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호정무진님, 따우님, 로쟈님 그리고 그밖의 다른 분들에게-철학사전 한 권 소개

 

[Maverick 22-철학책읽기에 관해 2]에 대해 댓글들을 달아주신 걸 보니까 문득 생각이 나서 철학사전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바로 요놈입니다요.

 

 

 

 

  작년 10월 초에 프랑스에서 아주 뜻깊은 철학사전이 한 권 출간되었습니다. [Vocabulaire europeen des philosophies](쇠이유Seuil 출판사/로베르Robert 출판사 공동 출간)라는 제목이 달린 사전인데,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유럽철학어휘사전] 정도가 되겠고, 좀더 정확히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철학들에 대한 유럽어휘사전]이 되겠죠. 이 뒤의 번역은 아주 어색하지만, 이 사전의 기획 의도를 생각한다면 사실은 이런 번역이 훨씬 정확할 듯합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제목은 바로 다음과 같은 부제(이는 책 겉표지에는 없고 속표지에만 나와 있습니다)입니다. [Dictionnaire des intraduisibles],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번역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사전]입니다! 매우 데리다적인 발상을 담고 있는 이 부제(하지만 사전의 항목 집필자들이 꼭 데리다와 친분이 있거나 데리다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는 이 사전이 시도하고 있는 지적 모험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뭐나구요? 우선 이 사전의 편집담당자인 바바라 카생(Barbara Cassin, 고전철학 및 문헌학)의 말을 한번 직접 들어보죠.


유럽이 제기하는 가장 긴급한 문제 중 하나는 언어들의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 두 가지 유형의 해결책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앞으로 그 언어를 통해 교류가 이루어질 지배적인 한 언어, 곧 세계화된 영미어를 선택하는 길이 있다. 또는 언어의 다원성을 유지하면서 매 경우마다 언어들 간의 차이의 의미와 잇점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길이 있는데, 이는 언어들 및 문화들 사이의 교통을 실제로 촉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유럽철학어휘사전: 번역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사전]은 두번째 시각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전은 과거보다는 장래에 시선을 두고 있다. 곧 이 사전은 회고적이고 화석화된 어떤 유럽―그러나 이는 어떤 유럽인가?―, 필경 [각 나라의] 특수성들만 더 부각시키게 될, 병렬적인 유산들의 누적에 따라 정의된 어떤 유럽보다는, 진행 중에 있고 활동 중에 있는, 곧 활동의 결과ergon라기보다는 활동energeia으로서의 유럽과 연계되어 있다. 이 유럽은 자기 자신을 더 훌륭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간격들, 긴장들, 전이들, 전유/고유화들appropriations, 오해들을 회피하지 않고 작업해나갈 것이다.  (...)


이 사전은 1500쪽 가량에 400여 항목을 담고 있고 150여명의 필자들이 참가하고 있는데, 규모만으로 보자면 이 사전은 그리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닙니다. 이미 10여년 전에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이보다 훨씬 방대한 규모의 철학사전(총 5권)을 펴낸 적이 있고, 독일이나 영미권에서도 훨씬 더 규모가 큰 철학사전들이 여러 권 나온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분량으로 따지자면,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윤리학과 도덕철학 사전]이 이 사전보다 오히려 더 크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외형만 놓고 본다면, 그저 “또 사전이야?”하고 지나칠 수도 있는 그런 사전입니다. 


하지만 이 사전의 의의는 일차적으로 번역이라는 문제,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늘 부딪치게 되는 번역이라는 문제를 유럽철학(사)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Âme”라는 항목을 보면 이렇습니다. 보통의 철학사전은 이 항목에 관해, 그리스어의 “프쉬케psykhē”(또는 “누스nous”)에서 유래하고 라틴어의 “아니마anima”나 “멘스mens”를 거쳐 오늘날의 “암므âme”나 “가이스트Geist”, “마인드mind”에 이르게 된 경로를, 대표적인 철학자들(가령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로크, 흄,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등)의 몇몇 저작들의 발췌문들을 검토하면서 제시해줍니다.


그런데 이 사전 같은 경우는 이처럼 우리가 “정신” 또는 “âme”나 “Geist”, "mind"라는 상이한 단어들로 이해하는 어떤 것(그런데 이게 뭘까요?)이 각각의 상이한 시기에 각각의 상이한 언어로 변화되는 것 자체를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하고, 이러한 변화가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탐구합니다.


데카르트를 예로 들면,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두 개의 언어로 철학을 한 사람으로, [방법서설](1637)이나 [정념론](1649) 같은 책은 불어로 썼고, [성찰](1641)이나 [철학원리](1644) 같은 책은 라틴어로 썼습니다. 더욱이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책들은 불어번역을 데카르트 자신이 감수했고, 내용을 일부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라틴어와 불어, 또는 불어와 라틴어 사이에 통상적인 의미의 원본과 번역본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몇몇 핵심 개념들의 차원에서 잘 드러나는데, “mens”나 “anima”라는 라틴어 단어와 불어의 “âme”나 “esprit”라는 단어가 그 한 가지 사례입니다. 곧 “âme”가 꼭 mens에 딱 들어맞는 번역어가 아니듯이, esprit 역시 “anima”에 딱 들어맞는 번역어가 아니라는 점이죠.   


예컨대 데카르트가 사용하는 라틴어 “mens”는 중세철학의 전통과 관련해 볼 때 매우 혁신적인 어휘죠. 이 개념은 신체,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물질적인 연장의 질서와는 전혀 무관한 정신, 또는 사유의 질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위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라는 것을 어휘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이 “멘스”라는 개념이죠. 그런데 문제는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데카르트의 주요 철학 저작의 불어 번역본(곧 데카르트 자신이 직접 감수해서 출간된 데카르트 당대의 번역본)에는 이 단어가 “âme”라는 불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게 문제냐구요??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별 문제가 될 게 없죠. 문제는 데카르트가 말년에 쓴 [정념론](이 책은 데카르트가 직접 불어로 썼습니다)에서도 “âme”라는 불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정념론]의 불어 원제가 “Passions de l'âme”입니다), 이 때 데카르트가 “âme”라는 단어로 지시하고 있는 어떤 것은, 데카르트가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책에서 지시하고 있는 것, 곧 “mens”, 순수한 사유실체로서의 “정신”과는 상이한 어떤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때의 “âme”는 신체나 물질과 구분되는 순수한 사유실체라기보다는, 신체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놀람과 기쁨, 슬픔, 사랑과 미움 등의 정념들에 따라 변양되는, 이를 테면 정념론적 차원에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의 불어 단어 “âme”가 한편으로는 순수한 사유실체로서 “mens”를 가리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념적인 실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사태가 벌어진 거죠.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단어 차원, 어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곧 이러한 용어상의 혼란은 데카르트 철학의 혼란, 난점을 드러내주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순수한 사유실체로서의 “mens”와 정념들의 차원에서 파악된 “âme”,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데카르트 자신도 명쾌한 답변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거지요. 더 나아가 이러한 애매성은 근대철학 내내 지속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mens”와  “âme”, 또는 “esprit”라는 용어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번역의 차원을 넘어서, 중세철학에서 근대철학으로 넘어오면서 일어난 개념적인 혁신과 그것이 담고 있는 이론적 난점들 및 긴장, 애매성을 표현해주는 한 사례가 되는 셈입니다. 


 “Âme”라는 항목에 관해 잠깐 살펴봤는데, 이 사전에 수록된 여러 항목들의 내용이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저런 용어에 대해 간편하고 도식화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용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떤 난점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후대의 철학자들에 의해 어떻게 전위되는지, 이런 번역과 발명, 소통과 변형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죠. 따라서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지루한 내용이 될 수도 있는데, 기고자들의 뛰어난 역량 때문인지, 매우 집약적이면서도 명쾌한 설명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 사전이 기획된 계기는 1990년에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있었던 한 학술회의였습니다. “철학자들을 번역하기Traduire les philosophes”라는 제목이 붙은 이 학술회의는, 특히 근대철학에서 한 나라의 철학이 다른 나라로 수입,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번역을 비롯한 여러 언어적인 문제를 다루는 회의였죠. 다수의 중견 철학자들이 참여한 회의였고, 상당히 재미있는 논의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 회의를 계기로 이 문제를 좀더 체계적으로 다뤄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되고, 오랜 기간의 작업과 진통을 거쳐(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 차례의 무산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출간된 게 바로 이 책입니다.


몇 년 전부터 나온다나온다 예고만 되길래 긴가민가했는데, 마침내 지난 해 10월에 출간이 되어서, 곧바로 주문해서 구입했습니다. 흑, 그런데 정가가 95유로, 할인을 해도 90유로 가까운 가격,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12만원이 넘는 가격이어서, 사고나서는 솔직히 좀 후회도 되더군요.(도서관에 신청해서 복사를 하면 ... 하고 말이죠. -_-v) 하지만 좋은 사전을 구입했다는 뿌듯한 감정이 더 크다(이 놈의 뿌듯함 때문에 내가 못살아요 ... ㅠ.ㅠ)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제가 이렇게 이 사전을 소개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여러 서재 주인장들께서 번역본만 읽는다고 우울해하시길래, 위로의 차원에서(헉, 진정 위로인가, 아니면 또다른 염장인가??) 소개해드린 겁니다. 번역의 어려움이나, 번역하면서 번역 불가능한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되는 일은 비단 우리에만 고유한 일은 아니라는 거죠. 이 사전이 증언해주고 있다시피 서양철학사는 어쩌면 번역 불가능한 것과의 대결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랍철학에서 헬레니즘철학으로, 다시 헬레니즘철학에서 중세철학으로, 그리고 다시 근대철학에서 현대철학으로 넘어오면서 계속해서 사람들은 번역 불가능한 어떤 것과 직면하게 되고, 이것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가면서, 또는 번역 불가능한 것에 맞서 새로운 단어, 새로운 개념, 새로운 문제를 발명해가면서 철학의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번역 불가능한 어떤 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로 생각하는 것은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의 새로운 기회, 새로운 사유의 발명의 조건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은가 합니다. 번역의 불가능성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사고와 시도를 자극하기 마련이고, 이런 자극은 번역 불가능한 것을 만들어내었던 이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유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사유의 필수 조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좀 먼 시기의 예이긴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는 희랍어를 전혀 모르는 가운데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관한 기념비적인 주석들을 남겼죠. 스피노자 같은 이도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라틴어 능력으로 훌륭한 저작들을 남겼구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죠. 한글만 할 줄 알았음에도 뛰어난 철학 저작, 이론 저작을 남기는 사람이 ...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책들이 좀더 많이 출간되고 번역되고 교육되어야겠죠. 개인이 어느 정도의 어학 능력을 갖고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이 후자의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우울해하지 마시고 열심히 읽으시길 ... (위안이 좀 되셨나요? ^^;;;) 


둘째는,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다. 지난 해부터 한국철학회에서는 용어정비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듣기로는 좀더 광범위한 학술용어정비사업의 일환이라고 하던데, 확실한 건 잘 모르겠군요). 사업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학술진흥재단을 정점으로 해서 그 아래의 한국철학회로, 그리고 다시 그 아래의 각 분과철학회(예컨대 한국칸트학회, 한국헤겔학회, 한국현상학회, 한국니체학회, 한국근대철학회 등)로, 위에서부터 진행되고 있는 작업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철학과 관련된 거의 모든 용어들을 통일하려는 사업입니다. 서양철학의 경우 이는 서양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를 확정하는 일이죠. 예컨대 “concept”는 “개념”으로, “intuition”은 “직관”으로, “Vernunft”는 “이성”으로, “Genealogie”는 “계보” 등으로 확정하는 거죠.


그런데 쉽게 합의가 되는 용어들 같은 경우는 별 문제가 없지만, 용어 번역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들마다 각기 자기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의 경우는 문제가 좀더 복잡하고 심각합니다. 예컨대 “transzendental”(이 용어는 주로 “선험적”이라는 번역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10여년 전부터 “초월적”이라는 번역어가, 그리고 좀더 최근에는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 마지막 세 번째 번역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이라든가 “Dasein”, 또는 “Gestell” 같은 번역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더 나아가 아직 용어에 대한 이해나 용법 등이 제대로 정립되지도 않은 용어들, 예컨대 “notio”라든가 “transcendentia”, “res” 같은 중세철학(및 근대초기철학)의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또 대개가 일상어에서 유래한 희랍어 철학용어들은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최근에 번역된 아리스텔레스의 {범주론/명제론}의 국역본에서 역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범주들에 관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학용어 대신(가령 실체, 수동, 능동 같은) 우리말 표현들을 다수 제안하고 있죠. 역자에 따르면 이것이 원래의 희랍어 표현에 좀더 잘 부합한다고 하고, 또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습니다)에 관한 의문들이 제기되기 때문이죠. 이제 수입되는 중에 있고 용어 번역에 관한 논의도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프랑스 철학의 용어들에 대한 번역 문제는 말할 것도 없구요.   


따라서 무질서하게 개인의 선호에 따라 이런저런 방식으로 번역되는 용어들을 정비하자는 원칙에는 기꺼이 동의하지만, 특정한 시한을 정해서 일률적으로 용어들을 통일하고(물론 특히 논란이 많은 용어들의 경우에는 복수 용어도 허용하기로 하긴 했지만) 이를 공식 용어로 지정한 다음에는, 모든 공식 학회에서 이 용어 사용을 의무화하고 따라서 공인 학술지에서도 모두 이 용어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은 좀 동의하기 어렵더군요. 법이 철학을 지배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 [유럽철학어휘사전]은 특히 교훈적인 것 같습니다. 이 사전은 용어를 통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이 사전에서 사용된 모든 철학용어(희랍어나 라틴어에서부터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심지어 아랍어 등에 이르는)를 하나의 불어로 번역하는 대신, 이 용어들, 예를 들면 “res”라는 라틴어나 “Geist”라는 독일어가 왜 하나의 불어 단어로 환원될 수 없는지, 곧 번역 불가능한지 설명하는 것을 사전의 존재 이유 자체로 삼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혼란이 생겼을까요? 철학의 위신이 더 깎였을까요? 오히려 이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철학 용어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이 더 증폭되고, 더 나아가 철학의 특성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열린 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한 내에 그렇게 서둘러서 용어를 정비하고 통일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서양철학 용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문적 검토와 이 용어들의 국내 수용과정에 대한 총괄적인 고찰을 해보는 게 더 유익하고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생각한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인문학도 뭔가를 한다’는 걸 정부 관료들이나 국회의원들에게 보여줘서 인문학 특별기금을 계속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속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좀 부럽다는 거죠. 우리나라와 인구수나 국토 면적, 또는 외형적인 경제적 능력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나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전들을 찍어내는 데, 우리나라는 아직 변변한 철학사전 하나 만들어본 경험이 없으니, 사실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죠. 더 나아가, 바바라 카생의 서문이 웅변하듯이, 이 사람들이 이러한 철학용어의 번역 문제를 유럽의 구성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러움은 더 커질 수밖에요. 우리도 동아시아 철학의 용어들과 역사를 공동으로 검토해보려는 기획쯤은 해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너무 꿈이 큰가?? 



어쨌든 제가 사전 하나를 이렇게 길게 소개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ㅎㅎㅎ, 관심 있는 분들은 한 권 구해보심이 ... (초강력 지름충동질이라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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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아만다 X 시리즈

 형사인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는 리키. 리키네 집에 새로운 파출부 아만다X가 들어온다. 이 괴짜 할머니는 초능력 외계양 시스터X를 항상 데리고 다닌다. 한편 '황금 닻' 술집의 불법 도박 사건을 수리하던 리키 아빠 카민스키 형사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리키와 아만다X, 그리고 단짝 친구인 작은꽃은 아빠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범인들의 소굴인 '황금 닻'으로 잠입하는데...

혼령을 불러내는 아만다 X, 용감한 소녀 리키, 왼손 펀치 왕 작은꽃 등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여 나이와 종을 뛰어넘는 우정을 과시하며 치밀한 범죄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는 활약을 펼친다. 독일의 동화 작가 요아힘 프리드리히의 '아만다 X' 시리즈는 2000년 첫 권이 발행된 이후 지금까지 모두 4권이 출간되었다. 한국에서는 두 권이 더 출간될 예정이다.

 아만다 X 시리즈의 두번째 권. 혼령을 불러내는 과짜 할머니 아만다 X와 리키, 작은 꽃은 사탕공장 사장 자트 씨의 초대를 받아 주말을 그의 저택에서 보낸다. 으리으리한 성에 살고 있는 자트 씨의 가족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어딘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그 날 밤 잠을 못 이루던 리키와 작은꽃은 벽을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든다. 심장이 멎을 듯한 비명소리에 이어 복도를 스쳐가는 희끄무레한 형태, 하나 둘씩 사라지는 리키 일행의 소지품. 그 와중에 벨라 부인이 실종된다.

식품점 점원, 사라진 소지품, 초콜릿 사탕 제조법이 적힌 비밀 서류, 일견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던 일들이 사건을 깊이 파고 들어갈수록 하나씩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만다 X 일행은 사탕공장을 둘러싼 엄청난 음모를 예감한다.

  <알파벳 P의 비밀>, <사탕 공장 실종 사건>에 이은 아만다 X 시리즈의 세번째 권.

즐거운 서커스 공연장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계단이 무너져 개 조련사 루루가 계단에서 추락한다. 이어 계속 원인모를 사고가 잇따르자 서커스단 겨울 공연장 건축 계획은 물거품이 될 사황에 처한다. 범죄의 냄새를 맡은 아마다 X는 사고를 조사하면서 사악한 범죄의 냄새를 맡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성큼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 데어 에반겔리쉐 부흐베라터

시종일관 유쾌한 초능력이 발휘된다. 어린이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속편들을 기대하게 해 준다. - 시게나 차이퉁

이런 책이라면 모든 어린이들이 좋아할 것이다. 유령을 불러내는 할머니, 선글라스를 쓴 양, 노련한 악당들이 있는 곳엔 긴장감이 넘친다. - 자르브뤼커 차이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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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문명이 살해한 요정들의 세계 - 마법침대
마법 침대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52
존 버닝햄 글 그림, 이상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 존 버닝햄(John Burningham)의 작품 가운데에는 교육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녹아있는 "지각대장 존"을 가장 좋아한다. 탈민족주의를 외치는 시대 조류에 부응하지는 못할 망정 헛소리로 비칠 수도 있는 이야기 한 마디해보자.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까지 하지만 같은 지역, 같은 환경, 같은 습속, 같은 문화(이때 같다는 건 절대적인 동일함을의미하진 않는다)를 공유한 이들끼리 비슷한 기질을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국식의 신랄한 풍자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조나단 스위프트 식의 그런 풍자 말이다.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 역시 나는 그런 영국식 유머로 받아들였는데, 그가 이런 그림책을 써낸 배경에는 그 자신이 영국의 대안학교인 서머힐스쿨 출신이란 점도 적지 않게 작용한 듯 싶다. 우리 화가인 이중섭의 경우에도 그에게 평생을 두고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그가 오산학교 출신이란 교육 체험이 컸다고들 하는데, 버닝햄이 비록 "지각대장 존"에서 교육에 대해 신랄한 풍자를 가하긴 했으나 자기 자신은 서머힐의 교육 방식에서 비롯된 혜택을 본 수혜자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교육이 인간에게 이토록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하물며 매일 들이쉬고, 내쉬며 살아온 대기와 흙, 물과 햇빛은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줄까.

본래 영국엔 수많은 요정들이 살고 있었다. 영국의 기후와 풍토가 수많은 요정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륙과 바다로 단절된 섬이고, 사방에 많은 숲과 습지, 깊은 안개와 잦은 비가 영국에 많은 요정들이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영국의 여러 지방엔 그들 나름의 많은 요정 이야기가 산재해 있다. 그런 영국에서 요정이 사라지게 된 것은 대중교육이 일반화되면서부터였다. 즉,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티 타임 시간에 마을 인근의 숲이나 습지에 살고 있는 재미난 요정 이야기를 듣는 대신, 선생님이 엄격하게 훈육하는 초등학교로 보내진 뒤부터 영국의 요정들은 점점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겠다. 한 마디로 축약해보면 산업 문명과 요정들은 함께 동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를 몇 살 때까지 믿을까? 매년 성탄 시즌이면 TV에서 방영해주는 성탄절 특집 할리우드 영화들이 도리어 아이들의 머리속에서 산타클로스를 몰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화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산야에서도 우리와 함께 머물던 수많은 귀신(왜 귀신이라고 말하면 어쩐지 싫고, 요정이라고 말하면 괜찮은가?)들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디오진크라지(idyosynkraise)"란 말이 있다.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반응 형식을 일컫는 말인데, 예를 들어 말미잘의 촉수 같은 무조건 반응을 말한다. 이디오진크라지는 인간을 순식간에 생물학적인 원초 상태로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광경이나 상태에 처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곤두서거나 심장이 급하게 뛰고, 사지가 경직되는 것과 같이 일순간 신체 부분들이 주변 세계에 동화되는 현상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근대의 계몽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삶이 새로운 종교나 사고 방식에 공간을 내어줄 때, 보통 옛 신들도 함께 내던져진다고 말한다. 예전에 사랑받던 습관이나 신성한 행동이나 경배 대상들은 가증스러운 비행이나 공포스러운 유령으로 변질된다. 이는 인류의 폭력적 진보가 만들어낸 상흔들이다. 다신교는 일신교로, 옛 신화는 계몽된 신화로, 위대한 대지모신은 여호와(분명히 남성적인)로, 토템에 대한 경배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로 변화된다. 모든 신화를 해체되고, 예전의 터부들은 미신이 된다. 교육은 아이들의 계몽과정, 문명화 과정이다.

존 버닝햄의 "마법 침대(The Magic Bed)"의 첫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조지는 자신의 작은 침대 - 아이들이 잠결에 떨어지지 않도록 사방에 난간을 댄 - 를 잡고 일어나 있다. 테디 베어 인형이 이불에 반쯤 묻혀있고, 침대 밑엔 아이용으로 만들어진 작은 변기가 놓여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어린 조지에게 말한다.

"조지야, 이 침대는 이제 너한테 작아. 아빠랑 쇼핑센터에 가서 새 침대 좀 사오라니까?"

머리가 훤하게 벗겨진 아버지는 안경을 쓰고, 방금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는지 신문을 반으로 접어 들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조지 사이의 대화를 방관자처럼 듣는 포즈다.

이제 조지는 더이상 어린 아기가 아니라 한 명의 어린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렇기에 조지에겐 새 침대가 필요했다. 조지와 아버지는 쇼핑센터 가는 길에 중고가구점을 발견하고, 가게 주인이 말한 마법침대를 구입하게 된다. 농경민족의 마법 도구는 산신령이나 도깨비가 흘린 물건을 우연히 줍거나 연못에 빠뜨린 도끼를 줍는 것처럼 신령에게 우연히 받는 것고, 아랍 유목 민족의 마법 도구는 알라딘처럼 바자(시장)에서 우연히 구매하는 것이다.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영국에서 마법 도구는 이처럼 쇼핑센터 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중고가구점에서 구매하게 된다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마법을 일으킬 도구들은 산재해 있다. 당신이 믿어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조지와 아빠는 침대를 가져와 깨끗하게 닦아내다가 마법의 주문을 발견한다. "엄"으로 시작하는 다섯 글자를 읽으면 되는데, 뒤에 있는 글자들은 지워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비록, 마법이라도 본인의 정성이 깃들지 않는다면 효험을 잃는다는 건, 신화와 전설의 서사구조에 흔히 있는 난관이다. 조지는 설레는 마음으로 어서 밤이 오길 기다린다. 첫날 밤 조지는 "엄"으로 시작하는 마법 주문을 발견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조지는 그냥 잠들었다. 하지만 조지는 그냥 포기하지 않았다. 이 말은 조지가 마법을 믿었다는 거다. 믿지 않는 자에겐 어떤 마법도 효험이 없는 법이다.

드디어 조지는 마법의 주문을 찾아냈고, 그 덕분에 도시 위를 날고, 들판에서 난쟁이들과 요정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지는 밀림에도 가고, 그곳에서 아기 호랑이를 만나 부모를 찾아주고, 동굴 속에서 보물이 가득찬 상자를 발견하기도 한다. 조지는 돌고래를 만나기도 하고(버닝햄은 위트있게 돌고래를 만났기 때문에 조지의 침대에 젖어있다고 말해준다), 빗자루를 탄 마녀들과 빨리 날아가기 시합도 벌인다. 조지와 가족이 휴가를 떠난 사이 할머니는 조지의 마법 침대를 버리고, 새침대를 들여놓았다. 조지는 잽싸게 쓰레기통에 실려있는 마법 침대를 따라 달려가 마법의 주문을 외워 마법 침대를 구출해내고, 마법 침대에 올라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버닝햄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지금 침대에 누워, 그 침대의 주문을 알아 내 보세요. 조지처럼 멀리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이는 버닝햄의 이런 마무리 보다는 조지가 침대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결말을 내려주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부모의 마음으로는 그것이 좀더 교훈적이고, 해피엔딩에 가까우리라 생각을 했을 법하다.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조지가 마녀들과 시합을 벌인 것이 이단적이란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근대의 계몽 - 산업화, 근대화, 도시화, 과학화로 일컬어지는 -  근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물질적 혜택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째서 무언가를 잃은 듯한 상실감에 젖게 되는 걸까? 어째서 무언가 순수한 세계를 잃어버린 기분이 드는 걸까? 그건 아마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순진무구한 영혼, 자연에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신성(神性)을 우리들 자신이 살해해버린 탓은 아닐까?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하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믿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더 많은 세계의 무언가를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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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icaru > 소년의 눈물
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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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의 옥중서한에 이어서, 서씨 형제들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는 연장선상에서 책을 집어들지만, 이 책은 실은 이 쪽에 속하면서도 저 쪽에 속하는, 어쩌면... 양 쪽에 모두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인 제일조선인이 소년 시절에 읽었던 책을 통해 소년 시절을 추억하는 기록이다.

추억 속에는 기쁨도 아픔도 버무려지게 마련이다. 압박과 차별을 받는 일본 사회에서의 소수자로서 갖었던 소년의 의기소침하게 굴절된 심정들, --“조선은 만사가 공정하지 못한 것. 조잡한 것, 어딘지 뒤끝이 씁쓸한 것, 볼썽사나운 무엇을 가르키는 대명사였다.”, 조국을 향한 그 복잡다단한 애증의 추억들-- 이 담겨 있다.

 

성장의 기억을 더듬을 만한 구절 중 몇을 옮겨 본다.

 

재일 조선인인 시인 허남기의 시 등이 포함되어 있던 시집에서 스즈키 기로쿠라는 시인의 ‘용서’라는 시를 읽고,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주위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절대로 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겠다’ 결심하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는 ‘나는 사랑은 못 하겠다’고 씌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때에는, 나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이 시구를 읊조렸다. 그만큼 마음이 약했던 것이다.

 

마의산---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죽고 싶을 정도로 지루해져버려 곧바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마의산은 본질적으로 끝나지 않을 그 무엇을 묘사하고 있었다.

--->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책을 꽤나 읽었다는 여학생이 “마의 산, 그 책만큼은 영 읽고 싶지 않아.” 라는 말에 “넌 이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지만, 여차여차하고 이러저러해서 난 재미있게 얽었단다‘ 라는 말을 꼭 그 친구에게 전해 주고 싶었했던 경식. 그렇지만 그에게 마의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였다.

 

“양친의 학력을 기입할 때 결연하게 공란에 없음이라고 써넣고 나니, 부끄러움보다는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끌어 올랐고 어느덧 나 자신이 당당한 어른으로 성장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시민들은 예전처럼 헤엄을 쳐서 건너든가 아니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된다. 다리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프란츠 파농”

 ---> 서경식은 형 준식의 친구 K를 통해서 프란츠 파농의 책들을 접한다. 위의 구절 속에는 각 인민이 어떻게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가 화두이다. 프란츠 파농은“먼저 자신의 소외를 의식하지 않는 한 결연하게 전진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또, “민족주의 아닌 민족의식이야말로 우리에게 범세계적인 확산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이 제일조선인이라는 사실, 바로 그 소외의 상황을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전진을 가능하게 한다. 그 전진이란 다름 아닌 답답하고 옹색하게 굴절된 일상에서 광활한 보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대학 3학년이 되던 1971년 봄, 한국에 유학 중이던 둘째형과 셋째형이 한국 정부에 체포되었다. 그는 그 사실을 “학원에 침투, 학생 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한 스파이 체포되다”라는 제하의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된다. 그 뒤부터 그는 두 형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지만, 재판이 종결되고 두 형이 각각 무기형과 7년형을 언도받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마저 사라지게 됨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중에도 형들이 어두컴컴한 독방에 갇혀 때때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순간도 잊을 수 없게 된다. 그럭저럭 1년 늦게 대학을 졸업하기는 했지만 재일조선인의 취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즈음 그는 루쉰이 일생동안 부대꼈을 ‘암흑’에 그 역시 몸을 담고 있는 심정이 되고. 그리하여 루쉰의 <‘분’의 후기>, ‘꽃없는 장미’ ‘어떻게 쓸 것인가-밤의 기록1’ 등을 읽고 또 읽고 한다.

 

“루쉰이 “희망이란 본래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는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거의 없다’라고...... 인간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걸어가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다. “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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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책읽는나무 > 코끼리를 쏘다

⊙제 30권

 1.4월 5일

 2.도서관

 3.차력독토 선정도서 중 한 권!
    조지 오웰의 소설들은 매번 눈도장만 찍고 있지 여적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다.
    (하긴 안 읽은 책이 어디 한 두 권 이겠냐만..쩝~~)

그러던 중 차력독토 덕분에 그의 소설을 읽기 전에 그의 산문집을 먼저 접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술술 잘 읽혀 내려가는 것 같다.
나는 단편소설책은 진도가 잘 안나가는데...산문집은 그런대로 잘 읽히는 것 같다.
좀 쉽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그래도 좀 어려운 산문은 여전히 난해하긴 마찬가지!..ㅡ.ㅡ;;

하지만 조지 오웰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이책이 좀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암튼.....이책을 읽고 나니 더욱더 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단 의지가 불타 오른다..ㅋㅋ
그리고 고전소설을 읽어야지~~ 매번 생각만 했지 실천하기 어려웠는데...이젠 정말 한달에 한 권 이상이라도 고전소설물을 읽어야겠다.
일단 집에 사다놓은 민음사 시리즈 중 세 권 정도의 고전소설책이라도 후딱 읽어야겠다.
저것들 도서관에 가보면 떡 하니 <청소년 권장도서>란 딱지가 붙어 있다.
나혼자 몰래 사서 읽는 건 상관없지만..
도서관에서 저책을 빌려 읽으려니 왠지 손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건 왜 그럴까?  
아마도 마태우스님이 "제인 에어"를 읽지 못하는 이유가 이러한 이유일지도???ㅋㅋ
(지금은 읽으셨겠지??^^)

아~~ 지금 남 탓할때가 아니다.
다른건 못 읽었어도 <제인 에어>는 학창시절 읽긴 했다만 내용이 가물 가물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흠~~
모든 책을 다시 읽어야 할 듯!!..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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