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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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를 어루만지는 작가, 메도루마 슌.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상처를 신비로운 상상과 유머로 풀어낸 물방울,
국가에 의해 죽어야했던 가미카제 특공대의 한을 흐느끼는 소리로 형상화한 바람소리,
가상의 책에 대한 서평만으로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기발한 형식의 단편 오키나와 북 리뷰.

수용소에서 시작된 전후 오키나와 문학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영토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져 생활 기반이 뿌리째 파괴되고 27년간 미국의 통치 아래 있던 오키나와의 문학은, 생활과 밀착된 문화의 재건‘ 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같은 미국 점령하에 있던 일본 본토의 전후 문학이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정신이 깔린 자유로운 표현을 기조로 삼았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전후의 오키나와 문학은 1945년 일본 패전부터 1972년 미국이 일본에 시정권을 반환할 때까지의 미국 점령기와 1972년 일본 복귀 이후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P199

1960년에 태어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메도루마가 이토록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기발한 구상, 이색적인 묘사, 탄탄한 문장력을 쏟아내며 다양한 작품에서 오키나와 전투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무엇일까? 1945년에 끝났어야 할 전쟁이 오키나와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기에, 아름다운 풍광 속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오키나와의 어두운 이면을 독자들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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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사실주의를 현대 인간의 문제와 연결시킨 콜롬비아 최고의 시인이자 소설가 알바로 무티스의 대표작.



읽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일종의 환상문학처럼 남아있는데 왠지 느낌이 백년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했는데 해설을 읽으면 그 느낌이 쌩뚱맞은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61년 마르케스가 멕시코시티에 도착했을 때 무티스는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무티스는 마르케스를 멕시코의 문학 엘리트들에게 소개해주고 후안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를 읽어보라고 조언하는데, 이 소설은 후에 『백년의 고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무티스는 1966년에 『백년의 고독을 탈고한 마르케스를 오후마다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1982년에는 마르케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때 함께 스웨덴으로 가서 축하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1993년에 무티스의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콜롬비아 정부가 ‘보야카 대훈장을 수여하자, 마르케스는 그 기념식장에서 무티스를 기리는 연설을한다. 이 연설문은 후에 몰락한 시대의 우정』과 『내 친구 무티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마르케스는 무티스의 시에서 작중인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바다와 육지 3부작』에 실린 시 「알람브라 3부작」과산문 「마크롤 가비에로와 화가 알레한드로 오브레곤의 만남과 음모에 관한 진정한 이유가 대표적인 사례다.
- P503

콜롬비아는 일련의 거짓말 위에 놓여 있다. 가령 콜롬비아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국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민주주의는계속되는 야만과 폭력을 간신히 숨기고 있다. 또한 콜롬비아는 시인들의 땅이라고 일컬어진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런 말은 현재에는 더이상 진실이 아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페인어는 콜롬비아에서 말하는 스페인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현학적인 문법학자들이 콜롬비아의 스페인어를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어중에서 가장 형식적이고 가장 생동적이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 속에는 슬픔과 괴로움이 잠재되어 있다. 즉, 망명의 쓰라림과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조국과 그 문화가, 부패와 탐욕과 폭력과 부정으로 인해 하찮은 국가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보는 괴로움이 있다.
마크롤은 그런 문화의 산물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인 것이다.
-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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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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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FBI에 전화를 해 묻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흑인이라고 해서 때렸다면 그건 증오범죄라 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강간했다면 증오범죄라 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강간했다면 그건 증오범죄라 할 수 없지요? "맞습니다"

"어떤 사람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노예로 만들거나, 다른 식으로 해서 그 사람이 일하도록 강제한다면, 그건 증오범죄라고 할 수 없지요?" "맞습니다"


증오범죄,라는 건 무엇일까.


데릭 젠슨이라는 이름을 보고 혹시나... 싶었다.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나 싶었는데 조금은 아쉽게도 이전 책 '거짓된 진실'의 개정판이다. 

이 기회에 다시 꺼내들어 슬쩍 읽어보니... 정말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듯이 풀어나가고 있어 읽기에는 편한데, 문득 책이 씌여진 2004년,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2008년, 그리고 개정판이 나온 지금 2020년에도 이 책에 씌여진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라는 것이 착잡하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모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 뒤에서 그것도 그의 세 아이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경찰관이 케어콥 블레이크에게 7발의 총을 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세상은 변하는가? 그렇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가? 그렇다.


10년도 더 전에 내가 썼던 감상을 다시 읽어보며 지금의 세상은, 그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생각해보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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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는 사람이 위험에 직면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자유로운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다(190)

이 책을 읽는 내내 편하지 않았음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거짓된 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해보기도 전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적나라한 모습을 봐야했으니까.
나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진실'이기 때문에 그것에 직면해서는 결코 고개를 돌려서는 안된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진실을 직면한다는 것과 그에 더하여 끔찍한 증오를 만나게 된다면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세상에 대해 환멸과 좌절을 느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상상하던 끔찍함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는가를 느꼈다. 과연 진실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이 책을 쓰면서 내가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인식에 관한 것이다. 또는 인식의 결핍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직해져보자. 우리의 경제, 사회체제는 지구를 죽이고 있다. 다른 생물은 차치하고 인간만 보더라도 우리의 활동은 전례없는 궁핍을 만들어내고 있다. ...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명백한 부정의에 대해 누군가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지적을 하면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 갈가리 찢어발기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끝까지 공격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공동의 미래를 파괴한다. 정복에 저항한 원주민 부족들을 사람들은 얼마나 열광적으로 억압해왔는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강하게 저항하는 이들에게 똑같은 결말을 안겨주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그들을 열성적으로 공격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8-9, 서문)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끔찍한 세상의 적나라함을 그대로 보여주며 때로는 증오하라고 부추기는 듯, 데릭 젠슨은 도전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처음 이 책을 읽을때는 그런 인식조차 없이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이런 끔찍한 세상의 적나라함을 보여주고, 이제 그 피비린내나는 역사가 바로 잡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 어쩌면 더욱더 끔찍하고 증오로 가득차서 교묘한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그는 왜 증오를 부추기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하는가?

'이 책은 하나의 무기다. 잔학 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고,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메뉴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성냥이다.'(11)
문득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왔다'라는 성서말씀이 떠오른다. 평화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동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인 예수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데릭 젠슨의 말이 일맥상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실 책을 읽었음에도 나는 '거짓된 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얘기하기가 힘들다. 다만 어렴풋이 잡히는 윤곽만을 보면서 이 끔찍한 세상을 바라보려고 애써볼뿐이다. 물론 지금도 외면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있지만).

마이클 무어의 영화(볼링 포 콜롬바인 bowling for columbine)에서 희화적으로 그려졌지만 - 나는 그 영화를, 끔찍한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풍자적인 표현과 간단 명료한 진실의 접근에 마구 웃으면서 봤던 기억이 있다. -  침략과 약탈의 역사 위에 세워진 북아메리카를 볼 수 있다. 그리고 8mm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져 그 인기를 실감케했던 에미넴의 화이트 아메리카 (white america)도 거친내용과는 달리 역동적이면서 경쾌한 리듬으로 풍자된 백인들의 아메리카에 대해 웃으면서 노래를 듣곤했었다. 나는 세상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의 인식속에서 구역질날만큼 끔찍하고 증오에 가득차고 온통 피바다였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도대체 이 책은 어떻게 씌여졌길래 그리 끔찍하다는 이야기를 자꾸하는지 궁금해지려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감상적인 리뷰를 읽기보다 직접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겠다. '계급, 인종, 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가 이 책의 부제이다. 그만큼 광범위하게 씌여졌지만 - 간혹 너무 광범위하고 세세한 자료 조사로 인해 내 이해의 수준을 넘어버려 이해하기가 어려울때도 있긴 했지만 - 소화해낼 수 없는 범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가끔 - 아니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아주 자주 '그래, 잔인하고 폭력적인 약탈과 침략으로 일으켜 세운 피의 아메리카 얘기일뿐이야'라고 내뱉었었다.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죽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죽이고 있는 것이 피의 아메리카뿐은 아닐진대 나는 역시 그렇게라도 생각하면서 또 진실을 슬그머니 빗겨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괴물들이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프리모 레비)
우리는 괴물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결코 기계인간이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지금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지구 환경에서 마음껏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세상에 불을 지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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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의 총파업이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는 내용은 어디있을까.
수입이 줄어든대도 나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게 될텐데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되는건지?
무작정 의대 정원을 늘리는것에 전적으로 찬성하는것도 아니지만 이토록 강경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더 모르겠다.
근본적인 내용들은 나오지않고 기싸움하는 내용만 난무하니 어쩔껀가.

계속 병원을 다녀야하는 기저질환자는 그저 훌륭한 의료진이 많기만을.
친절한 의사가 훌륭한 의사와 동의어는 아니라는걸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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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는덧 이 책도 읽은지 10여년이 되어가는구나.
하아.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의미에서 테스는 ‘순정한 여인 이다. 순정함은 자존감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질이다. 개인의 대두를서양 근대의 전환점으로 볼 때, 순정함은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 감정과 행동의 일치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이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하는 자존감이 순정함의 근거라는것이다. 물론 테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알렉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의 정부로 살아야 하고, 에인절을 사랑하기 때문에 알렉을 죽이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감정과 언어, 언어와 행동이 일치하는 순정함을 드러낸다. 알렉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자 즉각 그의 곁을 떠난것, 에인절이 겉과 속이 다른 여자로 그녀를 규정하자 그를 붙잡지 않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테스의 비극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몸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중산층 여주인공들은 결혼을 통해 그나마 자아를 실현한다. 노동계급 여성인 테스에게 신분 상승의 신데렐라식 결말은 허용되지 않는다. 테스는 살인자로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몸은 전시되지만, 전시된 몸을 바라보는데 만족할 것이냐 죽음으로 입증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순정함을 읽어낼 것이냐는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 P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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