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평전 (양장)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현재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간의 화합은 멀다고 느껴진다.돈과 물질,개인의 명리에 집착한 나머지 국가의 올바른 정체성 및 역사 인식 등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근자에는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후보자간에 '역사 바로 세우기'에는 중점을 두지 않는 점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에 소홀해지는 원인이 될뿐더러 그들이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위치에 있을 때에 과연 지난간 한국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정립해 나갈지가 의문스럽기만 하다.

 

삼국시대 이래로 왜구의 침략,임란,정묘호란,한일합방 등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던 인물들은 개인의 명리를 위한 정파를 초월하여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국민을 떠받들려는 확고한 의지와 신념으로 가득했던 것을 보면 현재의 위정자들 대다수는 단지 명예와 권력,부를 일구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본심을 속이고 국민들에게 위장처세하는 것은 아닌가 한탄스럽기만 하다.

 

현대사에 있어 장준하 선생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이지만 항일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던 진보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는 인생의 전반을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바쳤고 후반은 출판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또한 그의 청년시절은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놓이고 대동아공영권의 일환으로 강제 징용을 해야만 했는데 동료들과 일본 군영을 탈출하면서 중국 충칭 임시정부로 향하는 6,000키로의 대장정이라는 간난신고와 같은 대장정과 해방이후 남북통일이라는 대의명분하에 김구 선생 밑에서 봉직을 하기도 했다.잠깐 그가 이범석 장군으로 몸을 옮긴 것에 뒷날 매우 후회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 수도 부산에서 사상계(처음에는 사상이라 명칭함)라는 잡지사를 창간하여 당시 한국 사회에 불모지와 같았던 인문 사상에 주력하면서 사상계 문학상 및 동인문학상 등을 제정하기도 하면서 걸출한 인물들의 등용문이 되어 주기도 했다.그의 이념과 사상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여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그러던 중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정권이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전불사의 양상으로 번져 가는데,특히 장준하는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 탄압 등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강경한 자세로 일관해 나갔다.

 

1967년 삼성 제일제당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맹희회장이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는 박정희를 향해 '밀수왕초'라는 독설을 퍼부어대면서 연행 및 옥살이가 이어지고 옥중 당선 등의 이변이 일어나지만 당시 공화당과 중앙정보부는 그에 대한 회유와 압력,탄압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사상계를 고사시키려는 작전은 철저하게 진행된다.결국 자금이 바닥이 나면서 그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로서 제대로 위상을 보여주지도 못하게 된다.그에 대한 말과 행동은 중정의 감시로 이어지고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로 운명을 달리한다.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미제이고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안타까운 점은 당시 장준하선생의 의문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미 고인이 되고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증발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혁명가적인 기질로 중국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임시정부,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사상계 창간,이승만 정권 비판,5.16 비판,한일굴욕회담 저지투쟁(당시 한일회담의 실무 책임자는 김종필로서 일본에 굴욕적인 의정서를 체결),3선개헌 반대투쟁,반유신항쟁,100만인 서명운동에 이르기까지 '금지된 동작'을 줄곧 이행해 왔다.그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나라의 독립과 일본군 출신이 대통령으로 자리를 잡아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에 강한 반발과 독설로 박정희와 한 판 승부를 불살랐던 것이다.

 

김구선생의 비서에 이르기까지의 독립운동가,사상계를 통한 민주언론운동가,반독재 민권 운동가 및 헌정질서 회복 등으로 이어져 온 장준하선생의 일대기는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한 몸을 바쳤던 고귀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겉으로는 온유하게 보이지만 내면은 차갑고도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불이 솓구쳐 오르는 강렬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 분이다.생전 그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도 안타깝기만 한데 석연치 않은 죽음의 원인은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반드시 가려내야 할 부분이고 뜻있는 분들이 줄기차게 의문사를 캐내야만 할 당위성을 갖고 있다.그것은 나라의 정체성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 쌤앤파커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너도 나도 무한 경쟁시대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속된 말로 죽을똥 살똥 하면서 팍팍하고 재미없게 살아가니 삶의 지수가 어떻게 높아져 가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돈과 물질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돈이 자신에게 쫓아 오는 것일진대 돈을 염두에 두고 돈을 쫓아가니 돈은 멀리 도망가 버리게 되고 몸과 마음은 지치게 되기 마련이다.돈이 어느 정도는 갖추어져 있어야 비로소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그렇다고 돈이 많은 사람은 부를 더 축적하려는 과욕과 탐욕으로 돈에 눈이 멀게 되어 결국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가족,친지,친구,동료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갈 수밖에 없다.

 

종교적 수행과 성찰을 통해 심신이 지쳐 있는 메마른 영혼들에게 밝고 맑은 언사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는 혜민 스님은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편안한 이미지에 지와 덕을 함께 갖추고 있는 분같다.나 역시 쫓기듯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경제적 여건이 그리 넉넉치 않아 돈과 관련된 문제는 늘 쪼달리고 예민하다.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되돌아 보면 당시 '왜 내가 그렇게 속좁고 아둥바둥 살았는지'를 후회하곤 한다.다양한 독서를 통해 편협한 시각과 오류를 수정해 나가려 노력을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쉽게 교정이 안되고 본성으로 되돌아 가버리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혜민 스님의 말씀 하나 하나가 뻐근한 어깨,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하고 답답한 심사를 달래 주기도 하며 오장육부까지 차오르는 화를 씻은 듯이 정화시켜 주는 혜안이 담겨 있는 말씀은 모두가 귀에 들어오고 공감이 충분히 간다.지친 심신을 달래 주고 치유해 주는 잠언과도 같고 영롱한 시와도 같다.

 

죽기 전에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들,

경험해보고 싶은 일들,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을 쭉 적어보세요.

그리고 그냥 그것들을 꾸준히 하세요.

하나씩 하나씩.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이것저것 너무 고민하지 말고,

우리,그렇게 살아요. - 본문 -

 

휴식을 취하고, 관계를 맺어가며, 미래의 행복한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살 것인가,사랑을 쌓아 가며,수행하는 연습을 하며,열정으로 가득차며,진리라는 종교에 귀의하기 등을 독자들에게 잔잔하면서도 알아듣게 전해 주고 있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 인간이다.평범한 진리이고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사회 환경,구조 탓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지수를 낮게 만드는 것도 문제이다.누구나 할거 없이 인정이 메마르고 구성원간의 온기와 배려의 정신이 사라져 가고 있다.특히 사회 지도층들의 부정부패와 권위 의식,패권주의,끼리끼리 어울리는 소조(小組)적인 분위기가 대다수의 서민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그리고 내가 마음을 열고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서고 싶지만 때론 역이용 당할까 싶은 의구심도 들 때가 있다.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이고 주체인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넓고 깊은 생각과 시각으로 사람을 대하고 관계를 맺어가며 미래의 창을 열어 가는 것부터 실천해 보고 싶다.그리고 현재는 무종교인이지만 무엇인가를 바라는 종교가 아닌 나의 맑고 썩지 않은 영혼을 연마해 가기 위해 종교 하나쯤은 갖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일어났다.지식과 (종교적)수행심이 깊은 혜민 스님의 말씀을 듣노라니 어느새 깊은 산사에서 풍경의 울림이 번져 옴을 느끼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압록강 아리랑 - 최범산의 항일유적 답사기
최범산 지음 / 달과소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10년 한일합방이 강제적으로 체결되고 국권이 일본에 넘어 가면서 나라의 독립의 열망을 담아 독립지사들은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에 임시정부 및 항일 독립운동 아지트를 세우면서 일본에 총칼로 저항하기도 하고 일본 경찰 및 밀정,간첩들을 나포하기도 하는 등 항일 독립지사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국에서 행했던 공로는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독립지사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한 줄기찬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나라에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독립지사들에게 감사함과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항일 유적 답사를 몸과 마음,두 발로 발품을 팔아가면서 항일 유적지를 현장 체험과 세세한 해설,전언 등과 함께 독자들에게 유적 답사의 의미,가치를 전달해 주고 있는 최범산저자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신의주를 마주 보고 있는 중국 단동(丹東)을 거점으로 요녕성,길림성,요녕성에 산재해 있는 항일 유적지를 더듬어 순례해 가는 과정은 기대반 회의반으로 가득차 있었다.사전에 한국 독립운동사를 숙지하고 항일 운동가 및 유적지를 체크하면서 답사해 나가는 과정은 한국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항일 운동 후손들의 현재의 삶은 어떤가? 이승만정권에 의해 항일운동의 의미가 축소되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세세손손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있는 상황을 직시할 때 과연 나라의 정기가 제대로 세워지고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친일 세력들의 부는 3대가 먹고 살만큼 유지가 되고 항일 운동 후손들은 3대가 가난을 면치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사실을 놓고 볼 때 형평성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정권을 유지하려는 위정자들이 과연 역사 인식이 있는지 아연해지기만 한다.이제라도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심정으로 역사를 바로잡지 않으면,민족정기로 빛나던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는 그 빛을 잃어버리고,민족배반의 인물들(친일세력들)이 또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치욕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항일독립투쟁의 봉화를 올린 단동,항일무장 투쟁의 성지 관전현,역사의 도시 환인현의 항일유적지,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의 유적지,남만주 항일투쟁의 횃불을 든 대한독립단,신흥무관학교 유적지,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유적지,육군주만참의부 항일유적지 등이 저자가 답사한 경로이다.중국이 자본주의 시장의 도입과 도시개발,산업화에 따라 항일 유적지들은 크게 훼손되고 도시개발로 인해 일부는 아예 흔적도 없기도 하다.또한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생생한 전언 및 증언도 세월이 흘러 대부분 고인이 되었거나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증언의 내용이 미미한 수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런 와중에 중국은 한국의 고대사 부분을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여 한국의 고대사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중국에 대한 입장과 외교채널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유인석장군을 비롯하여 이회영,김구,김동삼,윤희순,양세봉 장군 등이 온몸을 바쳐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끝내 해방의 기쁨과 환희를 맛보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 했어도 그 분들의 넋과 영혼은 조국의 금수강산이 평화와 번영으로 가득차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청소년들에게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항일 유적답사지를 견학 코스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돈과 물질,명예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국가의 역사의 인식을 바로 잡고 다시는 외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나 역시 이 글을 읽어 가면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겪었을 온갖 고초,수난과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그 분들께 숙연한 마음이 일어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가 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데보라 잭 지음, 이수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사람은 부모의 유전적 성품을 닮고 태어난다.나아가 자라면서 환경과 관계,학습에 의해 기질이 형성되어 가며 개개인의 성격 또한 외향적,중간형,내향적으로 굳어진다.그것은 부모의 유전적인 요인 즉 혈액형이니 가문의 분위기,기질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한 번 굳어진 성향,기질을 완전하게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현재의 성향과 기질 중에서 강점을 살려 인간 관계 및 사회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면 외향적,중간형,내향적인 사람들이 균형과 조형을 이루어 사회 공동체가 잘 흘러가지 않을까 한다.

 

흔히 내향적 내지 내성적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소심하다,완고하고 융통성이 없다,생각을 많이 한다,정에 약하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 왔다.그것은 내향적인 사람이 갖추고 있는 내면을 중시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먼저 나서고 말하기 보다는 군중 속에서 타인의 말을 경청하여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 한다음 자신의 의견과 신념을 말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한다.내향적인 사람들이 때로는 좌중을 리드하기도 하는 주도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온화하고 자신을 절제하며 먼저 나서지 않고 기다리고 사색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는 SNS 시대에 있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끼리 의견과 정보를 주고 받는 시대에 접어 들고 있다.내향적인 사람들이라면 마음 속으로 생각한 것을 다듬고 정리하여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자세로 소통과 관계 형성을 노력하고 있는게 특징이 아닐까 한다.외향적인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그리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지 않는 사이라도 생각이나 배려보다 우선 말이 앞서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 외향적인 타입이 아닐까 한다.물론 외향적인 사람이 상대방의 기분,상황,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호쾌하게 분위기를 이끌며 관계 맺기를 하려는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인맥을 쌓아 나가고 관계를 넓게 맺어 가려는 타입이 외향형이라고 한다면 소수의 인맥으로 깊고 길게 맺어 나가려는 타입은 아무래도 내향형이라고 생각한다.현대사회는 개인의 표현과 창의적인 관점을 중시하고 있기에 어쩌면 내향형인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시대가 아닐까 한다.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몰입하여 연구하여 학문적 내지 기술적인 업적을 이끌어 올리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의 투자,인내와 기다림이 요하기에 꾸준하게 다가서려는 타입은 내향형인 사람에게 맞지 않을까 한다.

 

반면에 외향형인 사람들은 조직을 이끌어 가고 통솔해 나가는 쪽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성향과 기질이 사람들을 넓게 포용하려는 의지와 신념이 강하기 때문이다.직업적으로는 정치가 및 기업가,스포츠맨이 이 방면에 어울릴것 같다.대범한듯 보이면서도 실수도 많은 것이 외향형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내향적인 사람도 외향적인 기질이 있고 중간형도 외향형과 내향형을 공유하고 있기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다만 통계적이고 인습적인 차원에서 보면 외향적인 사람들이 혼자있을 때보다는 여럿이 힘을 모아 공동의 목적을 이룩해 나가는데 유리하다는 점이다.

 

혼자 있을 때 집중하고 숙고하며 편함을 느끼는 내향형의 인간 타입은 생각을 많이 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디테일한 면도 불사하고 몰입하려는 장점을 충분히 살려 외향형과 중간형이 공동의 긍정적인 결과를 위해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려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면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중간형이든 서로 상호보완과 존중,균형이라는 감각으로 공생하는 사회 만들기가 이루어지지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의 역사담론 1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조선조 15대 군주였던 광해군에 대한 인식은 그리 넓지가 않다.선조의 뒤를 이은 군주로서 당시 명나라와 후금과의 등거리 외교 정책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고 조선 국내 사정은 사색 당파의 횡행과 관료들의 부패상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면서 정책 실천적인 면에서 판단이 흐렸던 인물로 각인되고 있다.또한 선조의 적자가 아닌 서자로 등극하는 과정에 많은 잡음과 암투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감지가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하나인 <광해군 일기>는 그가 폐위된 군주 시대의 실록이기에 실록이 아닌 광해군 일기로 명명하고 있으며,이 글은 <광해군 일기>에 기초하여 원문을 국문으로 번역하면서 광해군 시대의 전.후기의 시대상황을 저자의 해설과 함께 들려 주고 있다.그가 즉위하고 폐위되기까지(1608~1623)의 과정을 3기로 나뉘고 있다.1기는 즉위부터 1613년 계축옥사까지이고 2기는 1613~1618년 무렵까지이고 3기는 1618년부터 인종반정까지이다.

 

반정(反正)의 의미는 바른 길로 다시 돌아가 생활하자라는 의미로서 광해군이 군주로서 어떻게 치적을 하고 평가를 받았길래 중도하차하는 꼴불견의 폐위를 당해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1기는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 중심으로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대동법을 통해 재정 및 세금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는데,즉위초부터 임해군(광해군의 형) 옥사 문제가 커다란 흉사가 되었다.

 

2기는 대북 정권이 독주하면서 민생(대동법)을 외면한 채 백성들의 혈세로 궁궐을 짓고 경연보다는 친국에 맛을 들이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사건이 2기에 발생했다.3기는 불안안 정정이 극대화되면서 윤선도,이이첨,허균 등의 사대부들이 반목질시하면서 악화일로의 상황을 수습할 능력도 없었을 뿐아니라 명의 뒤를 이은 후금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도 수습하려는 의지와 노력도 보여 주지 않았기에 그는 인조에 의해 폐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인종 반정이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세금,부역,신분제의 개혁이 개량적 조치로 폄하되고 탈주자학,반주자학의 논리가 풍미했는데 근대주의자들의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 탓에 300년 동안 조선은 상황의 타개 능력,시스템의 혁신 능력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의 문제가 아닌 20세기 근대주의자들이 아닌가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그리고 광해군은 일제 식민사관에서 조선 후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출발 시점에서 운 좋게 부각되는 존재가 된다.

 

광해군 대 굵직한 현안에는 정인홍이 관여하고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부각하면서 결정적인 인조 반정의 구실을 사게 되었다.대표적인 것은 의병을 핑계로 지방에서 세력을 부리고 괴이한 학문을 주창했고, 이언적과 이황 배척(회퇴변척),사친을 종묘에 들이는 데 앞장서고,경연에서 풍수설을 하는 시문용을 추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고,계축옥사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악언을 퍼붇고,인목대비 폐모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적 외교는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매관매직,여알 정치는 알파로 따라 왔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궁궐 토목 공사의 진행과 더불어 파주 교하로 수도를 옮기는 논의가 광해군 4년(1611년)에 있었다는 점이다.한양의 기운이 쇠진되었으니 술관 이의신(李懿信)의 말에 따른 것이었는데 중론이 한꺼번에 일어나 성사가 되지 못했다.교하의 지세는 풍수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평사낙안(平砂落雁)의 형국이라고 한다.현재는 교하신도시로 지정되어 토목 공사가 한창이다.

 

허약한 왕으로 인식되는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피폐해진 민생과 재정,사회적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론 모든 것이 정지 내지 후퇴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민생 회복,사회 통합,재정 확보,군비 확충,문화 발전 등 내치에 더욱 힘을 썼어야 성군으로 숭앙을 받으며 여세를 몰아 동아시아 외교에서 역량과 운신의 폭이 넓었으리라 생각된다.광해군 재위 15년이 남긴 실기(失機)의 업보는 현대 한국 사회의 대통령을 맡고 이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