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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고혜원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8월
평점 :
한국전쟁 당시 소녀첩보원들의 활동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는 설명은 소녀첩보원에 대한 정보를 먼저 찾아보게 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쓴 소설이라고 하는 설명을 보면서도 쉽게 믿지 못했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2차세계대전에 여성전투원을 투입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훈련 중 계획파기로 여성전투원의 이야기는 사라졌다는 내용의 소설을 떠올리니 우리나라의 소녀첩보원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역사적 기록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내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들에 대한 내용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은 이 소설을 서둘러 읽어보게 만들었다. 아니, 사실 기록에 근거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내용이 너무 소설 - 꾸며진 이야기 같아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 책을 놓을수가 없었다.
심마니 홍주는 한여름 뒷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흰토끼를 만나고 토끼로 인해 산삼을 발견하게 된다. 흰토끼를 산신님으로 여기며 자신에게 쫓아오라는 듯 뛰어가는 토끼를 따라 산위까지 올라가게 되고 그 윟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반갑게 손까지 흔들어준다. 그런데 그 비행기는 홍주가 사는 마을을 폭격해버렸고 홍주는 혼자 살아남게 되었다.
전쟁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폭탄과 같은 것이고 가족을 잃게 하고 생활의 터전이던 마을 공동체를 무너뜨려버리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며 소설은 시작하고 있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적의 정보를 캐내기 위한 첩보전이 치열해지고 그 와중에 어린 소녀들이 적진에 파고들어 정보를 캐내고 확인하는 활동을 하지는 못할거라는 선입견을 깨고 과감히 그들을 모집했고 그 소녀첩보원들을 래빗이라고 칭했다. 홍주는 그런 래빗이 되었고 홍주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이어지는데......
이 소설은 어린 소녀들을 첩보활동에 이용하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믿지 못해 끊임없는 상호정찰을 요구하고, 죽기 위한 첩보활동이 아님에도 살아남은 래빗들에 대해 변절하지 않았는지 의심을 해야하는 상황들에 대해 홍주의 눈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늘 임무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설명에서 겨우 살아남았는데 아군의 총에 허망하게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라는 홍주의 마음 한 조각에도 전쟁의 비정함이 담겨있다.
소설에 대한 궁금증은 한국전쟁 당시 비정규군으로 활동을 했으며 전후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한 수많은 참전용사들, 특히 여성 군인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책을 읽을수록 전쟁에 대해, 그 비극에 대해, 피폐해져가는 사람들 사이에 그래도 정이 있고 사랑이 있고 배려가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어서 그저 흥미로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극적인 결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행복한 결말도 아닌 느낌에 래빗에 대해 기사검색을 해 봤는데 정말 말 그대로 그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첩보활동에 대한 함구령으로 인해 보상은 커녕 알려지지도 않았고 수많은 동무들의 죽음을 겪었으면서도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도 못받은 현실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하지만 작가의 말을 읽으며 다시 이들의 이야기에 대한 의미를 읽고 새겨본다. 나 역시 그들의, 우리 모두의 미래를 응원하겠다.
"전쟁 중 서로의 감시자로 만날 수밖에 없던 홍주와 유경이 동무가 되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는 힘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전쟁 중이기에 모든 것들이 쉽게 사라지던 시대를 되돌아보며, 그 시대여서 잃어버린 것들을 고민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시대를 한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제 마음은 미래를 택했습니다. 꿈을 이루는 미래, 연인과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한 미래, 가족들과 살 부대끼며 살아가는 미래. ... 꼭 그 미래에 가 닿으시길 응원하겠습니다."(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