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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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4명 중에 3명을 괴롭혔으나, 정작 나는 전혀 괴롭지 않았던 읽쓰연의 네 번째 책. 치즈 곱창을 먹으면서 모임의 H는 물었다, “언니, 대체 이거 왜 읽자고 한 거예요?” 소주로 입을 헹구면서 대답했지.

“(네가 저번에 읽자고 한) 민족주의 책 읽고.. 한국인과 한국의 민족주의가 궁금해져서 검색해봤는데, 이게 제일 괜찮을 거 같아서.” 라 말했는 데, 뭔가 분위기가 싸했다. 그러니까 ...... 두께도 두께지만, 너무 재미도, 의미도 없다는 책에 대한 반응들.

뭐라고????!!!!!!!!!즈엉말?????????? 😳😳
나는... 재/밌/었/는/데????????????????
🤯🤯개충격🤭

H는 말을 이었다. “정희진 샘이 책 고르는 기준이 있는데 백인, 중산층, 지식인, 남성이 쓴 책은 일단 거른대요. 이 책은 심지어 서/울/대 교수고 ‘노’학자예요. 어떻게 보면 주류중의 주류?! 그래서 언니가 이 책을 골랐다는 것부터가 좀 놀랐어요.”

정희진 머모님의 그 기준은 나도 알고 있었다. 실생활에서 적용해봐야겠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음음. 보자,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고르고, 사고 싶은 책을 사고..... 읽던 것을 읽고.. 그러고 보면 스무살 이후 내가 익숙하게 읽어온 책들이라는 건. 대부분. 남성 / (고학력의) 지식인 / 전문가-중산층 ... 뚜뚜뚜...

집에 있는 책장을 살펴봤다. 최근에 사들이기 시작한 페미니즘 책들 말고는 다들 ..... 뚜..뚜..뚜... 정말, 내가 열심히(?) 사모은 저자들일수록 더욱더.. 뚜....뚜...뚜..

그 날, 책장을 살핀 후 머릿 속을 생각했다. 헹굴 수 있다면 좀 흐르는 물에 헹구고 싶었다. 그리고 내 몸을 생각했다. 내 몸이 겪어온 서른 몇 해 동안, 당연히 체득해온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자연스럽게 흡수해왔던 윤리들을. 그것들은 모조리 누구의 것이었을까? 누구의 입맛에 맞게 살아왔던 걸까.

그러니까, 정체성. ....
한국인의.. 아니 그 이전의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

책 이야기를 하자. 난 재밌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서 ‘근대’를 그것도 ‘소설’을 톺아봤다는 방식 자체가 신선하다고 여겼다. 저자가 ‘오월의 사회과학’이라는 책을 집필했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국가는 없는 데 민족의식이 싹트던 시절 조선인들은 무엇을 욕망했을까.. 궁금해하며 소설이 반영하는 당대의 사람살이를 추측해본 독서경험이었다. 저자가 구한말의 시기를 ‘홉스적 자연상태’ 쯤으로 추상화해서 논지를 전개했던 부분도 흥미로웠고, 인용된 전/신/근대 소설들을 읽는 만으로도 것도 즐거움~

망국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근대,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누구보다 ‘강한 조선인’을 열망했고, 문인과 지식인들은 그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고군분투 했으며, 이러저러한 과정을 통해 ‘망한’‘헬조선’인들은 해방 이후 ‘무엇과도 싸울 준비가 된’‘한국인’으로 거듭나 있었다는 결론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임꺽정과 반지성주의를 연결한 부분도 좋았다.

물론 ‘작품을 선정한 기준이 뭘까?’‘아,여성작가는 1도 없네’‘이광수 너무 미화하셨네, 일제강점기 최애 시인 윤동주도 분석해주세요!’정도의 불만은 있었지만, 아주 작은 불만이어서 걸끄럽지 않았다. 아마, 같이 읽는 모임이 아니었다면, 후편인 <한국인의 발견>을 마저 읽으려 했을 것이다.

*



하지만 난 친구들과 함께 읽어버렸고, 그들의 평을 듣고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세게 머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지금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를 읽고 있다. <문학을~>의 부제는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 문학사’이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신소설은 ‘여성적인 장르’이다(p.21)” 이 글은 신소설을 통해 근대초기에 여성을 둘러싼 담론의 변화를 추적한다.

반면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아보자는 <한국인의 탄생>은 신소설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신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주체성, 자의식, 개성 등을 갖추지 못한 여성들이었다. 이처럼 피동적이고 내용이 전혀 없는 껍데기만 있는 ‘여성피해자’들이 바로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최초의 근대인의 모습이었다.(p.79)”

두권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주제의식은 다르다. 한 문장만 따로 떼서 평면적으로 놓고 비교할 수도 없다. 신소설의 여성주인공들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의 영역은 내 그릇을 벗어난다.

다만, 음.
내가 적는 이 글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내 정체성’에 관한 내용이니까.

*

‘정체성’이라는 것은 어떤 집단에 대한 동일시 일 것이다.
내가 동일시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집단을 살펴본다. 1차적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단위의) ‘국가’일 테고 그래서 난 이 책을 집어 들었을 것이다. 한국인.
인생의 대부분은 ‘학생’으로 지냈고, 지금은 자기 먹을 밥은 자기가 버는 노동자다. 전라도출신 서울시민, 장녀, N포세대. 이념의 스펙트럼으로 따지면 진보로. 민주당과 녹색당과 민중당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데, 어디에 서야할지 몰라서 정당활동은 안한다.
읽어온 책만 놓고 보면 586 아재들의 뇌를 장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동일시’하는 집단, 혹은 정체성에 ‘여성’이라는 카테고리가 추가된 것이 아주 최근래의 일이라는 사실이.

난 얼짱녀도, 된장녀도, 그렇다고 메갈/워마드도 아니었으므로. 그 흔한 OO녀라는 멸칭들이 붇는 ‘여성’들에는 동일시를 할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정말 여혐민국이었고, 그 안에서 살아온 나에게 ‘여성성’은 언제나 ‘연약함’으로 상징되는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책 부제의 말마따나 강한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남자가 아니니까 그건 좀 불가능 했던 것 같고 씩씩하고 또 싹싹하다는 수식어 정도에 만족.

혐오, 혐오, 혐오.
내안 남겨진 가부장제의 시각을 직면할 때 마다 소름이 끼친다.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믿은 책읽기나 공부조차 그것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

그날의 모임은 이렇게 끝났다.
이 책은 ‘한국(지식인 남성)인의 탄생’에서 괄호를 과감하게 삭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쓴 ‘한국인’에 대한 책쯤으로 여기자고. “한국인=기본값이 성인 남성!!?”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저자가 일반화해서 ‘한국인’이라 언급한 인물들에 나(나의 어머니/할머니/아버지)는 없었다. ‘그래도 2013년에 나온 책이었으므로, 감안해주면 안될까’ 소심하게 의견을 피력해 보았지만, 독서 모임 친구들은 ‘시대에 맞게 지식인이면 더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게요.......
최정운 선생님, 업데이트들 하셔야겠어요........
그리고..... 나는 책 고르는 수준을 좀 더 업데이트......

요즘 읽고 쓰면서 되게 많이 반성하는 데, 독서라는 행위가 가진 속성이 ‘반성’인건지, 나이가 많이 먹어서 그런 건지.. 김중혁 작가가 했던 말마따나 초딩때 쓰던, 언제나 반성으로 끝나는 일기의 습성이 남은 건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남겨두려고 쓴다. 업데이트, 동기화.




(50)
‘사랑’이라는 말이나 관념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흔하지 않다. 서구의 ‘사랑’과 꼭 같지는 않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에도 ‘사랑’이라는 말과 개념이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를 제외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비슷한 말은 있지만 남자와 여자 간의 성관계를 포함하는 특별한 관계와 감정으로서 정확히 대응되는 개념은 거의 없다. 한자의 ‘애愛’도 고전의 용례에서는 ‘아끼는 마음’, 예를 들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었다. 일본에서 근대 이전에 많이 등장하는 ‘이로色’라는 말은 게이샤나 유녀들과의 관계를 이르는 말로 우리 문화나 서구 문화에서의 사랑, love와는 아주 다른 뜻이었다. .... 그러나 몇가지 중요한 특징중 상대방에 대한 욕망, 각별한 감성, 상대에 대한 배타적 정의와 의리, 그리고 특정한 ‘사랑’의 관계에 대한 결의 등은 공통적이다.

(73)
신소설은 서양식 소설을 흉내 내기 위해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일차적으로 당시에 우리 조선 말고는 어디에도 없는 희한한 이야깃거리가 나타났기 때문에 시작된 예술 장르였는 지 모른다.

(132)
근대 사회 또는 근대성이란 다양한 얼굴을 갖지만, 한반도에서는 중세가 망가지고 흩어진 파편들로서의 개인들이 근대로 나타났다. 그곳은 지옥같은 ‘정글’이었으며 거기에서 처음 발견된 근대의 생명체는 속 빈 넝마 인형 같은, 인물성이 부정된 ‘피해자여성’들 뿐이었다. 그러나 몇년 후 그 지옥의 정글에서 자라난 생명체, 즉 한국인은 생명력 그 자체였다. 생존의 대가survivalist로서의 최초의한국 근대인, 특히 여성은 누가 창조한 인위적인 피조물이 아니라 그 지옥같은 자연에서 살아남고 진화한 최적fittest의 생명체였다. 그들은 말하자면 인물성이 부정된 껍데기 밖에 없던 피해자에서 그런 존재성이 다시 부정되어 진화한 강한 자의식과 개성을 갖춘 강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나타난 고독한 남성 투사는 가족생활에 무책임하며 능력 없고, 사회정치적 행위의 합리성은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이 모든 것에 자존심을 앞세우는 그런 인물이었다.

(255)
1910년대에 나타난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의 공통점은그들은 그들의 정체의 형식을 채울 내용(內容)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민족을 위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요건을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조건의 부재(不在)의 아쉬움을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무엇이 없음(不在)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 이다.우리의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욕망의 화신이었다.

(426)
1933년 이광수의 『유정이 발표되자 강한 조선인을 만드는비결(秘訣)이 드디어 공표되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으로 욕망과이성의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그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것이고,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비결이었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조선에서 사랑의 의미는 전적으로 변화하였다. 사랑은 행복을 위하여 이성과 행복한 교제를 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사랑은 뜨겁게 그러나 끝없이 자제해야 하는 일이며, 이는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강한 인간, 강한 의지로 끝없이 참고 이루는 인간을 만드는 더욱 진지한 일이었다.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고 생산적인 일이었다.

(486-7)
공통적으로 ‘민중’이라는 말은 ‘백성 민(民)’에 ‘무리 중(衆)’을 합하여 ‘국가에 속하는 수많은 군중들, 큰 무리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지혜라기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밀어붙이는 힘, 엄청난 규모의 물리적 완력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백만민중(百萬民衆)’이라는 쓰임새는 단적으로 많은 사람이라는 군중의 규모에 착안한 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중’이란 ‘정치적 의미를 갖는 육체적 힘으로 구성된 수많은 군중들’ 정도의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며 그렇게 쓰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전까지는 ‘민중’이라는 말은 서서히 정치적 혁명적 의미의 작은 조각들이 그 안에 모여들고 쌓여가는 과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민중이라는 말은 혁명을 생각하던 사람들, 나아가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511)
전통적인 영웅이 고결한 존재였다면 임꺽정이 대표하는 우리이 그대 영웅은 누구나 부러워하고 질투할 수 있는 ‘관능적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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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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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였던 고흐에게 사랑하는 동생은 돈(현실)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환기 시켜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림을 추구하면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자신의 경제적 무능이, 뒷바라지하는 동생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만들고 종래에는 그의 마음을 황폐하게 했을 것이다. 


고흐가 조금 더 뻔뻔한 류의 자의식 과잉의 혹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기‘만‘너무 중요한 인간이었더라면 미쳐버릴 일은 없었을 것이고, 동생(테오)에게 당연한 듯 요구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테오가 미쳤을 지도 모르겠다.
부인의 식모살이로 번 돈을 사업으로 날리는 인간, 누나가 여공으로 뒷바라지 해서 공부시켜놨더니 지가 잘나서 명문대(?)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어쩐지 예시에서 젠더가 강조되는 것은 요즘 읽는 책들 영향탓),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남모르는 희생과 헌신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이기적인 인간들 (나포함) 세상에 꽤 많잖아.

˝(47)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해 네가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나도 가능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마.˝

하지만 이 인간은 정말 끊임없이 미안해 했고, 미안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매번 최선을 다해서 생의 에너지를 다 소진시켜 버린듯 하다. 고흐는 너무 착하고 동생을 사랑했고, 동생 테오도 너무 착하고 고흐를 사랑했다. 이 형제들의 삶은 서로 너무 사랑해서 생긴 파국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돈이 없구나, 돈 때문에 미안하구나, 돈을 좀 보내다오, 언젠가는 네게 돈을 부탁하지 않고 싶은데, 돈이 없구나˝가 슴슴이 베인 그의 편지. 먼저 서울에 취직한 죄로 3년 정도 경제적으로 신세졌던 동생이 생각나서 많이 괴로웠다.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정말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 마음. 미련하고 안쓰럽고, 또 이해되기도 하고 해서. 결국엔 세상에 지고, 미쳐가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많이 울었다.


˝(243) 나는 단순하지만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왰다. 그런데 이제는 이미 패배한 싸움을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 성격의 나약함이 문제인지도 모르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자책감만 남았다. 발작이 일어난 동안 그토록 소리를 많이 지른 까닭도 그 때문이겠지. 나 자신을 지키고 싶은데 지킬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어려운 길, 돌아보지 않음,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까지 완벽해야한다는 강박.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로 중도반단한 (돈과 명성에 그림을 파는) 이들에 대한 분노. 그 분노는 자기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와 현실과의 타협을 튕겨냈을 것이다.

아, 미련한 사람.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책을 읽으면서 그 미련한 열정을 응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흐가 미치지 않으려면 무용한 응원보다는 부자 후원자가 필요했겠지!? 성격상 멋진 후견인이 나타나도 미안해서 (고갱 등 더 고생하는 화가들) 더 자신을 질책하며 몰아붙였을 것 같지만. (넘 깨끗해서, 영원히 고통받는 영혼ㅠㅠㅠ)

*

종종 타인의 우직한 신앙과 신념을 비웃기도 하고, 그것에 옳고 그름을 가져다 대려하는 나의 편협이 조금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모든 것을 내어주고 하나를 취하여 붙잡는 이들이 못나 보일때가 있다. 어쩌면 부러운 걸지도.
모든 열정을 낭만화할 필요는 없지만 고흐같은 낭만적 열정가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응원할 수있는 마음을 남겨둬야지.

*

덧, 젊고 열정있는 예술가, 창작자들게 사회적 보장과 지원을 해주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85)
여전히 흡족해 할 수 없었다. 기억 속에는 낮에 본 장관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도저히 그 그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장면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107)
나는 개로 남아있을 것이고, 가난할 것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 또 나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169)
오늘 아침, 꽃이 핀 자두나무가 있는 과수원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멋진 바람이 불어오더니 다른 곳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럴대면 작고 하얀 꽃잎들이 햇빛을 받아 불꽃처럼 반짝이곤 한다.
그 자면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순간순간 땅이 진동하는 걸 바라볼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 하얀색 화면에는파란색과 라일락색, 노란색이 많이 있다. 하늘은 하얗고 파랗다.

(174)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220)테오
형은 내게 빚진 돈 얘기를 하면서 내게 갚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형에게 원하는 것은 형이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내는 거야.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건 맞아. 우리 둘 다 가진 게 별로 없으니 너무 많은 짐을 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하지만 그 정도만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아무것도 팔지 않더라도 말이지.
...하지만 그 많은 그림을 한점당 100프랑으로 계산하는 건 이해할 수가 없어. 그 그림이 100프랑씩에팔리기를 바란다면 그건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이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이 지긋지긋한 사회는 그걸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 편이거든. 하지만 이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사회가 하는 대로 하면서 이렇게 말하자고, 우리도 그거 필요 없다고 말이야.
...형이 너무 힘들게 일해 와서 마치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할 때면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를 거야.
다른 무엇보다 난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아. 실제로 형은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것도 이 땅의 위대한 사람들처럼 품위 있게. 물론 형이 지나치게 곤궁하게 살아왔다고 느끼지 않도록,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빵을 갖지 못해아프게 되는 일이 없도록 적절하게 내게 미리 경고를 해주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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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우석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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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 딱 필요한 말 하는 구만 이책 100자평들 왜 이럼? 다들 직장에서 한 꼰대 하시는 분들인 듯. 팔려라. 88세대만큼 팔려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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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 - 존재를 절멸시키는- ‘(여성)살인’에 대한 이야기. 영아살해와 인도의 사티, 마녀사냥. 이 책을 그저 ‘그런 일도 있구나’ 수준으로 모르는 먼 나라의 옛날 이야기처럼 읽고 싶은데도 그렇게 안된다. 

여남이 동등한 인격이 아니라는 오래된 소유-통제의 가부장적 개념들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고 당연히 ‘청산’되지도 않았으므로 지금, 우리에게서는 관계에서의 불협화음으로 폭력으로 그리고 종래에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원리가 된다.

페미니즘은 공기처럼 익숙해서 보이지조차 않았던 폭력을 보게 해준다. 때문에 ‘살인’을 읽고 있지만 일상에서 맞닥뜨렸던 (공기같아서 인식조차 못했던) 촘촘한 가부장제의 폭력적 경험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숨막히는 것은 나역시 가부장제의 산물이라 당시 상황들에서 스스로를 문제시 했다는 거다.

무서워서 혹은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 ‘그래, (화를 돋군) 내가 문제구나.’ 재빨리 참고 침묵했었다. 미안 잘못했어, 진심없는 사과를 하고 웃은 적도 많았지. 그토록 참고, 때로는 반성까지 했는 데, 나를 조절하는 것이 더 어른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관계에서 ‘자아조절’은 나 일방의 노동이었겠구나 하게 되니 참 허탈하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게 마련이므로, 내가 조절하는 만큼 상대도 자기를 통제하거라 생각했다. 지금도 곰곰이 되짚고 있는 데, 그건 나의 착각.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으니 그렇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지겹다. 이해의 코르셋.

*

“ (214) 가부장제 가정 : 여성에게 가장 치명적인 장소
단 5명 (8퍼센트)의 여성만이 낯선 이에게 살해되었으며, 그 중 4명은 강도사건 도중에 살해되었다. 8명(12퍼센트)이 신원미상의 남성에게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으며, 5명은 강간까지 당했다. 이 5명이 해당 기간에 데이턴에서 낯선 이에게 성적 살인을 당한 사람의 전부였다. 이러한 살인사건은 비교적 드물게 일어남에도, 미디어의 주목을 많이 받는다. 성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에만 관심이 집중되는탓에, 여성들이 낯선 사람보다 남편이나 남자친구에 의해 더 많은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불행한 결과가 빚어진다.”

우리가 페미니즘 을 공부하는 이유, 어쩌면 페미니즘을 알고부터는 이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가 사실은 그 선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울타리’였다는 것. ‘강남역 여혐 살인사건’도 문제지만, 정말의 문제는 너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친밀한 그의 위협이라는 것.

*

리메모리 “(57)기억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해야 한다.”

솔직하고 싶지만 솔직할 수 없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다. 말하려고 하면 다시 기억해야하고, 기억하기 시작하면 일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 모든 이해와 노동을 통해 겨우 안주하고 있는 이만큼의 안정도 포기해야하는 것이다.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기득권이며 부역자이기도 한 나는 솔직히 페미니즘이 힘들고 어렵고, 버겁다.

모든 텍스트들이 나에게 ‘너 그렇게 살지마!’ 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데, 당장 이 삶의 방식을 멈추기는 어려우니까. 너무 너무.

읽는 것과 사는 것의 괴리가 심해지면 결국에는 살기를 멈추던가 읽기를 멈추던가 해야하는 거겠지. 그때의 난 뭘 멈출까. 당장은 둘다 멈추고 싶지 않은데. 이 심각한 불균형을 앓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미치거나 합리화의 달인이 되거나. 그렇게 되겠지. 결국 나는 위선자가 되는 걸까. 그건 진짜 싫은 데.



이 세계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는. 그러므로 지은 죄가 없는. 젊고, 그래서 더 잘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지적할 수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젊은 페미니스트 동생들을 떠올린다.

“(57) 그 기억 위에서 살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아마도 앞으로 나아갔을것이다… 하지만 페미사이드 세계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 또한 참상을 직면하되,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방식으로해야 한다.”

아직은 살아가지 않은 너희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함께 나아갈 수는 없으나 기꺼이 비키겠노라고.

가부장제에 기여하고 있는, 당장 이 모든 것을 박찰 수 없으며, 코르셋을 벗어 제낄 수도 없는 (모순적인) 나는 조용하지만 굳건하게 너희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까 요지는 얇디얇은 지갑을 열자.. ...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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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12-13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리메모리‘ 라는 단어에 밑줄 쫘악 그었었어요. 기억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게 해야 한다... 한 단어인데도 너무나 멋진 말인 것 같습니다.

공쟝쟝 2018-12-13 12:57   좋아요 0 | URL
그쵸. 눈에 딱. 꽂히면서 위로 되는 단어 ㅜ_ㅜ 토니모리슨의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지더랍니다.

단발머리 2018-12-13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아주 마음을 콕콕 찌르네요.
저도 페미니즘 읽어갈수록 그런게 힘들어요.
내가 알게 된 지식과 내가 사는 현실 사이의 간극. 그래서 쟝쟝님처럼 저도 그런 의문을 자주 갖게 되요.
나도 위선자 아닐까.
나도 가부장제의 부역자 아닐까.
아침부터 고민되는 질문들이지만 쟝쟝님 글 읽으니까 좋으네요.

공쟝쟝 2018-12-13 12:58   좋아요 0 | URL
힝..... 마자여.. 부역자....... ㅜ_ㅜ
인정은 하겠는 데, 그 후에 무엇을 해야할지는 너무도 고민되요.
다들 너무 가까이 있는 것들이라. 흙흙..

다락방 2018-12-13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좋습니다.
우리는 같은 책을 읽으며 같은 고민 또 각자 다른 고민들을 하게 되네요.
가장 많이 우리는 자신 안의 여성혐오를 돌아보고 잘못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마, 그래도 앞으로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겠죠.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기 위해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어제 몇 장 못읽고 잤어요. 너무 졸려서...
우리, 12월에 최선을 다해 함께 나아갑시다!

공쟝쟝 2018-12-13 13:00   좋아요 0 | URL
읽는게 사는 것을 초과하지 않게 하고 싶은 뎅... ㅜㅜ.. 갑자기 다른 선택들을 할 수 있는 용기는 아직 없다 말이죠 ㅜ_ㅜ 그래도 함께 읽고 있다는 것이 주는 묘한 안전한 기분이 있습니다. 같이 읽어나가요. 서로에게 필요한♡ 우리!

cyrus 2018-12-13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르셋을 하지 않는(못하는)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그 사람한테 ‘모순적이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늘 완벽할 수 없고,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유독 페미니스트의 ‘인간적인 결함’을 거론하면서 페미니스트 자격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진짜 페미니스트와 가짜 페미니스트를 구분하면서 페미니즘 자체를 문제 삼으려고 해요.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없고,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

공쟝쟝 2018-12-13 19:57   좋아요 0 | URL
탈코운동은 넘사벽이고.. 사실은 저도 모르고 지었던 죄들과..일상에서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웃고 참고, 괜찮다고 넘겨버리는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 맘이 아프게 하네요~ 자책은 좀만 할게요!

cyrus 2018-12-13 20:31   좋아요 1 | URL
제가 ‘코르셋을 하지 않는‘이라고 쓸려고 했는데 ‘탈코르셋을 하지 않는‘다라고 잘못 썼네요.

공쟝쟝 2018-12-13 20:42   좋아요 0 | URL
네!! 🙋🏻‍♀️🙋🏻‍♀️
 



겨울서점 유튜브 보고 뽐뿌 엄청와서 구입해본 #북다트
확실히 이쁩니다..! 브론즈 색깔 쪼아요! 그렇지만 정말 아끼는 책 아니고서는 꼽기 어려울것 같은것이.. 쫌 비싸기도 하구... 꼽는 거 좀 귀찮... (플래그 덕지덕지 붙이는게 편해요..)
_
사진 속 책은 조한혜정 선생님의 ‘선망국의 시간’입니다. 고개를 끄덕일 만한 부분이 많아요. (사실 읽다가 세번 울었어요)

쉼없이 달려온 이 나라 사람들에게 “달리기를 멈추고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하시기에, 저도 빨리빨리 급히 읽어 내려가다.. 그래 쉼의 속도!! 잠깐 덮고 읽기를 쉬었(🤔🤔)답니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 있었는 데, 북다트 꼽으려고 꺼낸김에 마저 읽어야겠다 싶은 것은 벌써 연말이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읽던 책인데 겨울..너무 쉬어버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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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12-12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올려주신 저 부분 내용 너무 와닿네요...! 읽어야겠어요~

공쟝쟝 2018-12-13 13:02   좋아요 0 | URL
홋홋~ 저의 의도를 간파하셨군요. 사실은 북다트가 아닌 책 소개 글!! +_+ 연말에 차분히 읽기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