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나무 주변을 뒹구는 푸른 이파리와 나뭇가지.
수수께끼처럼 남은 그루터기.
그와 같은 죽음은 처음이었다.
그처럼 강제적인 죽음은.
세월에 순응해 쓰러지거나 비바람에 뿌리째 뽑히거나속부터 썩어 마침내 부러지는 나무는 숱했다. 쓰러지고 뽑힌 뒤에도 나무는 그 자리에서 숲이 되었다. 그루터기만 남기고 줄기는 통째로 사라져버리는 기괴한 죽음은 300년이몇 번씩 거듭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숲에서 보고 들은 죽음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이별 또한 아니었다. 훼손이었다. 파괴였다. 폭발이자 비극이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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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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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정보라의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다고 한 기억이 있다. 이전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4년만의 소설작품이 나왔다고하니, 더구나 김초엽 작가의 추천사 '쉴새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생각의 파도에 휩쓸리게 되는 매혹적인 소설'이라는 글을 읽고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쉴새없이 책장만 넘기고 생각의 파도가 몰려오지 않아서일까. 여전히 혼란스럽다. 책장을 덮으며 가장 궁금했던 것은 등장인물들의 한글자 이름이 - 이름 옆에 유독 한자어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의미를 담았구나 싶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해설이 없어서 좀 아쉬운 느낌이 들기는 했다. 사실 신임형사가 어느 순간 순 형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급하게 다시 책을 뒤적여봐도 명확하지가 않다. 도대체 나는 뭘 읽고 있었던 걸까.


소설의 이야기는 마약같은 중독성도 없이 고통을 없애주는 진통제가 개발되었는데 그 회사에 폭탄이 터지며 사망자가 생기고, 그 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회사소유주의 딸 경은 자살을 시도하다 병원에 입원하면서 죽음을 피해간 아이러니함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폭탄테러를 한 사람은 고통을 통해 영혼의 존재증명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구원의 길이라 주장하는 사이비 교단의 일원 태이다. 범인을 잡고 사건이 일단락되며 끝나는 듯 했지만 교단과 관련된 인물들의 살인사건이 이어지며 살인범을 쫓는 형사 륜이 사건해결을 위해 이전의 관련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에세이같은 느낌이 드는 이 소설은 읽을수록 SF소설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하지만 또한 인류의 생존을 이어가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은... 아니, 이건 나름 행복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생각이 쌓이기 시작한다. 출산의 고통을 떠올려보다가 고통을 완벽히 없애는 NSTAR-14가 있으니 고통은 없는것인가, 이들은 그 약을 거부한다면 또다른 교단의 탄생이...

뭔가 스스로도 궤변을 늘어놓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만큼 이 소설은 내게 쉽지가 않다.


고통을 없애는 완벽한 진통제가 개발이 된다고 하면 또 누군가는 고통을 그리워(!)하며 신약을 거부하고, 맹목적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신념을 종교화시키려나. 과연 인간의 삶에 있어서 고통은 무엇인가. 

"흉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흉터는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과 회복에 동반하는 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뒤에 남는 감정과 기억을 대표했다. 경이 탐색했던 것, 탐색해서 되찾으려 한 것은 그 기억이었다. 신체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 채, 상처 입은 흉터투성이 존재를 떠안고 죽는 순간까지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그러한 삶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경험을 통해 이해하는 존재를 그녀는 찾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도 성욕도 아니었다. 사랑이나 성욕보다 더깊은 어떤 것이었다. 망가졌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사실, 망가진 채 살아가도 괜찮다는 승인을, 같은 경험을 가진 다른 존재를 통해 재확인하고자 하는 생의 가장 깊은 추동(推動)이었다"(301)


고통에 관하여,는 이런 이야기인가 싶지만 큰 맥락안에 담겨있는 이야기 줄기를 살펴보면 '생각의 파도에 휩쓸린다'는 말을 떠올려보게 된다. 고통이 구원의 길이라 믿는 이들은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을 위해 고통을 주기만 할 뿐이며,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는 이들에 대한 폭행과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질병의 고통에서 모든 것을 잃고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삶의 의미를 찾고 그를 전하기 위해 교단에 들어간 욱은 오히려 그것이 교단의 신념과 다른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폭력남편을 피해 보호센터로 가지만 남편은 그녀를 찾아내고 경찰로 인해 보호센터에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숨어지내다 무료숙식제공에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간 효는 아이들을 위해 남편을 떠난 것이었지만 결국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하게 부당한 삶을 살다 숨지게 되고...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도 사건사고뉴스를 찾아보면 수없이 터져나오는 현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법제도의 헛점으로 인해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내게는 쉽지 않은 소설이었다,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정리해야하나 싶었는데 하나하나 끄집어 내다보니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소설이다.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스스로도 궁금해지는 그런 소설이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방금 밑줄긋기 한 내용을 살펴보다가 책의 첫장 차례 뒷 장에 '등장인물'이 정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름 한자어를 찾아보며 읽은 나는 뭐였나... 싶지만 아무튼 등장인물을 찾음으로 인해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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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3-09-23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다섯개!!!

chika 2023-09-23 13:58   좋아요 1 | URL
ㅎ 제가 별점이 후합니다요... 인것도 있는데. 사실 딱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 읽고난 후 더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추천할수밖에 없는 책이예요 ^^
 
사이클을 탄 소크라테스 - 최정상급 철학자들이 참가한 투르 드 프랑스
기욤 마르탱 지음, 류재화 옮김 / 나무옆의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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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프랑스식 유머는 이해하기 힘들다,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다시 관심을 가져보곤 한다. 사이클을 탄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내가 이해할 수 있으려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사실 그렇게 혼용된 글이라면 픽션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책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철학자들이 독일은 아인슈타인을 매니저로, 그리스는 소크라테스를 매니저로 하여 팀을 이루고 경쟁을 하며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하며 일어난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철학자들의 철학사상을 잘 모른다는 것이 그리 큰 문제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책을 게속 읽다보니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못느낀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건 아주 무지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또 다른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아채게 되는 것일까, 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싶어지지만 어쨌거나 이 책은 내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마르크스정도랄까.

"우리를 착취하는 지도자들을 위해 노동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훨씬 아름다운 사이클을 위해, 훨씬 스포츠다운 사이클을 위해 우리는 우리 장딴지의 힘을 한 곳에 모아야 합니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236)


현실에서 유리된 몽상가라 불리는 문학가들과 머리에 든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스포츠인들의 클리셰를 활용하여 탄생한 철학에세이,라고 한다면 뭔가 과장일까 싶기도 하지만 저자의 의도에 맞춰서 책을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이야기들은 독자 각자에 의해서 진화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가기도 할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왠지 알듯말듯 이 책을 조금씩 이해하며 읽은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나는 그대들에게 평화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권한다. - 니체"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행동해야 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 앙리 베르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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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6시간의 훈련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이 답을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대화하다, 소통하다. 아 이건 결국 페달을 밟는 것보다 힘들구나. 대화 상대자가 아무리 철학자여도 말이다. - P74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행동해야 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 앙리 베르그송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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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으로 본 대한민국의 Vocabulary 1 외대보카 시리즈
최홍수 지음 / 사설닷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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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담을 쌓고 지내면서도 늘 영어공부는 해야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마음은 무엇인지...

'외신으로 본 대한민국의 vocabulary'라는 책 제목과 대략적인 설명을 후다닥 읽고 내 맘대로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을 짐작해버렸다. 솔직히 이 책을 학습책이 아닌 인문교양서로 착각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언론통제아닌언론통제 식으로 기사를 보지 못하는 내용도 제3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기사들을 읽다보면 뭔가 그 기사화 된 사건들의 핵심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로 책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책을 펼쳐드는 순간 영단어의 나열. 처음엔 당황하기는 했지만 다시 책을 살펴보니 '영어 공부에 진심인 학습자를 위한 책'이라는 문구가 보였고 책을 뒤적이며 곱씹을수록 학습자를 위한 책이라는 목적에 딱 맞는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첫장부터 단어가 나열되어 해당 기사는 뒷부분에 있으려나 하고 무심코 책장을 넘기면 또 다른 단어가 나열되어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살펴보면 기사를 읽기 위한 워밍업처럼 단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기사본문에 나온 단어뿐만 아니라 연관되는 단어까지 설명하고 있어서 좋다. 

이처럼 잘 쓰이지 않는 단어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뜻이 아니거나 비슷하게 사용되는 단어와 유사단어들을 같이 비교하며 확인하고 익힐 수 있게 해 주고 있고 시사용어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하고 있어 좋다. 판형이 큰 책이라 좀 불편한 느낌이었으나 실물책을 펼치고 편집상태를 보면 딱 이 판형의 책이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The candidates audition before the five permanent members of the UN Security Council, known as the P5 : the US, China, Russia, Britain and France. 이 문장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오디션,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책에는 'UN사무총장선거'라는 참고글이 있다. 그렇다면 사무총장 후보자들이 유엔안보리상임이사국 회원앞에서 연설했다 정도의 의역을 하면 되려나 싶어진다. 기사에 대해 아쉬운 것은 번역문이 없다는 것과 어떤 매체에 언제 실려있는 기사인지 출처가 없다는 것.


내가 생각했던 인문서  -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시사용어를 통해 최근의 이슈를 파악하고 외신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쟁점들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최근의 뉴스들이 담겨있는 기사예문이 있으니 영어공부에 진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것이 뭔가 하고 살펴보다보면 자꾸만 책의 한쪽을 들춰보게 될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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