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고무신

 

 

 

 

1.

 

아이의 비명을 듣고 잠에서 깼다.

 

고요한 어둠을 덮은 채 

아이는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한 땀, 두 땀, 세 땀 무한대로 솟는 땀에

아이의 정수리가 흠뻑 젖었다  

 

그 옆에서 아내가 이를 악문 채,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니, 눈을 부릅 뜬 채, 주먹을 불끈 쥔 채 

경련과 발작 중이었다. 아내의 몸은 불타고 있었다, 

산불 맞은 늦가을 낙엽처럼.

 

 

 

2.

 

남편의 꿈이 복기되는 동안

방울 토마토를 심어놓은 텃밭에다

버려진 고구마가 터전을 마련했다. 

너를 키워야 하나 뽑아야 하나

 

오덕아, 원기소 먹자!

땡구야, 카스테라 왔다!  

기영아, 만두 찐빵 먹을래?

 

 

*

 

 

 

 

고구마는 그냥 여기저기 던져놓은 것인데 너무 무성해져서 가위로 순을, 가지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다. 전지. 한편, 저놈의 씨몽키는 진짜 엽기. 무슨 가루(?)인가를 뿌렸는데 저렇게 '부화'되어 '살고' 있다. 하. 저것도 생명!!! 마트에서 온 생명이다. 저 비좁은 수조 안에서도 세상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동물과 식물의 한 살이. 태어나서 자라고 자손을(!) 낳기 까지의 과정. 자손 안 낳으면 '한살이'를 제대로 못한 것이다. 흑, 이번 생은 여기까지! 하고 죽은 애벌레도 있고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는 배추흰나비도 있다. 다 큰 애벌레는 최대 30mm. 1학기, 즉 상반기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는 판에 아이는 2학기 교과서를 들고 온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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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런 책들을 훑었다, 읽었다고 할만한 것도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기 위해서였다. 이 책인데, 번역이 조금 갱신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소설이 짧아서 작업에 큰 시간이 걸리진 않을 텐데.

 

 

 

 

 

 

 

 

 

 

 

 

 

 

 

 

러시아문학도 번역이 많이 되어 있다. 그런데도 제대로 안 읽다니^^; 이런 책들이 러시아 수용소 문학으로 대략 꼽히는 모양이다. 바실리 그로스만의 책도 있는데, 나는 읽지 못했고, 번역도 없고, 아마 번역되어도 안 읽기 쉽겠다.

 

 

 

 

 

 

 

 

 

 

 

 

 

 

이들 중 최근에 읽고 독자로서 가장 감동 받은 것은 빅터 프랭클 책이다. 처음 듣고(아, 무식?) 처음 읽는 작가라서 그렇기도 할 테지만, 문체가 담백하고, 무엇보다도, 이런 유의 문학(홀로코스트)에 항상 있는 '늪'이 여기는 없다.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과연 '로고테라피'가 효과가 있구나, 싶은 대목이다. 결국 자살하고 만 프리모 레비와는 사뭇 다르다. 레비는 완독 못했다, 읽어나가기 힘들었다. 반면, 프랭클은 '읽히는' 것에 대해 쓴다. 읽을 만하고 참을 만하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수용소에 강제 노역을 하다가 저녁 노을에, 자연 풍경에 감동하는 것, 역시 이것이 인간이다!

 

러시아 수용소 문학의 연원은, 놀라운가,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다. '문학'이라기에는 너무나 자료집, 르뽀에 가까운 체호프의 <사할린 섬>은, 그러나, <6호실>, <구셉>과 같은 걸작의 에뛰드라고 볼 수 있다. 아, 작가는 부지런해야!

 

 

 

 

 

 

 

 

 

 

 

 

 

 

 

다시 도-키. 서론에만 잠깐 언급되지만, 확실히 그에 맞먹을 만한 작가는 톨스토이(그리고 약간은 체호프) 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책은 겨우 2부작이다. 얼마든지 더 쓸 수 있었겠지만, 확실히 이런 유의 '기록'(반쯤은 논픽션)보다는 소설, 픽션이 더 끌렸을 터.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그의 머릿속, 가슴속에서 터져나오길 바라고 있었을까. 나를 꺼내줘, 나를 써줘, 나를 소설로 만들어줘! 솔제니친에 대해 쓰다가, 엉뚱하게도, 다시금,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함을 절감한다. 생긴 건 정말이지 도끼 자루 같은데 -_-;; 마침 <죄와 벌> 저 표지의 도끼가 생각나서, - 아무 의미 없는 비유다.

겸사겸사, 러시아문학 번역의 완벽한 세대 교체. 나-우리 역시 조만간 교체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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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스위치 끈 로봇처럼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잠시만 

 

존재했다.   

 

 

________

 

* 스위치... : 장하준 경제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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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으로(4)

 

 

 

 

올 여름은 월요일이 유난히 빨리 온다

 

이번 월요일은 쉬는 월요일

다음 월요일은 맞는 월요일

이번 월요일은 입원, 이틀 뒤 퇴원

쉬는 월요일 다음은 또 맞는 월요일

 

도대체 몇 번을 맞아야 -

 

배가죽은 딱딱해졌는데도

배속으로는 밥이 들어가, 심지어

맛있다

 

아이들은 직관적으로, 라는 말을 좋아한다

다음 맞는 월요일은 또 직관적으로 -

논증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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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속의 맨홀

 

 

 

 

사람 몸에는 구멍이 많다 manhole

눈구멍 코구멍 입구멍 귀구멍 etc.

사람 몸의 구멍에서 나오는 피는 사건사고다

여자 생식기 구멍에서 제때 나오는 피만 정상이다 

 

생굴 같은, 멍게 같은 애매하고 모호한 양감이

뭉텅뭉텅 쏟아져 투명한 수면 위로 실오라기처럼 퍼지고

붓글씨처럼 흘러내려 변기구멍에 닿으려 한다

때론 선홍색, 때론 적자색, 때론 검붉은 느낌  

아무튼 이건 血이라 기본적으로 붉다

 

생명의 이치에 따라 生理

달월을 넘어 越境 달월의 경전처럼 月經 

이번 달도 무사히, 이번 달도 여전히

달거리가 고맙지만  

 

마흔 다섯 해 -  

살긴 살았는데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다, 등신들아! 

에라이, 병신과 머저리!  

 

 

____

 

 

 

* 체호프 <벚꽃동산> 피르스 대사 /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 맨홀이 manhole인 줄 처음 알았다, 세상에.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데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라니. / 사람 구멍 / 사람 몸 속의 구멍 / 사람 몸이 들어가는 구멍 / 사람 몸을 뚫는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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