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
로버트 카파 지음, 우태정 옮김 / 필맥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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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건 주머니 속의 동전 한 닢이 전부였다. 나는 동전을 던져 결정하기로 했다. 만약 앞면이 나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필코 영국으로 갈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콜리어스>에 내 처지를 설명하고는 전도금을 되돌려 주리라.
공중으로 동전을 튕겨 올렸다. 결과는 뒷면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까짓 동전에 나의 미래를 내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 -10쪽

보도 사진가로 산다는 것과 다정한 마음을 잃지 않고 간직한다는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해 보았다. 병사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장면은 빠뜨린 채 그저 한가하게 비행장 주변에 앉아 있는 모습만 찍은 사진은 사람들에게 진실과는 동떨어진 세게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전사자와 부상자까지도 여과 없이 찍은 사진을 보여줘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내가 감상에 빠지기 전에 그런 장면들을 한 통의 필름에 담아두길 잘했다는 판단이 섰다.



-47쪽

군의관실은 교회에 딸린 고아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직 군의관이 내게 자기 침대를 내줬다. 그날 밤 그에게는 잠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군의관과 나는 식사를 함께 했다. 한창 밥을 먹고 있는데, 수녀원장의 인솔을 따라 고아들이 열을 지어 교회 뜰 안으로 들어왔다. 고아들은 행진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바로 '소년 파시스트의 노래'였다. 커피를 앞에 놓고 잠깐 졸음에 빠졌던 군의관이 눈을 번쩍 뜨고는 큰 소리로 통역관을 불렀다.
"수녀원장에게 가서 저 따위 짓은 이제 그만두라고 해. 지금 나더러 미국 식량을 먹여가며 미래의 파시스트를 기르란 말이야? 즉시 대열을 풀고 보통 아이들처럼 노는 법을 가르치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고아들 점심은 없다고 분명히 말해"
한동안 설전을 벌인 끝에 수녀원장은 교회를 빠져나갔다. 잠시 후 아이들은 마치 들판의 인디언처럼 신나게 뛰어놀기 시작했다. 하나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잠시동안 군의관은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긴장한 표정을 하고 벌떡 일어나서는 수술실로 달려갔다.-121-123쪽

내 머리 바로 위로 포탄이 날아다녔다. 박격포탄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순양함은 쇳소리를 내고, 장갑차는 삑삑거리는 고음을 내며 서로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독일군 박격포도 휘익 하는 소리를 내며 내게서 불과 100미터도 안되는 언덕 위에 떨어졌다. 나는 덤불 속으로 더 낮게 머리를 파묻었다. 태양이 내 등을 비추어 따뜻한 온기가 전해왔다. 불현듯 '아! 공중을 날며 노래하는 것이 새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133쪽

셸부르의 독일군 사령관인 칼 폰 슈리펜 장군으로, 그는 우리가 생포한 최초의 고위급 독일군 포로였다. 나는 그의 사진을 꼭 찍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포즈를 취해주지 않았다. 그가 부관에게 말했다.
"언론의 자유랍시고 떠들어대는 미국신문이라면 지긋지긋해."

나도 독일어로 한마디 응수했다.

"나도 이제 싸움에 패한 독일군 장군을 찍는 일에는 넌덜머리가 납니다"

내 말에 격분한 그가 나를 향해 홱 돌아섰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에 담았다. 아마도 그보다 더 좋은 사진은 나올 수 없으리라!-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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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3일에 13계단이라는 책을 읽었다. 예상치 못한 우연이지만 이런것이 어쩐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 때, 괜한 흥분과 묘한 전율이 느껴진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단순한 우연을 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 무겁지 않게 꺼내 든 이 책에서 엄청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생각이 자꾸 복잡해져만 갔다. 다른 사람들의 리뷰는 자세히 읽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추리소설은 스포일러가 없다고 하더라도 책을 읽어나갈수록 자꾸만 뭔가 예상되기 때문에 되도록 읽을만한가, 정도만 파악하고 직접 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려고 한다. 그런 내가 읽은 이 책에 대한 내용은 '기가막힌 반전' '엄청난'이 가장 많았다. '뭐야, 그정도로 기막히게 재밌는 책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13계단의 의미는 책을 읽으며 알았다. 그리고 사실 그 안에 담겨진 깊은 뜻을 생각하다보니, 머리 식히려고 꺼내든 추리소설이 오히려 더 침울해져버리게 했다. 이야기의 주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이야기 흐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기에 그 문제를 이야기 하지 않고서는 이 책의 느낌이 나오지 않을 듯 하여 잠깐만 책의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 중 한명, 난고의 직업은 교도관. 교도관이란 직업이 범상치 않은 거라는 생각은 해 봤지만, 사형집행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읽고 있자니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추상적으로 '사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왔었는지 절실해졌다. 영화나 소설로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간혹 교정사목을 하신다는 - 그러니까 교도소 내 재소자들의 종교생활을 위해 활동하시는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극악무도한 사형수는 없다. 사형 직전까지 갔을 때, 구십퍼센트 정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간혹 정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면 이전의 과오를 범하지 않고 속죄하며 살고 싶다,는 뜻으로 담담히 형 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때는 정말 왜 그들의 삶을 끝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죄를 신은 용서했으나 인간은 용서하지 않는다"(189쪽)는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괜히 어려운 이야기만 꺼냈지만, 이 책은 깊은 주제에 걸맞게 좋은 짜임새로 쓰여진 책이라 읽어나갈수록 점점 더 흥미롭고 그 끝이 어느곳을 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멋진 책이다. 기막히게 놀라운 반전, 이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쉽게 예측해버리면 안된다는 말이 더 어울릴 듯 하다. 하루에 다 읽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책이지만, 또 단숨에 읽지 않고 못견디는 책인것은 분명하다.
에도가와 란포상 심사위원 미야베 마유키의 "도저히 신인 작가라고 믿을 수 없다. 주도면밀한 구성과 탄탄하고 이지적인 문장에 읽을 때마다 감탄사가 터져나온다"는 말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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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6-1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의 세계가 좋다니까^^

chika 2006-06-1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원래 추리소설을 엄청 좋아했었다가...잠시 잊었었는데... 참말로~
만두언냐의 꼬드김에 빠져 다시 추리소설에 빠져들고 있사옵~ ㅠ.ㅠ
특히 일본 소설은 엄청 읽어제끼고 있수....크어~

반딧불,, 2006-06-1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좋고 리뷰도 좋고^^

chika 2006-06-1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책은 확실히 좋아요 ^^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구판절판


법률은 옳습니까? 진정 평등합니까? 지위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나쁜 인간은 범한 죄에 걸맞게 올바르게 심판받고 있는 것입니까?....
법률의 세계에는 일사부재리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한 번 확정 판결을 받은 피고인은 두 번 다시 같은 사건으로 재판받을 일은 없다는 규칙입니다. 저는 이미 이 사건으로 상해 치사죄 판결을 받아 형에 복종했으니, 이제 아무도 이 살인죄로 저를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남겨진 방법은 사형, 즉 사적인 형벌뿐입니다. ...
다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사형 私刑 을 허용해 버리면, 복수가 복수를 부르며 끝없는 보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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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6-13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옳은게 있기나 할까?

chika 2006-06-13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윽~ ㅠ.ㅠ
(옳은것도 많다고 봐요. 만두언냐도 옳고오~! ^^)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
로버트 카파 지음, 우태정 옮김 / 필맥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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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건 주머니 속의 동전 한 닢이 전부였다. 나는 동전을 던져 결정하기로 했다. 만약 앞면이 나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필코 영국으로 갈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콜리어스>에 내 처지를 설명하고는 전도금을 되돌려 주리라.
공중으로 동전을 튕겨 올렸다. 결과는 뒷면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까짓 동전에 나의 미래를 내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10쪽

보도 사진가로 산다는 것과 다정한 마음을 잃지 않고 간직한다는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해 보았다. 병사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장면은 빠뜨린 채 그저 한가하게 비행장 주변에 앉아 있는 모습만 찍은 사진은 사람들에게 진실과는 동떨어진 세게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전사자와 부상자까지도 여과 없이 찍은 사진을 보여줘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내가 감상에 빠지기 전에 그런 장면들을 한 통의 필름에 담아두길 잘했다는 판단이 섰다.-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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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넘어 2006-06-09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파의 책이군요.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 청년이 총에 맞는 장면을 촬영한. 이 책 읽어 봐야겠습니다. 지금 마음의 여유는 없지만. 침 발라 놓고 갑니다 ^^*
 
원피스 36
오다 에이이치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3월
구판절판


병기가 인간의 세상에 초래하는 것이 '평화'일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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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06-0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로 올리면 쉽게 묻혀버릴 듯 하여 올리는 리뷰!
으음~ 이럴꺼였으면 몇장면 더 찍을걸 그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