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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집은 떡붕어 아저씨의 집의 바로 아래층, 같은 호수였다. 마녀의 집 앞에는 그녀가 출퇴근용으로 썼던, 고양이 얼굴을 한 큰 개가 웅크리고 있었다. 집안은 진짜 고양이로 들끓었다. 어느 방에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는 새끼고양이들이, 또 다른 방에는 막 자라나는 아이 고양이들이, 또 다른 방에는 자랄 만큼 자란 어른 고양이들이, 또 다른 방에는 살 만큼 살아 걸음도 떼지 못하는 늙은 고양이들이 살았다. 마지막 방에는 죽은 고양이들이 미라의 모습으로 종류별로 다양하게 살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전부 몸통은 새카만데 얼굴을 하얗다는 것이었다.

 

우와, 고양이 천국이다! 얘들은 다 뭐야?”

내 자식들이지.”

마녀는 간특하고도 능글맞게 웃었다.

우와, 그럼 다 아줌마가 낳은 거야? , 정말 마녀다! 어떻게 하면 고양이를 낳을 수 있어?”

 

마녀는 얘기는 이랬다. 마녀가 앳된 처녀였던 어느 날, 멧돼지 얼굴에 얇고 가는 꼬리가 달린 바싹 여윈 악귀 한 마리가 성령처럼 임하였다. 악귀는 마녀에게 조만간 소식이 들릴 것이라고 말했다. 마녀는 설마?”라며 악귀를 비웃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슬이 멎었다. 아홉 달 뒤 마녀는 뱃속에 든 생명을 몸 밖으로 꺼냈다. 그들, 아니 그것은 머리통만 새하얗고 몸통은 새까만 털로 뒤덮인 고양이였다. 그 다음에는 그 고양이들이 서로 짝짓기를 하여 또 고양이를 낳았다. 마녀의 집은 졸지에 고양이들이 뛰노는 노르웨이 숲이 됐다.

 

마녀 집에는 다른 생명체들도 많았다. 어느 방에는 햄스터, 모르모트, 이구아나, 거북이가 각기 자신의 우리에서 살고 있었다. 뱀도 있었다. 뱀은 피부가 워낙에 민감하고 약했기 때문에 먼지 하나 없는 매끈매끈한 바닥에서 왕처럼 살았다. 그 옆방에는 토끼들이 살았다. 이들 중 일부는 뱀의 먹이가 됐다. 또 다른 방에는 식물들이 살았다. 이들은 다 흙이 아니라 물을 먹고 자랐다. 감자와 고구마의 짙은 색 뿌리에선 새끼 감자, 새끼 고구마가 맺히기 시작했다. 생강은 목이 긴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하얀 뿌리가 아래로 뻗을수록 위쪽의 푸른 잎이 더 무성해졌다. 양파도 투명한 유리병 속의 물을 머금어, 하늘을 향해 초록색 줄기를 뻗어냈다. 미나리와 콩나물도 보였다.

 

이 실내 농장의 가장 으슥한 곳에 자잘하고 흉측한 벌레들이 살았다. 다른 방들과 달리, 그곳은 일 년 열두 달, 24시간이 밤이었다. 그들은 톱밥 속에서 양식되는 것이 아니라, 축축한 흙의 양분을 먹으며 자랐다. 그들의 은신처 위에서 장작불이 피어올라 시커멓고 육중한 가마솥을 달구었다. 마녀 아줌마는 손에 두툼한 장갑을 끼고서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시커먼 김이 솟구쳐 올라 높은 천정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우아, 거울 속에 있던 가마솥이다! 아줌마, 저기다가 나 집어넣을 거야?”

? 어린아이는 키워야지, 잡아먹으면 안 돼.”

마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키웠다가 잡아먹는다는 소리야?”

이런! 키워놓으면 제가 알아서 늙어죽는 거야.”

에이, 거짓말! 늙어죽는 건 할머니들이야.”

아니, 할머니들은 원래부터 늙은 채로 태어난 줄 아니?”

당연하지! 내가 태어났을 때도 우리 할머니는 할머니였는걸.”

 

마녀는 가마솥 안에 갖은 푸성귀와 갖은 가루들을 뿌렸다.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시커멓고 걸쭉한 수면 위로 고양이털, 쥐며느리의 등, 바퀴벌레의 광택, 이구아나의 비늘 등이 둥둥 떠다녔다. 과자로 만든 집에서 거울을 통해 본 가마솥처럼 기포도 느릿느릿 부글거렸다. 오랫동안 끓인 약물을 식혀 마녀는 병에다 옮겨 담았다.

 

아줌마, 이거 무슨 맛이야?”

먹어볼래?”

 

소영이는 금방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호기심에 못 이겨 손가락을 약물에 살짝 담갔다가 뺀 뒤 혀끝에 댔다. 순간 혀끝뿐만 아니라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소영이는 퉤퉤 침을 뱉고 헛구역질까지 해댔다.

 

으악, 아줌마, 이거 독약 아니야?”

설마! , 소영이는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아줌마는?”

아줌마는 가 볼 데가 있어.”

어디 가는데?”

비밀, 비밀이야.”

어라, 문지기 아저씨랑 똑같네.”

문지기를 봤구나? 그럼 성탑에도 가봤니?”

. 요새는 매일 가. 할머니 보러. 그 할머니 죽을 거야.”

?”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셔. 물을 뿌려도 힘이 없어. 죽을 거야. 이제 곧 말도 못할 거야.”

지금은 해? 무슨 말을 하던?”

알아들을 수 없어. 다슬기 할매하고는 틀려.”

다슬기 할매가 누구야?”

에이, 마녀가 그런 것도 몰라? 다슬기 할매는 말이지, 다슬기를 잡아서 다슬기 해장국을 끓이는데, 지렁이도 잡고, 굿도 해주고, 돼지 머리 좋아하고, 그러니까 다슬기 할매는. 그냥 다슬기 할매야.”

그러고서 소영이는 마녀의 방을 나왔다.

 

*

 

소영이가 꽃밭과 성탑을 오가는 동안 떡붕어 아저씨는 거대한 수족관에서 물고기를 건져 올렸다. 매일 한 마리씩이었다. 하지만 성 안의 시간은 그 나름의 흐름을 탔기 때문에 물고기의 수는 줄지 않았다. 물고기들은 몇 번의 산란기를 맞았고 그때마다 많은 치어들이 생겨났다. 산란기는 금어기이기도 했다. 그 직전에 쏘가리를 잡는 것이 떡붕어 아저씨의 꿈이었다. 그는 비가 와주었으면 했다. 그 틈에 방심한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빛과 열을 아무리 조절해도 없는 비를 내리게 할 순 없었다. 그 때문에 쏘가리도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잡히는 건 여기서도 피라미, 고작해야 붕어뿐이었다. 그것은 죄다 다시 수족관 속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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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패배와 전락을 향하여:

모래 속으로 사라진 한 남자를 통해 조명한 자유의 문제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어디론가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자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를 자극한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31세에 자그마한 체형의 교사 니키 준페이는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모래사막에 서식하는 곤충을 찾아 떠난다. 신종 곤충을 발견하여 기나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곤충 도감에 올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작은 사구에 파묻힘으로써 원래의 이름을 상실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모래 속의 희귀 생명체, 즉 벌레-곤충으로 변신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모래의 여자>는 니키 준페이가 남자’, 심지어 인간의 대명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남자는 모래 구멍 속 여자의 집에 감금된 순간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 남자의 눈에는 여자가 안쓰러울뿐더러 한심하기까지 하다. 밤마다 모래를 퍼내야 하고 모래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잡혀 온 이방인도 아니면서 왜 자유를 반납하고 사냐고, 혹시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 수치스러운 짓이라도 한 것이냐고 남자는 여자를 추궁한다. 여자의 반응은 차분하다 못해 심드렁하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걸어 다니면 되잖아!

걸어 다녀요……?

그래, 걷는 거야…….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 봐야, 피로하기만 할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 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 버려!

걸어 봤어요…….

여자는 불쑥, 껍질을 닫은 조개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이 단순하고도 묘한 논리에 당황한 남자는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 십몇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너 역시 그런 환상을 상대로 한 귀신 놀이에 지친 나머지 이런 사구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무엇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며 무엇이 걸을 수 있는 자유인가. 이러나저러나 중요하지 않다. 모래 바깥에서처럼 모래 속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자유를 찾아 헤맨다. 첫 번째 탈출 시도가 실패하자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급기야 여자를 반쯤 혼수상태에 빠뜨려 놓고 손수 만든 밧줄을 이용해 사구 밖으로 빠져나가기에 이른다. 46일만의 자유!

 

하지만 이 자유가 모래밭을 계속 걸어 다녀야하는 상황, 즉 도망자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추격을 피해 열심히 도주한 결과 그가 다다른 곳은 개도 얼씬거리지 않는 소금밭’. 늪과 같은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남자는 판으로 찍어 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결국 적들의 손에 구출된 그는 다시 무덤과 같은 모래 구멍 속에 안치된다.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저들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니, 얼마나 허무한가.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남자의 몸부림은 계속된다.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노인의 외설스러운제안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유를 손에 넣었을 때는 그것을 향유하기는커녕 사구 밖으로 한 번 나가 볼 뿐, 자신이 발명한 유수 장치를 살피기 위해 이내 되돌아온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중략)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모래의 여자>는 이렇게 끝난다. 도주를 유예하는 것이 비단 병원에 실려 간 여자를 기다리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과연 남자는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인가.

 

저 독특한 모래 왕국을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의 은유라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 모래의 속성을 이용한 부조리한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망루를 지키는 시선!), 자유의 박탈과 개성의 말살 등은 여러 반()유토피아 소설 속의 국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아베 코보는 <모래의 여자>의 세계를 이데올로기적 은유로 축소하기보다는 실존적인 정황으로, 보편적인 인간 조건으로 확장한다. ‘모래의 여자가 보여 주듯 자유의 개념은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다. 남자 역시 이 점을 슬슬 깨달아간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노동은 삶의 동의어에 가깝다. ‘모래의 여자를 그냥 비참한 수인(囚人)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그녀야말로 모래와 더불어 살면서 매순간 모래, 즉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한 것은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남자는 사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보유한 채로 사구 속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거듭되는 패배와 전락, 이것이야말로 니키 준페이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핵심적인 요소인 셈이다.

 

-- 네이버캐스트

 

갑자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완전 칩거하겠으나,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 눈 속에서 절절 매게 됐지요. 덕분에 떠오른 저 책입니다. 눈의 싸늘함과 축축함, 모래의 뜨거움과 건조함... <모래의 여자> 속의 모래 더미는, 개인적으론 러시아 유학 시절 경험한 눈 더미를 상기시키더군요.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속 주인공 '모래의 여자'입니다. 얼마 전에 사망했다는데, 영화도, 영화 속 그녀의 느낌도 강렬했어요. 별로 야한(?) 영화가 아닌데, 이미지는 대부분 다 에로틱 쪽이네요 ^^; 

아베 코보, 라는 이름은 좀 생소했는데요, 다른 소설도 좀 뒤져보니 카프카와 비교되는 이유는 알 것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저 사진은 한 시절 탐독했던 국내 비평가를 닮았어요 ^^; 바로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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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2014-02-10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원작으로 한 연극이 공연되어 정보 공유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께는 더욱 흥미로운 연극이 될 것 같아 댓글 남겨요. 공연정보는 한국공연예술센터 홈페이지 (www.hanpac.or.kr)에서 "모래의 여자"를 검색하시면 확인가능합니다.

연극 <모래의 여자>
2014.02.18-2014.02.23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전석 2만원
예매 바로가기 http://www.hanpac.or.kr/hanpac/program.do?tran=play_info_view&playNo=140129154121243
 

 

 

소영이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손이 저절로 올라가 할머니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푸석푸석하고 메마르고 싸늘한 것이 느껴졌다. 소영이는 얼른 손을 뗐다. 머리카락 한 올이 소영이의 손가락에 낀 채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순간, 벽에 붙어 있는 무수한 단추 중 하나에 빨간 불이 들어왔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렸다. 할머니가 이제 막 전기 공급을 받은 로봇처럼 두 눈을 번쩍 떴다. 소영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그 바람에 소영이의 손에서 비닐봉지가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할머니의 몸 깊은 곳에서, 아마도 뱃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 , , , ~? , , ~~~?”

 

말이라고 하기엔 동물의 신음에 가까울 만큼 애매하고, 또 동물의 신음이라고 하기엔 발음이 제법 또렷하고 억양도 있었다.

 

할머니, 밥 달라는 거야? 안 그래도 이거 할머니 주려고 갖고 왔어.”

 

소영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레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갑자기 할머니의 팔이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 비닐봉지를 낚아챘다. 곧 다른 쪽 팔이 또 용수철처럼 튕겨 올랐으나, 봉지 속으로 들어가는 손의 움직임은 몹시 둔했다. 두툼한 손가락이 봉지 안에서 한심하게 꿈틀댔다. 사위가 조용했기 때문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봉지의 밑바닥이 찢기면서 내용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은 겨우내 떡붕어 아저씨가 냉동실에 보관해 온 꽁치 두 마리였다. 어찌나 꽁꽁 얼어붙었는지, 돌멩이보다 더 딱딱했고 온 몸에 뽀얀 성에가 덮여 있었다.

 

꽁치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두어 번에 걸쳐 통통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꼬리를 밑으로 향하고 머리를 위로 지켜든 채 꼿꼿이 섰다. 그러곤 지느러미가 없어서 영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힘겹게 삐거덕대며 흔들더니 곧 스카이콩콩처럼 바닥을 뛰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꽁치들은 몸이 슬슬 녹아, 꼬리 춤의 모양새도 훨씬 더 유연해졌다. 푸른 살이 흐느적거리며 벌렁거릴 때마다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일자로 쭉 갈라진, 내장이 다 사라진 꽁치의 배, 아니 몸뚱어리는 언제 난도질을 당하고 언제 죽었었느냐는 듯 신나게 통통거렸다.

 

소영이는 두 마리의 꽁치를 모두 손에 넣으려고 분주하게 앞뒤, 좌우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꽁치들은 늘 수색자의 손바닥보다 한 발 앞서 뛰는 벼룩처럼 소영이의 손아귀를 쏙쏙 빠져나갔다. 할머니는 반들반들한 얼굴 아래쪽에 불그스름하게 뚫려 있는 입을 달싹이며 계속 ~, , , ~소리를 반복했다. 꽁치들은 할머니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튕겨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곤 세 번에 걸쳐 제자리 뛰기를 하더니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영이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이들도 모두 그리로 달려가, 벽과 하늘을 이어주는 틈새로 얼굴을 내밀었다. 꽁치 두 마리는 어느새 푸른 하늘과 뒤섞여버렸다.

 

~? ~! ~주우.”

 

할머니의 신음소리가 좀 더 길고 필사적이었다.

 

이런, 꽁치들은 할머니가 싫은 가봐. 생 거라서 그런가? 다음번에 익혀서 갖다 줄게.”

 

소영이는 몸을 돌렸다. 때문에 할머니의 손이 힘겹게 파닥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나름대로 손짓이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

 

소영이는 매일 성 주변과 유리벽 사이를 돌며 꽃밭을 구경했다. 산책의 끝은 늘 성탑 안이었다.

 

한 번은 떡붕어 아저씨가 만들어준 꽁치 구이를 들고 올라갔다. 역시나 아저씨의 말대로 뚱보 할머니가 맛을 보기도 전에 구운 꽁치가 먼저 성탑 밖으로 뛰어내렸다. 김밥을 가져가도, 오이와 당근, 참외와 딸기를 가져가도 마찬가지였다. 먹을 것들은 발이 달린 양 냉큼 뚱보 할머니를 피해 달아났다. 마지막으로 소영이는 물을 들고서 방을 나섰다. 그 중 절반은 꽃들에게 주었다. 물을 머금자 꽃들은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황매화는 꽃잎이 더 무성해졌고 제비꽃은 보라색이 더 선명해졌다. 할미꽃도 더 아름다운 적자색을 뽐내며 솜털마저 미세하게 하늘거렸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물은 소용없게 돼 버렸다. 자동인형이 옆에서 할머니를 일으켜 받쳐주었지만, 물방울은 물 위의 기름처럼 할머니의 입술에 동그랗게 붙어 있을 따름이었다. 소영이는 물을 손바닥에 부어 할머니의 얼굴과 몸에 조금씩 뿌려보았다. 하지만 꽃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영이는 허탈한 마음으로 성탑을 내려왔다. 그리고 꽃밭을 돌아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관리실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문지기가 아니었다. 소영이는 의아스럽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특수교사와 닮은 데가 있었지만 옷차림도 허름하고 얼굴선도 기괴하게 망가져 있었다. 몸에 커다랗고 시커먼 자루 같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머리에는 꼭짓점이 축 늘어진 고깔모자를 쓴 모습도 괴기스러웠다. 소영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줌마설마 마녀? 선생님, 정말 마녀 맞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소영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녀라면 날렵하고 경쾌한 꼬마 소녀거나 아니면 과자로 만든 집을 지키던 처녀처럼 무척 예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사악한 눈을 번득이는, 추악하게 늙은 꼬부랑 할머니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생김새와 차림재가 약간 얄궂긴 해도 동네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아줌마였다. 얼굴빛은 왠지 누리끼리하고 간간히 기미나 주근깨가 보였다. 깡말랐다고 할 만큼 여위었지만 왠지 뱃살과 허벅지살이 출렁이는 것 같고 조그만 젖가슴은 축 늘어져 있었다. 한참을 고민한 결과, 소영이는 그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 선생님한테도 세상의 모든 아침이 한꺼번에 왔구나? 에이, 그래서, 이렇게 미워진 거야?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왜는 왜야? 나도 여기 사는 걸. 아줌마 집 구경 갈래?”

!”

세상에, 아줌마 마녀는 처음 봐.”

마녀라고 별 수 있겠어? 그것도 종류별로 다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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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올바르게 사유하는 존재의 위대함

- 파스칼, <팡세>

 

 

 

 

 

파스칼의 명상록에 관한 한 우리는 오랫동안 팡세라는 제목을 고집해 왔다. 그가 남긴 저 팡세-생각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갈대일 터이다.

 

391-(347) H. 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213)

 

인간이 유의미하고 존엄한 존재인 것은 사유라는 행위 때문이다. 위대함의 단초도 여기에 있다. “218-(397) 인간의 위대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비참하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위대함이다.”(115-116) 하지만 파스칼은 단순히 사유와 인식만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라는 것. , 도덕과 윤리가 중요하다. 그 궁극의 지점에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팡세>는 인간과 신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으되 신 없는 인간의 비참’(1)신 있는 인간의 행복’(2)으로 이끌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의 호교론은 가히 확률론의 창시자답게 내기(도박)의 논리를 따른다.

 

325-(230) 신이 있다는 것도 불가해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세계가 창조된 것도, 창조되지 않은 것 등등도. 원죄가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174)

 

그렇기에 일단 믿고 보는 편이 유리하다. 다소 거칠게 말해, 믿으면 밑져야 본전이지만 믿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무()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당장 현실에서도 세 부류의 사람들, 신을 발견한 다음 신을 섬기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온 힘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신을 찾지도 발견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178) 중 첫 번째 부류만이 합리성(이성)과 행복을 동시에 획득한다 

 

 

 

 

파스칼은 철학자이기에 앞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으며 발명가이기도 했다. 이성과 논리의 대변자인 그가 본질상 초이성적 존재이거나 반대로 아예 존재도 뭣도 아닐 수 있는 신을 옹호하고 나아가 신앙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것은 제법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해답은 파스칼이 지적하는 인간 본연의 모순에 있는 것 같다.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사유를 극단까지 몰아가도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 이성이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순간, 때문에 인간의 비참과 그것에의 인식이 극에 달하는 순간, 비로소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 “225-(278)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이성이 아니라 심정에 느껴지는 하느님.”(117-118) 이렇듯, 신과 신앙에 대한 파스칼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그의 인간학의 산물이다. 유한성과 우연성에 종속된, 그래서 항상 아슬아슬한 인간!

 

 

268-(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 나의 자아는 나의 사유(思惟)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생각하는 이 자아는 만약 내가 생명을 얻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나는 영원하지도 또 무한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필연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137)

 

파스칼은 인간의 실존을 쇠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사형수들에 비유한다. 그 중 몇몇이 매일 교살당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은 고뇌와 절망에 사로잡힌 채 그 동료들의 운명에서 자기의 운명을 읽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314-(199)). 이 비참한 인간 조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숨은 신’, 무한성과 필연성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과연 비참에서 행복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든 비단 신앙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온유한 어조로 올바른사유를 촉구한 파스칼의 통찰에는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749-[505] 모든 것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유익하게 만들어진 사물까지도. 가령, 자연 속에서 담도 우리를 죽일 수 있고 계단도 정확히 발을 딛지 않으면 우리를 죽일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운동도 전 자연에 영향을 준다. 돌 하나로 온 바다가 변한다. 이렇듯 은총에 있어서도 극히 작은 행동이 그 결과로써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모든 것이 중요하다.

하나하나의 행동에 있어서도 그 행동 외에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의 상태와, 그 행동의 영향을 받는 다른 행동들의 상태들을 관찰하고 또 이 모든 것의 관련성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사람은 매우 신중해질 것이다.(388)

 

 

 --네이버캐스트

 

 

-- 순전히 '팡세'라는 말과 '파스칼'이라는 말에 이끌려 손에 들었던 책. 정말로 '구덩이 오막살이'와 같은  반지하방에 살던 중학교 시절의 일이다.  그나마 접수됐던 것은, 그 전부터도 알고 있던(-_-;;)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문장 뿐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허걱, 이런 책이더군요! (('팡세'라는 제목을 워낙 좋아해서, 저 글도 제목에서 시작합니다 ㅎ ㅎ) <네이버> 누군가의 댓글 대로, 이렇게 지겨운 책, 요즘도 누가 봅니까?  하지만 은근히 볼 만합니다. 특히, 무던해지고 심드렁해지고 싶을 때...^^; 뭐, 그럴 때는 확률 문제를 풀면 좋겠지만 수학 쪽은 워낙 젬병이라, 수학자가 쓴 명상록을 보는 거죠...^^:  

- 블레즈 파스칼과 함께 떠오르는 인물들은~~~

 

관성의법칙, 작용반작용의법칙, 가속도의법칙, 만유인력의법칙, 중력의법칙 등 바로 뉴턴입니다^^; 덧붙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그, 바로 데카르트입니다 ^^' 뉴턴이 좀 많이 잘 생기긴 했지만 어째 다들 좀 닮았어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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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단을 원합니다.” - 청춘에 바치는 송가:

- 루이제 린저(1911-2002), <삶의 한가운데>(1950)

 

 

아홉 살도 안 된 소녀가 추운 겨울날 밤에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소녀보다 열두 살이 많은 언니의 질문에 소녀가 내놓는 대답이 참 잔망스럽다. “나는 이걸 할 수 있어야만 해. (중략) 언제든 따뜻한 침대에서 나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 가시나무를 손으로 잡는 것, 사나운 개한테 가는 것, 매질을 견디고 소금을 먹는 일 등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해.”(156.)

 

소녀의 성장의 순간들이 스냅사진처럼 스쳐간다. 십대 초반의 니나는 학업을 중단한 채 외진 도시에 틀어박혀 병든 고모할머니와 그녀의 가게를 돌본다. 그녀가 죽으면 가게를 물려받게 돼 있지만, 누군가가 죽어가는 모습을 관찰하며 기록하는 일 자체가 흥미를 자극한다. 오직 글을 쓰겠다는 욕망뿐이다. 이십대 중후반, 니나는 한 남자와 약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다. 약혼자는 이 사실을 알고서도 결혼을 강행하고, 첫 아이를 출산한 거의 직후에 거의 강제적으로 니나를 임신시킨다. 그녀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가스는 끔찍해. 다시는 가스를 선택하지 않을 거야.”(304) 결혼 생활은 종지부를 찍지만 삶은 계속된다. 삼십대의 니나는 작가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자 생활인으로 살면서 반()나치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기도 한다. 어느덧 마흔을 목전에 둔 니나, 그녀의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삶의 한가운데>’, 즉 마르그레트가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 니나의 얘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대부분이 슈타인 박사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니나를 처음 만난 1930년부터 1947년까지 정확히 18년 동안 때론 가까이서 때론 멀리서 꾸준히 그녀를 지켜봐왔다. 스무 살 연하의 여자를 사랑하되 영원히 그녀를 소유하지 못한 중년 남자의 고백은 꼭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 낭만적인 연애시의 한 구절을 연상시킨다. “나는 니나의 가벼운 걸음걸이를 사랑했으며, 나에게 버섯을 보여주려고, 그리고 잽싸게 도망가는 들쥐를 손으로 가리키려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사랑했으며, 니나의 검은 머리에 얹힌 바늘 같은 전나무 잎들과 니나의 치마에 감긴 거미줄을 사랑했다.”(195) 언니의 시선도 니나에 대한 질투 섞인 동경과 애정을 머금고 있다. 이들이 함께 그려 보이는 니나는 물론 신비스럽고 영웅적인 존재이다. 바로 이것, 즉 니나라는 신화를 만들기 위해 이 소설은 쓰였다.

 

소설은 냉담과 무심을 가장한 아포리즘으로 넘쳐나고 그 저변에는 치기어린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다. 니나, 마르그레트, 슈타인 박사, 심지어 한나 B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의 목소리와 문체도 좀처럼 구분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쓸 무렵 작가가 거의 불혹의 나이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청춘의 열기가 넘쳐난다. 니나는 곧 린저이며, 슈타인 역시 린저이다. ‘슈타인-린저가 사랑한 니나-린저는 단순히 한 여자가 아니라 영원히 잃어버린, 그렇기에 더 소중한 청춘의 상징이자 극단삶의 한가운데의 상징이다. “가령 너무 많은 책들 때문에 질식해 죽을 것 같은 느낌, 혹은 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질식당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것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슬픔.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 철저하게 순수한 절망도 없으며 값싼 혼합물, 값싼 혼합물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 인간은 행복할 수 없으며, 행복을 단념해도 평안에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206-207) 니나에게서 이런 말들을 배우며 아이는 어른이 된다. 이른바 니나 신드롬 없이 우리가 유년의 뜰을 오롯이 떠날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을 우리말로 처음 번역, 소개한 이는 전혜린이었고 당시 제목은 ()의 한가운데였다. 그녀가 니나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는 정신, 자유, 두뇌, 지성, 극단, 긍정 등이다. “남성적인 강함과 결단성을 지닌 여자”, “따라서 모험을 - 그게 어떤 성질의 것이든 간에 자기가 선택하기만 하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여자, 무엇보다도 지적 여자”.(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적 인간에 여성은 좀처럼 포함되지 않던 시절이니 니나가 얼마나 도발적인 매력을 발산했을지 짐작이 된다.

 

 

 

니나의 형상에 전혜린이 겹쳐진다. 실상 그녀가 쓴 책은 일기까지 포함해 수필집 두 권이 전부이지만 어떻든 그녀는 요절한 천재’, 적어도 비운의 여성 지식인의 상징으로 남았다. “어느 마녀의 저주처럼 그녀를 따라다닌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심지어 강박관념과, 우리의 실제 삶-생활의 본질적인 속성인 평범사이의 간극, 그리고 충돌! “어렸을 때 내 소원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역시 그것은 변함없는 것 같다. 무명으로 남을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그녀가 이미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 서른을 코앞에 두고 쓴 문장인데, 묘하게도, 열아홉 살의 니나가 던지는 말과 유사한 울림을 자아낸다. “나는 극단을 원합니다. 극단에 대한 특별한 결심이 서 있음을 봅니다.(21)”

 

-- 책&

 

-- 어릴 때는 무척 좋아했던 걸로 기억되는<생의 한가운데>, 다시 보니 몰입(?)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보시다시피, 전혜린 얘기를 덧붙였는데,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있습니다. 그녀의 수필집을 오랜만에 들춰보니, 지금 내 상황 탓이겠으나, 딸 얘기가 의외로 많더군요. 아이 식단도 꼬박꼬박 적어놓고... 60년대에 이른바 워킹맘 노릇 하기가 힘들었을 법하네요...쩝.

 

 

 

오직 전혜린이 번역했다는 이유로 찾아 읽곤 했던 책들입니다.

그녀가 번역한(아마 독일어에서 중역해놓은) 파스테르나크 시의 일절이나 니체의 아포리즘을 적어 다니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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