 영상미를 담당하는 것 같다. 두 번째 눈에 띠는 것은 기타리스트다.

 

* ‘여전히라는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억압

http://blog.aladin.co.kr/bluefox/7613538에서 발췌 ;

자신의 공격성을 페미니즘으로 풀어내는여성과 내가 대입한 자신의 공격성을 정의로 풀어내는남성은 어떤가. 남녀를 막론하고 페미니즘을 빌려 피해의식을 과대포장하거나 정의를 내세워 명성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파란여우 님의 위 글을 내 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겨 주신 파란여우 님께 감사한다.)

 

<매드맥스> 이 영화는 여성주의를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다. -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즉 이 여성주의로 해석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여성주의를 나타내는 영화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아니요로 답한다. 대부분이 남성주의 가치관에서 진행된 영화에서 정조대를 끊는 한 장면을 가지고 여성주의 영화로 논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모세와 같은 캐릭터 퓨리오사와 (노골적인 샷은 없지만, 그럼에도 추노의 이다해를 떠올리게 하는) 여전히 여성의 몸매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여성주의라니... 여성이 주인공 female lead이라서 여성주의영화라면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보다 여성주의가 구현된 나라이다. 여성 액션을 이야기하자면 양쯔충 楊紫瓊<예스 마담 皇家戰士: Royal Warriors>이 더 여성주의적이다. 개인적으로 마립간적 여성주의가 돋보이는 장면은 임신한 여성이 차문에 매달려 퓨리오사를 보호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 적지 않은 분량에 등장하는 눅스는 (미국의) 보수주의, 남성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페미니즘의 도전> p11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 나는 왜 양성평등을 지향하는가?

 

남성과 여성의 생각(인지 방식 사고방식)의 차이는 1차적으로 테스토스테론에 의한 성별에 분화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이 분화는 남녀의 사회적 역할의 분화로 확장되면서 적응한다. 남자는 집밖에서 사냥을 통해 분석적, 즉각적 사고를 하고, 여자는 집안에서, 집근처에서 채집과 살림의 역할을 맡으면서 종합적 사고를 한다.

(나머지 http://www.seehint.com/r.asp?no=11367)

 

이와 같은 성향은 <도덕의 정치>의 아버지 원리와 어머니 원리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 낙태와 사형 http://blog.aladin.co.kr/maripkahn/790073

 

내가 딸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딸이 살기 좋은 곳은 남성 우월의 남녀불평등 사회일까, 아니면 양성 평등의 사회일까? 당연히 양성 평등의 사회를 선택할 것이다. 만약에 아들이라면, 아들의 이기적 행복을 기대한다면? 나는 역시 양성 평등의 사회를 고를 것이다. 그 이유는 양성의 평등의 사회가 안정적이고, 안정적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부유하기도 하고, 신뢰와 배려라는 사회적 자산이 축적된 사회다. 양성 평등은 안정된 사회의 결과다.

 

그러면 양성 평등이 안정된 사회의 원인으로 작용할까? 조건에 따라 그렇다. 여성의 사고, 어머니의 원리는 중장기 中長期 계획 활동이 가능하다. 이런 중장기적 활동은 단기적 효용성을 보이는 남성의 사고, 아버지의 원리보다 더 좋은 결과를 보인다.

 

* 여성 21세기 http://blog.aladin.co.kr/maripkahn/790851

 

그러나 이 어머니 원리는 원인적으로 작동하려면 활동이 마무리될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예를 들어 전쟁과 같은) 사회적 환경이라면 진화적 압력에 의해 아버지 원리가 작동하게 된다. (내 이론에 따르면 1994년 한국 사회보다 2015년 한국 사회는 남녀불평등이 심화되었을 것이다. 20년간의 페미니스트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 1994년은 우리나라 지니계수가 가장 낮았던 해.)

 

영화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전쟁과 같은 상황인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배경은 아버지 원리가 작동하는 배경이다. 줄거리 자체가 아버지 원리를 이야기할 수 없는 구조다.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양성 평등의 주제는 일반 철학, 윤리 도덕의 주제의 사상寫象이다.

 

*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안정적이고 행복하고 부유한 사회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안정적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누구는 위기적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사람은 상대적 평가에 민감하다. 위기 상황을 선호하는 사람이 권력을 쥐면, 위기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 예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고 위기 상황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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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畵鑑賞 150701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2015) 평점 ; ★★☆

 

내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주제, 구성(줄거리), 연기, 영상미, 이렇게 4개로 나눠서 한다. 이 영화를 볼 때 개인 사정에 의해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내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다.

 

* 나는 왜 자연보호를 지향志向하는가? (志向이 맞는지 指向이 맞는지 모르겠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세계관이 우리 우주 universe에 한정했을 때는 직선적이다. 가설에 머물러 있지만, 다중 우주 multiverse를 고려하면, 직선적이라는 가설과 순환적이라는 가설이 경합을 하고 있지만, 아직 과학 분야에 속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 우주가 직선적이라 함은, 시간의 흐름 즉 엔트로피의 증가이고 궁극적으로 열죽음 heat death이 예상된다. 그러나 나의 2가지 디폴트 [기본값 ; 1) 나는 살아야 한다. 2) 인류는 지속되어야 한다] 중의 하나인 인류 지속을 고려하면 엔트로피 증가 속도를 낮추면 낮출수록 인류의 지속 시간은 길게 된다.

 

지구의 자연은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여 지구의 엔트로피를 낮춤으로써 자유에너지를 증가시키거나 유지시킨다. 인류의 진화도 이것의 결과이고 인류와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인류는 자연이 축적하는 자유에너지 이상 소모할 뿐만 아니라 자유에너지를 증가시키는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자연의 배신> p237 자연은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으며, 우리가 스스로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자연을 파괴했을 때, 우리가 죽을 뿐이다.

 

<자연의 배신> p245 우리 인간이 시간의 규모에 따라 자신의 DNA의 운명을 얼마나 다르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면 정말 흥미롭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몇 세대 후는 거의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자연을 녹색 환경으로만 생각한다면 석유라는 에너지원을 통해 되돌릴 수 있다. 중동의 사막에서도 석유로 유지되는 녹색 정원이 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붉은 사막의 배경과 달리 임모탄 조가 지배하는 땅에 약간의 녹색이 보인다.

 

현재 환경학자들은 자연 환경 쟁탈전의 매개는 로 여기며, 표면상으로 석유쟁탈전으로 나타날 것으로 판단한다.

 

녹색의 땅 ; 항상 맞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금언으로 가지고 있는 것. -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 '헛것 자연 친화''현실 자연 친화' 사이에서 http://blog.aladin.co.kr/bluefox/746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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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7-0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별 두개 반은 좀 짠 것 같아요 ^^
배우들이 스턴트도 없이 고생했다고 하던데,,,,
뭐, 고생많이 하면 별 많이 주자는 건 아니지만요 ㅎㅎㅎ

<자연의 배신>은 저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군요^^

마립간 2015-07-01 14:58   좋아요 0 | URL
저의 별점 세 개는 제가 만족함으로써 남에게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제 별점이 영화 평론가가 생각하는 완성도와 대중적 만족감과 차이가 있죠.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하는 영화이지만, 남에게 추천하고 싶은 생각은 .. 들지 않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7-0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붉은 돼지 님에게 한 표 ! ㅎㅎㅎㅎ

마립간 2015-07-01 14:33   좋아요 0 | URL
곰곰발 님을 포함한 다른 분들이 이 영화에 대해 평점을 높게 준 것에 대한 공감은 있습니다.

알케 2015-07-0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감독인 조지 할배의 노익장에 박수...저도 영화는 아니지만 영상 만드는 일로 밥을 먹고 사는데
마흔 중반 넘어가니 이젠 기운 빠져서 며칠 야외 촬영하거나 밤샘 편집하면 죽어요...ㄸㄸㄸ
조지 할배 쩔어요.

마립간 2015-07-02 08:03   좋아요 0 | URL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영화 외적으로 그런 면이 있군요.

모든 일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분이 계셔 사회가 유지되죠. 그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일반정감, 정서 02

 

<사랑은 사치일까?> 정서적으로 여성에게 의존하며 얻는 기쁨과 별개로 남성들은 정서적 영역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사랑의 가치절하를 의미했다.

 

<자연의 배신> p251 그는 과학자들은 꽃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한 예술가 친구의 주장

 

어떤 사람은 이성적 활동에 정서가 배제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처음 어린 시절 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누군가가 아폴로 우주선, 사람이 달에 착륙하는 바람에 달에 대한 신비감을 없앴고 사람으로부터 달에 정서를 뺐어 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게는 우주선이 달에 갔다 왔어도 여전히 정서적 감흥을 느끼며, 다른 의미에서 우주선이 달에 갔다 온 것이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

 

시나 소설, 음악을 들을 때는 정서의 인지가 작용하나 수학, 물리학을 공부할 때는 정서가 작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도 있다. 나는 수학 그리고 01’이라는 글을 통해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 수학 그리고 01 http://blog.aladin.co.kr/maripkahn/7180153

 

나는 어떤 남성이 또는 이성을 주로 사용하는 자연과학자가 정서를 평가 절하했다면, 나는 그를 교양이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이성을 사용하는 집단은 정서를 배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교양이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아마 수학, 물리학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을 한 번도 못 느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EBS 다큐프라임 아이의 사생활 남녀의 차이를 보면 남아는 공감능력과 정서 반응이 여아보다 떨어진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가치판단이 가능한가?

 

정서적으로 여성에게 의존하며 얻는 기쁨과 별개로 남성들은 정서적 영역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 이 글은 다음과 같은 패러디도 가능하다. 이성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하며 얻는 기쁨과 별개로 여성들은 이성적 영역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에 의하면 도덕적 기반은 이성도 아니고 정서도 아니다. <바른 마음>의 글쓴이 조너선 하이트는 도덕적 기반을 찾는 것을 포기한다. 대신 사람들이 무엇을 도덕적 기반으로 삼는가를 연구했고, 이 책을 썼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6개의 도덕적 기반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충성심-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중에 정서-사랑 1개만 도덕적 기반이 되어야 할 타당성은 없다고 본다.

 

사랑만을 사용하면 100%이고 6개를 균등하게 사용한다면 16.7%가 될 것이다. 100%에서 16.7%가 된다면 평가 절하라고 판단할 수 있나? ‘사랑은 사치일까의 대척점은 이성은 사치일까가 아니다. ‘이성은 부도덕할까?’

 

* 인지적 진화의 정향성 http://blog.aladin.co.kr/maripkahn/7118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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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5-06-2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저는 수학에 유능한 편이 못되어 수학을 잘 아른 분들이 부럽더군요.
그러나 마립간님 덕분에 수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수학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누군가가 과연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속시킬 수 있을까?를 식으로
설명해준 때 부터입니다.
감동이 아름답게 느껴지더군요.

수학에 대한 인식 전환의 순간이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마립간님

마립간 2015-06-25 10:57   좋아요 0 | URL
차트랑 님, 안녕하셨어요. 반갑습니다.
차트랑 님이 수학의 아름다움을 느낄 계기를 가지셨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군요.

제가 차트랑 님의 글을 통해 알고 있는 바로는 여성주의에 대한 제 글들이 차트랑 님과 맞지 않았으라 생각합니다. 어째거나 어머니, 안해, 아이를 포함하여 제 주위에 있는 여성들은 저( 또는 제 가치관으)로 인하여 그리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가치관이 맞았는지에 관해서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페크pek0501 2015-06-26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사치일까?>를 이달에 구입한다면 그건 순전히 마립간 님 덕분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마립간 2015-06-26 14:44   좋아요 0 | URL
저 아직 <사랑은 사치일까?> 안 읽었습니다.^^ 책 제목에 대한 저의 답은 사랑은 사치가 아니라 ...

진리, 소명,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없다. by 마립간
 

 

* 일반정감, 정서 01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의 부분 독후감을 쓰려 던 중 아랫글을 보았다.

 

<사랑은 사치일까?> 정서적으로 여성에게 의존하며 얻는 기쁨과 별개로 남성들은 정서적 영역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사랑의 가치절하를 의미했다.

 

퇴계와 율곡의 핵심 논쟁은 선한정감과 일반정감의 관계다. 퇴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통해 절대선을 상정하려 했다.

 

선한 정감으로 표현하든, 절대선 絶對善으로 표현하든, 지고지선으로 표현하든, 종교 기독교의 하나님을 상정하든 이들의 공통된 무엇인가를 사람들은 갈망했다. 일단 선한 정감이라고 하자.

 

퇴계는 순수한 선한정감을 추출하려 했다. (여기서 순환 논리의 모순이 나타나는데,) 선한정감이 아니라면 일반정감이다. 일반정감을 희노애구애오욕 喜怒哀懼愛惡欲이라고 했을 때 (아니면 희노우구애증욕 喜怒憂懼愛憎欲이든지) 그 자체로 선악을 판별하기 어렵다.

 

기쁨을 보자. 불쌍한 사람을 돕고 나서 기뻤다. 이 때의 기쁨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물건을 훔친 후 짜릿한 기쁨을 맛보았다면 이는 악이다. 퇴계는 선악의 구분을 리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율곡은 맥락에서 선악을 구분하고자 했다.

 

퇴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반정감, 현대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정서를 평가 절하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포함한 정서는 악으로 표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존재에 대해서는 유물론적으로, 행동에 대해서는 쾌락주의적으로, 그리고 인식에 관해서는 감각주의적으로 해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 학파의 주장은 마약, 섹스와 같은 말초적 쾌락을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서적 생활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반동이 일어난다. 스토아 철학 Stoicism이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탄생해 절충적인 모습을 보이며, 유물론과 범신론적 관점에서 금욕과 평정을 행하는 현자를 최고의 선으로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약 사랑(孺子將入於井)이 선이라면 퇴계도 스토아 학파도 폄훼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사랑을 선을 전제해 놓고 시작하는 것은 순환논리 모순이다.

 

사랑은 선과 동치同値인가? 영화 <마더>의 김혜자의 행동은 사랑인가, 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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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6-2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정서에 속하나요?
사랑으로 인해서 불러일으켜지는 수많은 감정들이 있기 때문에 정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모호한 점이 있네요. ^^

마립간 2015-06-25 14:56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랑이 단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사랑의 사치일까>의 저자 `벨 훅스`의 의견을 전제로 한 제 의견입니다. 그래도 저는 사랑에 정서가 가장 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본능, 마지막이 이성이겠죠.

의견 감사합니다.
 

 

* 讀書記錄 150623

 

<몬스터 6, 7, 8, 9, 10> 책 대여점 대출

 

- 스포일러 가능성 있음.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번 <공작왕>을 떠올렸는데, 첫 번째는 대의大義와 소의小義의 딜레마라면

 

두 번째는 자신이 자신의 대척점이 될 가능성을 생각했다. 즉 작가가 <장화 홍련>과 같은 Dr 덴마의 다중 인격을 복선으로 깔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중인격의 대상이 덴마가 아니고 안나로, 암시의 방향을 트는 것 같다. 18권이 완결임을 고려하면 이중 f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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