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 대화 - 무신론자와 신학자, 기독교를 말하다
자오치정.루이스 팔라우 지음, 이상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절판


<성경>은 세 개의 명제로는 부족하고, 저는 네가지 명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번째 명제는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시고 선하시며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명제는, 인간은 원죄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명제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 인간과 소통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명제는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인도하기 위해 애쓰지 말고 예수와 <성경>에 의지하여 자기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5~36쪽

기독교인은 말한다. 나는 무신론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독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그의 마음은 영원한 안식과 평온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는 말한다. 어떤 문화든지 그 문화를 관통하는 독특한 정신과 영혼이 있고, 어떤 주의든지 그 자신의 핵심적인 신앙이 있으며, 어떤 사회도 또한 그 자신의 핵심 가치 관념이 있다. 이를 보면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그들의 정신세계와 신앙은 똑같이 풍부하며 똑같이 자기를 고수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64쪽

자오_(중략)종교는 일종의 문화 현상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 문화 자체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에게 신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71쪽

중국 철학의 주요한 부분은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학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물주의자는 결코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는게 아니라, 물질과 정신의 관계가 변증법적임을 강조할 따름입니다. 중국에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건설은 예로부터 늘 똑같이 중시되어왔습니다. 중국인은 만약에 인간이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아서 영혼과 정신이 없다면, 그는 한 마리의 소나 양이나 물고기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80쪽

때로는 대중을 사랑하는 일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 사이에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마땅히 대중을 사랑하는 쪽을 선택해야겠지요.-121쪽

자오_저는 산봉우리가 세 개가 아니라 무한히 봉우리가 많은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산봉우리에 오르면 모두 진리를 얻게 됩니다. 더 높은 산에 오를수록 거기서 얻는 진리는 더욱 절대 진리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일생 가운데 이렇게 많은 산봉우리를 다 올라볼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 가운데 올라볼 수 있는 봉우리는 그저 하나이거나 많으면 두 개입니다. 어떤 봉우리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 노력해 기어 올라가야 하며, 봉우리들은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142쪽

자오_제가 볼 때, 수학 물리학 화학과 같은 과학 이외에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탐색하는 일은 철학의 임무입니다. (중략) 철학에 대해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이미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일종의 반성입니다. (중략) 둘째, 헤겔은 올빼미가 높이 날아올라 멀리 볼 수 있으며, 어두움 속에서도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략) 저는 철학의 한 가지 중요한 임무는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정련하여, 미래의 행동을 이끌어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44쪽

팔라우_(중략)종교는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입니다. 기독교는 자신을 종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하느님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실제로 진실한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드러내며,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길을 따르도록 권유합니다. 그러나 이를 어떤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유롭게 "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노"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습니다. -188쪽

젊은 사람들은 감정을 움직이기 쉽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은 더욱 풍부하게 오늘을 보듬고 옛일을 추억할 수 있는 감정이 있습니다.-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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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6-1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라는 매개없이 직접 신과 만나려는 사람들을 성직자들은 싫어하던데요.

무해한모리군 2009-06-12 08:02   좋아요 0 | URL
ㅎㅎ 생존권 투쟁이니 봐줍시다.
저는 목사도 텃밭 가꾸기라도 해라 이런 생각을 합니다만 흠..
이 팔라우라는 사람은 세계를 떠도는 전도사인데, 종교를 믿지 않아도 그 안에 신앙이 있다 그걸 일깨우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듯 합니다.
 
전쟁 전 한 잔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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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울적한 금요일밤, 맥주와 하드보일드는 늘 단짝 친구다.

어린시절 마쵸 아버지의 폭압을 상처로 가진 탐정 켄지, 아름답고 섹시한데다 남자하나쯤 작신하게 해치울 수 있는데 남편한테는 맞고 사는 그의 파트너 앤지가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그래 이야기는 이렇다. 부패한 정치인, 거기에 얽혀있는 조폭들, 돈과 약을 위해서는 자식도 내다파는 인간들.  

책 내내 겨우 22장의 사진때문에 두 주인공과 여러 사람들이 두들겨 맞고 죽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주인공의 생사뿐만 아니라, 약에 취해 정치인과 조폭들에게 이용당하는 가해자인, 어린 조폭들에게도 관심을 가진다. 

보호받아야 할 작고 꼬물한 것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내전이 치뤄지고 있는 국가의 수십만(?수백만일지도 모른다)의 소년병들, 가족들의 한끼를 위해 이리저리 매춘을 위해 팔리어 가는 열살 남짓의 아이들, (그걸 사는 어른들) 하루종일 일하다 스물이 되기 전에 그 목숨이 다해버리는 어린 노동자들. 

뭐 좀 산다는 미국이라도 다르지는 않은가보다. 알다싶이 부자와 가난한 자는 같이 있지만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 입는 옷도, 가는 곳도, 사는 곳도 다 다르다. 가난한 자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엉망이 된 자기 삶을 탓할 증오할 대상을 찾아 헤맨다. 그 대상은 여자가 되기도 하고, 흑인이 되기도 하고, 아시아 이민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국제중이니 특성화고니 성화니 부자집 녀석은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단 한명도 안만나고도 살아갈 수 있을듯 하다.  

자, 없는 동네 사정을 들어보자. 여기 가난한 흑인지역에 사는 5살 로랜스를 보자. 엄마는 어린나이에 성폭력이 됐든 눈이 맞았든 로랜스를 낳았다. 그래도 정신이 제대로 박혔던 엄마는 청소부를 하면서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보려고 했다. 그러나 알다싶이 로랜스가 '제대로'(조폭이나 마약쟁이나 실업자가 되지 않는 것) 크기 위해서는 백만서른가지 암초를 피해야 한다. 일하러 간 엄마가 하루 종일 집을 비운 사이, 일단 조폭 아버지를 피해야 하고, 동네 친구들을 피해야 하고, 마을 전체에 퍼져있는 유혹 약팔이, 몸팔이를 모두 극복해야 한다. 이 중 어느 하나에 라도 좌초되는 날에는 조폭이 되고 약에 취해서 이리저리 만난 여자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또 가난을 물려받는 이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 될 것이다.  

가끔 생각해 본다. 아동포르노나 매춘, 코카인은 없앨 수 없는 것일까 혹은 없애지 않는 것일까? 자식을 버린 아비에게 양육비 집행을 못하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사립탐정은 나쁜놈 하나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놈들은 너무 많고, 이런 놈들을 만드는 건 우리사회라는데 문제가 있다. 

공권력은 시청 담벼락을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도 기업 밑닥이 하라고 뽑아준 것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하면 멀쩡한 사회의 일원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푸는 것이나 고민하기 바란다.  

현대 사회가 얼마나 잔인하고, 이런 사회에서 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책 속의 몇 구절> 

p232 

돌이켜보면, 최근에 물음표가 달린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뼈대조차 추리지 못했다. 대상이 내가 되지만 않는다면 난 수사와 추리를 사랑한다. 문제는 갑자기 가까운 사람들과의 피 튀기는 갈등이 많아졌다는 데 있었다. 리치, 멀컨, 앤지. 그러다가 인종, 정치, 그리고 영웅 아버지를 잣대로 나를 재평가하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세가지 주제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고민이 많아지다간 결국 기다란 백발 수염을 기르고 하얀 도포를 입은 채 플라톤의 '크리톤'을 읽으며 독배를 마시는 것으로 인생을 쫑낼 수도 있겠다. 아니면 티베트로 날아가 달라이 라마가 있는 산정에 오르거나, 파리로 건너가 검은 옷차림에 염소수염을 기르고 내내 재즈 얘기만 하게 될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늘 하던 대로 하겠다. 아무렇게나 빈둥거리며 사는 것. 뼛 속까지 숙명론자가 되는 것. 

p339 

하나는 불명예 퇴진 하나는 처형. 하나는 생존 하나는 사망. 하나는 백인 그리고 하나는 흑인.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따. 머리카락에서는 모래와 기름기가 묻어나고 손가락에선 쓰레기와 오물 냄새가 났다. 그 순간이 세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역겨웠다. 

p340 

그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유린당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우리를 강간한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끌어안고 키스를 해주는 한, 우리 귀에 대고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아버지가 너를 돌봐주마"라고 속삭이는 한, 우리는 편안히 두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며, 허울 좋은 '문명'과 '보호'의 명분 아래 우리의 몸과 영혼을 물물교환한다. 20세기의 악몽이 빚어내는 거짓 우상들과 말이다. 

수많은 멀컨과 폴슨과 소시아와 필이 이 세상의 영웅들이 판치는 이유는 우리 역시 그 꿈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갖고 있는 암흑의 지식이며, 또한 그들이 늘 이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p349 

그는 황량한 들판에 멈춰 섰다. 이른바 미래의 건설현장이다. 이제 이곳에도 거대한 사업체가 들어서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미래는 조금씩 팽창해 들어와 록스베리를 서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고급음료가 제공되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들리는 또 하나의 사우스앤드를 만들어 놓으리라. 그리고 정치가들이 리본을 끊고 사업가들과 악수를 나누고 진보를 논하고 이 지역에서의 범죄율 감소를 자랑하는 동안, 쫓겨난 자들의 지역은 치솟는 범죄율로 외면당할 것이며 사람들은 또다시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고 말리라. 그리하여 록스베리는 좋은 단어가 되고 반면에 데드햄과 랜돌프는 나쁜 단어가 되고 말리라. 또 다른 이웃이 해체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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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3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켄지 커플의 신작인가 보네요...

무해한모리군 2009-05-30 20:02   좋아요 0 | URL
아 이게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예요. 국내에는 늦게 출간됐나봐요 ^^
 
한낮의 달을 쫓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4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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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리쿠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는 작가다.
특히 일상의 풍경 속에서 특이하거나 생경한 풍경들을 뽑아낼 줄 알고,
(달밤의 으스스함과 은밀함 처럼)
가까운 사람 사이의 미묘한 균열이나 감정의 교류를 세밀하게 표현할 줄 안다. 

그런데 이 작가 딱 거기까지다.
그래서 뭐?
아무것도 없다.

내가 읽은 작가의 다섯번째 작품인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 이제 그만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너무 익숙해진 작가의 분위기, 끊임없는 자기복제(잘 알다싶이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간략이 소개되었던 주제로 다음 작품을 쓰는 걸 즐긴다.), 허무감이 밀려든다. 

이 책은 온다리쿠가 쓴 나라 지방의 여행 홍보기쯤 된다.
지방의 분위기와 관광지를 온다리쿠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로 잘 뽑아내었다.
딱 그만큼.
내 느낌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밤의 피크닉이나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미치지 못한다. 

<책 속의 몇 구절>

p16
아마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자유는 꽤 괴롭다. 

p28
차창 밖으로 건물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는 늘 신선한 놀라움을 느낀다. 사실은 자기 쪽이 움직이는데도 세계가 움직이는 듯 보인다는 사실에. 과거에 왜 달님이 늘 내 뒤를 따라오는 걸까, 하고 몇 번씩 하늘을 올려다보던 생각이 났다.

지그재그로 잘린 오피스가의 하늘은 포근하게 개어 있었다. 

p47
"분명히 혜어지는 이유를 확인하겠지"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좋아하게 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지만 헤어지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거든. 아니면 끝낼 수 없잖아."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나도 지당한 의견이었다. 

p93
나는 평소에 늘 그런 여자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자신이 여자라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는 여자. 회사 탈의실에서 돌려 보는 통신판매 카달로그에서는 어김없이 세상 대다수 여자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고르고, 레슨 선생님에게 얼마를 드려야 할지 넌지시 의논할 수 있는, 느낌이 좋고 손톱 손질을 잘하는 여자들을.

p159
이렇게 보면 헤어진 그와의 사이에는 드라마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도, 책략을 쓰지도, 수라장을 벌이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리 드라마를 철저하게 연기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에 전혀 맞지 않았다. 자기들 인생에서조차 주역이 되기를 겁냈다. 

p203~204
"와타베 말로는 동화랑 민화는 거의 대부분이 '상실'이 테마래"
(중략)
"백설공주도 그렇지, 빨간 두건도 그렇지, 일단 죽어 목숨을 잃었다가 그 뒤에 재생돼서 부활하잖아. 잃고, 찾아, 되찾는다. 그게 인간이 만드는 이야기의 주된 테마래."
(중략)
"산다는 게 뭔가를 잃는다는 거니까요."
(중략)
"아니, 그보다 현실적으로 잃어버린 걸 조금씩 돈으로 치환시켜 가는 거겠죠. 시력이 감퇴되면 안경을 사고, 체력이 감퇴되면 돈내고 차를 타요.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시간이랑 노력까지 돈으로 사게 되고요. 그런 식으로 잃은 걸 벌충하게 되는 거예요." 

p269
남자의 등을 보는 것은 싫지 않았다. 등을 보면 늘 왜 그런지 아아, 이 사람은 남자구나, 하는 당연한 사실이 실감나곤 했다. 

p338~339
어느 바람이 쌩쌩 불고 추운 날 밤, 절벽 동굴 안에서 한 촛불이 떨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초였습니다. 다른 초들은 벌써 끝까지 다 타버렸거나 바람이 불어들어 꺼졌기 때문에 작은 초는 외톨이였습니다. 여기서 자기가 다 타버렸다가는 사방이 캄캄해지고 추위에 얼어버릴 것입니다. 초는 먼저 꺼져버린 친구를 그리워하고 원망하며 열심히 어둠속에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몹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들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불꽃을 흔들어 바람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아침 햇살을 보고 바깥 경치를 보고 싶다. 초는 오직 그것만을 바라며 긴긴 밤을 견뎠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 지나고 마침내 아침이 되었습니다. 동굴 밖에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밝은 세계가 있었습니다. 작은 초는 환한 아침 햇살 속에 날아다니는 새와 밝은 색으로 움트는 숲을 보았습니다. 초는 문득 먼저 간 친구들의 촛농이 동궁안에서 썩어버린 짐승의 뼈를 덮어 자기 주위에 작은 벽을 만들어 준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 타버린 그들이 작은 초를 바람으로부터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초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아아'하고 부르짖고는 다 타버렸습니다.
아침의 동굴에 환한 햇살이 눈부시게 비쳐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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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죽다 Medusa Collection 10
찰리 휴스턴 지음, 최필원 옮김 / 시작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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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의 이상형은 아주 어려서 부터 강동희, 현주엽, 김동주로 이어져 왔다.
이들의 공통점.. 음.. 다소 듬직한 곰돌이과?
어쨌든 이건 다 레이먼드 챈들러 때문이다. 

주정뱅이, 마약쟁이, 깡패, 총칼 어찌보면 죽음 앞에서도 냉소적이기 그지 없는,
그러나 여자와 어린아이들 앞에 부드럽다 못해 쩔쩔매는 필립말로류의 사내 케릭터가
어쩌다 내 마음에 들어와 버렸냐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불우한 가정 환경에 일찍 부터 거리로 뛰어나와 거친 삶을 살다,
어쩌다 보니 뱀파이어가 되었는데,
그나마 뱀파이어 조직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이 조직 저조직에서
조금씩 의뢰해 오는 일을 맡는 떠돌이 해결사로 살아가고 있다.
담배와 위스키를 입에 달고 사는 그닥 열심히 사는 것도,
그렇다고 목숨을 끊을 열정도 없는 냉소적인 190에 90킬로쯤 되는 사내. 

이 책의 매력은 뱀파이어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뱀파이어를 에이즈처럼 하나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로 본다.
강자이기 보다는 하나의 핸디캡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뭐 원해서 뱀파이어가 된 건 아니지만,
원해서 지금의 나가 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지금의 나와 함께 남은 인생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은 총 5부작이고, 현재 미국판은 4부작까지 나왔고,
우리나라엔 시리즈의 처음인 이 책이 이제야 번역되어 나왔다. 

시리즈의 시작인 만큼 앞으로 여러 사건의 배경이 될
뱀파이어 사회와 여러 주요 케릭터들도 세밀하게 묘사된다. 

뱀파이어 바이러스를 바라보는 시각은 각 조직간에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조직은 '뱀파이어 바이러스 피해자'인 자신들이 일반인과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혁명을 꿈꾸기도 하고, 또 어떤 조직은 적극적이지만 비밀리에 일반인들의 이권사업에 개입하면서 조직원들의 피를 공급받고, 세력을 키우는데 골몰한다. 또 어떤 조직은 뱀파이어 바이러스를 자기 각성(한계를 뛰어넘는 것)의 매개로 보고 수양을 하기도 한다. 

다른 한쪽 배경인 미국의 맨허튼의 노숙자, 마약쟁이, 창녀들의 바닥사회와
여피, 부자, 권력자들의 업타운도 묘사해 나간다. 

이 책은 말그대로 하드보일드 하다.
첫 열장부터 남의 머리를 깨고 뇌를 파먹는 장면이 나오고,
온갖 살육이 난무한다. 

그러나
좀비보균자와 집나간 부잣집 아가씨를 추적하는 과정의 스토리의 탄탄함과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매력만으로도 꽤나 멋진 소설이다. 

작가는 레이먼드 챈들러를 의식하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런 만큼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애호가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다음편이 어서 번역되어 나오기를, 그리고 시리즈가 중단없이 출간되기를 바란다.
시리즈의 닻이 올랐다. 어서 올라타시라. 

<책 속의 몇 구절>

p339~340
내 삶을 들여다본다. 부족한 것이 많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 인생이다. 매일 조금씩 벼랑 끝으로 다가가는 느낌이다. 언젠가는 발밑의 땅이 꺼지면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상관없다.
내 인생이라고 남들과 달라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필립 말로. 저자가 집필시에 염두에 두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간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알콜중독 탐정 필립말로의 사건해결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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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5-2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말로'라는 이름 때문에 왠지 웃음이 나와서 말입니다.^^
제가 새벽에 쓴 리뷰, 책 속의 주인공도 필립 말로의 골수팬이거든요.(웃음)
우연치고는 '하드보일드'라는 단어가 공통되는 것도 재밌지만.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 선생님들의 이유 있는 도서관 여행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지음 / 우리교육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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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에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첫째, 도서관은 시설, 자료 만큼 사서도 중요하다.
이 책은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좋은 작품을 고르고, 미술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한눈에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을 배치하고,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한 교육이나 자료를 제공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도서관에도 바로 그런 역할을 해 줄 사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쓴 저자들이 도서관담당교사들인 만큼 사서 중에서도 학교에서 어린이들의 수준과 요구에 맞게 도서학습이 가능하도록 도서관을 지속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할 주체로서 전문적인 사서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도서관은 걸어서 10분 거리안에 위치해야 한다.
서초구의 두배쯤 되는 파리에는 60개나 되는 도서관이 있다고 한다. 구당 겨우 한두개인 우리의 현실과 크게 차이가 난다. 더군다나 대다수 직장인이 도서관이 문여는 시간에 퇴근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보면 점심시간에 잠깐 나가 도서를 빌릴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또 이 정도 규모라야 마을단위 특성에 맞게 도서관을 특화하고, 주민들의 요구에 맞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셋째, 공공지식의 장으로서의 도서관의 역할은 중요하다.
프랑스의 도서관 중 이주민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이주민을 위해 프랑스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어학책과 다양한 언어로 된 읽을 거리를 배치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독일의 도서관에서는 노숙자도 강의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음은 물론 프랑스, 독일 공히 외국인, 노숙자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영국에 살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나 노인분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책을 집으로 대여해 가져다 주는 것이나, 읽기가 부족한 어린이들을 위해 노인분들이 아이들과 함께 동화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세대간 계층간의 간격을 마을 도서관에서의 지식의 교류로 줄일 수 있는 희망을 나는 그곳에서 보았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도 있었다. 

하나는 기행문으로서 이 책은 참 매력이 없다. 8개월을 함께 준비해 떠난 십여일의 여행, 그래서 인지 모든 답을 정해놓고 확인하러 간 사람들 같다. 그리고 즐기기보단 참 숨가쁜 일정의 힘겨움이 느껴진다. 

둘은 개개의 도서관에 대한 짧막한 설명과 지도를 기행문 앞에 배치했으면 좋았을 듯 하다. 도대체 도서관의 위치는 어디인지, 규모와 장서는 얼만큼인지 정도는 소제목 밑에 배치해 두었으면 책의 활용도가 높았을듯 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서교사의 중요성에 동의하지만, 현재의 공교육 파탄과 사교육 만연의 책임이 교사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자기주도형 학습이 도서관 사서교사를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제 머리로 생각하는 논술시험을 시행하자, 모범 논술 답안을 작성하는 사교육을 시키고, 논술에 잘 나오는 책을 요약해서 읽히는 형국이 아닌가. 학벌사회가 없어질 때, 대학 나오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먹고 살 만큼 정당하게 대우 받을 수 있을 때, 아니 기본적으로 누구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누리는 사회가 와야 우리 아이들이 책을 읽을 자유를, 내머리로 내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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