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큼한 번역


직역과 의역을 두고 이야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옮긴 번역을 의역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런데 사실 직역도 충분히자연스러울 수 있다. 자주 드는 예로 킬러의 보디가드 2: 킬러의와이프에 이런 문장이 있다.
•소니아한테 입만 뻥끗해봐. 아주 참신하게 조져줄 테니까.˝
(You say one word to Sonia about this. I‘ll invent new ways to killyour ass.)

보통은 의역이라고 생각하는 이 문장도 직역에 가깝다. 혼히 원문과 번역문의 주어, 술어가 일대일로 상응해야 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문장 구성요소의 의미를 희생하지 않고 온전히 같은 의미로 옮길 수 있다면, 심지어 뉘앙스만 동일하게 옮길수 있더라도 그 역시 직역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 문장에선
˝invent (발명하다, 개발하다)‘라는 동사의 뉘앙스만 가져와 ‘참신하게‘라는 부사로 옮겼다. 반드시 동사를 동사로 번역해야 직역이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자는 가능하다면 최대한 원문의 의미를 번역문에 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경•우는 원문의 의미를 직역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 오히려 내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의역을 도모하는 편이다.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I don‘t know why it is that I find it so very difficult, justbeing here on this earth.˝

그대로 옮기자면 아래와 같다.

˝그저 이 땅에 존재하는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
당시 내 1차 번역본은 이러했는데 자막을 올리고 감상해보니 감흥도 없고 무슨 뜻인지 전달도 잘 안 됐다. 특히 ˝그저 이땅에 존재하는게(just being here on this earth)˝라는 부분이 퍽 어색했다. 문장이 구어처럼 자연스럽길 하나, 의미가 잘 들어오길 하나. 결국 다 뜯어고치기로 작정했다. 직역으로는 원하는 만큼의효과적인 전달이 불가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그래서 이 문장이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를 파악하는거다. 화자의 상황에서 ˝그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부터 찬찬히 고민한다. 화자는 그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고말한다. 그렇다면 화자의 판단에 그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원래는 ‘누가 봐도 힘들지 않은 일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저 이 땅에 존재하는 것, 일도 사랑도 그 어떤 것에도 엮이지 않고 그저 아메바처럼 존재만 하는 것. 원칙적으론 힘이 들지않아야 한다. 에너지를 쏟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화자는 힘이 드는 거다. 그렇다면 아무런 에너지를 쏟지 않고 그저 존재만 하는상태를 문장으로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한국어에 그런 표현은 뭐가있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만들어진 문장은 다음과 같다.

˝숨만 쉬어도 살아지는 삶인데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

물론 숨만 쉬어도 살아지는 삶˝과 ˝그저 이 땅에 존재하는것의 간극은 꽤 크다. 다만 화자의 의중을 깊이 추론했을 때 치환할 수 있는 수준의 문장이라고 판단할 뿐이다. 이 문장을 좋은 번역의 예로 꺼내온 것은 아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직역문을 내놓지 못해 필사적으로 우회한 결과물에 불과하니까. 다만 때로는의역이 직역보다도 더 우리에게 밀착된 번역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마냥 자연스러운 번역이 의역이 아니라 번역가들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쓰는 이런 식의 번역이 의역이다. 물론 그 목적이 마구잡이식의 자의식 전시가 될 때는 문제가 커지기도 하겠지만. 의역은 오역의 여지도 있고 월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건드리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번역의 재미와 묘미가 숨어 있는 지점은 이런 원문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이다.

응큼하게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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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대사란 결국 사람과 사람간의 대화다. 그러니 실제 대화에서 타인의 말을 사람마다 다르게받아들이듯, 번역가마다 서로 다른 뉘앙스를 살린 다양한 번역이나오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번역가는 대사의 전달자가 아니라 대사에서 풍기는 뉘앙스의 냄새를 판별해서 전달하는 사람인지도모르겠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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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일을 겪은 후로 사람을 대하는게 조금은 달라졌다. 모든 사람에게 살갑게 대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일부러 상대를 아프게 할 필요는 없더라.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당신과의 마지막날이 있다. 다만 그게 언제일지는 모른다. 그래서라도소중한 사람에겐 물론이고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마지막 인사는 무던히 하는 게 좋다. 억지로 상냥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상처를 줄 필요도 없다. 그저 덤덤하게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은 인사하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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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인류의 관심사가 달라져 지금과 같은 과학적 호기심이 멈추고 전혀 다른 것들이 인간 마음을 차지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아주 약간은 위안이 돼. 결국 기술은 인간의 배설물일 뿐 대단한 ‘무언가‘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거든.



 "현존하는 무시무시한 핵전쟁의 가능성이 더 끔찍한 것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네.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우리가 설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어. 마침내우리는 지구의 유한한 실제 크기가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했네. 기술이 무르익어 찾아온 위기지. 지금부터 다음세기 초반까지 세계에 불어닥칠 위기는 이전 양상보다 훨씬 더심각할 거야. 언제, 어떻게 끝날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언젠가 인류의 관심사가 달라져 지금과 같은 과학적 호기심이 멈추고 전혀 다른 것들이 인간 마음을 차지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아주 약간은 위안이 돼. 결국 기술은 인간의 배설물일 뿐 대단한 ‘무언가‘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거든.
거미줄이 거미의 일부이듯 기술도 우리의 일부일 뿐이니까. 하지만 기술은 갈수록 빠르게 진보하면서 불가피한 특이점으로,
우리가 아는 인류 역사가 더는 지속되지 못할 티핑 포인트로 나아가고 있는 듯해. 이제 진보는 이해를 초월할 만큼 빠르고 복잡해질 걸세. 기술력은 언제나 양면성을 가진 성과이고, 과학은 지극히 중립적이어서 어떤 목적으로든 쓰일 수 있는 통제 수단을 제공할 뿐 모든 사안에 무관심하지. 어떤 특정한 발명품의 비뚤어진 파괴력이 위험을 초래하는 게 아니야. 위험은 원래부터 내재해 있지. 진보를 치유할 방법은 없어."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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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아빠는 말하려는 의지를, 혹은 말할 능력 자체를 상실했다. 왜 갑자기 침묵하는 것인지 의사들조차 의학적 이유를 대지 못했다. 나는 아빠가 의식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본다. 정신 능력의 약화는 아빠 같은 사람이 견디기엔 너무 버거운 공포였을 테니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아빠 나이는 고작쉰셋, 아직 한창 잘나가던 때였다. 아빠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성과 뛰어난 능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공포가 다른 모든 생각을 몰아냈다. 아빠는 생각하는 자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그려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따라서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품위를전혀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아빠는 죽음이란 게 남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인 양 그래서 자신은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없다는 듯, 그렇게 죽음에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어린애처럼 굴었다. 아빠의 의식은 뛰어넘을 수도, 그 너머를 바라볼수도 없는 한계에 부딪혀 움츠러들었고, 아빠는 거칠게 반항했다. 여러 이유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지만, 흐려지는 정신으로 고통받는 아빠만큼 힘겨워하는 사람은 본 적이없다. 아빠의 병세가 빠르게 나빠질 것이며 결국 목숨을 앗아가리란 것을 이미 다들 알고 있던 무렵,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그건 전혀 다른문제지." 아빠는 대답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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