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세컨드라이프를 현실도피라 하고, 세컨드라이프 주민은 그 말에 더러 반발한다. 그러나 세컨드라이프가 도피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은 보편적이며 비난할 만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어떤 삶을 산다 한들 우리는 그 삶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한다. 몽상을 통해서, 이야기를 통해서, 예술과 음악, 중독성 마약, 불륜과 스마트폰 스크린이 가져다주는 엑스터시를 통해서. 이런 형태의 ‘떠남‘은 진정한 존재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저 존재 증상의 하나다. 사랑에 갈등이 따라오고,
친밀함에 거리감이 따라오고, 믿음에 의심이 따라오듯이.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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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란 도움을 기꺼이 준다는, 어쩌면 기껍지 않을 때마저도 어쨌든 도움을 준다는 의미일까? 자비의 정의는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비를 베풀기 위해 전날 밤 숙면을 취해야 할 필요가 없고, 자비를 얻기 위해 전과 기록이 없어야 할 필요도 없다. 자비에는 특정한 뒷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면 가방에 든 껍데기를 소라게 껍데기라고 하는 건 소라게가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라게가 언젠가 쓸 거라는 뜻이에요?" "네." 남자가 대답한다. "그 말대롭니다."
그 말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무엇의 쓸모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한다.  - P81

자비란 도움을 기꺼이 준다는, 어쩌면 기껍지 않을 때마저도 어쨌든 도움을 준다는 의미일까? 자비의 정의는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비를 베풀기 위해 전날 밤 숙면을 취해야 할 필요가 없고, 자비를 얻기 위해 전과 기록이 없어야 할 필요도 없다. 자비에는 특정한 뒷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다.
당신은 이 이야기가 자꾸 바뀌었다고 생각했겠으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그 여자는 처음부터 그저당신 바로 앞에 앉아 고통을 호소하던 한 여자다. 때로는 아파서서 있기도 힘들다. 때로 사람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움이 필요하다. 그의 이야기가 도움을 얻기 충분할 만큼 설득력이있거나 고결하거나 이상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때로 당신은 그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 일을 한다고 해서 당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일은 당신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그저 당신이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그 사람이 되는 날을 상상해보는 아주 짧은 한순간 말고는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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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7일, 퓨젓사운드만의 위드비섬, 세계대전은 끝났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도 끝났다. 냉전 역시 마침내 종식되었다.
위드비섬 해군항공기지는 남아 있다. 그리고 산호해 해전에서 시신을 남기지 않고 전사한 전투기 조종사 윌리엄 올트의 이름을딴 비행장 너머로 한없이 넓고 깊게 펼쳐진 태평양 역시 그대로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바다는 사람의 몸을 통째 삼켜 불멸의 존재로 만든다. 윌리엄 올트는 다른 이들을 하늘로 실어 보내는 활주로가 되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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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른다.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에게는 이해를 뛰어넘은 감각이라는 게 있다. 알고 있는지식 따위, 실제로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세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알지 못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도 모른다, 라는 그 겸허함이 멋있게 느껴졌다. 높직이 쌓아 올린 저 책들 속에 과연 얼마나 정답이 들어 있을까. 오히려 나도 모른다, 라는 히사나의 대답 속에 진실이 잠들어 있다. 거짓 없는 정직함과 품이 넉넉한 다정함, 그리고 한없는 성의가 담겨 있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
렌지가 과거를 다시 떠올리며 물었다.
‘학교 친구는 없어? 나한테 와 봤자 너무 따분하잖아."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히사나는 그런 렌지를 바라보았다.
히사나, 넌 어떻게 그렇게 다정해?"
어린 시절의 렌지는 부모의 따스함이라고는 접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혈육도 아닌 히사나는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글쎄. 왤까? 나도 몰라."
히사나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렌지는 그 대답이 무척 마음에들었다. 나도 모른다.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에게는 이해를 뛰어넘은 감각이라는 게 있다. 알고 있는지식 따위, 실제로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세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알지 못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도 모른다, 라는 그 겸허함이 멋있게느껴졌다. 높직이 쌓아 올린 저 책들 속에 과연 얼마나 정답이 들어 있을까. 오히려 나도 모른다, 라는 히사나의 대답 속에 진실이잠들어 있다. 거짓 없는 정직함과 품이 넉넉한 다정함, 그리고 한없는 성의가 담겨 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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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무엇보다 안 좋은 건 익숙해진다는 것이죠. 아동 학대에 대한 것도 업무 효율을 따져서 가장 심한 케이스부터 처리하게 되거든요. 순위를 매기는 거예요. 그나마 이 케이스는 아직 어떻게든 헤쳐나갈 것이다, 아직은 괜찮다, 라고 넘겨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야겠죠. 그 아이는 강하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을 힘이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자꾸 뒤로 미루게 돼요.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아이부터 먼저 살려야 하니까. 그렇게 렌지일은 뒤로 밀립니다. 변명 같지만 그게 실제 내 본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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