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구판절판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그는 다시 한번 이름을 바꿨다. 옛이름은 과거의 인생과 함께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길잡이'라는의미의 '인디카비아'라 칭했다.
사람들이 이 이름의 뜻을 물어오면 그는 습관처럼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길잡이 노릇을 하는 이정표는 비바람에 부서지고 썩기까지 해서,그 자체론 아무 가치도 없는나무 한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무 토막은 자신의몸 위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스스로 읽을 수 없다. 설사그 것을 읽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 자체론 아무가치도 없는 나무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무 토막은 자신의 몸 위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스스로 읽을 수 없다.설사 그것을 읽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그리고 자신이 안내하는 그 목적지에는 결코 가볼 수도 없다. 하긴 자신이 세워져 있는 그곳에 머무르는게 그의 존재 목적이기도 하다. 이정표는 자신이 가리키는, 바로 그 목적지만 빼곤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으며, 그곳이 어디든 그의 가치는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 목적지야말로 이정표가 아무런 쓸모도, 아무런 의미도없는 유일한 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인디카비아 자신은 지금 자신이 안내하려는 그 목적지에 있는게 아니므로, 그 길을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말이다.......-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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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을까?
난 '자유의 감옥'이 긴 이야기인 줄 알았다. 더구나 '모모'를 쓴 미하엘 엔데이기에 막연히 밝은 이야기로 가득하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어렸을 적 읽은 모모를 떠올려보면 결코 통통 튀는 밝음은 없다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는데.

자유의 감옥은 8개의 단편이 묶여있다. 물론 각기 독립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지만, 서로 연관되어 읽히기도 한다. 아니, 이런 설명은 내 전문이 아니다. 책에 대한 설명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의 느낌을 털어놓자.

첫번째 이야기 '긴 여행의 목표'를 읽을때부터 나는 이미 미하엘 엔데를 동화작가라고만 잘못알고 있었음을 상기시키지 않아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미하엘 엔데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실과 허상이 마구 뒤섞여버린다. 더구나 조금씩 모습을 나타내는 '진실'이라는 것이 자꾸만 괴롭힌다. 그는 적당히 얘기하고 포장해서 넘겨버리지 않는다. 적나라한 진실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 그래서 진실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인해 맘이 편치않았었나보다. 지금까지 내가 회피해 온 진실들이 나를 정면에서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있다.
이젠 모른척하거나 회피할 수 없어, 넌 나를 이미 느꼈던거야. 그러니 이제 너도 네 모습을 뚜렷이 바라봐.
그리고 경계선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어느곳을 바라보고 그 어느곳을 가든지 저 너머엔 빛이 있고 내가 찾아 헤매는 그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것은 '나' 자신임을 기억하면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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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 5,17-18

 

나는 이천년 전 베들레헴의 더러운
말구윳간에서 태어났으나
지금도 그대의 비참한 슬픔을 위하여
가난한 시골집에서도 태어납니다
나는 사랑을 위해 그대 생애 속으로 들어왔으나
좀 더 큰 사랑을 위하여
그대 생애의순간 속에서
태어나고 괴롬받고 또 부활합니다
나는 사랑을 위하여 역사를 택했으나
다시 사랑을 위하여
당신의 생애를 택합니다
이것은 그대 절망의 찰라가 그지없이 길다는 뜻도 되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완성하기 위해서
당신 온 생애의 수없는 부활이 필요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대의 역사는 지금 내 눈앞에서
반바퀴도 채 못돌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불변은 아닙니다
변치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
내가 불변이라고 해도 그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그대는 그대의 변함으로
나의 변치않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어느 여관방에서 애비없는 자식으로 태어나고
지금도 그대 오만의 죄 속에서
그대와 함께 죽어갑니다
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 역사는 아니나
내가 사랑하는 당신들의 역사를 위해서
끊임없이 저질러지고 또 구제받아야 되는
어떤 찰나의 참상인 것입니다
그건 당신의 혁명을 위해서
그건 당신의 인간됨을 위해서
배반을 위해서, 부활을 위해서
마침내 그대와 내가 동시에 필요한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김정환, 황색예수전, 탄생의 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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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의 논리

예수님은 이승의 삶을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옹호해야 할,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아니하시었습니다. 이승의 삶은 오로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신 하느님에게서만 만나게 되는 충만한 성취 속에 질서지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대로의 생명력의 활동은 한 은혜입니다. 즉, 이웃과 만나려고 자신의 밖으로 나가는 것, 남을 섬기는 것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위대한 현자처럼 말씀하실 수 있었는데, 곧
자기 목숨을 지키려는 사람은 잃을 것입니다 (요한 12,25 마태 10,39 ; 16,25)
라고 하시었습니다. 목숨에 매달리는 사람에게는 목숨이 끝장으로 내달으리라고. 예수님 자신이 섬기는 사람으로(마르 10,45), 특히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봉사자로 스스로 느끼고 계시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이란 더불어 삶(Mit-Leben)이요 실존이란 위하는 실존(Pro-Existenz)이었습니다. 남을 위하여 몸바치면서 어떤 인간 차별도 없이 꼴찌에게서부터 시작하는 그런 실존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삶에서 펼치어 나오는 절로 환한 귀결, 그것은 사랑과 포용과 용서와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밀알에서 삶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의 한 본보기를 보시었습니다. 밀알이 땅 속에서 죽지 않으면 혼자 그대로 있을 뿐, 아무 열매도 내지 아니합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내게 됩니다(요한 12,24). 여기서 죽음은 고스란히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따로 남겨두지 아니하고, 그러면서 남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다 하는 것입니다. 보기로는 약함을 드러내는 듯한 이 자세가 실상으로는 진정한 자기 실현을 체현합니다.

- 레오나르도 보프, 해방하는 복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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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교적인 성향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요. 그래서 항상 스텔라님에게 보내는 글에는 이렇게 '신앙'에 대한 글이 들어가게 되네요.  처음 떠올렸던 것이 '탄생의 서'였답니다.

나는 사랑을 위하여 역사를 택했으나
다시 사랑을 위하여
당신의 생애를 택합니다

지금까지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다시 사랑을 위하여 그분의 생애를 택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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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9-30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고맙습니다. 너무 귀한 글입니다. 저는 얼마전 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그런 일을 당했는데, 예수님의 생애만 생각하면 나는 정말 보잘 것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는데 나는 고작 자존심의 문제 가지고 씨름하고 있으니 한없이 작은 존재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이것 때문에 저는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 건 불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ㅜ.ㅜ

chika 2005-10-0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어떤 일이 있으셨길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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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사무실에 조퇴까지 하면서 그녀의 강연을 들으러 갔었다. 그때 나는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를 내밀었고 그녀는 '와~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책이 등장했네'라고 하며 '그 꿈 이루시길!'이라 사인을 해 줬던 기억이 난다.
그 때 한비야님의 꿈은 난민촌에서 굶주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희망을 나눠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조금씩 베테랑이 되어가는 긴급구호요원이 되었다.

사인본을 받고 싶은 욕심에 급히 구입한 책을 받고 첫 장을 폈을 때, '우리, 함께 가요!'라는 글을 보며 순간 멈칫, 했다. 내 꿈을 꼭 이루라고, 분명 꿈은 이뤄진다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을 했던 그녀는 이제 내게 손을 내밀며 함께 가자고 한다. 아, 그래. 함께 가야지.

사실, 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산하 국제까리따스의 후원자이다. 그러니까 이미 몇년동안 세계 기아민 돕기 후원을 해 왔다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한달에 얼마간의 금액을 후원하면서 내 할일을 다 했다고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겨우 밥 한끼니의 금액이고, 밥 한끼 굶으면 배고프다, 말 한마디로 잠시동안 힘든척하다 기름진 음식먹고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내 밥 한끼니가 이 땅 건너편 누군가에게는 일주일의 생활비가 된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좀 전에 월드비젼 홈피에 가서 후원 신청을 하고 왔다. 해외아동결연..이었던가? 잠시 고민하면서 이미 가입한 후원회의 후원금을 올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결연을 맺는다면 그건 또다른 나의 책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직은 너무 가까우면 내가 느껴야 할 부담감과 마음을 옥죄는 듯한 아픔을 못견딜 것 같아 먼곳의 그 누군가와 보이지 않는 인연을 만드는 것이 좋을 듯 해서말이지. 이것이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괜찮다. 바닷물에 양동이 한 바가지를 퍼 넣는 것이된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엄청 클테니까.

아직은 머뭇거리고 있지만 나 역시 그녀가 내미는 손을 잡으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히 처음 책을 받아들고 옆에 있던 누군가가 잠 잘 시간도 없다면서 책도 냈네, 라는 말에 나는 무심코 '돈이 필요했나보지 뭐'라고 했는데 그 말이 정말이었다는 것은 책을 다 읽고 나서 알았다.
한비야라는 사람에게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정기적인 후원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고도 아직 후원신청서 쓰기를 망설이고 있다면 그는 오즈의 나라에 가보기를 권한다. 그래서 도로시를 만나 강철 심장을 빼내고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심장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쩌다보니 리뷰가 아니라 어떤 곳이든 얼마를 하든 어느 기간을 하든 다른 누군가를 위해 후원자가 되어달라는 호소문이 되어버린 듯 하다. 그렇지만 내가 이러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읽고 느낀바를 실천하는 모습이니 전혀 엉뚱한 건 아니겠지?

 

사족을 붙이자면. 그녀는 엄청난 달변가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한비야,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그녀만의 특별함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맘 설레이고 슬며시 웃음 짓게 되고 어렴풋이 희망이 맘 한구석에서 커져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내가 그녀의 책을 꼭 사서 읽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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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9-26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요. 후원이요 라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chika 2005-09-2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고맙습니다. ^^
 
사진이란 무엇인가 - 최민식, 사진을 말한다
최민식 지음 / 현실문화 / 2005년 6월
품절


보릿고개 시절의 비참한 가난과 아픔을 찍어낸 나의 사진들 앞에 따뜻한 촛불이 일렁인다. 나는 세상에서 잊힌 사람들을 찍는다. 볼품없이 일그러지고 불쌍한 자들, 가까이 가고 싶지조차 않은 자들의 외로운 외침을 듣는다.
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운명과 대결해 싸우고 있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다. 사진 속의 슬픔을 간직한 그들이 내게 걸어와 눈물 흘린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서러운 인생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비록 단 한장의 사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Russell Lee의 작품.
이 사진 한 장에는 사랑과 따뜻함이 넘쳐난다. 그리고 너무 밝다.
어쩌면 공황에 따른 극심한 빈곤과 인종차별 같은 삶의 고단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엄마에게 배움을 받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설레임만 있을 것 같은 평온함과 미소가 있다.

전쟁고아. 1949
제 발보다 큰 어른의 신발을 신고 기뻐하는 어린이. 고아원 뜰에서 보모의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행진하는 전쟁고아의 모습이다. 고아원 수녀들의 보살핌을 받은 어린이의 천진한 표정이 숭고한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어린아이의 조용한 걸음걸이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이 사진은 더욱 감동스럽다.(p193)

내가 어렸을때도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다. 그래서 뭔가 받으면 가만히 하루 종일이라도 그걸 바라보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누가 뭐래도 내가 받은것은 무조건 최고로 좋은 것이었으니.

두분의 모습이 너무나 다정스러운 것 아닌가?
고단한 삶을 살았겠지만 지나 온 모든 것을 추억하면 '행복'을 떠올릴 것 같은 미소를 띄고 있다.

엊그제 나는 아마추어 동호인들의 작품 전시회에 갔었다. 조금은 평면적인 듯 하고 느낌이 없는 사진들이 많았다. 이들은 무엇을 담으려 했을까.
그 중에 맘에 든 사진 한 장.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들과 수사님들이 커다랗게 웃으며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치렁치렁한 수도복은 지금까지 내게 침묵과 근엄, 권위의식, 구별.. 같은 안좋은 인상만을 남겼었나보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환한 그들의 모습에서 수도복은 그순간 그들의 행복을 나타내 보이는 듯 했다. 여기 이 아이들의 웃음과 비슷한.

그렇게 사진 한 장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여전히 세상은 불의로 가득차 있고 많은 고통이 있다. 이 노동자들의 사진에도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흙더미 이상의 삶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겠지.
이 사진 한 장은 그렇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넌 함께 하고 있니?'

나는, 저 평온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사랑이 넘쳐나는 모습을 위해 함께 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사진 한 장은 그렇게 내게 삶의 물음을 던진다. 사진의 의미는 그런것일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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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9-26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고르신 사진하고 두 장 겹치네요. ^^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어 좋습니다...

chika 2005-09-2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