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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개정판이 출판되었다고 했을 때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는 지금까지 구입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문득 진짜 내 어머니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 나는 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야금야금 들어보고 싶어져서 책구입을 미뤄두고 있다. 야심차게 정리하며 들어야하는데 도무지 그에 집중하며 시간을 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황해도 겸이포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47년 7월에 서울로 오셨다. 짐작한바와 같이 38군사분계선이 그어져있었고 이북에서 넘어올 때의 이야기만 해도 어마무지하다. 할아버지는 1년전 홀로 서울로 내려오셨고 나머지 식구들이 모두 남쪽으로 넘어오는데 어머니는 삼촌 한명과 안내자를 통해 산으로, 할머니는 또 다른 삼촌을 데리고 바닷가길로 새우젓장사를 하며, 큰 삼촌은 만주를 통해 멀리 돌아 서울에서 다 만날 수 있었다고한다.
어머니는 해주에서 바로 붙잡혀 수용소에 갇히고 - 그곳에서 개밥같은 밥을 줘서 못드셨다고... - 어떻게 풀려나서 (아마 안내자가 돈으로 해결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보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시 남하를 시도하는데 또 걸려 총알이 날아오니 삼촌은 북쪽으로 도망가고 어머니는 안내자와 무사히 산을 넘어 서울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 만주로 돌아온 삼촌의 이야기와 총을 피해 북으로 다시 돌아가 인민군대장 아들을 둔 게모할머니가 숨겨주고 돈을 마련해줘서 남쪽으로 보내주셨다는 이야기까지 하면 더 엄청난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오래전에 삼촌들은 세상을 떠나셨다.
아무튼 다행히 온가족이 서울에서 다 만나고, 당시 협신제약회사 직원이었던 할아버지가 제주파견근무를 하고 계셔서 48년 8월에 제주 입도를 하셨다.
세상에나 48년이라니! 死삶 항쟁의 봉기가 있었던 해가 아닌가.
물론 어머니는 해안에서 살게 되어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폭도'(!)들이 오면 아버지가 이발쟁이라고 말하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리 큰 위험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머니에게 4.3에 대해 물어보면 그리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다만 이덕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신기해 어떻게 아냐고 물어봤을 때 좀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덕구가 사살된 후 목에 숟가락이 꽂힌 상태로 광장에 전시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이덕구의 시신은 형틀에 묶여 주머니에 숟가락이 꽂힌채 관덕정 광장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4.3에 대해 들어본적도 없다가 대학생이 되어 처음 들었을 때,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말을 꺼냈다가 '속솜허라!'라는 한마디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큰며느리가 맘에 차지 않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빨갱이년'이라는 욕을 하셨다는 이야기도.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는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삶으로 먼저 다가왔기에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뭐라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이 책을 읽으며 한강작가가 이 소설을 '지극한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는 그 의미를 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직접적인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데 오랜 세월 빨갱이년이라는 가해자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왔고 그래서 또 간접적인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는 생각을 하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게 되지 않을까.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 말하는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는 그 내용자체가 신선함을 넘어서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는데 그 신선함에서 나는 또 어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36년생이신 어머니는 6.25때 약품조달을 위해 서울로 가셨던 할아버지가 행불자가 되셔서 서울로 진학할 예정이었던 진로를 바꿔 중등4학년이 아닌 교원양성과정을 배워 교사가 되셨다.
사실 내가 태어나면서 퇴직을 하시고 밭일만 하셨기때문에 난 어릴적에 그저 무지랭이 밭일을 하는 어머니라고만 생각했었다. 역사도 모르고, 공부에도 관심이 없어보이고 내 학업성적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시던 어머니라고만 생각했는데.
해방전에는 역사를 배우지 못했고, 북쪽에서는 교실에 스탈린, 레닌 사진이 걸려있었고 영어는 더더구나 배워보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때야 비로소 내 편견의 시선을 깨달았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시겠다며 한글문서작성하는 걸 배우러 동사무소 교육센터에 등록하시고 나도 작성하지 않는 규정문서작성법을 예습복습하며 가르쳐달라실때는 그저 귀찮기만 했었는데 어느새 또 영어를 배우시겠다며 날마다 알파벳 쓰기 연습을 하시는 걸 보며 나는 어머니를 안닮았나보다...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아이들이 알파벳을 처음 배울때 b와 d를 헷갈려하는것처럼 어머니도 똑같이 거꾸로 쓰신 걸 보고 재밌어 웃었더랬는데 어느샌가 알파벳을 읽기 시작해서, 화단에 적혀있는 영어를 읽어 화원 아저씨를 놀라게 하셨었다.
어린시절엔, 굴곡의 역사속에서 어머니는 어쩌면 그냥 무난하게 잘 지내오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손꼽히는 부잣집에서 험한일해보지 않은, 더구나 아들부잣집의 막내딸이었으니 오죽했겠나, 하지만 현대사 속에 녹아든 삶의 모습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다.
이렇게 얼렁뚱땅 술렁거리면서라도 어머니 이야기를 한조각 적어놓으니 오늘은 좀 마음 한구석이 편해진다. 병원에 다녀올때마다 점점 소멸되어가시는 듯한 어머니 생각에 마음 한켠이 불안했었는데... 긴 세월을 강건하게 잘 살아오셨다는 생각을 하니 뭐가 두렵고 뭐가 아쉽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