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랜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양철 지붕에 대하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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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마더 데레사 지음, 앤서니 스턴 엮음, 이해인 옮김 / 황금가지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장소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늘 감사합시다.

우리가 걷고 있는 삶의 길에서
우리에겐 아직 줄 것이 많고 나눌 것이 많습니다.

- 본문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어렵지 않은 간결하기에 더 마음을 파고드는 말씀들을 참 좋아합니다.
멋모르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던 어린 시절에 '변화의 방법'은 하나뿐이라 생각하며 외골로 나가던 나를 잠시 멈칫하게 만든 분도 마더 데레사입니다. 구조의 변화가 근본적인 것이지만 구조의 변화는 더디오고 그동안 죽어가는 이들을 방관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 역시 마더데레사의 말씀에서 찾습니다. 다양하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이도 저도 아닌 이기적인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또한 좌절하지 않는 것도 내 삶의 길에서 내가 내어 줄 무엇인가가 있을거라는 희망하나를 갖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더데레사의 말씀은 무더운 여름철 한줄기 바람과 같은 기쁨과 맑음을 줍니다.
마더 데레사는 직설적인 말로 '투쟁하라'고 외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시오'라는 말로 내 삶의 변화를 위해 투쟁할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방법과 실천으로 부조리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으며, 그 모두를 사랑해야함을 일깨워줍니다.

오늘도 세계의 평화를 위한 기도는 이어질 것이고 그 기도는 때로 파병철회를 위한 몸짓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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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 지음, 최영혁 옮김 / 청조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선물 받지 않았다면 난 아직까지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짧은 내용이었지만 4년여전에 읽으며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읽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내용 역시 다 기억하고 있는 지금, 이 책은 역시 감동으로 느껴진다. 물론 처음의 그 엄청난 감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책을 찾아 읽다가 예전의 감동을 느꼈던 짧은 책을 꺼내들고 읽으니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동 한그릇에 담긴 그 마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99년 9월에 33쇄까지 인쇄된 이 책의 겉표지에는 '99년 말까지 우동한그릇 1권마다 100원씩 결식아동기금으로 쓰입니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 현재 어떠한 변화를 하였는지....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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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몰락하여 가고 있다.
문화의 몰락은 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전쟁이 문화 몰락의 한 현상인 것이다.
왜 문화 몰락이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우리들이 문화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꿔말하면 철학이 무력하게 되고 그 영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로크, 스미드, 몽테스외외, 칸트 등이 벌인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이성에 바탕을 두고 윤리적인 이상을 구상했다. 그 이상은 철학과 여론의 지지를 받아서 현실과 대결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철학은 여론의 지도자로서 인간, 사회, 민족, 인류, 문화 등에 관하여 근본적인 사색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가 되자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낙관론적인 셰계관은 엄준한 비판을 받기에 이르고 그 독단론은 무너지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 위에 급속한 진보를 수행한 자연과학이 이 이상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이다.
그때부터 윤리적인 이상은 그 기반을 이룬 세계관을 잃게 되어 거지처럼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다. 철학은 전과 같은 활기를 잃고 세상에서 소원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원래 철학의 임무라는 것은 이성의 지도자가 되며 감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는 철학이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의 성과를 체에 걸러서 장차의 세계관을 위한 재료를 모으는 정도의 학문으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항에 관하여 사색은 하지만 문화에 관해서만은 사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논리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데 도취하고있었다. 그러므로 그 세계관은 비낙관적이며 비윤리적이다. 그래서 설사 그 세계관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문화의 이상을 쌓아 올리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철학은점차 그 자신의 시대가 문화를 잃은 것조차 모르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문화 몰락의 원인은 철학이 무력하게 되고 사고가 그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뿐이 아니다. 그 원잉ㄴ으로서는 현대의 사회적 경제적인 상황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가 발달한다는 것은 전체의 진보를 지향하는 이상이 개인에 의해서 생각되고 그것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 이상은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서 형성되고 자유인에 의해서 일밙거인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담당자로서의 개인은, 곧 생각하는 사람이며 자유인이 아니면 안된다. 여기에 자유인이란 생존경쟁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사람의 물질적 자유와 정신적인 자유와는 매우 밀접하게결부되어 있으며 자유인이 없는 곳에 문화는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 이 자유가 상실되어 왔다. 물론 기계문명이 가져온 물질적인 성과는 사람을 자연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것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한 사람의 수를 줄여갔다. 수공업소의 주민이 전락하여 일군으로 일하지 ㅇ낳으면 안되었다. 또 기업의 거대화는 농촌 사람들을 농지나 자연에서 끌어다가 도시로 집중시켰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농을 하여 도회지에서 부자유한 생활을 강제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정신적으로도 큰 타격이 아닐 수없다.

그 다음으로는 정신을 활발치 못하게 한 것으로 과로를 들 수 있다. 현대인은 늘 바쁜 일에 쫒기는 결과 그 정신이 쇠퇴해 버렸다. 사람들은 격심한 근로생활 때문에 외면적인 위안을 요구한다. 교양을 요구하지 않고 오락을 바라게 되었다. 이제 현대인은 진지하게 자기 일을 생각하든지 책을 읽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거나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더욱 나쁜 현상은 이들의 심리상태는 매스컴에도 영향을 주었다. 극장이나 신문이나 잡지는 독자에게 아첨하여 점점 그 내용을 저하시키고 잇다. 전에는 정신생활의 전당이었던 문화기관이 이제는 사회에서 정신을 추방하는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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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4-08-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바이쩌, 생애와 사상. 유풍출판사. 1981년 중판, 정가 1,200원.
다시 꺼내 읽고 있는데... 뜻밖에 세로쓰기다. ㅡㅡ;;
옛날엔 이런 작은 글씨크기의 세로쓰기를 어찌 읽었을까...라는 생각과 눈이 아프다는 생각에 빠져 책에 집중을 못하는 중. ㅠ.ㅠ
 

어느 여름날, 왕진을 나가기 위해 오고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 느닷없이 '생명에의 외경'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살아남으려고 하는 내 생명은 동시에 살아나가려고 하는 남의 생명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다른 생명(생명이 있는 것)을 존중하는 그야말로 윤리의 근본인 것이다. 따라서 삶을 지키고 이것을 촉진시키는 것은 선이며, 생명을 없애고 이것을 상처내는 것은 악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이와같은 '생명에의 외경'이라는 윤리관에 의해서 지배되는 곳에야말로 문화의 근본이 있다. 이와같은 원리의 회복, 이와같은 윤리에 의한 개인이나 사회의 개조, 그것이야말로 문화의 근본이 있다.
시바이쩌는 그렇게 결론을 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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