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51007

 

<원림>

- 대칭과 대칭의 파괴 ;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백미러 속의 우주> 페르시아의 양탄자는 완전하게 불완전하며, 정확하게 부정확하다.

 

<원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대칭과 대칭의 파괴에 관한 것이다.

 

p62 대부분 이와 같은 규격화된 대칭 구조를 이룬다. 하지만 원림은 이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효과적으로 자연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규격화된 기풍을 깨뜨리기도 했으며, 융통성 있고 다양한 배치를 택한 것이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기본적인 회화의 구도에 대해 배웠다. 사과 3개가 어떤 위치에 가장 아름다울까? 가장자리에 있을 때, 너무 산만하고 정삼각형이나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사과가 배치될 때, 지나치게 대칭, 기하학적이라 자연스럽지 못하다. 중앙에 (이등변 삼각형의 이상의 조건을 갖춘 것을 배제한) 일반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할 때, 가장 심미적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과 문화에 대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나는 플라톤-노자주의,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디오게네스-양주주의, 3분법으로 주로 사용하는데, 아폴론적인 것은 플라톤-노자주의에 해당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디오게네스-양주주의에 해당한다. (니체는 2차원으로 파악했지만, 나는 판단으로는) 이 세상은 3차원의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언어를 포함한 (그림, 조형과 같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때, 일부 정보의 소실을 가져오게 된다. 다시 정리하면 3차원으로 2차원에 표현하면 정보의 소실로 인한 왜곡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의 인지 認知가 세상의 사상 寫像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학과 물리를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심미적 최고조는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의 비율이 세상의 비율과 같게 적용되었을 때이다.

 

* 만폭동도 http://blog.aladin.co.kr/maripkahn/433073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서양화보다는 한국화이고, 한국화 중에서도 인물산수도를 좋아한다. 이것 역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함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추정한다. ‘원림’, ‘인물산수도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세 번째 모순(딜레마)이다. The imperfect can be perfect!

 

의문] The imperfect can be perfect. ; 내가 지은 문장이기는 하지만, 포탈에서 검색될 만한데, 문법에 안 맞는지 검색이 안 된다. 대신 아랫말은 있다. We are all perfectly imperfect.

의문] 산불 후, 조림 造林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놓아두는 것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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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記錄 151006

 

<원림>

- 문화적 도교 ; 자연과 가까운 삶

 

선진국 기준으로 보면 1, 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의 추정이다. 최소한 식민지 제국주의 이전은 아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1960년대 이후가 될 것이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자연( 자원)의 우위에서 인공 人工의 우위로 변화되었다.

 

내가 자연보호를 지지하는 이유는 생태순환이 관점이 장기적 안목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연에 대한 심미적 것 때문이다. 두 번째 관점에서 읽은 책이 <원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중국의 스케일을 느낄 수 있지만, 꼭 원림을 통해서만 자연 친화가 연상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적 자연 친화 환경에 관심이 많다. 내가 구입한 <한국의 옛 조경>, <한옥의 조형>, <집꾸미기>, <소쇄원> 등은 <원림>을 구입한 동기와 같다.

 

문제는 이런 자연 친화적인 (주거) 환경이 경제적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 본 곳 아침고요수목원’, ‘화담숲과 같은) 수목원이나 자연이 잘 반영된 태권도원같은 곳, 자연이 잘 녹아 있거나 자연과 잘 어울린다는 감상평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냥 거저 형성된 것이 아니다. 나의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중동의 사막에도 녹색 지대를 만들 수 있다. 단지 비용(에너지, 석유, 또는 돈)이 필요할 뿐이다. 자연 환경을 즐기기 위해서는 비용이 지불해야 하고, (경제적) 지불 능력은 (인간 사회 전체로 볼 때)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원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언급하고 지나간다.) 진나라의 아방궁을 떠올리면 사회적 비용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실례를 찾아보자. 전원주택이라는 곳에 부유한 사람이 거주하는가, 보통 또는 보통 이하의 경제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거주하는가.

 

<녹색당 선언> p198 후배가 인천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후배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월미산 근처로 가서 인천 앞바다를 보여주었다. 바다를 본 후배는 외쳤다. “이건 내가 생각한 바다가 아니야!” 후배는 아마도 하얀 백사장과 파란 바다를 상상한 것 같다. “미안해, 인천 앞바다는 똥물이야 ...” (중략) 나는 바닷물에서 멱 감고 놀려면 송도유원지로 가거나, 차를 타고 도시와 멀리 떨어진 동해안으로 가거나, 배 타고 섬에 들어갔다. 공통점은 하나, 모두 입장료를 받았다.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산 사람들 떠올릴 때, 죽림칠현 竹林七賢, 상산사호 常山四皓, 강좌칠현 江左七賢를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노동을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녹색당 선언> p224 뭐라고 표현하더라도, 여행이라는 것은 대단히 특권적인 일이라는 점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나는 누군가 자연과 가까운 삶을 누리고 있다면 그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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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記錄 151005

 

<원림>

- 삶으로서의 도교 ; 자발적 가난

 

나의 여러 가지 딜레마 중의 하나는 도교적 심상을 삶 자체에 적용하는 것과 문화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갈등이다.

 

도교는 (노자, 장자, 양주에 따라 철학적 의견을 매우 달리하지만, 실천적으로는 대개 공통점을 갖는) 무욕 無慾, 무소유 無所有를 주장한다. 이 가치관의 나에 대한 적용은 자발적 가난이다. <자발적 가난>도 좋지만, 내가 기본으로 삼은 책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이다. 내 인상 중 자발적이면서도 가장 내핍된 가난한 삶을 실천했을 때는 2000년 초반이다. 단면적으로 당시에는 한 달 전기료가 900원 내지 1200원 정도 나왔다. (전기료가 천원 미만일 때는 격월로 고지된다.) 당시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한국 전력에서 내가 사는 집을 찾아왔었다. (내 서재 초기 글에 몇 에피소드가 더 소개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이런 나의 생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이야기를 해 보자.

 

안해와 아이 친구 엄마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 집에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TV가 없다는 사실보다 더 놀랐다. 그리고 남편(바로 나, 마립간을 가리킨다.)이 이기적이라고 했다. 왜 이기적이라고 했을까? 안해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있고, 올 여름에 그리 덥지 않게 보냈다. 나의 사무실에 역시 에어컨이 있지만 올 여름 에어컨을 작동한 기억은 10회 미만이다. (어쩌면 5회 미만이다. 손님과 함께 있을 때.) 선풍기와 부채로 여름 보냈다.

 

왜 아이 친구 엄마는 나를 이기적이라고 했을까? 남자는 사무실에서 에어콘 아래 시원하게 보내고 안해와 아이는 집에서 덥게 보낸 것으로 추정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사실판단에 있어 오판이다. 에어컨이 없는 것에 대한, 비판을 너머 비난에 가까운 책망은 아이가 1~2살 때였다.

 

에너지 절약(이는 환경 보호의 일면이라고 생각한다.)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서 에어컨 없이 사는 내 삶이 맞을까, 아니면 신체적 약자인 주부와 아이를 위해 적당히 에어컨을 켜고 사는 삶이 맞을까. (여기에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딜레마도 엮이게 된다.)

 

내 판단에는 TV와 에어컨이 없어도 결혼 후의 생활에 가난한 삶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평균적이 삶이다. ‘자발적 가난을 운운하려면 내 기준에 의하면 나의 2000년 초반 생활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안해와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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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記錄 151002

 

<원림> 서평 별점 ; ★★★, 구매

 

얼마 전 알라디너에게 원자력 발전소핵 발전소의 용어에 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 다발적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주지적 표현을 바꾸면 만감이 교차한다고 할까?)

 

<원림>이라는 구매할 때부터 원자력 딜레마처럼 애매모호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인지는 이 책에서 언급한 원림과 무관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9월 초에 읽었지만 독후감을 정리하기 쉽지 않았다. 동시에 <백가쟁명><백미러 속의 우주>를 읽었는데,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3권의 책은 결국에 같은 감상을 남겼다.

 

<카오스와 불교>의 독후감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과학적 사실을 철학으로 추상화하고 이 추상화된 철학을 인문학에 적용한다.

 

<백미러 속의 우주> 페르시아의 양탄자는 완전하게 불완전하며, 정확하게 부정확하다.

    

* 밑줄 긋기

p7 중국 원림 原林으로 들어서면 누구나 동양 특유의 매력에 압도당한다./대자연의 풍광이 주는 느낌과 달리 원림은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을 담고 있으며 돌 한 개, 풀 한 포기에도 문화적 의미가 담겨 있다./의도적으로 조성된 조경에는 시적 정취가 깃들어 있으며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다고 있다.

p12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생활예술

p19 이런 사화적 배경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 무위도식하는 삶을 추구하는 도교가 성행해 현학 玄學이 크게 일어났다.

p21 하지만 이때의 황가 원림은 더 이상 진한 시기 절정의 화려함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과거의 웅장하고 격식을 따른 원림보다는 작고 아름다우며 정교한 원림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p27 송나라에 이르러 ... 그 작은 공간 속에도 계곡, 언덕, 샘물, 연못, , , 나무, 바위, 정자, 대청, 초당 등 없는 것이 없었다.

p35 자손들이 원림에서 독서, , 그림, 작곡 등의 여가생활을 즐기며 인생의 도리를 깨닫고 반듯한 인격을 수양할 수 있기를 염원하였다. 이렇듯 원림이란 인간의 정과 마음뿐 아니라 우주의 이치까지 담겨 있는 심오한 예술의 결정체다.

p62 대부분 이와 같은 규격화된 대칭 구조를 이룬다. 하지만 원림은 이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효과적으로 자연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규격화된 기풍을 깨뜨리기도 했으며, 융통성 있고 다양한 배치를 택한 것이다

p63 원림 건축도 다른 건축과 마찬가지로 기능성이 요구된다. 사가 원림은 주거, 독서, 손님 접대, 오락활동 등 다양한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에 건물의 배치나 모양에 앞서 우선적으로 갖춰야 했다.

p63 원림의 건축 배치에는 성경 成景과 득경 得景이 필요했다.

p103 원내의 건물군은 ... 첫째, 전체적으로 중심축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좌우 비대칭으로 건축했다. ... 둘째, 대칭은 따르되 건물의 형식에 변화를 주었다. ... 셋째, 주요 건축물의 대문과 본체는 중심축을 경계로 대칭을 이루지만, 그 외의 건물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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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10-0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들이 저에겐 신세계네요.
알라딘의 좋은 점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독서하는 게 아니라
남의 서재를 구경하며 낯선 책의 내용을 훑을 수 있고 감상을 읽을 수 있고 서로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추석을 잘 보내셨는지요?

마립간 2015-10-05 10:24   좋아요 0 | URL
pek0501 님도 추석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남자에게 추석 명절은 휴일이고, 주부에게 명절은 ...^^ 그렇습니다.

저도 알라딘 서재를 통해 좋은 책 소개도 많이 받고, 제가 조언을 구하기도 합니다. 서재의 가장 큰 유익이죠.
 

 

* 讀書記錄 151001

 

<백가쟁명>

- 이단異端 02 ; 법가와 도가

 

* 독서를 꼭 좋은 것만이 아닌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받아들여 자신의 사고를 강화 reinforcement한다는 것이다. <백가쟁명>를 읽으면서 나의 생각에 맞는 것을 골라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 앞선 독서기록의 맹자와 묵자 못지않게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준 것은 양주 楊朱를 도가의 연장선상에 놓은 것이다. 실제로 양주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양주의 사상을 가의 천인사상 天人思想의 시초라고 한 글을 찾을 수 있다.

 

유교 중도 - 공자 ; 유교 우파 - 순자 ; 유교 좌파 - 맹자와 함께 도교 우파 - 노자 ; 도교 중간 - 장자 ; 도교 좌파 양주의 구도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도교 우파인 노자와 유교보다 우파인 법가의 공통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의 임의의 본질 기준에 따라 묵가-유가-법가를 동일 선상에 도가를 별도의 선상에 위치시켜 놓았다.

 

이런 나의 생각에 이 책은 반전을 주는데, 묵가, 유가, 도가는 많은 타인을 위한 (이 책의 표현으로는 천하를 위한) 철학으로, 법가는 군주 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분류한 것은 작은 충격이었다. 어찌 보면 묵가, 법가 관련도서는 읽지 않았으니,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글쓴이 이중텐의 의견에 반론을 하자면, 법가 사상의 결과인 질서가 과연 군주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 법가, 보수주의의 가치에 또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이때의 가치가 도덕적 가치인지 아닌지 각자의 판단이다.)

 

같은 체급의 보수와 진보가 맞붙으면 대개 보수가 이긴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9:1 정도가 되는 것 같다. 5:5가 되지 않는 이유는 진보는 내부 갈등 조정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가 이기는 경우는 바람을 등에 지거나 (블랙 스완까지는 아니더라도) 돌발적인 상황에서 이기게 된다. 진보가 보수를 이기기 위해 내부 갈등 조정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 하는 순간 진보는 진보의 외양을 가진 보수가 된다. 그 진보가 정치 세력을 의미하든, 녹색당을 의미하든, 페미니즘을 의미하든 간에 말이다.

 

니체 악마와 싸울 때는 악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 ‘악마와 싸우면서 악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나는 이 명제에 긍정적인 예를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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