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놀자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는 어느날 흰토끼를 만나 이상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여행 중에 중간 중간 나타나는 체셔고양이가 있습니다.
이 체셔고양이는 시간과 공간의 초월자입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모든 수수께끼의 근원입니다.

어느날 앨리스는 이 체셔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앨리스 :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하지?
체셔고양이 : 그건 니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려있지.
앨리스 : 난 어디든 상관없는데...
체셔고양이 : 그렇다면 어디로 가든 상관 없겠지.


현재 당신은 어느 숲에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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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네버랜드에서 네버랜드로 떠난 고양이
100만 번 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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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는 "슬픈 인연"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단, 단 한번의 눈마주침으로/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슬픔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못본체 했고,/ 사랑하면서도 지나쳤으니/ 서로의 가슴의 넓은 호수는/ 더욱 공허합니다// 자신의 초라함을 알면서도/ 사랑은 멈출 줄을 몰랐고,/ 서로가 곁에 없음을 알면서도/ 눈물은 그칠줄을 몰랐습니다/ 이제, 서로가 한 발씩 물러나/ 눈물을 흘릴 줄 압니다/ 이들을 우린/ 슬픈 인연이라 합니다" <전문>

그의 인연은 슬프고, 미묘하며 또한 신비롭다. 그것은 "단, 단 한 번의 눈 마주침"으로 서로의 가슴에 "넓은 호수"를 만들고, 눈물을 그칠 줄 모르게 만든다. 그럼에도 결국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서로가 한 발씩 물러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이 때의 인연이란 사랑이란 인과율에 얽매였으나 서로의 사랑이 맺어지지 못함을 알게 되고, 결국 한 발씩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인연이란 운명이기도 하다. 

인연(因緣)...
불교에서는 일체(一切) 중생(衆生)은 인(因)과 연(緣)에 의하여 생멸(生滅)한다고 보았는데, 인이란 결과에 대한 직접 원인을 말하고, 연이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간접적인 힘(결과)이다. 인이 전생의 업에 의해 이승에서 연결된 하나의 고리라면, 연은 전생의 연결고리에 현재의 나란 존재가 만들어내는(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자유 의지가 관여할 수 있는) 현생의 업(결과)에 해당한다. 불교에서는 인연이 발생하는 것을 "연기(緣起)"라 하는데, 인과 연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므로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얽매여 있으므로 나와 너는 남이 아닌, 둘이 아닌 하나란 사상으로 이어진다. 너와 나는 남이 아니므로 너를 구원하는 것은 곧 나를 구원하는 것이 되고, 내가 남을 돕는 사랑(혹은 구원)을 일컬어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라 부른다.

사랑 '자', 슬플 '비', 물론 저 '자'를 그저 사랑이라고 옮길 수도, '비'자가 그저 슬프다는 뜻만 가진 것은 아니다. 사실 자비의 속뜻은 세상 사람들의 고통스러움을 함께 탄식하며 슬퍼한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윤동주의 시와도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인연의 씨줄날줄이 빚어내는 번뇌로부터 비롯된다. 석가의 사랑인 자비는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에 괴로운 것이고, 우리 같은 무지랭이 중생은 인연으로 비롯된 사랑때문에 그 사랑의 괴로움을 내 것으로 하기에 괴롭다.

여기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 살았던 한 마리 얼룩 고양이가 있다.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을 읽노라면 기독교 문명권을 제외한 다른 문명권에서 상상했던 저승의 지리학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대개의 저승의 지리학엔 소위 "중간계"가 존재한다. 지옥에 보내자니 아직 이승과의 인연 혹은 해탈할 기회가 남아있는 영혼, 천국(극락)에 보내기엔 아직 이승의 업이 쌓인 존재들은 이승에서의 업을 다 씻어내기 위해 혹은 전생의 업보에 대한 벌을 받기 위해 다시 이승으로 보내진다.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백 만 번이나 죽고 다시 살았다는 이야기는 굳이 불교적 윤회전생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신화적 이야기이다.

"사노 요코"의 이야기는 소설의 문체에 비견할 수 있는 그림책의 그림체와 캐릭터에도 등장하지만 드러내놓고 교훈적이지 않다. 백만 번을 죽고 살아난 고양이라면 의당 그럴 것이라고 어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때묻고, 거만한 표정의 얼룩 고양이. 얼룩 고양이가 백 만 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동안 고양이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리란 건 이미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 이 심드렁한 표정의 고양이는 늘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얼룩 고양이의 냉소는 백만 번이나 반복된다. 중요한 건 백만 번이란 횟수가 아니다. 우리는 잠시 잠깐 출근길 만원 지하철 안,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 미술전시장에서 한 꺼번에 수 만 번의 미움을 같은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인연들에게 쏟아내지 않는가. 가령, 이렇게 "이 사람들이 말이야. 집구석에나 처박혀들 있을 것이지. 뭐 처먹을 거 있다고 돌아다니냐."  한 마디 뱉어낼 때 어쩌면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상처받을 지도 모른다.

사노 요코는 반복한다.

"한때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뱃사공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도둑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홀로 사는 할머니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어린 여자 아이의 고양이였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이 장면들을 보노라면 얼룩 고양이의 잘난 척하는 얼굴이 떠오르면서 얼핏 얼룩 고양이의 본성이 원래부터 그런 것이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임금, 뱃사공, 서커스단, 도둑, 홀로 사는 할머니, 어린 여자 아이와 고양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고양이가 이전의 누군가와 관계맺고 있던 형식은 주인과 그 애완동물, 소유와 종속의 관계였을 뿐 진정한 관계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양이는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던 그 횟수만큼 관계맺은 상대를 싫어했다. 이런 관계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분화될 수 있다. 진정한 관계맺기의 형식은 소유나 종속이 아니란 사실과 누군가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선 우선 그 관계가 대등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란 누군가의 꿈에 상대방이 종속되거나 소유되거나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자신만의 세계와 꿈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멋진 경험, 꿈이라 할지라도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형태로 출현할 때, 그것은 종종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런 폭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은 가부장적 가족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환생했을 때,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다. 고양이는 도둑의 고양이가 아니라 그 자신이 도둑고양이였고,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다. 그는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고양이였고, 이전의 상처들이 있으므로 누군가의 소유나 종속된 고양이가 되길 원치 않았다. 그런 얼룩 고양이는 모든 암고양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먹이로, 아양으로 유혹하는 고양이들에게 얼룩 고양이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자신의 거만함이, 혹은 상처가 이들과 관계 맺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을지도, 인연의 새로운 싹이 자라나지 않는한 백만 번 죽어도 아플 일은 없을 것이었다. 얼룩 고양이가 상처받는 것, 상처 주는 것이 두려워서 다른 존재들과 관계, 인연을 맺지 않았다고 해서 이 얼룩 고양이가 이기적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마치 네버랜드에서 영원히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는 피터팬터럼 비록 영원히 어린이로 머물 수는 있겠지만, 그곳엔 고통도 슬픔도 없는 대신 성장도,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룩 고양이는 성장하지 않았고, 성장을 거부한다는 것은 타인의 도움도 기대치 않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도 싫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다.

하얀 암고양이가 얼룩 고양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얼룩 고양이를 성적인 미숙함, 어른이 되지 못한 미성숙한 고양이라고 한다면, 성숙한 암고양이로서야 이 고양이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얼룩 고양이는 아직 어린 아이처럼 하얀 고양이 앞에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다.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그러자 하얀 고양이는 "그러니." 라고만 대꾸할 뿐이었다. 자신을 몰라주는 하얀 고양이의 행동에 화를 내는 얼룩 고양이의 모습은 더욱 미성숙해 보인다. 다음날에도 얼룩 고양이는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다.

"너 아직 한 번도 죽어 보지 못했지?"

하얀 고양이는 단지 "그래." 라고만 대꾸할 뿐이었다. 얼룩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앞에서 공중 돌기를 세 번이나 해보이면서 "나 서커스단에 있었던 적도 있다고." 하지만, 하얀 고양이는 "그래." 라고만 대꾸할 뿐이다. 얼룩 고양이는 자신을 앞세우는 미숙함 탓에 관계 맺는데 실패한다. 이번에도 "난 백만 번이나...." 라는 말을 꺼내려다 얼룩 고양이는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라고 하얀 고양이에게 묻게 되었다. 이제 이 둘 사이의 관계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는 일방적인 통보나, 자기 자랑이 아닌 대화로 시작된다. 그제서야 하얀 고양이는 "으응."이라고 대답하고, 얼룩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게 된다. 자신들의 분신인 새끼 고양이들을 많이많이 낳아가면서 말이다. 이후부터 얼룩 고양이는 "난, 백만 번이나....." 란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고양이는 나 자신보다 하얀 고양이와 아기고양이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타불이인 셈이다. 그리고 아기 고양이들도 자라 뿔뿔이 흩어지고, 하얀 고양이는 조금씩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하얀 고양이는 세상을 떠난다. 얼룩 고양이는 밤이 되고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 만 번이아 울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도 하얀 고양이 곁에서 숨졌다. 사노 요코가 백 만번이란 횟수만큼은 아니더라도 같은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반복함으로써(국내 번역에 비해 일어 원문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는데) 반복의 의미를 더욱 잘 살려내고 있다. 비록 백 만 번을 환생했으나 그 백 만 번의 삶과 단 한 번의 삶 가운데 얼룩 고양이는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어떤 삶을 기억하고 싶었을까? 

얼룩 고양이가 두 번 다시 환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불교적으로야 해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사노 요코의 이 이야기를 반드시 불교적인 우화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앞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백 만 번 인연 맺기를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미 백 만 번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을 다람쥐 쳇 바퀴 돌 듯이라고 말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매일 한 번 잠들 때마다 한 번씩 죽는다. 1년에 365번 죽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과연 얼마나 훌륭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못본 체 지나치고, 더이상 그리워할 것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또 그리워하는 만큼 스스로를 성숙시키기 위해 노력하는가? 스스로 대등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우리에게 인연의 고리에서 피어난 관계맺기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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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놀자 > 소소한 행복들...
속눈썹 위에 올라 앉은 행복
브리짓 민느 지음, 나탈리 포르티에 그림, 이정주 옮김 / 삼성출판사 / 2004년 6월
절판


행복 1

어린시절 갖고 있던 행복들...

아주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행복이었다.


행복 2

행복 3

행복 4

행복 5

행복 6

행복 7

현재 나는 불행하다...
현재 행복의 만족 못하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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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디카로 보는 책] <색깔 놀이>

크베타 파코브스카의 '마법 그림책' 시리즈의 한 권인 <샐깔 놀이>입니다.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멋지지만, 그 중에서 이 <색깔 놀이>는 어른에게는 어렵고, 아이에게는 너무도 재밌는 책입니다.

사실, 이 책은 좀 있으면 절판될 책으로 개인적으로 무척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전량 해외에서 제작되어 들어오는데요, 이번 수입분을 마지막으로 책을 더이상 찍지 않을 거라고 하네요. 알라딘 독자들이 특별히 사랑하는 책이고, 너무 훌륭한 책인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좀 있으면 판매되지 않을 책이라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수 있을 때 구입해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보시면 정말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지요. 저도 이 책을 보고 색깔책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습니다.

색깔책이라면, 색깔 인지에 머무르기 쉬운데, 이 책은 다양한 색깔이 가지는 느낌과 그들의 어울림을 놀이를 통해 익힐 수 있습니다. 일대일 대응식의 색깔 배우기는 사실 예술적 감성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색깔에는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저도 중학교 미술시간에 그 사실을 알고 참 놀랐습니다. 정식 이름은 명도 몇, 채도 몇.. 이런 식으로 이름이 붙는다고 하네요. ^^(제가 미술 전공자가 아니가 이 이야기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분이 있다면 저의 무식을 깨우쳐 주세요.)

레오 리오니의 전기를 읽다보면, 레오 리오니는 굉장히 예술적인 분위가 충만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샤갈의 원화를 달력 그림처럼 보고 자랐다니 그의 집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십대 때는 유럽에서 제일 유명한 미술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예술감각을 익혔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의 그림책의 선명한 색감과 단정한 디자인 감각, 참신한 구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이 가지요. 미술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아름다운 그림책을 많이 읽고, 많은 미술 활동을 스스로 해 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색깔 놀이>는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책이지요.


 

 

 

 

 

책의 펼친 모습, 앞면, 뒷면입니다. 사진이 좀 흔들렸습니다.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다음은 한 번 휙휙 책 페이지를 넘겨 볼까요?


 

 

 

 

 

 

 



 

 

 

 

 

 


 

 

 

 

 

 

책의 펼친 모습을 세워서 몇 컷 찍었습니다. 속 종이는 빳빳한 느낌으로, 약간 광택이 납니다. 꽤 두꺼운 편이라, 아이들이 험하게 책을 다뤄도 잘 찢어지지 않습니다. 스프링 제본이라 혹시 그 부분이 너덜너덜해질까 고민이 되긴 하는데요, 지질을 믿어볼랍니다.

자. 그럼 좀더 요모조모 따져볼까요?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원반입니다. 이중 원반으로 다양한 색의 조합과 각각이 만났을 때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냥 원반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활동이지요 각각의 색깔 부분에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색깔 맞추기 놀이로도 활용할 수 있는 원반이랍니다.

 

 



플랩입니다. 플랩을 열면, 색깔 동그라미 밑에 씌어 있는 사물이 들어 있지요. 노란색은 '노란색 해', 보라색 밑에는 '파란색 꽃', 초록색 밑에는 '초록색 완두콩' 이렇게 씌어져 있고, 열면 해당 사물이 같은 색깔로 그려져 있습니다. 각각의 동그란 플랩의 크기가 잘라서 소근윤 운동에도 좋습니다. 작은 플랩을 열려면 꽤 정교한 운동능력이 필요하거든요.

 

 


유채색의 어울림입니다. 이 책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이 옆에는 달이 그려져 있어서, 차가운 느낌과 따뜻한 느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앞페이지에 구멍이 뚤려 있어서, 빨랑, 파랑, 초록, 노랑 등의 색깔을 개별적으로 볼 수 있고, 구멍이 뚤린 페이지를 넘기면, 각각의 색깔들이 서로 어우러진 그림이 펼쳐집니다.

 

 

 


참으로 기묘하게 생겼죠? 일단 머리는 말인데, 봄 부분은 돼지같기도 하고, 소 같기도 하고.. 그 위에는 두꺼비가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은 빨간 달입니다.

 

 

 

 


같은 색깔이지만 밤과 낮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에로 아저씨의 배부분에 구멍이 뚤려 있거든요.  페이지를 오락가락하면서 색깔의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 다음은 언제나 그렇듯 덤입니다.



 

 

 

 

 

 

흐린 날씨에 홍차 한 잔은 어떠세요. ^^ 알라딘 류화선(yukineco@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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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법의학자에게 던지는 서늘한 경고
죽은자들은 토크쇼 게스트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 마이클 베이든의 법의학 이야기
마이클 베이든 지음, 안재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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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실종될 뻔한 정의를 바로잡는 학문이 바로 법의학이다. 차 안에서 나온 콘택트 렌즈가 강간 후 살해된 소녀의 것이라는 걸 입증한 것도, 가해자의 바지에 붙은 부러진 손톱이 희생자의 것임을 증명해 살인자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다 법의학의 힘이다. 최근에는 철로 부근에서 나온 뼈조각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것이었음을 증명하기도 했고, 무덤 속에 묻힌 시체를 재조사, 30년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뒤늦게나마 감옥에 보냈다.

“이 머리카락은 피고의 것과 일치합니다”라는 법의학자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릴 판사가 어디 있겠는가?


어느날, 어드만이라는 법의학자가 작성한 보고서를 읽던 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드만이 검시를 하면서 사망자의 비장을 꺼내고 무게를 달았다고 적어놓았기 때문. 하지만 사망자는 어릴 때 배를 다쳐 비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가족들이 시신을 발굴해보니 시신에 칼을 댄 흔적도 없었다. 즉 어드만은 하지도 않은 검시로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보낸 것. 그가 관여한 수백건의 사건은 모두 재조사되었다. 어드만은 “나는 인간이고 따라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법의학적 증거가 재판에 미치는 위력을 생각해보면 그런 변명은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어드만 같은 사람은 한두명이 아니다. 피해자의 의류에서 발견된 정액이 자신의 것과 일치한다는, 또 다른 법의학자의 증언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데이비스는 재조사 끝에 무죄임이 입증되었는데, 죄도 없이 4년을 복역해야 했던 데이비스의 인생은 어떻게 보상되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법의관들 중 일부는 스스로를 검찰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증거를 검찰에 유리하게 조작한다고. 경찰이 “사망시각을 오전 3시로 잡아주시면 좋겠다”고 한다고 거기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법의학적 증거가 재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과학이란 건 거짓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당장의 유혹에 눈이 멀어 나온 결과를 조작한다면 법의학의 신뢰도는 크게 떨어지리라. 첨단 기술이 인간의 사악한 마음과 결합한다면 공룡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법의학자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윤리의식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중간중간 지루한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법의학을 통해 진실을 밝혀진 사건들이 나열되어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현장에서 뛰는 전문가가 법의학의 실상을 알기 쉽게 기술했다는 점에서 별 다섯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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