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숨은아이 > 인간에 대한 존중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안을 돌보는 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남편이 어느 날 가출한다. 소식 한 통 없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는데, 8년 만에 남편이란 사람이 돌아왔다. 외모가 좀 달라진 듯하지만, 그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알아보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다 기억한다. 사람들은 돌아온 탕아를 환영하고, 4년간 이 사람은 농사일과 장사 등에 충실하여 가부장 노릇을 잘 해낸다. 그리고 전에는 그리 금실이 좋지 않았던 각시와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집안의 재산 문제로 작은아버지와 갈등이 생기고, 마침내 작은아버지는 각시를 내세워, 조카가 가짜라는 걸 밝혀 달라고 법정에 호소한다. 각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작은아버지와, 이제는 작은아버지의 처가 된 친정어머니의 등쌀에 마지못해 소송 당사자가 된다. 피고인이 된 남자는 설득력 있게 자신이 진짜 마르탱 게르라고 주장하고, 판사들도 그렇게 믿게 되었는데, 그만 진짜 마르탱 게르가 돌아온다. 가짜 마르탱 게르, 곧 아르노 뒤 틸은 유산을 가로채고 간음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각시인 베르트랑드는 정말로 속았던 것으로 인정되어 간음죄를 받지 않는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를, 오래 전에 TV 영화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던 것도 같다. 이 영화의 고증 작업에 참여했던 역사학자가 영화적인 거품을 빼내고, 사료에 근거하여 당시의 프랑스 남부 농촌 사회, 사건 당사자들이 보았을 세계를 되살리려 했다. 그 노력과 연구의 결과가 이 책이다. 읽으면서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가 생각났다. 옛 사람들이 남긴 조각 기록을 가지고 당시를 되살려 보려 했다는 점에서. “조선 사람들...”이 혜원의 그림을 가지고 그 그림이 보여 주는 시대상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설명한 책이라면, 이 책은 마르탱 게르 사건의 판사 장 드 코라스가 쓴 회고록과 그 밖에 이 이야기를 다룬 온갖 문헌, 그리고 그 시대 농촌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상업적인 계약서, 그 시대 그 지방 주민들의 유언장 등등을 바탕으로 이 사건의 실제 진행 과정을 재구축한다.

돌아온 남편. 그가 진짜 마르탱 게르인지 아닌지 어떻게 밝혀낼까? 지은이는 묻는다. “사진도 없고 초상화도 드물고, 테이프 리코더도, 지문 날인도, 신분증도, 출생증명서도 없고 그나마 교구 기록이 있다 해도 여전히 일정치 않았던 시대에 어떻게 개인의 정체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히 밝힐 수 있겠는가?”(94쪽) 그렇구나. 만약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도 없고, 지문 기록도 없고, 사진이나 녹음기도 없다면 내가 나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가족과 친지가 보증해 주지 않으면 밝힐 도리가 없다.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었다.

이 책의 지은이는 아내 베르트랑드가 속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베르트랑드는 마르탱이라 주장하는 이 남자가 진짜 자기 남편이 아님을 곧 알아차렸지만,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스스로 이 남자와 함께하는 생활을 선택했으리라고 한다. 그리고 돌아온 진짜 마르탱 게르도 베르트랑드에게 “눈물을 치워라. 나의 누이들과 삼촌을 내세워 자신을 변명하지 말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 이상으로 아들, 조카, 형제를 잘 아는 아버지, 어머니, 삼촌, 누이, 형제는 없다. 우리 집에 내린 재앙에 대해서는 너 이외에 탓할 사람이 없다.”(124쪽)고 했다 한다.

글쎄, 그럴까? 물론 오래 같이 생활해온 부부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베르트랑드는 너무 어린 나이(열 살 무렵)에 혼인해서 8년 동안이나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지 못했고, 겨우 2년 정도 성생활을 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다가, 다시 8년 동안 얼굴 한 번 못 보고 살았다. 게다가 이들이 헤어진 건 20대 초반, 다시 나타난 남자는 30대 초반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20대 초반과 30대 초반 사이에 표정부터 몸집까지 얼마든지 달라진다. 게다가 그동안 남자는 군대에 가서 전쟁을 치렀다. 군대와 전쟁은 사람의 성품뿐 아니라 외모도 바꿀 수 있다. 속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베르트랑드보다, 이 사건을 가장 직접적으로 기록한, 마르탱 게르 재판을 직접 담당한 판사 장 드 코라스가 흥미로웠다. 지은이는 이 책의 10장에서, 재판이 마무리되자마자 이 사건을 자세히 기록해 출판한 코라스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다. 코라스의 시각으로 쓴 그 책 “톨루즈 법원에서의 잊을 수 없는 판결(Arrest Memorable du parlement de Tolose)”이 이 사건을 밝혀 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에, 이 자료를 쓴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코라스는 가짜 마르탱에게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구교 갈등이 임박하던 시점, 코라스는 신교에 상당히 기운 사람이었다. 전통 가치에 충실한 보수적 특권층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고, 그 이권을 수호하는 데 충실한 신흥 부르주아에 가깝다. 그리고 코라스는 아내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러니까 뭔가 열정을 가지고 혁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마르탱에게 동질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코라스는 자기 출세의 발판이 될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코라스는, 가짜 마르탱이 유산을 가로채려 한 건 “여자가 자신의 사생아를 남편의 아이라고 속여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과 비견될 만한 범죄”(127쪽)로 더욱이 간음까지 했기 때문에 사형이 타당하다고 한다. 가부장권을 침해하는 것이 사형에 처해질 범죄라니, 혁신을 바라면서도 보수적인 기득권에 편승하려 한 이 사람의 모순, 이 사람 내면의 갈등.

이 사건에 대해 몽테뉴가 썼다는 글이 매우 인상 깊다.

젊었을 때 나는 두 남자가 서로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건과 관련된 소송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 소송은 툴루즈의 판사 코라스에 의해 출간되었다. 판사가 자신이 유죄를 선고한 피고의 사기 행위가 매우 놀랍고도 기이하며 우리나 판사 자신의 지식을 크게 초월하는 것임을 입증하여 나로서는 교수형을 선고한 그 판결이 매우 대담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그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명할 수도,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소송에 말려들었을 때 소송 당사자들에게 100년 후에 다시 와 재판을 받으라고 명령한 아레오파고스 회의[고대 아테네의 귀족정 시기의 핵심 기관]의 재판관들보다 더 자유롭고 솔직하게 다음과 같은 형태의 판결문을 용인하도록 하자. “법정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65~166쪽

법정은 진짜 마르탱 게르가 돌아오기 전까지 아르노 뒤 틸을 진짜 마르탱 게르로 믿고, 그를 고발한 작은아버지 피에르 게르를 무고죄로 심판하려 했다. 법정은 그만큼 진실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가 전지전능하다고, 우리 판단에는 오류 가능성이 없다고 착각하지 말자. 우리 능력 밖의 일에 대해 함부로 심판하지 말자.

흠 하나. 이 책에서는 법정에 선 가짜 마르탱을 “피고”라고 했는데, 가짜 마르탱은 형사재판을 받았으므로 “피고인”이라고 해야 맞다. 원고, 피고는 민사소송에서 쓰는 용어다. (법률용어를 누구나 알기 쉽게 만들었다면 이렇게 헷갈릴 일도 없겠구만.)

그리고 사소한 불평불만 하나. 41쪽에 “르 르와 라뒤리”라는 프랑스 역사학자 이름이 나오는데, 난 처음에 “르 르”라는 사람과 “라뒤리”라는 사람 둘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엠파스 검색 결과 그 사람 원래 이름이 Emmanuel Le Roy Ladurie다.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르 루아 라뒤리”라고 썼으면 그런 착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ㅠ.ㅜ 내가 무식한 탓인 걸 어쩌랴.

1998년 발표되고 한국어판은 2000년에 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놀자 > 놀자는 독서중_속눈썹위에 올라 앉은 행복

 알라딘 분류가 1~2학년 외국동화로 되어있구나..;

 

 이 그림 동화책은 아주 소소한 일상..작은거 하나에도

 우리들 삶속에 늘 행복함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는 늘 행복 속에 살 고 있다는

중요함 깨우침을 주는 책이다.

괜찮은 동화책인데...유명하지 않나 보네...

난 좋았는데...

우울할때마다 한장 씩 보면서 아? 맞아 이때 정말 행복했었지.? 기억을 떠올려 보다보면

어느세 기분이 업! 업! 업!

 

프랑스에서 발간되었을때

엄마와 아이가 함께 읽는 책

바쁘게 살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권한 만한 책으로 꼽혀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하는데

맞는 말 같다........^^

 

우리는 늘 행복 속에 산다는 것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드무비 > 사랑은 획득이 아니라 경작
신영복의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3년 12월
구판절판


길을 걷다가 골목이 꺾이는 길모퉁이 같은 데서 재빨리
뒤를 돌아보라. 거기 당신의 등뒤에 당신을 지켜주는
손이 있다. 어머니의 손 같은, 친구의 손 같은......

(클릭하면 큰 그림이 나옴)

아버님, 보내주신 下書와 毛布 잘 받았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가슴 좋은 사람만 못하고,
가슴 좋은 사람이 손 좋은 사람만 못하고,
손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하다.
立場의 동일함, 그것은 人間關係의 최고형태이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이 여름보다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다리보다 너의 돼지등이 더 좋다.

'사랑이란 生活의 결과로서 耕作되는 것이지
결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선한 것은 무릇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 딱 한 권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이 책을 고를 것이다.
1988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용기백배하여
한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고 오랜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취직이 되어 상경했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라 믿고
아무 노력도 안하고 살다가 이 책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제법 노력이란 것도 하게 되었다.
그가 오래 전 감옥 속에서 써내려간 친필 편지들은
언제 읽어도 뭉근한 감동을 준다.

(사진은 책의 앞표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람구두 > 박영희 - 아내의 브래지어

아내의 브래지어


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팽이는 서고 싶다 - 창비시선 209 
박영희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01년 7월

 

 

 

 

 

----------------------------------------------------------

종종 시인들의 엄살 - 한 알의 밀알에서 우주를 보는 - 에 군밤을 먹이고 싶어진다.
기껏 아내의 브래지어 하나 빨면서 호들갑스럽긴...
여기 아내의 브래지어는 물론 빤쓰도 빨아주는 남편도 있건만.

시적 형상화란 점에서 "아내의 브래지어"에 토를 달 부분은 없지만,
어쩐지 공연한 아내 사랑에 토를 달고 싶어진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참, 아전인수도....
아내의 젖가슴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어쩜 숫컷들의 위대한 자위가 아닐까.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앞서는 한 남자만이더니 이제는 그 대상을 명확히 나 하나만으로 국한시킨다.
갑자기 어제 아내가 욕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우연히 손에 잡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최인호의 소설 "몽유도원도"가 떠오른다.
최인호의 소설 "몽유도원도""도미설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글이야 최인호니까. 그렇다치고, 삽화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내용이나 시대배경은 모두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대로이고,
문장과 몇몇 사건들만 최인호가 손을 보았다.

혹시 도미설화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성서에 나오는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와 흡사하다.
다만 밧세바가 다윗의 유혹에 넘어가 통정하여 솔로몬을 낳았다면
도미의 아내 아랑은 끝끝내 개로왕의 유혹을 거부하고
개로왕의 분노를 사 눈알을 뽑힌 남편 도미와 더불어 세상을 떠돌며 산다.
개로왕을 본의아니게 유혹시킨 자신의 얼굴과 몸에 깊고 깊은 상처를 새겨
더이상 그녀의 외모에 미혹되는 남성이 없도록 한 채...

도미는 자신의 아내 아랑이 자신을 위해 정조를 지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것을 드러내놓고 개로왕 앞에서 확신해보였다.
물론 아랑은 정조를 지켰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도미의 확신과 어쩐지 시인의 확신이 내게는 흡사하게 느껴진다.

아내의 유방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아내의 브래지어를 빨면서 홀로 흐뭇해했을 ....
브래지어 호크를 푸는 일이 나의 기쁨을 위한 일이었고,
그 호크를 다시 닫아 거는 일도 나를 위한 일이었다면
아내의 브래지어를 빠는 일도 나를 위한 일이지 않았겠나.

아내가 남편의 팬티를 빨면서
남편의 성기에 대해 저런 상상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나의 공연한 생각이 괜스레 멀쩡한 시 한 편이 시비를 걸게 만든다.

냉동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잠깐 돌린다고
그 깊은 속까지 해동되는 건 아니다.
그 깊은 속까지 데워지기 위해선 좀더 오랜 시간 돌려야 한다.
굳이 마음의 향기까지 전하고 싶다면... 엄살도 엄살스럽게 할 일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람구두 > 파워엘리트 : 구닥다리 낡은 이야기라고....?
파워 엘리트 오늘의 사상신서 10
C. W. 밀즈 지음 / 한길사 / 1991년 4월
평점 :
품절


먼저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자.

18세기에 들어와서 역사의 무대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근대사회를 사회구조의 정점에서 권력의 분화라는 뚜렷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즉, 문관이 권위를 독점, 군사적 강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반면에 군인의 세력은 제한되었으며 정치적인 중립화를 유지해야 했고 따라서 그 세력이 점차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공업화를 이룬 여러 국가에서는 문관 우위라는, 일견 위대하기는 하지만 불확실한 사실이 점차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로부터 1차 대전까지의 오랜 평화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세계 역사는 바야흐로 군부 중심시대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장군들이 다시금 종전처럼 활약하게 되었다. 전 세계의 현실적인 성격은 군부의 지도자들이 제출한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정치적인 진공 속으로 장성들이 진군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회사 중역이나 정치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장성들이 -- 미국의 엘리트 세계에서 가장 우대받지 못하였던 이들 장성들이 진출, 지극히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대한 권력을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243쪽>

위의 문장을 살펴보았을 때, 이 내용이 과연 현재의 미국 혹은 세계와 무관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의 13장에 논의된 "대중사회" 부분을 읽어보기 위해 오랜만에 손 때 묻은 이 책을 꺼내서 읽다가 심심한데(물론 절대로 심심할 겨를이 없지만)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이 써 논 글이나 읽어보자는 심산에서 클릭해봤더니 절판이란다. 이런 걸 문화적 아노미라고 해야 하나? 문화지체(cultural lag)라고 해야 하나? 사회과학 분야의 관심이 예전 같지 못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한 시대를 풍미했던 C.W. 밀스의 책이 절판되었을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세상이 이토록 빠르게 변화하는 걸 애통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책의 가치 효용이 다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사실 이 책 "파워엘리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상당수는 이제 그 효용이 다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작동하는 지배구조의 엘리트들이 누구라는 걸 오늘날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이 처음 나온 1950년대 중반 "파워 엘리트"가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C.W.밀스는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 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을 상류사회, 지방사회, 대도시 상류사회의 400대 가문과 유명인사들, 대부호, 기업의 최고 간부, 기업체 부호, 군부 지도자 등등의 범주로 나누어 이들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그 가운데 미국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균형이론(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분점하도록 하여 균형을 맞춘다는 이론)과 파워엘리트, 대중사회의 틀로써 설명한다. 책의 말미에는 미국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1950년대 미국은 이미 보수적 분위기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다)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럿셀 커크를 인용해 미국의 보수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리고 있다.

"1) 신의 의도가 사회를 지배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위대한 힘을 자기의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보수주의자는 전통적 생활의 다양성과 신비성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사회는 지도자를 찾고 있다"고 믿는다. 마치 유대 민족이 선지자를 통해 하느님이 예시해준 왕을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보수주의자(미국의)들은 사람들 사이에 자연적 우열이 있으며 거기에서 계급과 권력의 자연적 질서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이는 현재 미국이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내재된 보수주의의 도덕률이다). 미국의 전통은 신성한 것이며, 전통을 통해서 신의 섭리의 참된 시화적 방향이 명시된다고 보았다. C.W.밀스의 "파워엘리트"가 왜 대단한 책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이다. 미국 사회는 신의 섭리에 따른 전통에 의해 승인된(기름부음을 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통치되는 균형잡힌 사회인 셈이고, 밀즈는 바로 미국의 그런 보수주의를 비판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끝낸 미국은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으나 내외부적으로는 두 가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외부적인 위협이란 것은 일찌기 패튼이 주장한 바대로 소련의 위협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미국 사회가 이전과 다르게 크게 변모했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이 유럽에 미국식 문화를 광범위하게 퍼뜨린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전쟁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커다란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우선, 전쟁전에 비해 기업의 구조가 대규모화되었다. 이전의 중소기업들은 전쟁 기간 동안 소멸되거나 거대 기업에 합병되었고, 소규모(물론 우리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농장들 역시 거대 기업 속에 포함되어 갔다.

전쟁은 참전한 남성 병사들을 대신해 노동 현장을 메꿔 준 여성과 청소년의 사회진출을 가속화시켰고, 전쟁 수행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미국 동부와 서부의 도시들이 거대화되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미국의 기존 문화 시스템이 대중사회화(산업화와 도시화)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자신이 대중문화의 총본산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 역시 대중문화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이 되는데, "파워엘리트"의 C.W.밀스 역시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J.S.밀과 A.토크빌의 자유주의적 견해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밀스의 견해는 물론, 대중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C.W. 밀스는 공중(public)과 대중(mass)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다. 공중은 ① 의견을 받는 쪽과 거의 같은 정도로 많은 수의 의견을 보내 주는 쪽이 있고 ② 공중에 대해서 표명된 의견에 효과적으로 반응을 나타낼 기회를 보장하는 공적(公的)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며 ③ 그와 같은 토론을 통해서 형성된 의견이 효과적인 행동으로서 실현되는 통로가 용이하게 발견되며 ④ 제도화(制度化)된 권위가 공중에게 침투되어 있지 않고 공중으로서의 행동에 자율성이 유지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중에 있어서는 ① 다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의견을 받는 쪽에 불과하다. ②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이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며 또는 불가능하게까지 만드는 조직에 놓여 있다. ③ 의견이나 행동으로의 실현은 여러 가지의 저항으로 인해 통제되고 있다. ④ 대중은 제도화된 권위로부터의 자율성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고 있다. 밀스는 어떠한 양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지배적인가에 따라 공중과 대중을 구별하고, 대중사회에서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제도화된 미디어이며, 대중은 주어진 매스미디어의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라 하였다. 그런데 매스미디어는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밀스에 의하면 당시(1950년대) 미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는 도덕, 덕성과 상관없는 것이며 그들의 능력은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결부되어 있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권력 수단이나 부의 원천, 명성의 기구에 의해서 선발되고 형성된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공중(public - 요새 말로 하자면 '참여 민주주의')의 토론을 정책 결정자의 의사와 결부시켜 주고 있는 자발적 결사체의 다원적 존재에 의해서 견제를 받으면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류사상 일찌기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령관이며 미국의 무책임한 제도의 조직 내부에서 성공을 차지한 인물들이다. (낡은 이야기라고 하기엔 지금 읽어봐도 너무나 생생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