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도사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2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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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리퍼 푀치작가의 <사형집행인의 딸>을 읽으면서 중세유럽의 엽기,광기로 넘쳐나는 마녀 사냥식 재판이 색다르면서도 흥미를 더해 주었다.그 감흥과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올리퍼 푀치작가는 한 신부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계기로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까지 합류하면서 스토리는 흥미진진하게 흘러 간다.때는 바야흐로 1660년대이고 독일 바바리아주를 배경으로 하면서 교구,수도원 등이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가정부가 준 꿀이 발라진 도넛을 먹고 복통을 일으키면서 토사물을 내뱉으면서 성당 안 납골당을 덮은 석판위까지 기어가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신부 코프마이어가 죽었다는 소식들 듣고 달려온 의사 지몬 앞에 새겨진 문구는 "세속의 영광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었다.아울러 가정부는 자신으로 인해 신부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아닌가 하고 안절부절 못하는데 한편 신부의 여동생 베네딕타는 오빠의 사인(死因)이 무엇인가를 놓고 의사 지몬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한다.지몬의 연인인 사형집행인의 딸 막달레나는 지몬이 신부 여동생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불안해하고 질투심을 갖기도 한다.

 

 한편 십자군 전쟁 때 작은 기사단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했던 템플기사단은 교단의 세력이 커지면서 재정운영이 좋아지는데,왕과 황제보다 부유해지지만 이것은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먼 템플기사단이 파멸의 원인이 된다.신부는 생전 십자가들을 덮어버리라고 했는데 그것이 납골당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놓고 신부의 살인범을 유추하기도 한다.17세기 독일은 열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지몬은 신부의 사인을 제대로 밝혀내지를 못하고 신부의 여동생 베네딕타도 속만 타들어 가지만 인내심을 갖고 신부인 오빠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밝혀 나간다.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은 법원서기의 명령에 의해 바바리아주 근처에 나타난 강도단 토벌에 나서고 강도단을 체포하여 처형을 하기도 한다.1권에서는 산파인 마르타가 마녀로 몰리면서 사형을 당할 위기에 놓였지만 산파의 도움을 받은 사형집행인의 가호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기도 했지만,2권에서는 산파의 역할비중이 크지는 않았다.다만 막달레나는 산파와 아버지의 약초 심부름으로 아우크스부르크에 간다.아우크스부르크에도 사형집행인이 있으며,중세유럽의 분위기가 바바리아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다.막달레나는 사공들에게 겁탈을 당하는 위기상황이 닥치는데,이 무리 가운데에는 사악한 강도단이 있고 그 안에는 템플기사단,검은 수도복을 입은 검은 그림자가 길게 뻗쳐 있었다.검은 수도복에는 가로대가 두 개나 있는 십자가가 있다.검은 수도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가로대가 두 개나 있는 성십자가는 템플기사단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를 내내 생각케 한다.

 

 성 로렌츠 성당의 신부 코프마이어의 돌연사가 계기가 되어 전개되는 <검은 수도사>는 다양한 인물과 중세유럽의 사회상,미스터리한 템플기사단의 보물과 검은 수도사 등이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올리퍼 푀치작가는 사형집행인의 후손으로서 선조들로부터 또는 중세유럽의 역사자료를 취합하여 이 글을 구상했다고 하는 만큼 사실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또한 중세유럽의 성당과 묘지 등과 관련한 작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어 함께 읽으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의사 지몬과 막달레나가 막다른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내심 신부 여동생과 어떠한 관계로 진전이 될지 내심 호기심이 일었다.사형집행인 야콥 퀴슬의 인간적인 면모도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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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 - 법정에서 바라 본 세계사의 극적인 순간들과 숨은 이야기
L. 레너드 케스터 외 지음 / 현암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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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법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복잡한 절차와 긴 시간을 요하는 재판절차에 의해 최종형량을 언도하면서 죄값을 치르게 마련이다.성문법이냐 불문법이냐에 따라 재판 과정에서 배심원이 해당 사건에 대해 심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사회가 복잡다양하고 당사자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법의 심판을 받은 인구가 늘어나고,사회적 비용도 비례증가하고 있다.국가의 최고사법기관인 헌법을 위시하여 민.형사소송법,상법과 관련한 재판 건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사회악을 비롯하여 개인의 물질적 이해관계는 식지를 않고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당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 테두리 안에서 인간의 삶은 불공평하기도 하고 부지불식간에 위법을 저지르기도 하며,지능범과 같이 법망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무리들도 있다.이것은 비단 개인이 저지르는 위법행위를 넘어서서 다수가 공모를 한다든지 또는 조직적 의도적으로 술수를 도모하려다 사법의 제재를 받기도 한다.세월호 참사가 빚은 한국 전체의 허술한 안전망과 이를 바로 잡으려 사회전체가 발칵 뒤집혔지만 몸통의 정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변사체로 발견되어 정신적 피해를 입은 유가족들은 또 한 번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역사는 무사하게 흘러가지를 않는다.지구촌은 하루에도 부지기수의 사건.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범법행위에 대한 죄목도 다양하기만 하다.정치권력을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범죄가 성립하기도 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한국사회는 유교적인 가부장제와 군대문화가 아직도 상존하고 있기에 표현을 잘해야 한다.현정부에서는 아직 민간인 사찰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지난 MB정부는 통치자의 비위를 거스리는 표현을 명예훼손 및 괘씸조로 몰아붙여 민간인 사찰이라는 불편하고 거북하기 이를데 없는 행태를 보여 주었다.일반인의 시각으로 보면 권력과 통치라는 것이 무엇인가,나라를 다스리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숙지하여 민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것을 망각하고 구태를 보여 주었던 것은 정치민주화가 퇴행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글이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판결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아 놓았다.판결 31가지는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신의 뜻을 어긴 죄목으로 소트라테스의 재판이 이루어지고,근래(2011년)일본 벤처 기업 호리에 다카후미에 대한 재판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읽다 보니 권력의 정점에 있는 통치자의 비위를 거스려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며,인종문제와 같이 편견과 차별에 의해 재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또한 유럽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 엽기,광란의 판결도 있으며,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재판도 있었는데,이는 통치자의 판단미스와 편집증적인 사고가 문제였다는 것을 여실히 밝혀준다.나아가 2차세계대전의 전범(戰犯) 및 냉전의 시대에 스파이 혐의로 몰린 이들의 재판을 거쳐 금전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던 리베이트사건,사기극 등을 들려 주고 있다.특히 폰지 사기극의 주범인 버니 메이도프는 판결형량이 150년이라고 하니 옥중에서 삶을 마무리해도 형량이 까마득하게 남을 거라는 자조가 저절로 나온다.일본 총리를 지낸 다나카가쿠에이는 비행기 납품회사 록히드사로부터 리베이트조로 받은 뇌물사건이 특수부의 끈질긴 조사에 의해 현역 총리가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한국의 사법계라면 과연 일본처럼 최고 통치권자에게 비수를 들이댈 용기와 담대함이 있을까?

 

 인류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재판과 판결들이 수긍할 만한 것들은 아니다.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시대착오적인 사건도 있고,권력을 남용한 측면도 많다.그런데 세인들의 모범을 보여야 할 공직자 및 고위층들이 돈과 물질에 너무 현혹되어 독서망양과 같은 우(愚)을 다시는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아울러 버니 메이도프처럼 개미 투자자들을 되풀이 기만하는 행위는 강력한 정부 규제가 뒤따르고,사법계는 어느 쪽에도 흔들리지 않고 엄격한 법의 잣대로만 재판이 이루어지게끔 한 점의 의혹이 없는 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그간 세계적인 판결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알고 있던 부분을 정확하게 알게 되고,미처 몰랐던 판결에 대한 부분은 신선한 감각으로 판결과정을 접할 수가 있어 법의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과 인식이 확대되었다.아울러 세계사 지식까지 두루 넓힐 수가 있어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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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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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좁은 방 두개에 열 식구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순박하고 성실하기 그지없던 조부모,부모님 밑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말썽 피우지 않고 무난하게 성장했다.내 형제자매들은 지금과 같은 언감생심 사교육은 생각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가 전부였고 좀 욕심을 낸다면 전과나 문제집을 통해 시험준비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의 기억,국민학교,중학교시절 그리고 조그마한 울타리를 벗어나 도회지로 통학하던 고교시절과 서울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상경을 하고 군생활과 지금의 사회생활까지 삶은 도도하게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생각해 보니 지나간 어린 시절은 이렇다 하게 보잘 것은 없었으나,외상후 트라우마와 같이 장기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들이 새록새록 아니 자주 상념에 잠길 때가 있다.아마 나이가 들어가니 앞으로의 삶을 거창하게 꾸미기보다는 그간의 삶 속에서 겪었던 경험과 체화인지가 내 삶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가를 되새겨보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좋았던 때,후회스러운 때,기쁨과 환희도 넘치던 때,슬픔으로 젖어 있었던 일들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기도 하고,꿈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어린 시절을 대신해 주기도 한다.

 

 유년시절,청소년 시절은 한국이 새마을운동과 같은 전국민이 하나가 된 적도 있었지만,꽁꽁 얼어 붙었던 정치이념과 사상에 대한 지식과 비판의식이 없었던 탓인지 획일적인 학교교육에 순응하는 것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다.내가 성장하던 곳은 산촌이었기에 전깃불이 늦게 들어오고 문화생활도 쉬이 접할 수가 없어 좀 잘산다는 이웃과 비교가 되어 어린 마음에 괜스레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했다.국민학교 교사(校舍)는 일제가 남긴 목조건물이었다.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는 계속 일제식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복도바닥,교실바닥이 원목으로 되어 있어 늘 쓸고 닦기를 밥먹듯이 되풀이했다.닦을 때에는 양초로 먼저 칠하고 마른걸레로 박박 문지르고 나서 담임이 오케이 하면 종례식을 하면서 귀가를 했다.

 

 집에 오면 계절에 따라 (부모님이 외지로 장사를 나가셨기에)할머니께서 만드신 각종 밑반찬,찌개,전(적),찐감자,찐고구마가 식사이기도 하고 간식이기도 했다.간장,된장,고추장은 발효식품으로서 할머니 솜씨는 최고였다고 자부한다.간장,된장,고추장으로 만든 각종 음식은 간간하면서 칼칼하고 구수한 내음이 코끝을 간질이면서 입맛을 한층 돋구었다.고기는 추석,설이 아니면 쉽게 구경을 할 수가 없었는데,나는 할머니께서 숯불에 구운 재래김이 너무 맛이 있어 어른들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날쌔게 숟가락에 밥을 얹어 구운 재래김을 찍어먹다 가끔 혼이 난 적이 있는데 얌전하게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다간 김 몇 장도 입에 대지 못한 채 숟가락을 내려 놓아야 하기에 일단 구운 재래김이 밥상에 올라오면 무조건 김부터 입에 대는 것이 수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께서는 3대독자이시고 할머니와는 스무세살 때 결혼을 하셨다.할머니와는 아홉 살 차이가 나셨는데 두 분의 성격이 모두 완고하고 고집이 쎘지만 할아버지는 모든 일을 속으로 생각하면서 일단 마음정리가 되면 행동으로 옮기는 반면,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행동에 쫑알쫑알 불만을 드러내시고 잔소리도 참 많이 하셨다.할아버지께서 3대독자이시고 일찍이 증조부모님을 여의셔서 홀로 되시고 (누군가 중매를 섰겠지만)할머니와 혼인을 하면서 서 너번을 이사를 왔다 갔다 하셨던 것으로 안다.남부여대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두 분이 어렵게 사시던 시절이 타임머신을 타고 들여다 보는 것처럼 애잔한 삶이 눈물겹기만 하다.들은 얘기인데 젊은날 집도 절도 없는 두 분이 이모할머니댁에서 더부살이를 하고,가을날 초가지붕을 엮다 발을 헛디뎌 마당으로 낙상을 하셔서 엉덩이를 많이 상하시고,일본이 상수원을 건립한다는 명목하에 하루가 멀다하고 보수없는 강제부역을 하셨다는 할아버지는 단신(短身)이지만 탄탄한 골격에 근육이 넘쳐 나셨다.1900년생으로서 1982년에 작고하셨는데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도 지게질을 하셨던 머슴이셨다.

 

 아버지는 총 팔남매를 두셨다.내 밑으로 생긴 남동생이 아침에 태어나 해저물 무렵 세상을 떠나고,여덟살 밑인 여동생이 세 살 때 덜 익은 감을 먹고 체해서 그만 세상을 떠났으니,총 육남매가 남은 셈이다.동네 가구수는 삼십호 정도이면서 우리집은 동네 가장 중심에 놓인 명당이었다.그래서인지 일제때 심은 은행나무(수컷)가 아름드리 연리지가 되어 사,얼축 높이가 사오십미터는 되었는데,이장이 우리 은행나무에 마이크를 매달아 마을회관에서 모임이나 공지사항이 있을 때에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그런데 은행나무는 할아버지가 작고하시고 도회지로 이사오면서 누군가에서 팔았다고 한다.아버지는 남아선호가 강해서인지 여자는 시집가면 남의 집 식구가 된다면서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았다.위에 누나와 밑에 여동생 둘이 배우고 싶고 포부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완고한 뜻에 부딪히고 반항기인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세 자매가 풍파를 일으킬 줄을 미처 몰랐다.누나는 집을 나가고 밑의 여동생들은 따로 자취를 하겠다고 돈을 요구하는 통에 집안 분위기가 한동안 삼엄하기만 했다.나는 남아선호사상을 밀어 붙이는 아버지를 둔 덕분에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생겼지만 누나,여동생들에게는 미안하기만 할 뿐 어떻게 말을 건넬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폭풍과 같은 시기도 잔잔한 파도로 되돌아 오면서 평정을 되찾았지만 사,오십이 된 누나,여동생들은 은연중에 봉건적이고 남아선호만 내세웠던 아버지를 탓하기도 한다.그렇다면 내가 신분과 명예,경제적 수입이 높아서 누나,동생들을 다독여 줄 여유라도 있다면 사람 노릇 좀 할텐데 그러지를 못해 마음이 울적하기만 하다.다행히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매형,매제를 두어 위안이 된다.

 

 성석제작가의 이번 글을 읽노라니 내 유년시절과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살아왔던 지난 시절의 편린과 단상들이 너무도 흡사하다는 동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그 시절 그 속으로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육남매를 둔 만수의 집안 이야기부터 만수가 사회인이 될 때까지의 여정을 너무도 잘 직조해 냈다.소설이지만 해방직전부터 베이비붐 세대들이 겪었을 법한 집안 이야기,학창시절 이야기,농촌에서 도회지로 돈벌러 나간 아가씨들의 이야기,운동권학생들이 겪었을 후유증 등 직간접적으로 내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과 같은 동질성을 느끼게 한 이야기였다.특히 만수의 집이 산골인 개운리이고 자연과 호흡하면서 살아가던 시절은 감명을 주기에 족했다.만석꾼 집안이면서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을 받은 만수의 조부가 오지인 개운리로 이사오면서 만수 일가의 사연은 잔잔한 물결이 일기도 하지만,격동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암흑의 터널로 빠지기도 한다.이는 한 가족사의 얘기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현대사의 굴곡과 부조리를 창 넘어 응시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누구나 투명인간이 되어 자신의 가족사를 누군가가 전해주는 것을 귀를 기울인다면 언제 어디서든 들려올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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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견문록 - 보르도에서 토스카나까지, 세계 최고의 와인에 담긴 문화와 역사, 반양장본
고형욱 지음 / 노브16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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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은 내게 와인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좋아하는 이와 함께 오붓하게 서로 잔에 ’짠’소리를 내며 시선을 마주하며 '위하여'를 외치며 한 때를 가져 볼 것을 기대한다.멋진 ’와인견문록’을 접하면서 와인의 고장인 프랑스,이탈리아의 포도밭 농장,와이너리 등지를 간접 체험하면서 와인의 역사와 문화,장인 정신,재배법등을 알게 된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포도를 재배하는 토양과 일조량, 배수 시설등의 재배 조건과 1년 내내 쉴 새 없는 농장주들의 포도 수확에서 압착기에 집어 넣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오크통에서 오랜 시간 숙성되어 세상에 나올때까지 굴같은 어두컴컴한 샐리라는 곳에서 진정한 와인으로 탄생되기까지 와인을 가꾸는 장인들의 정신은 찬탄해 마지 않을 수 없고,그들의 포도 재배는 몇 대를 이어서 전통 가업으로 계승되고 있다고 한다.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이 35~40년 정도라는 것을 새롭게 알았고 그 이상이 되면 늙어 건강한 열매를 생산하지 못해 뿌리 째 뽑고 2년 후에 그 자리에 다시 어린 묘목을 심어 포도 재배를 이어 나간다는 것이다.

 나아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DRC(Domaine de la Romanee-Conti) 와인 중에 로마네 꽁띠는 국내 출시 가격이 400만 원이 넘으며 라 따슈도 100만 원가량 나간다는 것...아무리 비싸도 선택받은 소수는 음미하고 감상하며 목을 축이면서 서로의 감정과 이성을 조율하고 나눌 것이다.세계 정상급들이 만나면 의례 값비싼 와인들이 정상들의 목을 멋지게 타고 넘어가는 와인이야 말로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국위선양을 톡톡히 하는 명예대사쯤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봤다.

 와인 명산지와 브랜드 아래와 같다.

 

보드로 : 무똥 로칠드.라피뜨 로칠드
부르고뉴 :
루이 라뚜르.도멘 드 로마네 꽁띠
샹파뉴(샴페인): 모엣 샹동.루이 로드레 
토스카나 :
안티노리
피에몬테 :
가야.라 스피네타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와인 문화가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지만 프랑스.이탈리아는 그들의 고유한 전통 숙성법,저장법을 고집하며 외화를 벌어들이고  포도 재배지는 이미 관광지가 되어 해외 각국에 견학의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특히 와이너리(와인을 숙성시키는 공간),빈티지(와인으로 만들어진 해)등을 보면서 섬세하고 치밀한 장인의 손놀림에 의한 와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끔은 좀 더 느리면서도 차분하게 와인을 즐기는 여유로운 삶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와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 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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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문학과 생애, 홍명희 그들의 문학과 생애 15
강영주 지음 / 한길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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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해방과 더불어 이념상 월북해서 북에서 생을 마친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에 대해 평소 관심은 있었지만 기회가 닿질 않던 중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민중의 삶,애환,언어,복장등을 천의무봉마냥 수작으로 알려져 있어,우선 홍명희의 삶과 문학,사상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좋은 거 같아 이 도서를 선택하게 되었다.

 1888년 충북괴산에서 구한말 명문 양반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집안이 사대부였던 것같다.영조때 영의정이었던 홍봉한등을 위시해 부친은 구한말 전북금산군수로 재직하기도 했다.구한말 어수선한 나라의 분위기하에서 그는 총명하여 [서경]등의 내용을 암송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거같다.또한 11세부터는 중국의 고전소설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는데 삼국지,수호지,서유기,금병매등을 일찍이 읽은 것이 후일 ’임꺽정’을 저작하는데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또한 당시 조혼의 풍습이 있었던 터라 그는 13세 되던해 명성왕후 민씨의 일족인 참판 민영만의 딸 민순영과 혼인을 하게 되고,후일 일본 유학을 하는 등 신학문과 신사상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부사이는 금슬이 좋았던 거 같다.


 그는 독서와 학구열이 대단하여 최남선과 함께 <소년>지에 서양문학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고 <학창산화>에서 문학~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이색적인 지식들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폭넓은 독서가 힘을 받은 것같다.사상적으로는 러일전쟁등이 한창이던 때라 "침통하고 사색적인" 러시아문학이 그에겐 어울린 거같으며 사회현실,인생 탐구,허무주의적 인간상에 끌려 하나의 그의 사상을 이루는 근간이 되기도 했으며,최남선,이광수,정인보등과 깊은 교류를 갖으며 당시의 문학세계를 모색하고 협의하면서 그의 지식과 사상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하지만 근본적으로 삶의 방향전환이 되었던 것은 부친 홍범식이 조선이 일본에 병탄하려는 소식을 접하고 자살을 하게 되며,장남 홍명희에게 남긴 유언(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에 따라 그는 부친의 유언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하며,3.1운동의 주모자로 괴산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는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한다.

  홍명희는 출옥 이후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몸을 담으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는데,1920년데에는 교사생활,대학출강,조선에스페란토협회에 가입.활동을 하기도 한다.동아일보,시대일보를 전전하면서 언론인으로서 고위간부직에 있으면서 사회적,국가적으로 책임을 다한다.그가 1928~1940년에 걸쳐 생애 수작으로 불리는 <임꺽정>은 탁월한 리얼리즘 역사소설로서 [학창산화]에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의식과 동서고금의 문문레 대한 폭넓은 식견,특히 언어.문학.풍속사에 대한 깊은 조예,사물의 디테일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며 등장인물을 각 계층의 전형으로서 형상화하고,서술적 설명보다는 장면 중심의 객관적 묘사에 치중하며 극도의 치밀한 세부 묘사가 백미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독특한 구성방식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더 쿠프린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일제에서 해방과 더불어 그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지만,미군정하 이승만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정치지도자들이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됨에 따라 그도 평양길에 오르게 되며,민족문제를 주체적이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회동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에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며 그가 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 북에 남게 된 경위와 내막은 분단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거 같다.홍명희에 대한 김일성의 환대와 존경,신뢰등이 그가 일제강점기등을 통해 보여준 양심적인 지식인,해방후 미국의 회유를 물리치고 애국적인 활동을 한 점을 높이 샀던 거같다.1968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북한의 고위직을 두루 맡으면서 역량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이념과 체제문제만큼은 남한과는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홍명희라는 인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이 도서를 통해 그의 가정환경,유년시절의 학구적인 자세와 독립운동,언론인으로서 보여준 존재,작가로서의 명성,그의 사상과 행보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의 삶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역사 인식까지 깊이를 더해 주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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