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세상에서 용감하게 살아가기 - 당당하게 버티고 필요할 때 행동하는 용기강화의 심리학
로버트 비스워스 디너 지음, 민지영 옮김 / 한빛비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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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이나 난국에 대처하는 숭고한 마음가짐 또는 정신'을 용기라고 한다.

 

요즘에는 삶의 거주지가 아파트,빌라,타워팰리스,단독주택 등 사각을 이루는 형태의 건물들이 늘어나고 경비,CCTV 등이 불철주야로 사람을 감시하는 세태이다. 이웃과의 소통과 관계는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어쩌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마지 못해 건네는 인사가 전부이고 이웃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조차 없다.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도 종종 가정불화로 큰 소리가 나고 혹간 과음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제 집을 찾지 못해 다른 집 문을 두드리고 난리가 난 적이 있다.피해를 당한 이웃집은 가해자가 문을 두드리고 욕설을 퍼부어도 가해자와는 상종을 하지 않고 곧바로 경찰을 불러 뒷수습을 맡긴 적이 있다.서로 이웃간에 왕래와 유대관계가 있었더라면 서로들 나와서 가해자를 혼을 내고 크게 주의를 주었을텐데 모두 무관심이고 '강 건너 물구경'하는 식이다.

 

과연 용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한 직관적인 결단에서 나오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용기는 '도덕적 가치가 있는 미덕'으로서 개인 한 몸을 희생하여 타인과 사회를 위해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행위가 아닐까 한다.용기라는 행위는 때론 신변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고 때로는 타인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해야 하기에 겁이 많고 내성적인 사람보다는 활달하면서도 다수를 위한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이 제격이 아닐까 한다.또한 다수의 삶의 질을 높이고 상생을 도모하기 위해 남들이 걷지 않을 길을 진보적이고 긍정적으로 앞서 나가는 사람도 용기있는 사람이고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용기를 자극하는 사회문화권별 동기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그것은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므로,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들의 존엄성을 지키고 존중해야 한다는 존엄성 문화,내 행동이나 남의 행동이 나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명성과 인격에 흠이 된다면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명예 문화,일을 제대로 못했거나 두려움,위험에 맞서지 못할 경우 타인의 눈을 의식해 자신감을 상실한다는 체면 문화 있다.

 

그런데 용기있는 사람이라면 선천적으로 용감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용기는 습관.실천.학습이 가능한 기술'이라는 진리를 상기할 수가 있다.그것이 용기를 자극한 사회문화의 동기에서 비롯된다.가정,사회의 학습을 통해 용기는 얼마든지 배양되고 유사시에 발현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몸을 던져 싸우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경찰의 추격전,전쟁터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전사들의 영웅적인 모습도 용기있는 행동이지만 여성들에게도 용기있는 행동이 들려 오고 잇다.2007년 베커와 이글리 팀이 신장기증을 조사한 결과 신장기증자 중 57%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나아가 인간이 진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논리적 사고에서 벗어나 초자연적 미신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보는데,스트레스와 불안감이 높을 때 사람들이 마법적 사고에 더욱 많이 의존을 한다고 한다.그것은 용기를 내는 데에 마법(魔法)적 사고만큼 좋은 방법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이러한 용기는 기업간부나 경찰관에게서 용기지수가 많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런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위험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접고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 용기하면 떠오르는 말이 두려움을 모른다,영웅적이다,자기를 희생한다,자신감이 있다,헌신적이다라고 한다.용기의 유형이 개인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칙에 따르면서 성실하게 용기를 발휘하기도 한다.용기를 발휘할 때에는 대가가 따르기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용기는 사회적,문화적 환경 요인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학습에 의해 얼마든지 용기있는 행동을 발휘하게 되고 다수를 위한 가치부여와 진보적 문명발전에도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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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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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작가의 글은 남성분들보다 여성분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그것은 사연이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으며 동적인 이야기보다는 정적인 이야기들이 여성들에게 더욱 어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렇다고 남성팬이 적으냐면 그렇지도 않다.나 역시 신경숙작가와 동향이고 거의 비슷한 연배이다 보니 언어적인 면이나 어릴 적 비슷하게 살아 왔던 환경적인 요소가 매우 친밀하게 다가오며 그 기억과 추억이 새록새록 내 몸과 마음 속으로 깊게 침잠하고 있기에 좋아하는 이유이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그 객지도 고향이 되어 버리고 까마득한 옛 일은 꿈 속에서나 가끔 나타날 법하다.현실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깨지고 마모되면서 사람다운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한다.그런데 신경숙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어린 시절 태어나 자라던 고향 부모님,형제,산천의 모습들을 선연하게 비춰주고 추억 속으로 푹 빠지게 하는 정겨움이 충만하다.나아가 사람과의 관계망을 톡톡 건드리는 것이 아닌 담 너머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하는 모습을 갓 시집 온 아낙네가 수줍은 모습으로 바라보고 마음 속으로 삭히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번 <종소리>에는 6편의 단편이 소개되고 있다.내용은 제각각 사연과 특색이 있다.

 

표제작 종소리는 17년간 잘 다니던 회사에서 구조조정된 남편이 마치 날아 온 새와 같다는 종소리에서는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왔건만 살가운 기색은 없다.남편이 일벌레가 되어 버리고 아내는 조용히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정작 부부간의 스킨십다운 스킨십이 없었던 듯 아내는 그 간 고층빌딩에서 일하던 남편의 모습만 그려 보는 부부간의 진정한 관계망을 집으로 날아온 새에 비유하는 것 같다.우물을 들여다 보다 이사를 하던 한 여자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우물 속에 비친 빛이 죽은 사람의 넋이고 그 넋이 다시 환생하여 돌아오리라는 몽환적이고 고독한 분위기가 감돈다.

 

물속의 사원은 주인공 다방여자가 타인의 건물을 빼앗으려 휘두른 폭력으로 일자리를 잃고 타인과의 유대감마저 멀어져 관계가 단절되는 이야기이다.달의 물은 작가의 고향 언어가 물씬 배어있다.오빠의 이혼으로 손녀를 키우는 조부모의 애틋한 얘기와 화자의 귀향기가 현실적으로 큰 갭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혼자 간 사람 한 작가의 죽음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2002 월드컵의 열기와 고독이 서린 한 작가의 얘기를 들려 주고 있다.

 

부석사는 한 오피스텔에 거주하면서 몇 마디 주고 받은 걸로 남녀가 꿀꿀함을 달래려 부석사로 향하는데 목적지 부석사에는 당도를 하지 못하는데 두 개의 사연이 있다.공통점은 서로 친숙하지 않은 관계라는 점이다.1월 1일이라는 특정 날짜 두 명 모두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을 했지만 내심 만나고 싶지 않아 부석사를 택했다는 이야기이다.이야기 속에는 애완견이 동행하는데 서먹한 관계를 완화해 주는 미메시스적(춤.몸짓.얼굴표정 등에 의해 인간.신.사물 등을 모방) 상징물로 작용한다.

 

6편의 단편이 고독한 현대인을 상징하기도 하고 관계 단절,소통의 부재를 작중화자로서 그려 내고 있다.글의 분위기가 마치 옆에서 관전하는 듯한 생동감이 넘치기도 하고 (약간은)몽환적이고 신화적인 느낌도 있었으며 사람과 환경과의 융화해 가려 하지만 그 현실적이든 감정적이든 그에 미치지 못하는 한계상황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대인의 고독이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에서 빚어내는 관계의 단절,원만하지 않은 소통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따뜻한 분위기보다는 차가운 분위기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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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 이슬람세계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바삼 티비 지음, 유지훈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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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는 56개국에 17억 인구 갖고 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인구에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흔히 중동을 비롯하여 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동남아 등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이슬람교도인들까지 합하면 셀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이러한 이슬람교는 알라 신을 믿는 고유의 신앙을 떠나 요근래에는 이슬람권에 있는 국가들이 이슬람주의로 정신무장화하여 전세계로 세력을 뻗쳐 나가려는 데에 세계의 이목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한다.첫째 믿음의 기둥인 샤하다(알라 신께 순복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를 선언,둘째 믿음의 기둥인 일일기도를 드리며,셋째 믿음의 기둥인 라마단 성월의 금식,넷째 믿음의 기둥인 가난한 사람에게 구호물자 지급,다섯 째 믿음의 기둥인 형편이 넉넉하여 메카를 순례함으로써 진정한 순례자,즉 남성(하지)과 여성(하자)이 되는 것이다.이슬람주의위 주된 시놎는 샤리아(이슬람법)에 의거한 정교일치인데,이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신앙이라는 미명하에 정치체제의 구색을 맞춘 것이다. - 본문 -

 

중세 기독교인들에 의한 십자군 운동이 이슬람 세력과 일대 격전을 치르면서 양대 세력은 아직까지도 커다란 앙금으로 남아 있다.이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반시온니즘에 입각하여 유대인들이 세계에서 경제영향력을 제패하려는 데에 시기와 질투,제동을 걸려는 의도가 다분한데,그 단적인 예가 9.11테러사건이다.특히 "테러와의 전쟁"을 위협하는 지하디스트 조직체는 비국가 주동세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자 지하드운동의 세력과 무슬림의 지원이 강화되어 이란에도 이슬람주의 집단의 지원처가 수립되고 미.이라크 전쟁으로 추악한 후세인 독재정권을 몰락했으나 권력의 공백기를 이란이 채우면서 지역 열강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특히 9.11테러 사태는 이슬람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중동을 민주화하려는 미국 정책 입안자도 혼동의 원인이 되었는데 1980년대 침략한 소련을 상대하던 아프간 이슬람주의 단체 무자히딘을 미국이 지원한 것이 탈레반으로 이어지고 부시정권은 지하드 테러를 지원한 무슬림을 와해시켰지만 지하드운동을 발본색원하지는 못했다.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사태가 2001년 미국을 비롯하여 2004~06 유럽에서 벌어지고 그것은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지하드(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한 성전(聖戰)) 외에 다른 명분은 없었다고 보여진다.

 

 

이슬람교는 이집트,시리아 등의 수니파와 이란.이라크의 시아파로 대별되는데 수니파가 압도적으로 많다.이슬람율법(샤리아)에 따라 이슬람교를 정치적 색채가 짙은 이슬람주의화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샤리아가 가자는 의미는 경전(코란)과 관계가 깊고,이슬람국가의 민사법 및 제의적 율례를 위한 법이고,이슬람교가 이슬람주의로 정치화되는 과정에서 발전한 이것은 헌법으로 성문화하여 국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샤리아가 이슬람국가의 정체성과 이슬람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슬람국가들이 민주 정치가 정립되려면 이슬람주의식 샤리아의 부활 이상으로 무언가 필요한데 다원주의 문화와 시민 사회에 대한 철학도 감안해야 하지만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요원한 것으로 보여진다.그들은 민주적 절차인 "선거를 당장" 치르고 싶어 하지만,시민 사회의 라이프스타일과 민주적인 다원주의 가치관은 배격하고 있다.팔레스타인의 하마스,이라크의 최고 이슬람 이라크 위원회,레바논의 헤즈볼라,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튀니지의 알나하다,요르단의 이슬람 행동전선 및 알제리의 FIS(이슬람 구국전선)는 민주정치의 탈만 썼을 뿐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슬람주의 그 자체이다.

 

이슬람국가의 풍성한 문화 유산과 이슬람교 합리주의의 숭고한 업적은 고전 헬레니즘 토대를 두고 있다.헬레니즘이 없었다면 이슬람문명의 번성은 상상을 할 수가 없다.그런데 이슬람문명의 지식이 주로 지식인의 정통성과 그 조직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는 점이 안타깝다.그들에 의해 이슬람교의 헬레니즘화에 의해 시작된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고,이방 과학 이나 고대인의 과학과 이슬람 과학을 서로 대립시키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시리아에서 출생한 저자는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의 유산이 아니라 꾸며낸 전통에 근거하여 이슬람교를 정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지하드(성전) 세력이 아직도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자는 "급진파 이슬람교"와 "이슬람교 부흥주의" 대신 정치적 이슬람교,이슬람주의,종교적 원리주의라는 신개념을 제안하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전체주의적으로 비춰지고 있는 이슬람주의자들의 향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그것은 세계 평화의 구축과 상생,정치적 균형과 조화가 중요한 싯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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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를 위한 심리상담
로버트 드 보드 지음, 고연수 옮김 / 교양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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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나 사물을 내세워 풍자나 교훈을 안겨 주는 우화(寓話)는 우선 친근감이 든다.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나 사물이 위주가 되기 때문이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동물을 내세운 글을 많이 접하지를 못해 주변머리는 없지만 동물이 갖는 신화,전설,상징성에 비추어 볼 때 글을 쓴 작가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는 읽어 가는 도중에 쉽게 간파할 수가 있다.

 

어릴 적 초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기억된다.당시 내가 다니던 시골은 전깃불도 철길을 사이에 두고 한 쪽은 전기가 들어 오고,내가 살던 마을은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전봇대만 세워진 채 전기 공급은 차일피일 미루다 몇 년 뒤에 전기가 들어 왔다.아무튼 철길 한 쪽 마을(학교를 포함)은 문명의 혜택을 일찍 맛을 보고 비록 흑백 텔레비젼이었지만 학교 교무실에는 묵직하면서도 눈요기가 되는 TV가 있었다.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매주 한 번씩 만화영화(제목은 기억이 안 남)를 보여 주었는데,담임선생님을 따라 졸졸 교무실 나무 바닥에 앉아 만화영화를 보았다.그 만화가 눈이 톡 튀어 나온 두꺼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두꺼비 친구들이 꼭두각시가 조종하는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를 안겨 주었다.

 

이 글은 주인공 토드(두꺼비)를 내세워 토드가 말썽을 피우고 사회적 물의를 빚으면서 감옥생활을 거치고 토드 내면에 어떠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지를 심리상담사 헤런과의 주고 받는 이야기 속에서 토드의 내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면이 완화가 되면서 정상적인 사회 우등생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토드의 친구들인 두더지 몰,물렛 쥐,너구리 배저 아저씨 등과의 관계도 마치 인간의 일상과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다가와 읽는 재미가 솔솔했다.

 

사회의 법과 규칙을 어기고 긴긴 감옥생활을 마치고 보다 나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심리상담사 앞에 앉은 토드는 처음에는 자신만의 생활방식으로 가득차 있어 심리상담에 쉽게 적응을 못하지만 친절하면서 자상한 상담사의 안내에 따라 그가 갖고 있는 분노,슬픔,공포가 여러 차례 상담을 거쳐 자신을 제대로 판단하고 너그러우며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의 자아 상태,부모의 자아 상태,어른의 자아 상태라는 대목이 인상적인데 부모의 자아 상태는 부모가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정신적 교육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해지는데 그것은 이성적인 면보다는 그저 편한 상태인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언어,행동이 많다 보니 나쁜 가정환경하에서는 아이가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크게 물려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신념과 가치관을 더욱 함양시키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혁신을 위해서는 어른의 자아 상태가 매우 중요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토드 홀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제법 유복한 삶을 살아 가던 토드는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서 편협하고 잘못된 생활방식으로 인하여 법의 제재를 받았지만 심리상담사,베저 아저씨와의 수차례에 걸친 상담,조언 등을 들으면서 토드에게도 몰라보게 바뀐 삶을 스스로 느끼게 된 점에서 훈훈한 느낌마저 들었다.사람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잘못된 생활습관,방식은 쉽게 고쳐지지 않겠지만 유연한 사고방식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배우고 익히려는 태도와 자세를 갖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행복한 삶으로 바뀌고 삶의 질도 고양되어 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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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 - 토플러가 말하는 제3 물결 정치학
앨빈 토플러 & 하이디 토플러 지음, 김원호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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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인생을 살지 않았지만 유년기의 농촌의 공동체 생활,1970년대 산업개발로 인한 굴뚝공장의 증가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 서비스 업종의 증가를 몸으로 느끼게 되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컴퓨터,SNS 등의 탈산업화를 맞이하게 된다.농업을 위주로 하던 농경시대는 이웃간의 품앗이 등 상부상조 정신이 강했고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는 공장으로 몰리고 서비스 산업으로 옮겨지면서부터는 육체노동보다는 사무직 및 대접객 업무가 번성하게 되었다.나아가 요근래는 탈서비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지식노동 및 재택근무 형태가 빈번하게 되었다.시간이 바뀌면서 시대의 흐름,직종의 변화도 급물살을 타게 된다.

 

한국 현대사를 보더라도 해방후 이승만 정권부터 노태우정권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보여주는 정책만 다를 뿐이지 일제 잔재색이 짙은 경직되고 권위적인 체제 유지가 강했고 국민들과의 원활한소통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의식있는 인사,진보세력 등에 의해 부단한 민주화 요구,항쟁,희생의 댓가로 정치민주화를 이룩해 낼 수가 있었다.그러나 정치민주화 역시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보수 및 진보,지역색깔 등으로 인해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농경사회에서 탈산업화시대에 접어 들고 있는 현대사회에 분명 개개인의 정치에 대한 의식구조도 많이 바뀌었다.특히 대량 생산,대량 소비,대량 교육,핵가족 시대에서 가족,보건,도시,가치관 등에 변화가 심하여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그것은 돈과 물력을 앞세운 신자본주의가 만든 결과이고 사회 구성원 간의 위화감이 크다는 점이다.특히 미국발 리먼 브러더스(부실자산을 이용한 무한 주택담보 대출) 사태로 한국의 경제까지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인데,중산층이 무너진 상황에서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감내해야 하는 체감지수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소수 부유층이 절대 다수계층에 대한 배려,상생의 실천을 하지 않고서는 한국 경제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사회구성원 간의 위화감은 더욱 커질 것이 불을 보는 듯하다.

 

미래예측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앨빈 토플러는 현대 사회는 가족 구조가 해체되고 매스미디어는 탈대량화되고 있으며,개개인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다변화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 기존의 <제3 물결>,<전쟁 반(反)전쟁>,<권력 이동>에서 가져온 내용들이고 현시대에 맞추어 앞으로의 정치방향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들려주고 있다.

 

역사의 진행 속도가 빨라지면서 정치,경제 등의 분야도 새로운 삶의 방식과 더불어 새로운 행동양식을 요구할 것으로 보여진다.당연 표준화,획일화,중앙집권화는 붕괴될 것이고 자원과 돈과 권력의 분산화를 촉진할 것이다.개인과 사회,국가의 체제,시스템이 이렇게 변모해 가는 상황에서 유연한 사고와 행동방식,상생하려는 의지와 실천이 갖지 않고서는 변화하는 시대에서 도태될 것이 뻔하다.시대의 흐름에 맞춰 미리 준비하고 당당하게 국민들 앞에서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정치지도자만이 신뢰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리라 생각한다.

 

미래변화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컴퓨터 설비,로봇,전자정보 시스템 등에 뒤쳐지고 효율적인 조직으로의 구조조정에 늦은 기업들은 더 빠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패하고 대량해고와 기업 부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이들은 외국과의 경쟁,고저 금리,지나친 규제가 문제라고 변명을 하고 있다.미래에 대한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우매함의 발로라고 생각하며,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래계획은 탈과나료주의 및 탈공장 모델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앨빈 토플러가 밝히고 있는 제3의 물결 정부의 요지는 주류가 아닌 소수자들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고,국민에 의해 뽑힌 정치인들을 통한 정치 참여와 일반인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반직접민주주의이고,의사결정의 부하를 분산하고 의사결정으로 인해 영향받는 사람들에게 의사결정 권한을 이양해주는 것이며,산업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들과 제3의 물결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세력들 사이의 갈등을 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신자본주의가 기업을 살리면서 생산과 소비 등에 활성화시키려는 좋은 면도 엿보이지만 실제 속을 들여다 보면 소수계층을 위한 실질적이고 편협한 정책이 많다.사회구성원 간의 위화감을 해소하면서 상생을 도모하는 정책드라이브가 다음 정권에서는 확고하게 펼쳐지기를 기대한다.특히 부의 분배,(보편적)복지정책 실행,고용창출,노후문제 등에 주력해 주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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