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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한 잔 ㅣ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울적한 금요일밤, 맥주와 하드보일드는 늘 단짝 친구다.
어린시절 마쵸 아버지의 폭압을 상처로 가진 탐정 켄지, 아름답고 섹시한데다 남자하나쯤 작신하게 해치울 수 있는데 남편한테는 맞고 사는 그의 파트너 앤지가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그래 이야기는 이렇다. 부패한 정치인, 거기에 얽혀있는 조폭들, 돈과 약을 위해서는 자식도 내다파는 인간들.
책 내내 겨우 22장의 사진때문에 두 주인공과 여러 사람들이 두들겨 맞고 죽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주인공의 생사뿐만 아니라, 약에 취해 정치인과 조폭들에게 이용당하는 가해자인, 어린 조폭들에게도 관심을 가진다.
보호받아야 할 작고 꼬물한 것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내전이 치뤄지고 있는 국가의 수십만(?수백만일지도 모른다)의 소년병들, 가족들의 한끼를 위해 이리저리 매춘을 위해 팔리어 가는 열살 남짓의 아이들, (그걸 사는 어른들) 하루종일 일하다 스물이 되기 전에 그 목숨이 다해버리는 어린 노동자들.
뭐 좀 산다는 미국이라도 다르지는 않은가보다. 알다싶이 부자와 가난한 자는 같이 있지만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 입는 옷도, 가는 곳도, 사는 곳도 다 다르다. 가난한 자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엉망이 된 자기 삶을 탓할 증오할 대상을 찾아 헤맨다. 그 대상은 여자가 되기도 하고, 흑인이 되기도 하고, 아시아 이민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국제중이니 특성화고니 성화니 부자집 녀석은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단 한명도 안만나고도 살아갈 수 있을듯 하다.
자, 없는 동네 사정을 들어보자. 여기 가난한 흑인지역에 사는 5살 로랜스를 보자. 엄마는 어린나이에 성폭력이 됐든 눈이 맞았든 로랜스를 낳았다. 그래도 정신이 제대로 박혔던 엄마는 청소부를 하면서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보려고 했다. 그러나 알다싶이 로랜스가 '제대로'(조폭이나 마약쟁이나 실업자가 되지 않는 것) 크기 위해서는 백만서른가지 암초를 피해야 한다. 일하러 간 엄마가 하루 종일 집을 비운 사이, 일단 조폭 아버지를 피해야 하고, 동네 친구들을 피해야 하고, 마을 전체에 퍼져있는 유혹 약팔이, 몸팔이를 모두 극복해야 한다. 이 중 어느 하나에 라도 좌초되는 날에는 조폭이 되고 약에 취해서 이리저리 만난 여자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또 가난을 물려받는 이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 될 것이다.
가끔 생각해 본다. 아동포르노나 매춘, 코카인은 없앨 수 없는 것일까 혹은 없애지 않는 것일까? 자식을 버린 아비에게 양육비 집행을 못하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사립탐정은 나쁜놈 하나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놈들은 너무 많고, 이런 놈들을 만드는 건 우리사회라는데 문제가 있다.
공권력은 시청 담벼락을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도 기업 밑닥이 하라고 뽑아준 것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하면 멀쩡한 사회의 일원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푸는 것이나 고민하기 바란다.
현대 사회가 얼마나 잔인하고, 이런 사회에서 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책 속의 몇 구절>
p232
돌이켜보면, 최근에 물음표가 달린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뼈대조차 추리지 못했다. 대상이 내가 되지만 않는다면 난 수사와 추리를 사랑한다. 문제는 갑자기 가까운 사람들과의 피 튀기는 갈등이 많아졌다는 데 있었다. 리치, 멀컨, 앤지. 그러다가 인종, 정치, 그리고 영웅 아버지를 잣대로 나를 재평가하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세가지 주제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고민이 많아지다간 결국 기다란 백발 수염을 기르고 하얀 도포를 입은 채 플라톤의 '크리톤'을 읽으며 독배를 마시는 것으로 인생을 쫑낼 수도 있겠다. 아니면 티베트로 날아가 달라이 라마가 있는 산정에 오르거나, 파리로 건너가 검은 옷차림에 염소수염을 기르고 내내 재즈 얘기만 하게 될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늘 하던 대로 하겠다. 아무렇게나 빈둥거리며 사는 것. 뼛 속까지 숙명론자가 되는 것.
p339
하나는 불명예 퇴진 하나는 처형. 하나는 생존 하나는 사망. 하나는 백인 그리고 하나는 흑인.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따. 머리카락에서는 모래와 기름기가 묻어나고 손가락에선 쓰레기와 오물 냄새가 났다. 그 순간이 세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역겨웠다.
p340
그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유린당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우리를 강간한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끌어안고 키스를 해주는 한, 우리 귀에 대고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아버지가 너를 돌봐주마"라고 속삭이는 한, 우리는 편안히 두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며, 허울 좋은 '문명'과 '보호'의 명분 아래 우리의 몸과 영혼을 물물교환한다. 20세기의 악몽이 빚어내는 거짓 우상들과 말이다.
수많은 멀컨과 폴슨과 소시아와 필이 이 세상의 영웅들이 판치는 이유는 우리 역시 그 꿈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갖고 있는 암흑의 지식이며, 또한 그들이 늘 이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p349
그는 황량한 들판에 멈춰 섰다. 이른바 미래의 건설현장이다. 이제 이곳에도 거대한 사업체가 들어서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미래는 조금씩 팽창해 들어와 록스베리를 서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고급음료가 제공되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들리는 또 하나의 사우스앤드를 만들어 놓으리라. 그리고 정치가들이 리본을 끊고 사업가들과 악수를 나누고 진보를 논하고 이 지역에서의 범죄율 감소를 자랑하는 동안, 쫓겨난 자들의 지역은 치솟는 범죄율로 외면당할 것이며 사람들은 또다시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고 말리라. 그리하여 록스베리는 좋은 단어가 되고 반면에 데드햄과 랜돌프는 나쁜 단어가 되고 말리라. 또 다른 이웃이 해체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