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사람을 기분좋은 감상에 취하게 하고 막연한 불안은 꿈을 말하는 데 꼭 필요한 안주가 된다. 홀로 고독에 시달리며 불안을 달고 살아가는 때는 사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때이며 오히려 다부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때인 것이다. 쉼표도 없이 자꾸자꾸 넘어가는 나날, 보기도 지겨운 사계절의 방문. 그것들이 쉬는 일도 없이 반복적으로 찾아오겠지, 하고 짜증난 눈으로 바라본다. 하루하루가 그저 천천히, 영원히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아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시작되어야 할 무언가가. 그 무언가가 시작되지 않는 데 대한 답답함. 첫발을 떼지 못하는데 대한 초조감.-238쪽
하지만 그런 괴로움도 일단 무언가가 시작된 다음에 뒤돌아 보면 그토록 낭만적인 것도 없다. 참된 고독은 그저 흔해빠진 생활 속에 존재한다. 진짜 불안은 평범하기만한 일상의 한 귀퉁이에 존재한다. 술집에서 아무리 떠들어 봐도 한낱 푸념에 불과한 답답하고 특징 없는 것. 어디를 향해 날아올라야 할지 몰라 활주로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비행기보다 착륙해야 할 곳을 알지 못해 허공에서 헤매는 비행기가 훨씬 더 아슬아슬하고 불안하다.-239쪽
이 세계와 나 자신, 그 애매한 간격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한없이 느릿느릿 이어지지만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의 저승사자가 찾아온다. 광대처럼 진한 화장을 한 검은 옷의 저승사자가 무표정하게 나타나 어딘가의 스위치를 누른다. 그순간부터 시간은 발소리를 내며 마라톤 주자처럼 달려간다. 그때까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에 마음을 기울이며 천천히 지나갔던 시간은 문득 역회전을 시작한다. 지금에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다. 종말로부터 지금을 향해 시간을 새기며 저벅저벅 다가온다.-239쪽
나 자신의 죽음, 다른 누군가의 죽음. 거기서부터 거꾸로 헤아려 올라오는 인생의 카운트 다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현실을 회피할 수도 도피할 수도 없다.그런때가 반드시,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누군가에게서 ㅌ어나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가는 이상, 나 자신의 손목시계만으로는 운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 도쿄든 시골이든 어디서든 마찬가지야. 결국 누구와 함께 있느냐,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239-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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