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냐 > 누군들....살고싶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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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신촌의 뒷골목에 가면, 작은 카페들이 나온다. 그 동네를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해온 나도 그 카페골목을 몰랐다. 제법 얘기가 잘 통하는 마담이 있고, 언니들이 옆에서 술시중을 들어준다. P선배의 단골도 그중 하나. 지난 겨울, 3차로 그 카페에 갔다가 마담과 쿵짝이 맞았다. 세상에, 피터 마쓰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마담이 있군...그 언니 덕분에 술도 쑥쑥........
암튼, 다음날 아침, 뭔가 실수했다 싶었다. 이런, 마침 가방에 넣고 다니던 조 사코의 `고라즈데'를 넘겨주고 왔네! 3분의 1이나 남았는데. ㅠ.ㅜ
좋은 책 선물했음 그만인 것을, 많이 아쉬웠던 책이다. 처음 그 책을 펼치고 받았던 충격들이 이젠 희미하다. 얼치기 지식인을 자처할라치면,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정도는 들어본체 해야 했길래....주저않고 집어든 책. 그리고 안이한 내 접근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담긴 책이었다. 어쨌든 `고라즈데'와의 인연은 신촌카페 사건으로 끝인가 했는데, 동료 T가 (당연하게도) 그 책을 갖고 있었다. 낼름 빌렸다.
안전지대 고라즈데. 보스니아 내전의 기록이다. 세르비아계 만행으로부터 보스니아계 무슬림을 보호하기 위해 UN이 지정한 이른바 `안전지대'. 그러나 실상은 고립된 절망의 땅이었고, 때로는 무기력하게 살육당해야 했던 곳이다. 저자는 고라즈데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중계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이 만화. 대사는 비현실적이고, 그림은 엽기잔혹사다.
"미국에서도 고라즈데를 아나요? ", "평화가 올까요?" "청바지를 사다주세요, 꼭 리바이스여야 해요"
"사람들은 세르비아계 집들에 불을 지르고 있었죠. 무슬림계 집들은 대부분 세르비아계가 태워버린 상태였고요. 어떤 사람들은 약탈엔 관심이 없고, 오직 불지르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죠. 그들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들 공포감에 사로잡혔고,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모두 일곱구. 그중 둘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죠...그의 배속에는 오물이 가득했어요. 아마 그들이 배를 갈랐던 모양이죠. ...그의 한쪽 손 손가락은 모두 잘려나갔고....모두 성기가 잘려있었어요. 그는 결혼해서 아이가 하나 있었죠..."(살육된 한 마을을 뒤늦게 찾은 고라즈데 사람들)
"밤마다 사람들을 잡아갔소. 애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강물에 사람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렸소. 때로는 총을 쐈지만, 칼로 목을 찌르는 걸 더 좋아했소. 사흘 낮과 사흘 밤 사이에, 나는 200~300명이 죽는 걸 보았소. 나는 똑똑히 보았소."(고라즈데 주변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한 남자)
평범한 고라즈데 시민들. 그들의 눈 앞에서 때로는 포탄이 터진다. 필사적으로 딸의 손을 붙잡고, 가족을 챙겨 달아나보지만, 길 위에서 아내를 잃고, 아이를 잃고, 때로는 가장을 잃는다. 아무 일 없을거라는 TV속 정치가들의 말과 현실은 달랐다. 혹시나 해서 피신했던 가족들은 두고 온 가족들을 `사망자 명단'에서 발견한다. 하룻밤 수십, 수백명씩 팔과 다리가 떨어져나가는, 배가 갈라진 부상자들이 병원에 실려와도 의약품은 없다. 포위된 주민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UN 결의 불구, 세르비아인들은 멋대로 구호대를 차단하는 상황. 굶어죽지 않으려면 목숨을 거는게 당연하다. 총부리를 피해 밤새 산길을 타서, 수십kg의 식량을 짊어지고 돌아아야만 한다. 중간에 누군가 쓰러져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누구나 같은 생각이다. 오직 살아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행복하게도, 운좋게도 평화를 맞이한 이들은 인생에 4년여의 공백을 두고 새출발을 한다. `피붙이를 잃은 슬픔'은 `살아남은 죄'로 이어진다. 떠들석하게 파티를 하고, 새 청바지를 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설마 그렇겠냐만) 만화책의 그림 속에서도 처절하고, 눈빛은 공허해보인다.
`베를린의 한 여인'에서 전쟁의 한 복판 목소리는 충분히 들었다. 고라즈데가 다른 것? 글쎄.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책은 만화로 현장을 재생, 머리로 생각하기 앞서 먼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을 방패막이 삼아, 잘 알던 이웃끼리 인간임을 잊고 공포에 취해 몇 세대를 두고 잊지 못할 원한을 쌓아간다는게 조금 다를까. 그리고 제3자가 들여다본 피해자들의 서글픈 광기 또한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국제질서라는 미명 아래 인류역사상 어디선가는 늘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