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비연 > 인간의 사악한 본성은 어디까지일까
빨강머리 레드메인즈 동서 미스터리 북스 32
이든 필포츠 지음, 오정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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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접해보는 이든 필포츠의 추리소설이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형식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는, 풍경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로맨틱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작은 도시에서 뜻하지 않은 혈육간의 살인 사건으로 보여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우연히 휴가를 갔던 마크 브렌던이라는 런던 경시청 소속의 민완 형사가 이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거기에는 살인된 사람의 부인인 스무살 초반의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가 있고 브렌던 형사는 사사로운 연애 감정에 휘말린 채 사건의 해결에 전력한다. 하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가고 계속 유령과 같은 살인자의 모습만  드문드문 나타나는데..결국 이 제니 펜딘이라는 미망인의 큰 삼촌의 친구이자, 탁월한 탐정인 피터 건즈의 등장으로 사건은 실마리를 찾아가게 되고 결국 잡히고야 만 범인의 멋드러진 수기로 이 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무엇보다 사람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는 점이 이 추리소설의 큰 장점이다. 아주 세세한 감정의 흔들림과 의혹, 질투, 분노 등이 눈 앞에 보이는 듯 그려지고 있고 범인의 잘난 체 하고 싶어하는(!) 그 심정 또한 곳곳에 드러나 소설의 매력을 더한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작위적인 설정과 지나칠 정도의 구체적인 설명들로 인하여 범인의 윤곽과 플롯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는 것이 흥미를 조금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범인이 왜 그런 일들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구심만큼은 그대로 남아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한다.

무엇보다 믿어야 할 사람과 믿지 말아야 할 사람, 사실이라 생각해야 할 것과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 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어 끝까지 그 결말을 의심하게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것이라 보여진다. 결국 일종의 허영심으로 무너진 범인이, 그러나 자신의 범죄 행각과 배경을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유려한 솜씨의 글로 남기는 대목은 인간이란 어디까지 사악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삐뚤어진 생각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세계 10대 추리소설 중의 하나라는 타이틀이 전혀 무색하지 않은 멋진 작품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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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피아노 치는 좀머씨, 글렌 굴드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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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 ― 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까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영화배우 이은주의 자살을 바라보면서, 이후 나는 점점더 나의 죽음 이후를 상상해본다. 내가 죽은 뒤 나의 사체를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산 속에 버려두거나 아니면 깊은 심연 속에서 두번 다시 햇살 아래로 떠오르는 일 없이 그렇게 조용히 부패해가기를... 한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잠시 전 한 회사 동료로부터 그녀의 죽음과 관련한 그럴 듯한 X파일 하나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우습다. 사람의 죽음이 소모되는 방식이란 구더기가 눈구멍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처럼 잔인하다.

브레히트의 시를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들도 모두 죽는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에 타인의 죽음을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가 아니라 살아남았으므로 강한 자임을 깨닫노라면 나는 자신이 미워진다." 오직 인간만이 타인의 손에 자신의 시신을, 최후 처리를 넘긴다. 짐승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을 푸줏간의 고기처럼도 취급해주지 않는다. 죽은 건, 그냥 죽은 거다. 한밤의 연예 프로그램에서 성남 분당의 아파트에서 하얀 시트에 포장된채 들려나오는 여인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에 질질 끌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오디오에 삽입한다.

"딴따아앙 따라다라 퉁두르"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토론토 순회 공연 중이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어느날 굴드를 방문했다. 굴드는 자신의 아파트에 번스타인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곧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모피와 털로 안을 댄 외투, 목도리 속에 얼굴이 묻힐만큼 깊이 파묻힌 굴드는 창문을 모두 닫고 난방을 최고로 높였다. 그리고 볼륨을 최대한 올린 라디오가 악을 쓰는 상황에서 번스타인은 굴드와 함께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해야 했다. 소음과 땀에 파묻힌 번스타인이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고 했더니 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하루에 육백마흔네가지 망상에 사로잡히는 나 같은 인간도, 병들어 몸져 누워 있는 동안 욕실 거울을 앞에 두고 면도칼로 스스로의 목울대 대신에 머리카락을 스윽쓱 밀어댄 나 같은 인간도, 회사를 그만두고 삼개월여 동안 두문불출하고 방 안에서만 지내 괴물같이 자란 수염을 보며 텅빈 미소를 지어 보였던 나 같은 인간도 글렌 굴드와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하라면 이렇게 말할 거다. "넌 참 짜증나는 인간이야!"라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저자 "미셸 슈나이더"를 감히 존경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어느 정도로 글렌 굴드를 사랑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거지요? 하고 그에게 묻고 싶다. 굴드는 종종 마약이 필요한 나에게 마약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금쯤 백골이 진토되어 나뒹굴고 있을 굴드 자신이 아니라 그가 웅얼대며 남겨논 음반 덕이다. 나는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뿐만 아니라 골트베르크 변주곡 자체를 무진장 좋아해서 이 곡이 수록된 음반만 대여섯장 가지고 있다. 그래도 내 귀엔 굴드가 최고다. 그의 악보엔 온갖 낙서들이 난무한다. 상념 많은 인간은 스타인웨이 CD318 피아노 앞에서도 끊임없이 웅얼대고 싶어했다. 그가 그랬다.

굴드는 만년에 잠시 야마하를 쓰기는 했지만 그가 즐겨쓰고 좋아한 피아노는 역시 <스타인웨이 CD318> 그것도 그만의 174번째 생산된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불의의 사고로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1960년 초 굴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아노의 건반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 스타인웨이사의 전속 조율사 윌리엄 후퍼를 불렀다. 후퍼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애용하는 호로비츠와 굴드를 위해 스타인웨이사측에서 특별히 채용하고 있는 조율사였다. 굴드의 집에 온 후퍼는 굴드와 이야기를 나누다 친근감의 표시로 그의 등을 가볍게 한번 툭 쳤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절대 악수하지 않는다는 결벽증의 소유자. 소련에서 니콜라예바와 악수할 때조차 장갑을 낀 채 였던 굴드에게 이것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는 즉시 왼팔과 등에 통증과 왼손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며 스타인웨이사에 3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재판에서 누가 승소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사건이 굴드의 노이로제 증세를 더욱 악화시킨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굴드는 이전부터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등의 핑계댈 만한 것만 있으면, 아니 핑계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휴식하던 중 번스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병의 이름들을 적어놓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특히 콘서트 매니저들에게 효과가 있을 병들을 앞으로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의 나이 26세때의 일이다. 결국 이런 글렌 굴드의 꾀병과 노이로제 증세는 정작 그의 몸에 중한 병이 찾아왔을 때 의사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부메랑이 되어 변변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문득 독일 작가 파트릭 쥐스킨트가 떠올랐다.
이 인간의 사진 한 장 보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라면 J.D. 샐린저도 만만치 않은데, 쥐스킨트는 사람 만나는 걸 꺼리고, 빛을 싫어하고, 누가 그에게 문학상을 수여할 테니 시상식장에 나와달라고 요청할까 두려워서 문학상도 거부한다. 어디가서 자신의 얘기를 전하는 친구에겐 주저없이 절교를 선언한다. 그는 개도 무서워하고, 비위생적이란 이유에서 악수도 거절한다.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좀머씨는 그래서 쥐스킨트 자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침묵한 채 걸을 뿐, 누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치는... 자기 안에 심연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타인과의 대화를 꺼리게 되는 걸까.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한 얼마 후 글렌 굴드는 자신이 거주하던 토론토의 아파트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불을 모두 켜둔 채 잠을 자던 그는 토론토의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데뷔 레코딩곡>이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굴드는 두 번째 녹음 이듬해인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가 피아노 건반에 코를 박듯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연주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속 결말이 어찌 끝나는지 잘 알고 있다. 소설 속의 좀머씨는 호수를 향해 그냥 걸어 들어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나는 그가 과연 자살을 위해 호수로 걸어 들어갔는지 그냥 걸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오늘날 클래식 연주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타성을 발휘하길 원하는 청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그렇게 말하고 있는 본인을 포함해서) 사실 고전 음악의 최전성기 때조차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받은 대접이 그렇게 훌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몸을 누일 만한 그럴 듯한 관짝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고, 오페라 작곡가들은 온갖 연애담과 구설수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로 대접받았던 시기는 고전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연주자들은 더 이상 예술가라기보다는 메이저 음반사에 묶인 상품이 되어가고 있다. 대중들은 마음의 심연을 두드리는 음악보다는 듣기 좋게 짜깁기된 콤필레이션 음반들을 더 선호하고, 불황으로 활로를 찾을 수 없는 음반사들은 음악성보다는 뛰어난 외모를 갖춘 연주자들을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려 든다. 글렌 굴드가 이와 같은 이유들로 청중들을 싫어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 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더 잔인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서로 사랑하다가 이별한 경험이 있는 연인이라면 더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내가 당신을 아는 만큼 나는 당신에게 더 잔인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당신이 사랑해달라고 애걸했던 그곳, 당신의 가장 취약한 곳에 비수를 박아넣을 수도 있으니까. 글렌 굴드는 미치도록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외로왔고, 무대에서, 콘서트 장에서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내 자신이 강박적인 인간이란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마다 나의 상처들이 벌어져 오래된 고름들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 글렌 굴드는 나에게 좋은 위로가 된다. 사랑이란 모든 걸 다 아는 존재로서의 대상을 상정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거기 오랫동안 있어주는, 그것이 무엇일지는 나도 모르는 존재를 상정할 뿐이다.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음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따금 음악이 일체를 엄습해 깡그리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음향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없을 수도 있지만, 음향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때론 아주 미미한 것, 거의 무효화된, 아니면 부서진 무엇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마치 내면에 외부가 존재하는 양. 음악은 신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보존하면서 채운다. 그것은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도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中에서,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지난 88년 프랑스에서 출간돼 유명한 페미나 바카레스코상까지 수상한 전기문학이지만 매우 특별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미셸 슈나이더는 굴드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담아 그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기인 글렌 굴드를 조금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만약 추억하거나 회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이 혹시 나라면 이처럼 해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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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당신의 수호유령이 말을 걸어올 때...
수호 유령이 내게로 왔어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글,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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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굴러다니는 책 중에 헌책방에서 구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책 "그해 봄은 빨리 왔다"란 책이 있다. 원제는 "날아라 풍뎅이" 1988년에 출간된 동서문화사의 "에이스88" 아동문학전집 중 44번째 책이다. 그리고 엊그제 집에 굴러다니는 뇌스틀링거의 책 한 권을 새로 읽었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원제는 "Rosa Riedl Schutzgespenst"로 "수호유령 로자 리들" 정도가 되겠다) 였다. "이거 무슨 책이야?" 하고 책을 집어드니 집사람이 "누가 좋아하는 누구 책이야"하며 놀린다. 흐흐... 웃어주고 낼름 책을 들고 나와 버렸다.

책을 읽는 동안 너댓 번 정도는 소리내서 웃고, 대여섯 번 정도는 미소 지었다. 나중에 아내의 설명으로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뇌스틀링거는 굉장히 유명한, 거장 대접을 받는 동화 작가였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36년 10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다. 193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대입시키기는 곤란하겠지만, 우리 식으로 바꿔보면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세대의 경험과 흡사한 삶의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1945년 뇌스트링거의 나이는 대략 10세 가량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7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200여 종의 책을 써냈고, 1984년엔 아동문학 분야의 노벨문학상이라 한다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과 명성을 쌓았다. 국내에도 20종 가량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중에 단지 두 권을 읽었을 뿐이다. 시계공 아버지와 빈의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가 국내 모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살펴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소재 삼아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유년기 영향이라면 나치와 2차 세계 대전을 겪었다는 사실뿐이고, 그것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갖게 됐다."라고 말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실제 체험을 결부시키려는 외부의 시선에 대해 저항하는 몸짓을 보이는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뇌스틀링거의 경우엔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란 유년기의 역사적 체험이 작가의 시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근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한 모든 독일인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좌파가 된 것이 아니듯 뇌스틀링거를 좌파적 이념을 지닌 작가로 몰고가려는 시도는 위험한 규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뇌스틀링거는 "자유와 연대(혹은 평등)"라는 서로 상충될 수도 있는 두 가치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의 인터뷰에서 젊은 부모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고 그녀는 "나는 기본적으로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어른들의 꾸중과 칭찬을 통해 아이들은 깨닫지 않는다. 경험과 고통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자란다."고 말한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지난 1998년 출간되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뇌스틀링거의 최근작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로자 리들", 검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몇 개 섞여있고, 코에는 둥근 니켈 안경이 얹혀져 있고, 뺨이 늘어진, 이제는 날지도 못하는 뚱뚱보 아줌마 유령이다. 그녀가 유령이 된 것은 1938년 나치에 의해 부당한 처벌을 당하는 유대인을 도와주러 달려가다가 전차에 치인 사건 때문이다. 이 책의 독자층이 주로 초등 5-6학년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1938년 무렵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이 해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탄압, 이른바 "제국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 11. 9)"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이 이전에도 나치에 의한 유대인 탄압은 있어 왔지만, 본격적이고 대규모 탄압은 이 해를 기점으로 종전되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아줌마 유령 "로자 리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는 건 이 작품의 재미를 반감하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런 선입견을 염려한 탓인지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머리에 '이 이야기를 1944년부터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은 까닭' 이란 소제목의 글을 배치해두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가까운 과거인 1978년부터 시작한다. 1938년 전차에 치어 죽은 로자 리들은 1978년 열한살짜리 어린 소녀 나스티에게 나타나 말을 건다. 나스티는 공부는 잘하지만  겁도 많고, 외동 아이로 자라 소심한 데다가 아주 이기적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개인주의적이긴 한 소녀다. 한 마디로 말해 친구들보다 몇몇 과목에서 좀더 성적이 좋다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란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나스티가 티나에겐 있는데 자신에겐 없는 존재를 부러워한단 사실 한 가지만 빼놓고...

티나에겐 있지만 나스티에겐 없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건 어느날 체육 시간 티나의 목에 걸려 있는 작은 펜던트였다. "작은 금빛 원판인데 한쪽 면은 에나멜"로 된 펜던트에는 볼이 포동포동하고, 날개가 달린 어린 아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티나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수호천사"라고 말한다. 나스티는 짐짓 관심없는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에게도 수호천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그런 나스티에게 어느날 갑자기 유령 로자 리들이 나타난다. 볼이 포동포동한 천사는 커녕 뺨이 축 늘어진 데다 날개도 없고, 게다가 날지도 못하는 유령의 출현은, 마치 나비를 꿈꾼 소녀에게 갑자기 나방이 날아든 격이었다. 하지만 로자 리들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스티를 사로잡았다. 나스티에겐 수호유령이 생겼고, 로자 리들에겐 좋은 말벗이 생겼다. 두 사람, 아니 한 명의 유령과 한 명의 소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유령 친구가 생긴 나스티에게 많은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는 "다른 아이들과 잘 놀지도 않을 뿐더러 친했던 여자 친구와 사이가 나빠지고, 파티에 가지 않고, 대신 홀로 외로이 오후를 다락방에서 선인장과함께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물론 나스티가 혼자인 건 아니었다. 로자 리들과 함께 하지만 엄마 안네마리의 눈엔 유령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엄마는 나스티를 다그치지만 나스티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고, 엄마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 생길 충격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 엄마는 우연히 나스티와 유령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때부터 나스티와 로자의 관계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나스티의 엄마, 아빠를 포함한 나스티 가족과 로자, 그리고 관계가 점차점차 확대되어 가는 내용을 다룬다.

아빠인 좀머 씨가 유령 로자와 관계 맺는 과정을 살펴보자. 로자 리들의 존재를 알게 된 아빠는 깜짝놀라 말한다.

"다만, 제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걸 아시는지!"
로자 리들이 외쳤다.
"난 누구의 세계관도 뒤집은 일은 없어! 그렇고 말고! 유령이 있는 걸 알아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지! 그래, 자네가 나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비열한 것, 선한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자네가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가능해졌다고, 다음 번 선거 때 다른 정당을 뽑을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네는 분명 올바른 선택을 할 걸세!"
<본문 145쪽>

다행히도 아빠 좀머 씨는 로자 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엄마 안네마리 역시 나스티와 로자를 이해하며 한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이렇듯 로자 리들은 처음엔 나스티만의 수호유령이었으나 점차 나스티 가족의 친구로 옮겨간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나스티는 영어 선생님이 예고도 없이 한 친구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우리하고는 교육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나로서는 잘 체감할 수 없지만). 나스티로서는 영어에 자신없어 하는 게롤트에게 미리 준비도 없이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일이 부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어 선생에게 항의하다 교실 밖으로 뛰쳐나온 나스티는 역사 선생을 만나 아이들이 동조해주지 않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사람은 자기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해요!"
나스티가 훌쩍이며 말했다. 역사 선생이 말했다.
"얘야, 내가 보니 너는 투쟁하는 게 아니라, 울고 있다!"
 .....< 중략 >.....
"반 아이들 모두에게 반장을 잘못 뽑았다고 납득시키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리는 걸요! 걔들은 영어 선생님이 얼마나 비열한지도 모르고 있어요!"
"투쟁이란 대부분 지루하고 힘든 일이란다, 얘야!"
역사 선생이 말했다.
"그렇지만 반 아이들 대부분은 다른 아이가 어떻든 전혀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고요!"
<본문 165쪽>

영어 선생은 평소 공부를 잘하는 나스티를 귀여워했는데, 나스티가 영어 선생에게 대든 것은 분명 자기만 생각한 행동은 아니었다. 역사 선생의 말대로 반장을 교체하려는 나스티의 시도는 나스티네 반 아이들을 반장 토미 패거리와 나스티 패거리로 양분시켜 버렸고, 싸움까지 벌어졌다. 나스티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 달려가 말한다. 로자는 뭔가를 이루려면 단결해야 한다며 나스티를 설득하지만, 나스티는 토미 패거리를 멍청하고, 비열한 바보 천치들이라고 비난한다.

"나스티, 설마 너도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멍청하고 바보 천치고 비열하다고 믿지는 않겠지! 너와 몇몇 아이들만 얌전하고 친절할까! 네가 티나랑 하는 말을 들었다. 토미는 돼지야! 가브리엘레는 사팔뜨기야! 후버트는 아버지가 부자니까 밥맛이야! 요하나는 정신병자야! 잉게는 다리가 X자야! 너희들 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런 게 대체 예고 시험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 중략 >....
"로자, 어쩔 수 없이 서로 욕을 하게 돼요!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야 할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깡그리 잊어먹게 된단다."
<본문 188-189쪽>

수호유령 로자 리들은 비록 날지도 못하고, 열쇠 구멍 같이 작은 구멍으로 몸을 빼내는 재주는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아니 무엇보다 오래 산 사람의 지혜와 균형잡힌 시선을 지닌 양심적인 유령이었다. 그런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평발이라 오래 걸어다니지 못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지하실에 묻혀 있었던 경험으로 생긴 폐쇄공포증이었다.

이제 나스티와 가족으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로자 리들이 불의의(로자 리들이 파출리향이  나는 궤짝에 갇혀 궤짝째 필츠마이어 씨 집으로 팔려가는) 사고로 행방불명 되어버리는 사건이 생긴다. 나스티와 티나, 온가족의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로자 리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과연 나스티의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겐 어떤 일이 생긴 걸까?(아쉽지만 그건 책으로 읽으시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이렇듯 재미와 교훈이 절묘하게 배합된 작품이다. 착하지만 외동딸로 자라 개인적인 나스티, 남을 배려해줄 줄 알지만 엘리트적인 면도 있는 나스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다. 자식이 7남매, 8남매 되는 대가족은 이제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이 되었다. 과거의 아이들은 넘쳐나는 가족, 형제들 틈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공동체의 미덕과 사회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가족이란 그저 사회 교과서에서 배우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단위 이상의 의미가 있는 중요한 학교였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에게 가족은 늘 부모라는 어른이고, 그나마 동년배 가족은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가족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건 1978년을 경험하며 어른이 된(그 이후에 태어난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우리의 80년대라 할 수 있는 유럽의 68혁명과 동구 현실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한다. 그런 까닭일까. "70년대만 해도 나는 문학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학은 독자들을 웃고 울릴 뿐, 세상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높여 주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 경험했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작가가 문학을 통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로부터 벗어나버린 현시대의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되풀이되는 질문이지만, 문학은 단지 그것을 읽고, 표현함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아마도 작가는 수호유령 로자 리들을 만나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시대보다는 덜 편협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도록 일깨워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불과 200여쪽이 조금 넘는 이야기임에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로자 리들이 나스티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게 단지 그것뿐은 아닐 거다. 훌륭한 작품들의 미덕은 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 마련인데,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이 책을 읽고 혹시 내게도 수호유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가슴 속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기 바란다. 거기 당신의 수호유령이 말을 걸기 시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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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발~* > 보름달의 전설

 
미하엘 엔데의 글과 비네테 슈뢰더의 그림? 정말 환상적인 만남이겠군. 이 책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이야기>와 <모모>에서 펼쳐주는 엔데의 기막힌 상상의 세계와 <개구리 왕자>에서 보여주는 슈뢰더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그림 해석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아직 세상에 천사와 악마가 있다고 믿던 때, 애인의 배신과 아버지의 파산으로 세상에 회의를 품게 된 젊은이가 세상을 등진 채 성스런 책들을 공부하며 진리를 찾는 데 열중한다. 하지만 이 모든 말이 지푸라기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읽게 되자,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어느 외딴 골짜기에 들어가 영원을 구하는데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성자가 있는 골짜기에 한 사나운 사내가 들어오게 된다. 똑같이 세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으나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사뭇 달랐다. 그 사내는 도둑이었다. 성자는 도둑을 제자로 삼는다.


여기서 전설이라 옮긴 ‘Legend’는 본디 성자들의 전설을 말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으며 영원을 구하는, 성스런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엔데의 이야기는 그런 일반적인 성자 전설과는 다르다. 오랫동안 진리와 영원을 추구하던 성자는 악마에게 현혹당하고, 진리를 알기는커녕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없어 성자를 안타깝게 하던 살인자 도둑이 그를 구한다. 성자가 온 평생을 바쳐 구했던 진리는 무엇이고, 그의 정신이 향하던 성스런 세계는 또 무엇인가? 진정한 진리는 어디 있으며, 진정한 깨달음은 어디 있는가? 결코 쉽지 않은 질문을 이 짧은 이야기는 던지고 있다.


담고 있는 질문만큼이나 책 크기도 크다. 첫 장을 넘기면 두 사람이 바다 건너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달은 하나가 아니다. 희미하게 빛나는 또 하나의 달은 착각인가, 현실인가? 그리고 또 한 장을 넘기면 젊은이가 도망치는 연인의 뒷모습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분노와 서글픔을 녹여내는 듯 붉은 색조를 띈다. 그러나 그가 서재를 떠나는 장면은 그의 깨달음을 알리듯 푸르른 달빛이 어두운 방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은자가 도달한 마음의 평화는 한껏 부드러운 녹색으로 알려지지만, 도둑이 여자를 희롱하는 장면은 붉은 빛이 강렬하다. 도둑과 은자의 만남은 양면 가득 신비로운 은빛으로 표현되고, 악마는 초록과 빨강의 강렬한 대비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며, 동굴 주위의 불길한 기운은 독수리에 잡힌 토끼의 모습으로 클로즈업된다. 대천사가 나타나는 장면은 몽환적인 푸른색이 화면을 메우고, 그의 본모습인 오소리는 피처럼 붉은 빛을 피워 올린다. 세부 묘사는 사실적이나 색과 분위기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 그림책이라면, 이 책은 그림책이다. 그러나 그림책이 아이들이나 읽는 책으로 생각한다면, 이 책은 그림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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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퍼온글] 기생충의 변명
기생충의 변명 대학병원 건강교실 6
서민 지음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기생충의 변명

‘닳지 않는 칫솔’, ‘대통령과 기생충’에 이어 3번째로 읽는 서민님의 책이었다. 이제 ‘소설 마태우스’만 읽으면 서민 명작 Ⅳ시리즈는 다 읽는 것이다.


펴낸 곳이 단국대학교출판부다. 출판사만 보고 이 책의 선택을 망설이지는 않길 바란다. 나 또한 출판사를 좀 따지고 책을 고르는 편인데, 이 책은 평범한 대학출판물이 아니었다. 병원로비에 비취되어 있는, 대학병원이 서비스차원에서 내놓는 심심한 대학출판물이 아니었다. 만약 당신이 단국대부속병원 로비에서 이 책을 발견한다면 당신의 경미한 통증따위는 잊게 될 것이다.


난 이 책을 살 때부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평에서 별 5개가 꽉 채워진 책은 아주 귀하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기대를 넘어 만족이며, 만족을 넘어 작가에 대한 이해다.


‘대통령과 기생충’을 읽다보면, 기생충은 인류와의 평화공존을 원하며, 기생충학자는 기생충으로 세계인류 평화에 공헌하려는 사람임을 강조한다. 처음 그 글귀를 읽었을 때, 원래 재미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기생충의 변명’을 읽으면서 작가가 진짜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책에서는 험난한 기생충 연구여정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연구의 어려움이 보통이 아니었다.


동양안충 이야기를 비롯, 지역사회 사례조사, 서민법칙에 대한 내용은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다. 안타깝게 보이는 그의 행보가 있기에 오늘날 우리는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감사해야 할 일이다.

책에는 주제에 맞게 기생충이야기가 서술되어있고, 그에 대한 흑백 참고사진이 첨부되어있다. 누가 기생충의 몸체를 보길 원하며, 기생충의 징그러운 이미지를 각인 시키길 원하겠는가 마는 저자는  묵묵히 참고사진을 챙겨놓는다. 나는 여기서 저자가 보여주는 학문에 대한 자부심과 연구에 대한 경외감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이 분야의 사람이다. 원한다면, 컬러판 사진을 첨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흑백사진을 첨부했다. 이는 비위약한 독자를 세심히 배려하기 위해서 택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기생충 충격영상을 처음 대면하여, 기생충의 재미난 이야기도 듣기도 전에 책을 덥을, 안타까운 독자도 넓게 수용할 듯하다. 책값을 맞추기위해 출판사가 단순히 흑백 일괄처리했다면, 더이상 할말은 없다. 그래도 이해를 돕기위해 사진을 찾아보던 저자의 부지런 함이 누락되는 것은 아니니까.

70년대도 아닌데 생각보다 기생충학자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서민님의 책을 접한 동료나 선후배는 실적이 없다며 그를 타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를 해줘야 한다. 나같이 기생충학에 대한 편견을 버릴 이가 생기는 것을 안다면, 공로상이라도 줘야한다.

이젠 기생충이 낯설지 않다. 그의 책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어 학습된 것도 있으며, 어느 순간 기생충에 관심이 생겨, 교양 생물서적에서 기생충이야기를 먼저 골라 읽는 버릇이 생긴 까닭이다.


책을 읽으면서 서민님이 기생충학자가 아니라, 전문의로 간다면 어떤 과가 어울릴지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설득력 있게 연결해 본 과>

흉부외과: 가장 중요한 메이저 과이나 그만큼 수술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그럼 마음 여린 서민님은 어쩌라고.

신경외과: 신경외과의 특성상 빠른 진단과 처치가 필요한데, 행동이 조신하고 여유 있으신 서민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성형외과: 여자라면, 모두 미인이라고 부른다. 대상자가 요구하는 기준과 주치의가 주장하는 미적 견해차로 의료사고 낼 듯.

정형외과: 정형외과는 다른 과와는 달리 서열이 굉장히 세다. 그럼 누구에게나 골고루 나눠주시던 서민 유머를 수술 방에 불려온 실습생이나 인턴들만 누릴 수 있을 듯.

산부인과: 여성들에게 상냥하고, 아이들을 좋아할 듯하여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이긴 하나,  고된 과가 산부인과이다. 그래서 제외.

외과: (이제 일반외과라는 말은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이 외과라고 한다.) 칼 솜씨로 모든 것이 갈라지는 외과. 그러나 서민님의 칼 솜씨는 별로일 듯

소아과: 신생아와는 잘 어울릴 듯한데, 학령전후 아이들은 서민님과 어울리기를 거부할 듯  그럼 서민님이 상처받는다.

(심장 신장 내분비...)내과 : 만성 장기환자가 많은 과다. 그래서 유머에 능하고, 마음 따뜻한 전문의가 필요하다. 여기에 서민님이 필요하다.

가정의학과: 1차 진료를 하는 곳으로 서민님과 잘 어울린다. 만약 개업을 한다면 서민님의 의술과 인술에 감동할 환자가 많을 것 같다.

 

그래도 서민님은 기생충학과가 가장 어울린다. 그가 아니면, 이렇게 기생충들의 변명을 도와줄 이가 없다.


기생충학회지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임상 병리과에 속한 기생충학과, 자신이 속한 기생충학 교실이 다르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았다. 그가 그의 교실에서 좋은 논문과 재미난 기생충이야기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날 그 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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