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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그날 저녁, 취함의 단계에도 상중하가 있으니 중상에서 상으로 넘어가기 직전. 끊기려고 하는 필름을 붙잡아야겠어, 나는 지금을 기억하고 싶어, 도리도리. 그래도 자꾸 정신이 혼미+몽롱해지고, 입에서는 뇌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말만 새어나오고, 어쨌든 사람은 자기가 불리한건 까먹는 법이니까, 결국은 내가 했던 말들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않고, 그러므로 이제와서야 내가 기억하는 건 나에게 가장 유리한 말. 속편하게 술에 취해가는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A가 했던 말. “네가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
기억해야지. 기억할게. 잡아탄 택시에서 유리창에 쿵쿵 머리를 박으면서 메모 앱에 적어놓았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할 것.”*
다음 날, 이를 닦으면서, 테이블을 닦으면서, 먹은 그릇을 닦으면서, 동네를 달리면서, 머리를 말리면서, 연필을 깎으면서, 드문드문 - 띄엄띄엄 - 문득문득 - 조금씩 생각했다(너무 깊이 생각하면 다다르고 싶지 않은 결말에 가닿을 것 같았다). 내가 정말로 사랑받고 있는 지(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사랑이라는 건 대체 뭔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한건가). 어쨌든 난 왜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는 지(지금도 하얗게 잊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받고 싶은 사랑에 대한 모양이 따로 있는 지(확실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여타 등등.
하지만 내가 ‘받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것을 생각하기는 역시나 익숙한 쪽이 아니라서, 대부분의 생각은 이런 종류로만 흘러갔다. 그때, 어떻게 그걸 사랑이라고 여겼던 거지? 사랑이라는 말을 입혀 놓은 온갖 오염된 사랑들. 거기엔 숱한 언어적/비언어적/물리적 폭력과 나르시시즘도 있었지만 사랑을 지킬 용기없음도 포함되었다. 비겁함, 피곤함, 혹은 무지, 무지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 등등. 지금껏 기를 쓰고 내가 해온 ‘주는’ 사랑 역시도 그런 오염 천지라서, 나는 사랑이 싫었다. 사랑의 이데아 같은게 있다면 걔는 걔 대로 남겨두고,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않도록 사랑을 입에 담거나 쉽게 사용하지는 말자. 뭐, 거칠게 정리하면 난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이를 닦고 나서, 닦아낸 테이블 위에서, 밥을 먹고 난 후에, 동네를 달리고 와서, 씻고 난 뒤 앉아, 연필을 깎고 난 후에. 일상에 들어가는 최소한의 시간들 빼고 남아있는 시간들 동안엔 <밀크맨>을 읽었다. 이 소설, 어려웠다. 돌아가서 다시 자꾸 읽어야 했다. 복잡했다. 실은 단순한 이야기임에 불구하고 정말 복잡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집중했다.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할 때가 있다는 곤란함까지 포함했기에 더 좋은 소설이었다. 돌아가서 다시 읽을 때 마다 또 다르게 보였고, 이 복잡한 와중에도 소설이 응시하려는 방향이 느껴졌다. 읽는 동안에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비언어적 폭력에 대해 / 루머와 소문이 어떻게 개인을 파괴하는지에 대해 / 억압적인 시대와 정치적 분위기에 대해/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마구마구 끓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이틀 후에,
묘하게도 지금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랑.
혹은 빛나는 것.
에 대해 느끼는 내면의 일그러진 거부감.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인식.
“(375) 나는 언니가 왜 독을 먹이는지 알아내고 생각이 꼬인 데를 풀고 언니가 정신을 추스르게 하려고 했어. 언니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나쁜 일들이 있는데, 잊을 수 없는 나쁜 일들이 이렇게 많은데 좋은 일만 보면 위험하다고 했어. 새로운 나쁜 일들뿐 아니라 오래된 나쁜 일들도 기억하고 새겨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면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헛된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고 했어. 나는 그걸 몰랐고 언니가 무슨 뜻으로 ‘헛된 일’이라고 하는지도 몰랐지만 언니한테 과거의 일이 헛된 일이 아니었더라도 안타깝지만 이제는 내려놓고 돌아서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지. 그때 언니가 나한테 처음으로 독약을 먹였어.”
오랜기간 서로를 죽고 죽이는 종교ㆍ정치적 분쟁에 시달리던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 <밀크맨>에는 이제 그만 내려놓고 돌아기를 권유하는 동생에게, 그 모든 일이 ‘헛된 일’이 되지 않기 위해라며, 독약을 먹이는 언니가 등장한다. 잊어서는 안되는 나쁜 일들을 해결하지 않은채 혹시라도 좋은 일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이 나쁜 일들 역시 모두 ‘헛된 일’이 될거라는 인식. 나쁜 일 보다 더 끔찍 한 것은, 행복해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헛된 일’이 아니어야 한다”는 매우 강한 당위(에 대한 집착). 일부의 등장인물을 제외하고는 (그 경계에서 흔들리는) 주인공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위가 작동하는 프레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먼 나라 과거의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전에 통과했던(혹은 통과 중인) 시절과 닮아있어 기시감을 느꼈다.
“(364) 물론 딱 맞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바로 이거다. 만약에 바로 그 사람, 내가 사랑하고 원하고 그도 나를 사랑하고 원하는 사람과 진실하고 건실하고 충만하고 만족스럽고 행복한 결합을 이룬데다가, 내 짝의 사랑도 식지 않고 나의 사랑도 식지 않고 두 사람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살해당하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그렇게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다면? 정말로, 진실로, 그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나? 이곳 공동체는 그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크고 지속적인 행복을 바라는 것은 과도한 일로 봤다. 그래서 의심, 죄책감, 후회, 두려움, 절망, 원망 속에서 끔찍한 자기 희생을 치르며 결혼하는 것이 이 곳에서는 암묵적인 필수 코스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지키려고 결혼을 안하고 버텼다. 어쩌면-남자친구와 나 사이를 정식 관계로 발전시키고 싶은 갈망이 이따금 들기도 했고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실패하면서도 내내 어쩌면-관계를 고수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우리는 엉뚱한 사람과 결혼했다.”
“(382)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취약한 상태를 더이상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오빠는 운명에 의해서건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건 그걸 잃거나 뺏기기 전에 스스로 끝내는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그때 아무도 오빠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사실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오빠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을 잃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대체물을 만들었다.”
가장 원하는 것을 잃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장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 두려움을 차단하기 위해서 감각을 차단하고 행복감마저 차단해 버리는 존재들. 하늘이 파랗지 않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다르고 빛나는 것이 있다면 저주를 퍼붓는 마을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못했던 것은 나역시 “(135)안전한 어둠에 이미 오래전에 익숙”해진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이 나쁜 이유는 고통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많은 수고로움들이 삶을 왜곡한다. 나의 경우 그것은 선택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고,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도 못한 채로 선택당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순간순간을 자책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우리는 인식을 차단하고 감각과 감정을 차단하며, 고통의 위계를 짓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고유한 각자의 욕망을 억압하고, 타인의 욕망을 비난한다. ‘안전한 어둠’에 머무르려 하는 것. 빛을 인식하고, 그것을 살아보려 하는 이들에 대한 부정과 시샘. 끝내 타인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의 행복감마저 저주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소설을 따라 읽다보면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이 어떻게 우리의 의식안에 자리잡아 그늘을 만들고, 집단 안에서 일종의 ‘윤리’로 기능하게 되는지 그 숨막힘을 함께 느끼며 알 수 있게 된다. 슬프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표정을 잃고, 더 이상 걸으면서 책을 읽지도, 저수지를 힘껏 달리지도 않게 되고 말았다.
“(252) 지금은 안다. 내가 어떻게 했든 간에 소문이 잦아들거나 멈추거나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때는 일단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멍한 얼굴을 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긴 했다. … 당연히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당연히 나는 겁에 질려있었다. 내 몸에서 자연적인 반응이 들끓는다는 것도 당연히 알았다. 처음에는 이런 반응으로 내가 살아 있고 여기 내 몸안에 있으면 내면의 격랑을 경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삶에 대한 나의 무감한 접근이 겉으로만 그렇게 꾸민 가면이 아니라 점점 실제가 되어갔다는 것이다. 먼저 감정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머리가, 처음에는 “좋아, 잘했어. 사람들을 잘 속여서 내가 누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인지 모르게 만들었어”라고 칭찬을 해주던 머리가 이제는 내가 거기에 있기는 한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는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우리 반응은 어떻게 된 거야? 속으로 표현하던 감정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졌어. 어디 갔지?” 감정이 표출되기를 멈춘 것이다. 그러더니 아예 사라져버렸다. 무감함이 어찌나 발달했는지 지역 사람들 만 내 속을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나도 내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내면세계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신, 밀고 당기기, 저격, 응사, 우회, 왜곡 등이 신체적으로도 에너지를 고갈시켰다. 사람들과 내가 최종 맞대결을 향해 멈추지 못하고 굴러가는 기분이었다. … 사람들을 경계하고 피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 이렇게 암울한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면서 나는 점점 소모되었다. 애초에 속마음을 숨기려고 했던 까닭이 사람들과 엮이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한순간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내가 나의 몰락을 초래했고 몰락에 기여했고 몰락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내면 세계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같은 날들을 살아본 적이 있는가. 당시를 통과할 때는 몰랐지만 나는, 있다.
일그러진 이 세계를 살아가야만 하는 누구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통과 중이거나.
때때로 악몽에서 깬다. 횟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그 시기를 떠올리는 꿈을 꾸고 나면, 지금의 나는 그 때의 나의 결과물 같은 느낌이 들어서 우울감에 빠진다. 상처에 신세진 기분, 덕분에 성숙해진 기분이랄까. 여하튼 여러가지 노력을 통해 깨끗히 지워져있던 내면세계를 복구하고 있고, 이것은 생각지 못한 행복한 경험이라, 너무 소중해서 가끔 전전긍긍하게 된다. 책 속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이게 너무 좋은데 뺏길까봐. 이것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데, 너무 많이 의존해 버릴까봐. 없던 때로 돌아가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을 때도 있다.
“(108) “하늘은 파랗죠. 하늘이 또 무슨 색일 수 있어요?”
물론 우리는 사실 하늘이 파란색 말고 다른 색일 수 있다는 것, 다른 색이 두가지 더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걸 인정할 이유가 없었다. 나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 그날 저녁에도 하늘의 색으로 인정할 수 있는 세가지 색 - 파란색(낮하늘), 검은색(밤하늘), 흰색(구름)- 에다 그 밖에 더 많은 색이 있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수업을 듣는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었다. 세부적인 사항을 인정한다는 것은 선택을 의미하고 선택은 책임을 뜻하는데 우리가 책임을 다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본 탓에 추궁을 당하고 무너지게 되면 어쩌겠는가?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만약 그게 좋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건 간에 좋았고 마음에 들어 그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에서 위안을 얻고 의존하게 되었는데 그게 사라진다면, 그것을 빼앗긴다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하나? 애초에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그래서 우리의 하늘은 파란색이어야 했다.”
다만 내면을 갖추는 일에 열렬히 의존 중인 요즘의 내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점이 있다면 “애초에 없는 편”을 절대로 원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그 프레임 안에서 막연히 생각할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파랗지만은 않은 하늘을 사는 삶이란 건.
그래서 프랑스어 선생님 처럼 나역시 통과 중인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것은 빼앗거나 가져갈 수 있는,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다만,
“(118) “걱정하지 말아요.”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 “저녁놀을 보고 불편해하는 것도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는 것도 다 좋은 일이에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니까. 깨어난다는 의미니까. 본심을 들켰다고 망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선생님은 우리가 자기를 보고 더 용맹하고 모험적인 정신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지 심호흡을 몇번 더 했다. 그렇지만 그 문학반 교실 안에서 모험심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더 모험심이 없었다. 나는 적어도 하늘이 주는 충격, 일몰의 전복성을 일주일 전에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보아하니 다른 사람은 나이가 많든 적든 일몰을 처음 맞닥뜨려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공황에 휩싸일 것 같은 심정이었다. 충격이 공기 중에 감돌고 잔물결처럼 밀려오고 파도처럼 덮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난번 일몰을 보았을 때 똑같은 공황을 경험했지만 가만히 서서 공황에 압도되지 않게 버티면 차차로 가라앉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살짝살짝 정신을 조종했고 이윽고 거슬리고 낯설고 불편한 느낌이 사라졌길래 고개를 숙여 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공황은 주의. ㅎㅎ
그것에 너무 압도되지 않게 살짝살짝 정신을 조종할 수는 있어야 함.
누군가 물었던 적이있다. 내 이상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섞어서. 폭력없는 세계가, 상처 없는 세상이 가능할거라고 믿냐고. (그 질문은 어둠에 익숙해진 사람의 냉소였을까.) 적당히 곰곰히 생각해봤는 데, 아마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현실주의를 근거로 들어 어떤 폭력은 눈감자고 말하는 사람들의 본심은 알 것 같다. 그만큼의 숨 쉴 공간, 그 만큼의 자유로움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137) 이미 적응한 좁아진 세상에 남아있기가 더 쉬웠다.”
쉬운 선택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난 더 이상 쉬운 선택을 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또 선택에 따르는 댓가가 너무 어려워서 내가 많이 고통스러워지는 것 역시도 사절이다.
폭력없는 세계? 가능하지 않다. 때리거나 죽이는 것만, 혹은 성기를 집어 넣는 것만, 폭력으로 인식하는 납작한 세계에서의 폭력이라면- 그건 가능할지도? 다만 그만큼의 폭력이 사라진 세계라면- 그때의 우리는 폭력에 대한 훨씬 많은 해석과 정의를 갖게 되겠지. 그러니 지금껏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폭력들을 포함한 더 많은 폭력들이 당분간은- 생겨나는 것 처럼 보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겨우 숨 쉴 공간이 빼앗겨질지도 모르겠고, 종종 공황의 시간이 찾아올 지라도. 하늘의 색깔은 파랗지만은 않은거니까. 그건 진실이니까.
“(492) 우리는 작은 대문을 열고 닫고 할 것도 없이 작은 산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고 나는 초저녁의 빛을 들이마시며 빛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 공원 방향으로 가는 보도 위로 뛰어내리면서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 여느 유명한 싯구처럼. 내게 있는 분노, 아픔과 슬픔을 해석하다보니 고통이 나를 만든 것은 아닐까, 상처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와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가장 치명적으로 아팠던 것은 가장 사랑했을 때라서, 사랑과 고통을 따로 떼놓기도 어렵다.
인정하고 있다. 상처가 내게 굉장한 교훈을 준 건 맞다. 그런데 그건 ‘교훈’일 뿐, ‘나’는 아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온 건 나 자신이다. 넘어질 때 마다 적절한 순간 누군가들에게 의지도 했다. 나를 지지해주는 그 기운에 기대어 이별하고, 해석하고, 다시 걷고, 조금씩 행복해질 수 있었다. 아, 어떤 날은 정말로는 이해받지 못해서 차라리 이데올로기에 기댈 때도 있었고,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책 속의 한문장, 영화나 드라마속 인물을 부여잡을 때도 있었다. (… 음 … 확실히 현실인간보다는 그쪽이 더 많은 것 같긴 하지만…)
만약 현실에 없는 그것들이 내게 영향을 미쳤다면, 내가 그것들의 ‘흔적’ 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곁에 두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왔기 때문일 거다. 그러고 보면 난 왜 노력했던 걸까. A의 말대로, 사랑 ‘받았’기 때문에? 어디까지는 망가질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는 허용할 수 없다라는 내 안의 어떤 단단한 잠금장치의 기저에는 잊어버린 ‘사랑받은 기억’ 같은 게 있나. 잘 모르겠다. 어렵다. 고통의 가운데를 건너는 순간 고통을 인식하기는 어려운 것 처럼, 사랑을 받고 있는 순간엔 사랑을 인식하기 어려운 걸지도 모르겠고.
“(256)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신이 너무 강해서 나를 도와주고 지지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있었을 텐데도 친구를 만들고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을 못 믿었고 나 자신을 못 믿었고 나한테 도움을 구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그때에는 정신을 붙잡고 추스르는 게 내 최대 목표였고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정신을 붙잡고 추스르려 애쓰고 있었으니, 어쩌면 나로서는 도움이나 위안이라는 개념을 알아차리거나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접근하기는 했고 그중 몇몇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정말 좋은 뜻으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움츠러들었는데, 두려움과 고집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무엇이라도 사람들에게 말할 만한 일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A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난 내 방식대로 ‘나에게 다가온 곱씹을 말들 목록’에 아래의 말을 추가해 놓기로 한다.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할 것.”*
그 말은 어떤 격려였다고.
종종 삶에서 만나는 힘든 과정에 사로잡혀 버리고 싶을 때, 부디 네가 받은 사랑을 기억해내서 조금씩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아무래도 사랑받는 방법을 조금은 배워야지 싶다.
"그런 사람도 있단다. 딸아. 고통을 한껏 누리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더 정신병을 일으킬 이유가 많은 사람, 고통스러울 이유가 더 많은 사람도 있어. 그런데도 어둠에 굴복하거나 한탄에 빠지지 않고 용기있게 자기 갈 길을 가고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야." 이렇게 엄마는 위쪽을 바라봐야 한다며 고통의 단계를 구분해가며 말했다. 고통스러워할 자격이 있는 사람. 자격이 있긴 하지만 자기에게 정당하게 주어진 몫을 심하게 넘어선 사람. 아빠처럼, 다른 사람에게 속한 고통 받을 권리를 빼앗아온 난데없는 무자격자. "네 아빠 말이다." 엄마가 말했다. - P130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평생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안도감이었다. 내 몸이 외치고 있었다. ‘할렐루야! 그가 죽었어! 씨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이 말이 내 전두엽에서 떠오른 정확한 단어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 P428
‘인생은 다 끝났어. 내 인생은 끝났고 다 지나갔고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근근이 사는 거야’ 하는 식의 노인 같은 태도. - P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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