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그러므로 우리는 카를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유들을 알게 될 것이다. 지난 세기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이유들, 잘못된 확신들에 양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 어떤 권력이든 반환될 수 있어야 하며, 어떤 이론도 반박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떤 진실도 다른 진실에 의해 추월되게 마련이다. 또한 어떤 자유의지도 소멸될 것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생각이든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말고, 상반되는 관점들을 받아들이며, 원인과 책임 요소들, 메커니즘과 행위자들, 계층들과 사람들을 혼동하지 말며, 언제나 열려 이어야 하는 이유들을 말이다.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 이유 말이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세대들이 추방된 카를 마르크스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런던의 빈궁 속에서 죽은 자식들을 놓고 슬퍼하면서 최선의 인류를 꿈꾸었던 그를. 그러면 미래의 세대들은 세계의 정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의 주된 메시지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741)


마르크스의 사상과 삶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또한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일반명사처럼 불리워지고 있는 카를 마르크스에 대해 흘려버릴 뿐이지 정작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야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것이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막상 책을 다 읽고, 마지막의 저 문장들 [그러므로 우리는 카를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그의 주된 메시지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을 읽고 책을 덮으려니 마음 한쪽이 도로 무거워지는 듯 했다. 사실 이 두툼한 책을 사상은 커녕 역사인식도 제대로 못하면서 읽으려고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점점 마무리 되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써 가벼워지던 마음이 한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당신의 신조는? 인간적인 그 어느것도 내게 낯설지 않다.(431)]
1865년, 카를 마르크스는 사랑하는 사촌 나네트와의 고백놀이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인간적인  그 어느 것도 내게 낯설지 않다'
또한 그가 좋아하던 표현 중의 하나는 '인류를 위해 일하다(260)라고 한다. 그저 막연하게 '자본론'의 저자, 유물론적 사관, 정치경제학을 확립시킨 좌파의 신적존재(?)로만 알고 있던 마르크스에 대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다.

솔직히 얼치기로 알고 있는 그에 대한 내 지식을 갖고 감히 '마르크스 평전'을 읽은 리뷰를 쓴다는 것이 내게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일이다,라는 말을 하고 리뷰를 끝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건가. '평전'이라는 것은 물론 그의 삶,에 녹아들어있는 모든 것, 사상뿐만이 아닌 생활태도, 인간관계까지 아우르며 이야기하는 것이고 나로서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그가 '인간'에 대해 가졌던 마음과 그의 인간적인 생활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을.
무장혁명을 원한 것도 아니었고, 신을 중심에 둔 기독교적 공산제 사회를 호소한 것도 아니었고, 일당 독재는 더더구나 말하지 않았던 마르크스의 사상을 내 능력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 성서를 읽으며 막연하게 '공산제사회'를 생각해봤던 나의 추상성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에 관심을 갖고 소외된 인간의 해방을 위한 사상적 체계를 확립한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이 책을 쓴 저자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해버리려고 한다.

"..... 그는 보편성에 관한 정치적 사상가이자 약자들의 수호자가 되었다. 이전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했다 해도, 세계를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총체로서 파악한 사상가는 마르크스가 처음이다. 그는 첫 스승인 헤겔을 본떠서 현실에 대해 포괄적인 해석을 하고 싶어했다. 그렇지만 헤겔과는 달리 현실을 더 이상 신의 지배 속에서 보지 않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만 보았다. 그는 모든 분야, 모든 언어와 지식에 대해 어마어마한 욕구를 보이면서 세계와 인간 자유의 원동력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애를 썼다. 그는 세계의 정신이었다."[저자 머리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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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절판


좋아하는 특질은? 단순성. 남자에게서는? 힘. 여자에게서는? 약함. 당신의 주된 성격은? 고집. 당신이 좋아하는 일은? 나네트를 바라보는 것.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결점은? 굴종. 당신이 가장 쉽게 용서하는 결점은? 맹신. 행복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투쟁하는 것. 빈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굴복하는 것. 당신이 좋아하는 시인은? 아이스킬로스와 셰익스피어. 당신이 좋아하는 산문 작가는? 디드로. 당신의 신조는? 인간적인 그 어느 것도 내게 낯설지 않다. 당신의 신조는? 모든 것에 의심할 것. 당신이 좋아하는 색깔은? 빨강색. 당신이 좋아하는이름은? 예니와 라우라.
그때 마르크스는 행복을 1848년 샤토 마르고 산 포도주라고 정의하였고, 불행은 치과에 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1865년의 일)

******** 인간적인 그 어느것도 내게 낯설지 않다,는 말 한마디때문에.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나는 왜 마르크스를 읽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더 심해지고 있다. 그의 사상에 대해, 인성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솔직히는 궁금하지도 않은거였잖아!-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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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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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위해 일하다'가 그가 좋아하던 표현들 중 하나였다. 설사 노동자계급의 괴로움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공산주의에 이르게 된 것은 감상적인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이다. 그는 사적인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계급의 편견들에 현혹되지 않는 공정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든 자기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 마르크스의 한 측근이 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과연 누.구.일.까?-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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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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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에서 객관적으로 펼쳐지는 풍요 덕분에 어떤 귀는 음악가가 되고, 어떤 눈은 형태의 아름다움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다. ... 인간의 눈은 인간적이지 않은 상스런 눈과 달리 즐기며 인간적인 귀는 상스런 귀와는 다르게 즐길 줄 알며 등등... 사회적 인간의 감각들은 비사회적인 인간의 감각들과는 다르다.
개인성과 집단성은 이때부터 초월된 인간성 속에서 혼동될 수도 있다. 인간 열정의 존재론적 본질은 총체성과 인간성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고독의 끝이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승리이기도 하다. 죽음은 정해진 개인에 대한 인류의 힘겨운 승리처럼 보인다. 반면에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립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이 메시아적 공산주의는 정치만 갖고서는 되지 않으며 역사의 개입을 통해서 실현될 것이다. 또한 자기 자리가 아니라 역사의 끝에서야 자리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풀어져버린 수수께끼이다. 역사의 전체적인 운동은 이런 공산주의의 생식 행위이다.-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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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11-17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67쪽.
인간의 본질은 고립된 개인에 내재한 추상성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는 사회적 관계들이 총체이다. 모든 사회적인 생활은 기본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끄는 모든 신비들은 인간의 실천과 그것의 이해속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윌리엄 슈니더윈드 지음, 박정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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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경을 읽기도 하고, 성경공부도 했고, 주해석서도 읽어봤고.... 그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이 책을 읽는데 좀 더 수월하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기본적인 얘기를 건너 뛰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그나마 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참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겨우겨우, 뜻도 내용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장수만 넘길뿐이었다.

문자화된 기록으로 남는 것의 의미를 말하고자 한 것인지, 성경이 기록되어가는 과정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 경계선의 모호함속에서 나는 저자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후다닥 책을 덮어버렸다. 나같은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흥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한다면 대부분이 한번쯤은 성경필사라는 것을 해 봤을 것이다. 책을 그대로 베껴 옮기는 일에도 수많은 오자가 생기고 문장이 빠져나가 문맥의 흐름이 이상해져버릴 때도 있는데 과거에 구술되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은 당시의 기록문자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뜻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기본적인 전제, 그러니까 성경이 구두전승되어 온 신앙을 기록한 것에 중점을 둔 것인지 아니면 권력을 잡은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기록문자를 이용해먹은 것인지 분명히 밝혀두고 있지 않다. 책을 너무 허술하게 읽어버려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서평이라는 걸 쓰고 있는 것도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네. 아, 어쩌나. 이것도 기록으로 남아버릴텐데 말이다.

"글은 무엇보다 국가에의해 통제되었고, 국력의 과시 수단이자 행정의 도구였다. 두번째로 글은 신의 선물이었다. 그런 경우 글은 저주문이나 ''쓴 물''의 의식과 같은 마술적 의식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글은 또한 하늘에서, 즉 ''생명의 책''에 사람들의 이름을 올리는 데 쓰이거나 하느님이 땅위에 거하실 처소의 설계방법을 기록한 점토판 위에 씌어지기도 했다. 반면에 구두전승은 문화를 후대로 이어주는 매개 수단이었다.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를 불렀다. 금언과 옛 이야기, 노래를 통해 각 세대는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적 유산을 전수받고 또 전했다"(312)

나는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나''의 의문이 풀리기 보다는 유대 랍비들의 권위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나,를 알게 된 것 같다. 저자는 또 글을 끝맺으면서 "랍비 유대교나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서기관 출신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 지도층이나 학식 있는 제사장들이 주도하던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랍비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는 평민이나 배우지 못한 이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그에 따라 구두전승과 선생에게 권위가 주어졌다''라고 하고 있다. 내가 조금 비약해서 이 말을 받아들이자면 문자로 기록된 성경이 구두전승을 이어나가는 유대랍비의 권위에 못미친다는 말처럼 느껴진다. 아, 요즘 유행어처럼 ''그건 아니잖아~''를 외치고 싶은 심정은 또 뭔가.
문자,라는 것이 단지 지식인층이 점유하는 것이고 문자로 기록된 것은 지배자지식층의 것이다 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다. 물론 저자의 뜻도 그런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덮고나서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다.

오히려 기록문자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 훨씬 좋았을지 모르겠다.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것이 명확해보일 것 같다. 괜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성경''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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