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대략 30x20cm 화면에 스물 얼굴과 이름이 뜬다

다음 화면에도 하양 검정 얼굴과 이름이 뜬다

 

우주는 떨림이다, 인간은 울림이다

존재는 세계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한다

존재는 접촉을 꿈꾼다

접촉에 오류는 불가피하다

 

*

 

쉰 남짓 얼굴과 이름이 휙휙휙 - 

마지막, 화면 속에 홀로 푹 빠져 있는 나 -   

내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나가기', 

화면이 꺼지자 내 얼굴이 그립다

 

6월 4일 목요일 10시

마지막 접속을 끝내며  

내 얼굴에 보내는 마지막 시선 -  

 

 

 

--

 

* 김상욱, <떨림과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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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일어난 까닭

 

 

 

 

1인의 아해가 웁니다

왜? 

몰라요.  

 

2인의 아해가 뜨겁습니다, 40도! 

왜?

몰라요.

 

3인의 아해가 혈뇨를 봅니다

왜?

몰라요.

 

4인의 아해가 경련을 일으킵니다

왜?

몰라요. 

 

5인의 아해가 의식을 잃습니다, 영영.

왜?

몰라요.

 

아해 앞의 숫자는 변할 수 있지만  

'왜?'와 '몰라요.'는 불변입니다.

일이 일어난 까닭,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 

모든 아해가 무서워합니다.

무서워하는 아해는 모두 질주합니다.

질주 끝에 막다른 골목입니다.

 

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다음 생이라고 별 수 있을까요?

조만간 체념하게 되겠지요.

옥수수는 따가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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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라는 낱말

 

 

 

낱말에는 

이름을 나타내는 낱말

움직임을 나타내는 낱말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름 낱말은 불변이지만

움직임 낱말과 성질 상태 낱말은 변합니다

 

존재라는 낱말에는

삶이 있고

삶이라는 낱말에는

죽음이 있고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존재는 아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죽을 수 있습니다

지금껏 존재했기에, 거저, 존재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명색이 한 번뿐인 삶인데

버럭, 돌연 죽기는 싫어요

차라리 많이 아프다가 죽을래요

 

- 머리 위에 큼직한 바위가 매달려 있다면 아프겠습니까?

- 무섭겠지요

- 공포와 불안이 아니라 고통 말입니다, 아프겠습니까? 

 

저라면 아프겠습니다

공포와 불안 때문에 더 아프겠습니다 

몸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떠느라 

더 아프겠습니다 

 

 

 

*

 

<악령>: '나'와 키릴로프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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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으로(3)  

 

 

 

1.

 

누나야

일년 사이 왼쪽 윗니가 1미리나 넘게 벌어졌어

 

마흔 한 살 아우의 이마와 뒤통수에는 구멍이 다섯 개나 뚫렸다

머리통을 열었다 닫았는데도 술을 마시면 니가 인간이냐

그러고도 담배를 피우면 니가 인간이냐

 

다 내려놓았어

 

하, 아우님아, 내려놓아도 너무 내려놓으셨군요 -

 

 

2.

 

딸아,

너도 이제 그만 다 내려놓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말고 

사는 대로 생각하려무나

되는 대로 살려무나  

 

일흔 세살 아비의 배에는 자꾸자꾸 바늘 구멍이 생긴다 

전나무 소나무 참나무에 뿌리 내려 자라는 또 다른 나무가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지 못하고 주사제가 되어

늙은 아비의 뱃가죽 깊숙이 스며 든다

 

아빠, 배 아프겠어요 -

 

mistletoe, 라는 스펠링에서 첫 t는 묵음임을 분명히 해둔다 

우리말로는 겨우살이, 한자어로는 槲寄生이라는 사실도 덧붙여둔다  

내려놓아도 너무 내려놓고 나니 이렇게 사소한 것이 중요해진다 

 

하, 님아, 이제 그만 내려놓고

좀 주워담으세요 -

 

3.

 

과일 수레를 밀고 가다가 비틀비틀, 어질어질, 갈짓자,

그래도 병원에 빨리 갔으니 망정이지, 

혈압약을 먹으니 한결 좋아, 딱 직립보행이 됐어

나는 이제 명실상부한 호모 에렉투스야

 

내가 니들 때문에 혈압이 빡! 올라가서 -

혈압약 한 알이면 모든 것이 쑥! 내려가

 

하, 어미님아, 참 많이도 내려놓으셨군요 -

머리 위에 이고 가는 그 큼직한 늙은 호박만

딱! 내려놓으시면 금상첨화, 아니, 새옹지마겠어요 

 

4.

 

검은 대리석 비석 위에 새빨간 카네이션을 내려놓습니다

1, 3, 5, 7, 9 반드시 홀수여야 합니다

새빨간, 때론 검붉은 장미꽃을 내려놓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홀수여야 합니다

 

홀수와 홀수를 곱하면 반드시 홀수가 나옵니다

홀수와 홀수를 더하면 반드시 짝수가 나옵니다

반드시 예외가 있는 인생과 달리

수셈은 반드시 반드시의 원칙에 종속됩니다 

수셈이 참 고맙고 갸륵합니다

 

비오는 날, 눈오는 날에는

검은 대리석 비석 위에 핏빛 꽃을 홀수로 -  

하, 님아, 실은 반대, 짝수로! 

짝수가 죽음의 수랍니다 -  

 

5.

 

당신의 내려놓음을

애도하고 축복합니다

살아 있음의 명복을 빕니다

 

 

202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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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분식과 두꺼비 닷컴

 

 

1.

 

어, 혹시 <평화분식> 사장님 아니세요? 택시는 부업?

아, 저를 알아보시다니, 그게 아니라 -

 

 

2.

 

10년 전 우리 동네 <두꺼비 분식>. 욕쟁이 할머니는 욕만큼이나 떡볶이가 찰졌다. 여기에 어묵과 순대, 끝! 튀김은 안 하냐고 물었다가 욕쟁이 할머니한테 욕 침만 잔뜩 맞았다.

 

<두꺼비 분식> 맞은편에 <평화분식>이 생겼다. 떡볶이, 어묵, 순대, 아, 튀김! 심지어 라면과 우동까지! 3년 뒤 <평화분식> 옆에 <평화삼겹살>이 생겼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3년 뒤 <평화분식>도, <평화삼겹살>도 문을 닫았다.

<두꺼비 분식>은 여전히 떡볶이, 어묵, 순대를 팔았다. 그사이 떡볶이의 종류가 찬란해졌다. 카레떡볶이, 자장떡볶이,아, 피자떡볶이! 그냥 떡볶이에는 쪽파 송송 당근 톡톡까지! 그럼에도 여전히 튀김은 없었다.

 

3.

 

그게 아니라 -

송파에서 떡볶이와 삼겹살이 잘 팔리니까 

강남에다 인형뽑기 집을 차렸는데 쫄딱 망했어 -

학생, 아직 젊으니 아저씨 말 잘 들어.

사람은 잘 나갈 때 겸손할 줄 알아야 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전 평화 사장님이 

그런데, 정녕 평안해 보였다.

 

4.

 

두꺼비 분식의 메뉴는 내일도 떡볶이, 어묵, 순대. 하지만 이름은 두꺼비닷컴. 살풋 더 늙은 욕쟁이 할머니, 여전히 떡볶이 양념처럼 빨간 티셔츠를 좋아하신다. 튀김은 여전히 없다. 여전히 부조리한 편견이다. 순대와 간과 위장은 먹지만 징그럽다는 이유로 허파와 심장만은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편견은 원래 부조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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