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책을 <감정의 문화정치>로 할지 <가치 있는 삶>으로 할지 고민 중이다. 아마 다 읽게 된다면 감정이 되겠지만. 가치를 올해의 책으로 남기고 싶어서 홀딩한 상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6장. 책임의 윤리학


그런 책들이 있다. 제대로 읽기 위해서 내 삶을 바꿔야 하는 책들이. 그리고 그런 책이 있다. 나를 바꿔 온 까닭이 이 책을 읽어낼 수 있기 위함이었다는 알게 하는 책들이. 그러니까 읽다 보면 그런 저자들을 만난다. 내게 전자는 정희진. 후자는 미셸 푸코.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전자일지 후자일지 물음표인) 사라 아메드. 살아남기 위해 굳혀버렸던 나의 감정을 풀어헤쳐 이해하고 내게 가능한 수준의 언어의 형태로 바꿀 수 있을 때까지. 이제 나는 (정희진의) 몸으로 읽는다는 말을 안다. 감정은 (이성의 반대가 아닌) 체현된 사상이라는 문장을 몸으로 산다. 


그러니까 애석하게도 나라는 인간에게 기억이 윤리적 장치였던 것이다.


삶에서 (때로는 역사에서) 어떤 단절과 비약을 염두에 두지만, 단절은 망각이 아닌 기억을 전제한 것이어야 한다. 잊지 않는 까닭이 있다. 반복 강박은 삶이 보내는 신호다. 내겐 다르게 살기 위한 숙제 같은 거였다. 물론 망각은 중요하다. 그것은 새롭게 살 수 있는 여분의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기억도 중요하다. 기억은 윤리적 장치다. 스스로가 해로운 인간으로 기능하지 않기 위해.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잊어버렸을 것이며, 몸을 다 지워버렸을 거다. 


“(189) 기억한다는 행위는 충실함을 의미한다. 기억은 어떤 사건을 우리의 의식에서 지워 내고 싶은 유혹에도 우리가 그 사건이 남긴 흔적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윤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190) 사실 내가 현재에 충실한 삶이라는 이상을 보편적인 삶의 철학으로 대중화하려는 시도가 너무나 근시안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과거의 지혜를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에게는 현재 가지고 있는 욕구의 관점에서 과거를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우리가 욕구를 더욱 잘 충족시키기 위해 과거를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이 희미해져 가는 과거를 영감이 가득 깃든 삶의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때때로 가능한 이유다.


(191) 현재를 충실하게 산다는 이상은 (중략) 우리가 현재에서 과거의 흔적을 더욱 몰아낼수록 과거를 능가할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정반대다. 과거가 현재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재에 당면한 문제와 과거의 관련성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다. 과거가 지닌 무게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며, 특히 대인 관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오직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아를 갖는다는 사실, 기질의 발달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존이 타인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는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며, 이 책임은 도덕적인 사고 과정을 처리하는 의식적 세계 너머의 무의식적 열정이 머무는 뒤죽박죽 지하 세계까지도 닿는다.


(193) 우리도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타인들도 똑같이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



무의식적 열정과 뒤죽박죽 지하 세계. 마리 루티 답다. 무의식이 강요한 일에 대한 책임까지도. 


잊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맞춤하게 찾아와 나 자신을 해석하게 하는 독서라는 노동은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다. (모두가 나처럼 읽지는 않는다는 건 내게 자존감이 되었다.) 


나는 내 삶을 잘 책임지고자 한다. 그건 오직 나 하나일 테지만 나와 관계 맺은 모든 것과 때때로 내가 잊어버린 그러나 잊지 않으려 하는 기억들과 관계된 일이라 가끔은 벅차고 난망하게 느껴진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서는 쿨내 진동하며 아예 다 잊고 살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게 사는 일은 충분히 넉넉히 부끄러워하는 일이겠지. 우리는 부끄럽기 싫어서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 더 무자비하게 망가져가는 게 아닐까. 가끔은 정성들인 것들을 대범하게 망칠 필요도 있지만. 어쨌든.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떤 전제를 흔들어야 하는 것이고. 다른 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될 때까지 멀어져야 하는 것이며. 멀어지는 것은 달아나기 위함이 아니라 마주보기 위함이라고. 


상처를 기억하는 것. 지금의 삶이 요구하는 것에 맞추어 다르게 읽어내며 기억하는 것이. 내게는 #가치있는삶 처럼 느껴진다. 나는 과거와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몸으로 나를 만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읽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다르게.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계속 이렇게 살면 되는 걸까. 더 웅크려있기를 처방했던 23년도 딱 16일이 남았다.

기억한다는 행위는 충실함을 의미한다. 기억은 어떤 사건을 우리의 의식에서 지워 내고 싶은 유혹에도 우리가 그 사건이 남긴 흔적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윤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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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12-15 14: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멀어집시다. 마주봐야 하니까. 후후후. 올해는 제 인생에 두고두고 기억에 깊이 남을 한 해인데_ 내 생에 중요하고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났기에. 그 중에 한 명은 쟝님입니다. 쟝님과 만나 읽기와 쓰기에 대해서 가벼이 여기던 마음을 좀 접을 수 있었습니다. 내내 읽고 사유하시어 이 게으르고 게으른 중년의 손을 놓지 말아주소서.

공쟝쟝 2023-12-15 14:14   좋아요 2 | URL
아 나란 얼마나 진지한 독자인가.
저는 *과정을 쓰는 것*에 대해 배웠고. 읽고 쓰지 않고 느끼는 법도 배웠고. 무엇보다 수이님 아니었으면 *사랑*이라는 탐구주제는 10년 뒤로 미뤘을 듯. 저 정희진의 공부가 꼽은 올해의 인물 ‘구독자’인데요. 이 훌륭한 제가 꼽는 올해의 인물도 ‘수이’언니 할게요! 서로 나눠주는 거 아니고. 정말로 많이 배웠어요. 제가 워낙 잘 배우는 사람이긴 한데 쑥쑥 크는 건 역시 알라디너 언니들 때문이다!!! 내년에도 잘부탁합니다!
 


드디어 왔다…. ㅠㅠ


선생님 공부 열심히 할게요. 사실 저는 뭐든 열심히 하는 게 평생 문제였는 데… 

샘께서 몸소 실천해 보이시 듯 #정희진의공부 란,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서문에 거다 러너 인용해 주셔서 내 안의 지적 오만이 하늘을 찌르네요. 연말 선물 감사합니다 💕



“(19) 또한 서구 여성사를 개척한 거다 러너의 말대로, 여성/사회적 약자들은 자기 동료의 글을 모르고/읽지 않고 ‘초기 개척자의 사명’을 반복한다. 여성의 글은 인용하지 않는다. 여성의 지식은 제대로 계승되지 않는다. 그러니 언어의 발전이 없다. 나는 이 문제가 사회적 약자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고 본다. 이 글을 부록으로 게재한 이유에는 이러한 문제의식도 있다.


(20) 여성학, 여성 운동은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경합을 통한 생산적인 갈등 없이는 진전도 없다. 한국의 여성주의가 나아감 없이 여성의 생존의 목소리가 왜곡되어 미소지니의 타깃이 되지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여성의 공부, 다른 언어, 남성 사회가 못 알아듣는 언어가 최고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사회의 질문에 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자*.”



내가 추구하는 공부다.

쓸님이 <정희진의 공부> 어록 정리해 주신 거 읽다보니 더 감동적이라 링크.

https://blog.naver.com/iskii82/223276894061


나는 여성의 공부, 다른 언어, 남성 사회가 못 알아듣는 언어가 최고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사회의 질문에 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자*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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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1-29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받았지롱요!!!!!!!!!!
진짜 알림 떴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받는줄...... >_<

공쟝쟝 2023-11-30 12:45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는 개인사와 얽혀서 정말 선물 같았어요. 알림 소식만 떴는데도 눈물이 펑펑.
우리 은오님도 이 책 재밌게 읽고 은오님만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은오 2023-11-30 20:01   좋아요 1 | URL
희진쌤이 쟝님한테 큰 위로가 되어주시는군요ㅠㅠ 진짜 선물이네요. 쟝님 뚝!!! 이리와요 안아줄랑게!!!!! 😭😭💕
그리고.... 쟝님도 “우리” 은오님 금지

수이 2023-11-29 2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쟝님의 언어가 제일 기대됩니다. 읽고 내내 페이퍼 써주세요.

공쟝쟝 2023-11-30 12:51   좋아요 1 | URL
연필 형광펜 색연필 번갈아가면서 밑줄 긋고 있고요. 선생님의 혜안과 드넓은 이해력과 포용심에 또 한번 스스로의 간장 종지만한 그릇을 느끼며....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희진 선생님의 한남 돌려서 까기 실력은 저는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이를 테면 이런 문장.
˝어느 사회나 일부일처제의 결혼의 가장 큰 동기는 남사는 가사 노동자를 구하는 것이고, 여성은 원가정에서 독립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가사 노동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성에게 여전히 결혼은 필요하다 ....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 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페크pek0501 2023-11-29 2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의 도전, 을 읽은 자로서 이 책도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생각합니다.^^

공쟝쟝 2023-11-30 12:50   좋아요 2 | URL
페크님, 이 책은 20년 전 페미니즘을 소개하던 시절에서 변화하지 않은 현실과 또 변화한 현실을 함께 보여주네요. 꼭 읽어보시고 좋은 감상과 추천 부탁드립니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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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년 동안 변화(없음)가 한마디로 진단 끝. “(55) 여성의 ‘사회’ 진출이 사실상 공사 영역에 걸친 이중 노동이라는 현실 때문에 여성들은 과로와 경력 단절을 피해 비혼을 선택하고, 이는 저출산과 동물과의 반려 인생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성차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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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4 19: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엥 어떻게 벌써 읽죠? 관계자입니까?!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1-24 19:38   좋아요 4 | URL
정희진 선생님과는 관계가 없지만 그분에게 진심인 천하장사 소시지와 관련있는 분의 관계자입미다 ㅋㅋㅋㅋ 구매 기념 책속에서의 문장만 보고도 이미 별다섯은 확정이라 ㅋㅋㅋㅋㅋ 북플이 자동으로 읽었다고 해버리네욬ㅋㅋ 고쳤습니다!! (천하장사 소시지의 진심 앞에서는 진실해질 뿐…)

잠자냥 2023-11-24 19:41   좋아요 4 | URL
서문은 저도 미리보기로 읽었삼 ㅋ

공쟝쟝 2023-11-24 20:30   좋아요 3 | URL
너무 읽고 싶어서 손떨리는 현상😫😫

잠자냥 2023-11-24 22:27   좋아요 4 | URL
밥 먹어!

단발머리 2023-11-26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요일에 당일 출고라더니 어제 확인해보니 화요일에 출고된대요. 어찌된 일인지… 🤔

공쟝쟝 2023-11-26 23:29   좋아요 1 | URL
제가 구매할 때는...... 화요일에 출고예고가 되어있었다는 ....... 그전에 빨리 <애국의 계보학>을 다 읽어야할텐데요.....🤔 참고로 저 책 맛도리입니다! ㅋㅋ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삶을 파괴하는 말들에 지지 않기
아라이 유키 지음, 배형은 옮김 / ㅁ(미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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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강추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정주행했다. 매 화가 다 좋았는데, 주인공이 우울증에 걸린 상황을 볼 때 눈물이 계속 나서 힘들었다. 재경험. 재인식. 애도.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애써서 생각하지만. 가끔 참기 힘든 마음은 내가 나를 이상하고 아픈 애라고 스스로 여겼다는 거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학습된 성격과 무기력의 결과겠지.



별 뜻 없이 했을 말들만 귀에서 울려 퍼지고 가슴에 남아서 나를 할퀴더라. 뒤늦게 지속적으로 상처받고 말았다. 여전히 상처는 벌어져 있는 모양. 내 마음을 나는 보호할 줄을 몰랐다. 귀를 막을 줄을 몰랐다. 그래. 어쩌면 나는 앞으로 내가 해서는 안 될 말들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배웠어야 했던 거다.


올해 읽으면서 가장 많이 운 책은 이 책.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보다 80배는 정교한 방식으로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제재 받지 않은 혐오의 말들이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킬 때 세상에 어떤 지옥이 펼쳐지는 지를 세밀하게 알려준다. (동시에 가능성도)



- (30) 언어에는 내리 쌓이는 성질이 있다.


나는 이 문장을 나의 방식으로 그러나 아라이 유키의 의도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마지막 잘못 빼든 젠가 같은 거지. 내 존재를 빼서 그 위에 하나하나 올려두는 말들. 기우뚱하다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까지. 내가 들었던. 내게 쌓이고 쌓인 못된 말들. 나를 통제하기 위해 했던 말. 내가 나를 포기시키기 위해 했던 말.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못 들은 척 나는 아닌 척 했던 말이. 나를 내가 공격하는 말로 바로 바뀌는 순간. 그래 어쩌면 이건 자기 비판적인 성격의 내 경우일 테고, 대부분은 타인들을 공격해도 되는 (때로는 물리적으로까지) 정당화의 근거로 사용되는. 말은 사회적이다. 말은 맥락적이다. 말은 권력적이다. 말은. 그래서 누군가를 살리고. 가차없이 누군가를 죽인다. 그러니까. 말은 닿는다. 글은 닿는다. 닿는다. 닿는 단다. 어떤 마음을 품고 써야 하는 건지. 어떤 건 왜 혼자 만의 일기장에 써야 하는지 까지도.


(30) A 선배가 겪은 ‘마음의 병’에 대해서도 “나약하다”, “어리광부린다”, “게으름 피울 뿐이다”라고 평하곤 한다. A 선배도 ‘마음의 병’으로 휴직한 동료들에 대해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쌓이고 쌓여 이번에는 본인이 그 ‘압력’에 짓눌리게 되었다. 바쁘고 피곤하면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야”라고 불평 한마디 흘리고 싶어진다. 욕하고 싶을 때도 있다. 나 역시 그런 감정과 아무 연 없이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살기 괴로운’ 정도를 서로 비교해봤자 결코 편해지지않는다. 도리어 ‘입을 다물리는 압력’이 높아질 뿐이다. 이런 ‘압력’을 높여서는 안 된다. ‘살기 괴로운 사람이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다‘불쌍하다’는 감상은 ‘나는 그런 문제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발상이다. 그 압력을 높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좋았던 것은.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는 느낌들보다는 (증상에 대한 연출이 정말 대단하다) 내가 나를 통해 어렵게 닿게 된 인식이 사람들이 공감하며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한 콘텐츠로 만들어져서 유통되고 있구나 하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어딘가에서 짓이겨 망쳐지고 있는 언어들이 어딘가에서는 보듬어지고 다독여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 아라이 유키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안도감.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팠던 것은 아팠던 거였고, 힘들었던 것은 힘들었던 거라서.

그때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니까. 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내 마음은.


분명한 건.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그다지 상관 없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는 방식이 바뀌었으니까. 아직은 좀 아슬아슬한가.

그런데 과정에서 벼려지게 된 생각과 글들이. (나 스스로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내 놓고 나서는 생각보다는 후유증이 남는 나름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나 보다.

여전히 어떤 동의를 구하는 것만 같은 내 연약한 마음이 좀 서글퍼서 좀 뒤척였다.


그래 나는 나약하다. 내가 여린 것은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강하고 독한 부분도 있다.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힘내고 싶은지, 더 용기 내고 싶은지, 혹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것인지까지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 아니, 난 그냥 일상을 잘 지내고 싶어.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랑받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글은.

모든 글은 부치지 않은 편지다. 그것은 언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는 모두가 안다. 그러므로. 취향으로 에두를 필요가 없다.

발신인 자신이 모른다고 주장해도. 수신인은 알아차린다.

오배송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그 문장은 내게 도달했다.

그리고 언어는 내리 쌓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는 거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엄마, 사랑해. 전화를 끊고.

누구의 사랑을 받고 싶은지. 어디에 서 있고 싶은지를 묻는다.

당연히 나는 내 편이며,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옆에 서 있고 싶다. 이젠 서운하거나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내가 나를 살고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맛있는 것을 먹어야겠다. 그래야겠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엔딩멘트-

언어에는 ‘내리쌓이는’ 성질이 있다. 입 밖으로 나온 언어는 개인 안에도, 사회 안에도 내리쌓인다. 그러한 언어가 축적되어 우리가 지닌 가치관의 기반을 만들어간다. ‘배려 없는 말’이야 예전에도 있었지만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말의 축적’과 ‘가치관 형성’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심지어 그 폭발을 누구나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무섭다.
‘누군가를 입 다물게 하기 위한 말’이 내리 쌓이면 ‘입을 다물게 하는 압력’도 반드시 높아질 것이다. ‘삶의 괴로움을 떠안은 사람’이 "도와줘"라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압력이다. - P30

오해의 우려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장애인들은 전쟁을 찬미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찬미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발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졌다.’ ‘내 생각이 그러하다고 표명한 순간에만 세상으로부터 괴롭힘당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이는 노골적으로 무언가를 ‘강제‘당하는 일보다 훨씬 무섭다. 강권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우선 누군가에게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는 데 망설임이 없어진다. 다음에는 낙인 찍힌 사람들을 박해하고 배제하고 입 다물게한다. 입을 다물린 뒤 이번에는 거꾸로 말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면 동료로 받아줄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하며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말하게 만든다. ‘강제로 말하게 한 사람’의 책임은 이런 식으로 사라지고 ‘자발적으로 말한 사람’만이 상처받는다. - P101

누군가에게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는 사람은 남에게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나는 무언가에 쓸모가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특히 그 ‘무언가‘가 막연히 커다란 것이라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국가’, ‘세계’, ‘인류’ 등 말이다). 제6화에서 언급한 사가미하라(장애인 시설 살상) 사건의 범인에게서도 같은 문제가 파악된다.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것’이 ‘쓸모없는 사람을 찾아내 비난하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절대로 어떤 쓸모도 있고 싶지 않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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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3 23: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고 포도만 주는 사람한텐 그래도 노라고 말하는 쟝이 되길.

공쟝쟝 2023-11-24 06:54   좋아요 4 | URL
여성들이 사회 속에서 싫어요, 안돼요, no라고 조금 더 수월하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온 따뜻하고 멋진 잠자냥🐈‍⬛님~ 사과에 땅콩 잼을 발라서 먹으면 맛있어요. 포도만 주던 엄마는 좀 바보.

독서괭 2023-11-28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보다 80배는 정교한 방식으로,,라니, 궁금해지는 책이군요.
˝모든 글은 부치지 않은 편지다. 그것은 언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기에 밑줄 쫙 긋고요.
저도 이 드라마가 누구나 정신질환을 겪을 수 있는 경계에 있다고 잘 보여주고 있어서 좋더라고요. 아직 박보영의 우울증 극복기는 못 봤는데, 얼른 보고 싶네요.
잘하고 있는 쟝쟝님!!♥

공쟝쟝 2023-11-29 17:5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잘 해내고 있는 독서괭님 ^^
 
[감정의 문화정치] ‘무엇이 끈적이는가’라는 질문

월요일 아침부터 내 <감정의 문화정치> 페이퍼에 <좋아요>로 발작 눌리게 하는 *철학 책 읽는 미소지니 남*에게 감정 한뭉탱이 섞어서 인용 문장 가져온다. (트랙백 참조)



가방 끈. 때로는 독립 연구자. 지식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론에 특별히 재능이 있었던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살게 된 것이던가. 이론이라는 리그 안에서 이론으로 다투면서 세상을 덜 망칠 해석을 얻기 위해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써 왔다는 거 이해했음. 지성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끼리는 더 치열하게 다퉈야지. 그래야 하는 게 맞고.


내가 아직도 좀 화나는 거는. 사회 전반의 미소지니가 너무 힘들다고, 살겠다고 뛰쳐나온 여성들한테 대고 본질주의, 반지성주의, 혐오주의라는 규정부터 잽싸게 들고 와서 분석하려 하던 종래의 여성주의자들 포함한 분석, 평가하고 싶어서 안달났던 종류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래 결론은 그들이 하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 만들어진 앙심은 결국은 정말로 나 같은 대중을 반지성주의로 만든다. 쉬운 규정의 말. 언어(지식)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조신하게 돌아봐야하는 태도였을텐데도... 


더 신경질 나는 건. 

그 사람들이 규정한 지식에 기대서 결국 *하고 싶은 미소지니를 정당화*해야겠는 여성혐오자들의 탄생이겠지만.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게 너무 아파서. 이건 아닌가? 저건 아닌가? 생각하는 방법을 잘 몰라 휘청일 때. 이미 여성주의 지식으로 알고 있던 잘 배운 한남은 나한테 물어보더라. 너 스까야? 랟이야? 난 그 말이 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랟이었으면 너는 내가 무서워~ 아무말도 안 했겠지. 그때 나는 워마드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냥 몰라서 그건 뭐야? 헤헤 웃었다. 랟은 아니라며 딴 이야기 계속 하더라. 난 또 열심히 들었지. 하. 아마 내가 들어줬으니까 했겠지. 옳다고 안했는 데. 궁시렁.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대체. 책은 왜 읽냐. 라는 말을. 정말 해주고 싶다. 그래. 한국 사회에서 책 읽기야 말로. 식민화 된 영역이라는 걸 이젠 안다. 여성주의 고맙고 탈식민주의도 땡큐입니다. 이 모든 걸 하나 하나 볼 수 있게된, 그 동안의 나의 무지성과 반지성 위치성도 땡큐다.    


계속해서 하고 있는 말이지만 나의 (젠더화된) 감정에 평가와 걱정과 우려는 필요 없다. 진짜 해악인 건. 그런 감정을 가진 대중과 섞이지 못하는 섞일 생각 조차 없는. 지 혼자 잘난 지식이라는 거. 근데 지식이 권력이야. 나도 그건 이제 알아. 그거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걸 내려 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도 오케이. 요컨대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인 거지? 


그래서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 정치>가 탁월한 거고. 내 페미니즘 선생님 이민경, 정희진 만세입니다!  


(139) 대리자 없는 발화, 매개 없는 이해와 표현은 언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법이 아닌 회화에 해당하며, 이 능력은 무조건 연습으로부터만 나온다. 특정한 언어를 갓 접한 입문자가 문법적 지식을 학습하는 건 유창성에서 철저히 부차적이거나 혹은 능력을 갖추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규범보다는 그것을 활용하여 말하고 싶은 내용을 갖는 게, 누군가가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 모방할 준비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여러 번 듣고 여러 번 말하면 오류는 줄어든다. 

강남역 살인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은 전부 동요했고 상처 입었다. 그 흔들림으로 의식의 장막에는 틈새가 생겼다. 그 틈을 타 뱃속 깊이 눌러두었던 기억들이 혀뿌리까지 타고 올라왔다.

누군가는 여자들이 진실을 말하면 세상은 터져버린다고 했다. 세상이 터질 기미를 불안해한, 대학에서 만난 철학과 남자 선배는 ‘비이성적으로 구는’ 주변 여성들을 진정시키겠답시고 ‘우리의 적은 남자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가벼운 에세이가 아니라 이론서다’ 같은 글을 페이스북에다 올렸다. 리베카 솔닛의 페미니즘 에세이가 인기를 끈 무렵이었다. 몸속에서 울컥 올라온 물질을 글자로 담아 남자에게 전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틀렸으니 조용히 계세요.*  


분명히 처음이 맞을 것이다. 짧은 한 줄에도 그는 아주 놀라 내게 따로 연락을 해 왔으니까.

이날 시작한 응수는 보름쯤 지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라는 내 책 첫 제목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론서가 아니다”라는 설명 문구에 담기게 되었다. 실용 회화 매뉴얼!


- <꼬리를 문 뱀>, 이민경


틀렸으니 조용히 계세요.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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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20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후 시원해!

공쟝쟝 2023-11-20 20: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ㅋㅋㅋ 모처럼 사이다.

yamoo 2023-11-2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야 말로. 식민화 된 영역...이라고 하셨는데..
몰라서 그러는데 말씀하신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공쟝쟝 2023-11-20 13:33   좋아요 1 | URL
서울대 나온 검사가 공부를 못해서 이런 대통령이 되었겠습니까? 책을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이겠지만.
‘언어-지식-상징계 질서‘가 이미 권력이라는 소리고, 그 권력에 진입하려고 미친 듯이 공부하고 있는 게 한국 사회 아닙니까? 한국에서 지식인으로 알려지기에는 서울대 아니면 미국박사 학위 말고 필요한 인정, 권위가 또 있나요? 그런 책들 읽다보면 그런 사람들 생각을 내면화 하겠죠.
야무님의 질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읽었던 아시스 난디의 <친밀한 적>을 권합니다.
˝난디는 그들에게 내재된 식민주의, 곧 서구 지배자에게 봉사하거나 인정받은 서구 방식의 개념, 문화적 우선순위, 계층화, 지배적 자아를 ‘우리 안의 적‘ 곧 ‘친밀한 적‘이라고 불렀다. 난디의 논리를 따르면 ‘친밀한 적‘을 다정하게 껴안은, 식민지배를 경험한 나라의 엘리트들은 정신의 식민화를 겪고 있는 셈이다.˝
뭐 그렇다고 제가 서구를 벗어나서 우리나라 최고여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얻게 된 지식을 간단한 문장들로 한꺼번에 정확하게 설명해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열공하세요~

2023-11-20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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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2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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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2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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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2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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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2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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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2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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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2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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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2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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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1-20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리를 문 뱀....이 마침 집에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랍니까. 제가 함 읽어볼게요!

공쟝쟝 2023-11-20 21:13   좋아요 2 | URL
저를 영어공부의 길로 떠민 (그리고 붙잡지는 못한...ㅋㅋㅋㅋ)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페미니즘이 키우고 페미니즘을 키운 또래의 동료 여성의 거침없는 행보에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큰 일은 여자가 합니다!! 참, 단발머리님 저도 그 병 앓고 있어요. 너무 좋으면. 너무 좋아서. 책 읽고 독후감 못쓰는 병.

단발머리 2023-11-20 21:23   좋아요 1 | URL
그거 불치병이고 난치병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가장 심하게 앓았을 때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나서였죠. 한 문장 쓰고 멈추고 또 한 문장 쓰고 멈추고.... 치료제 찾아봅시다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1-21 07:32   좋아요 1 | URL
그거 치료제는요,
이책 너무 좋아 별 오십 개야. 꼭 꼭 읽어, 라고 리뷰로 친구들 꼬셔서 전염시키기 뿐이에요. 근데 잠시 낫다가 (친구랑 그 책 얘길 할 수 있다면) 재발함.

2023-11-20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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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11-20 21:14   좋아요 0 | URL
어떤 질문은 통제가 목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지만. 잘난 척 하고 싶으니까 한다 ㅋㅋㅋ

2023-11-21 1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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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2 0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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