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절판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온종일 입 한번 열지 않을 때도 많다. 역의 매표소 직원이나 버스 승무원에게 고작 몇 마디 할까. 그걸 빼면 숙소로 들어올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는 날도 있다.
그런 외로움은 할머니와 얘기한들 할아버지와 얘기한들 달래지지 않는다.
이때 요긴한 방법이 멋진 남자에게 다가서서,
'저어…… 실례지만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묻는 것이다.
'저어……' 또는 '실례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이면 반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몇 시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니, 누구든 그런 질문을 받으면 시계가 있는 한 대답해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까지 가죠? ㅇㅇ온천? 서두르지 않으면 비가 올 거예요"라는 말도 해준다.
그렇다고 혼자 여행하는 여자의 그 말이 인연이 돼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일로 발전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아방튀르(모험)는 세상의 스캔들이나 주간지의 기사처럼 손쉽게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저어…… 지금 몇 시예요?'로부터 안개가 낀 듯 야릇해지다가 드디어 의기투합해서 한 여관에 묵는 일 따위는 있을 리 없다. -15쪽

나는 혼자 사는 서른한 살의 여자다.
특별히 혼자인 게 좋아서 혼자 지내는 건 아니다. 부득이하게 혼자인 것이다.
뭘 하든 혼자다. 혼잣말, 홀로 잠, 홀로 웃기, 홀로 울기, 홀로 먹기, 홀로 텔레비전(그런 말이 있다면), 홀로 끄덕이기, 홀로 신음하기(이상한 걸 상상하면 곤란하지만).
혼자 산다는 건 어렵다.
오해받기 쉽다. 고영오연하게 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한다.
그러나 또한 어딘지 조금 애처로운 데가 없으면 얄밉게 보인다.
그러나 또한 너무 애처로운 태를 내면 색기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균형이 어렵다. -63~4쪽

그리고 혼자인 게 좋아서 홀로 사는 게 아닌 이상 여러 가지로 바쁘다. 물론 결혼 상대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남자가 다가와주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미묘한 부분이 있다.
남자가 건드려주길 기다리다가도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의연하게 퇴짜 놓는 자세를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 기다렸습니다 하는 구석을 보여서는 안 된다.
건드리길 기다린다는 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면 남자는 다가오지 않는다. 남자라는 물고기를 낚아올리려면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한 법. 적당히 해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첫째로,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아무나 좋다고 하면 안 된다. 상대도 그렇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신은 여러모로 바쁜 것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호박이 저절로 굴러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공상 속에서는 버젓이 행세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엉덩이가 무거운 애들이 많다. 그러면서 해마다 주문이 까다로워진다. -64쪽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못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안정되고 좋을 것이다. -75쪽

정말 내 주위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 이 사람이다 싶은 남자가 없다. 있었으면 벌써 옛날에 결혼했겠지. -81쪽

"외로워."
"외롭지, 외로워."
"역시 혼자는 재미없고."
"재미없지, 재미없어."-82쪽

미카코는 냉랭한 집 안으로 들어가 봄코트를 입은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이 어지르지 않으면 영원히 깔끔하게 치워진 채로 있을 실내.
그건 대자연의 정적. 말하자면 북극과 같은 정적과 비정을 생각나게 했다. 미카코는 결국 자신이 얼마나 엄마게에 의존하는 존재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만든 요리, 엄마의 배려, 엄마의 수다, 엄마의 냄새로부터 아직 멀리 벗어나지 못한 의지가지없는 아이 같은 존재.
자신의 인생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컸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자신의 발로 굳건히 서 있다고 생각했건만…… 엄마의 보호 속에 따뜻하게 몸을 웅크리고 입으로만 잘난 듯이 떠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110쪽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남자에게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추상능력, 분석능력, 표현능력이 있는 남자를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바로 여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134~5쪽

나는 다카하타 씨가 건축금속물 부서에서 가정금속물 부서로 옮겨 왔을 때부터 얘기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자란 얘기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좋다.
아무리 훌륭하고 멋진 남자라도 말 붙이기 힘든 사람은 나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는 부류다. -139쪽

'여보, 즐거웠어요. 재밌었어요. 덕분에 잘살았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나얏코의 눈에 처음으로 진심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부부로서의 인생이 끝날 때,
'즐거운 삶이었어. 재밌었어. 고마워'라고 상대에게 말할 정도의 행복이 또 있을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를 인생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172쪽

"함께 살지 않을래?"
쓰루가 씨는 성실한 사람이라 그 말을 할 때도 성실하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수습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재미있는 친구로 지내왔는데 아까워요. 결혼 같은 거 해버리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럴까?"
쓰루가 씨가 말했다.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다케우치 씨하고는 오래 만나와서 서로 마음도 잘 알고."
오래 만나왔다는 점이 수상쩍은 것이다.
너무 오래 만나와서,
'그래, 가는 거야!' 하는 데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로맨티스트라 결혼이라는 건 '그래, 가는 거야!' 하고 점프하는 것 같은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구식 여자라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자의 가슴에 뛰어드는 격정 같은 것을 기대한다.
나는 쓰루가 씨와 마음이 잘 맞고 좋긴 하지만 그의 가슴에 안겨 여자로서의 기쁨에 몸을 떠는 나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난처하다. -197~8쪽

남녀 사이란 어느 쪽이 됐든 한 쪽이 억지로라도 끈을 꽉 묶어놓고 있지 않으면 자연히 풀려버리는 허망한 면이 있다.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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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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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영화도 책도 재미있게 봤는데 어째서인지 다나베 세이코의 다른 소설과는 인연이 없었다. 국내에 번역서가 여러 권 소개되었던 터라 관심만 있다면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건어물녀마냥 건조한 나는 연애소설이라니 어쩐지 간질간질하고 소녀같군 하며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과는 자연 멀어졌다. 그러다 서른이 되고 봄바람 불자 <서른 넘어 함박눈>의 분홍분홍한 표지에 마음도 부농부농해져서 오랜만에 다나베 세이코를 만났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는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 사랑이 진행될 때의 열정, 그리고 식어버린 사랑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을 폭넓게 보여준다면 <서른 넘어 함박눈>의 여자들의 모습은 그보다 조금 구깃구깃하다. 여행지에서 멋진 남자에게 "저어…… 실례지만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물으며 다니기도 하고, 룸메이트의 남자가 두고 간 듯한 특대 흰 팬티를 보고 공상을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그물을 쳐놓고 남자가 걸리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서른이 넘어 한 살씩 나이가 먹어가면서 운명적인 사랑이란 없음을(혹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래도 내심 우연한 계기로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거나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팟, 하는 계기로 결혼에 골인하기를 꿈꾼다. 

 

  사실 이 책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그리 낯설지 않다. 카페 옆자리나 술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연히 만난 부부의 대화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농밀한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는 이 책 속의 여자들처럼 어느샌가 나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30대 여자의 사랑과 인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와 일본드라마 <결혼하지 않는다結婚しない>를 볼 때처럼 무한공감하며 읽었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지만 등떠밀려서 하고 싶지는 않은, 이왕이면 조건에 맞춰 결혼하기보다는 내 힘으로 사랑을 이뤄가고 싶은, "주위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못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안정되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서른 넘어 함박눈>에서 만난 여자들의 모습 속에 나를 슬쩍슬쩍 만나는 것 같아 즐거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아, 봄이구나.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몃 고개를 들었다. 아아, 봄도, 서른도, 사랑하기 좋은 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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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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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영미장르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를 하나 고르라면 많은 이들이 스티븐 킹을 꼽지 않을까 싶다.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숱하게 영화화됐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만큼 소개가 된 작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많은 작품이 소개됐다. 독서모임 책으로 <11/22/63>이 선정되었을 때 '드디어 스티븐 킹을 만나게 되겠군'이라는 생각이 맨 먼저 스쳤다. 그래도 나름대로 장르소설은 좀 읽는다고 자부(?)하는데 스티븐 킹이 처음이라니 스스로도 좀 의아했지만, 너무 작품이 많다 보니 뭐부터 읽지 망설이다가 시간만 흘렀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초면부터 벽돌 같은 책 두 권이라니.

 

  표지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책이다. 젊은 나이에 취임한 케네디는 경제불황과 냉전, 핵전쟁으로 뒤숭숭하던 시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 오늘까지도 많은 미국인들의 기억에 살아 있는 대통령 중 하나다. 지병이나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닌, 1963년 11월 22일에 오스왈드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며 급작스럽게 임기가 끝나버렸다. 어쩌면 암살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그리움이 더 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까지도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음모론은 꾸준히 제기된다. 그리고 스티븐 킹은 이 사건에 타임슬립을 접목시켜 자기 나름의 견해를 더한다. '그때 오스왈드를 저지했다면 미국, 아니 세계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스티븐 킹 나름의 답이 <11/22/63>이다.

 

  1권 520쪽, 2권 744쪽. 1200페이지가 넘는 무지막지한 분량인지라 케네디 암살 사건을 스티븐 킹이 뭔가 집중적으로 파헤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고개가 갸웃해졌다. 애초에 1958년으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이 케네디의 암살을 저지하기 위해 1963년까지 그곳에서 주인공이 오스왈드의 행적을 쫓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과거에서 새롭게 만날 사람들과 꾸려갈 삶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그려지겠구나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어느 순간 케네디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고 새라와의 사랑이 메인 스토리로 부각된다. '과거는 고집이 세'지만 그보다 더 강한 의지로 이를 바꾸어 보겠는 의지를 보이던 주인공이 새라를 만난 이후로 "이런 일본 속담이 있었어요. '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보이든 당신 얼굴을 사랑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 얼굴이니까"라는 식의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타임슬립 로맨스로 변해버린다. 63년이 되어 이제 정신 좀 차려 암살 사건에 집중하나 했더니 스티븐 킹은 되려 "현자들마저 믿을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도 사랑한다는 선언은 제 몫을 하는 법"이라고 어떤 시대에도 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명성답게 무지막지한 분량도 어느새 몰입해 술술 읽어가지만, 이렇게 길게 쓸 수밖에 없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58년부터 63년까지 약 6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싶다가도 그럼 과거 체류 기간을 몇 년 줄이면 되잖아 싶었다. 나도 어차피 주인공 같은 소시민(?)이라, 주인공처럼 토끼굴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면 오스왈드의 저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과거에서 저렴한 식재료나 사들고 돌아왔을 것 같지만 말이다. 기대했던 바와 다른 이야기 전개에, 아무리 암살이 "역사라는 강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러 분수령 중에서도 변화를 일으킬 여지가 가장 다분한 사건"이라고 해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의 마무리라 용두사미같았지만, "독자의 궁금증을 계속 유발"한다는 점 하나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소설이건 비소설이건 "단순의 미학"이 중요하다고 "군더더기를 배제하라고,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얘기했던 스티븐 킹. 그의 말처럼 군더더기가 없었다면 더 좋았을 책. 여러모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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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3-04-0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더기 너머 많은 좀도 분량을 줄였으면 훨씬 더 읽기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이 드네요

이매지 2013-04-03 10:44   좋아요 0 | URL
사실 글을 군더더기 없이 쓰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저도 어느샌가 리뷰에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ㅠㅠ)
 
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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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티븐 킹을 놀라게 한 작가'라는 띠지 문안에도 혹했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스무 권 이상의 장편을 발표했음에도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는 점이 끌렸다. 한 남자가 인형을 조종하는 표지 그림을 보면 이 책이 무대와 관계 있음을, 제목의 연기가 '연기(演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마음은 '연기(延期)'에 가까웠다. 페이지는 눈여겨보지 않고 그냥 머리 식힐 겸 읽으려고 주문했는데 500페이지가 넘어 어쩐지 여유 있을 때로 미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니 '일생 일대의 상황'을 맞닥뜨린 주인공의 모습을 하루하루 지켜보면서 점점 이 남자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의 연기를 끝까지 정신없이 지켜보게 되었다.

 

  주인공 토비 플러드. "로저 무어의 뒤를 이어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될 뻔"했지만, 그의 연기 인생은 "몇 년 전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본궤도에서 이탈해 옆길로 들어"선 상황이다. 순회공연 중인 연극도 반응이 그저 그래서 연기 인생이 끝나갈 참이고, 별거중인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끝이 보인다. 그러던 중 토비는 아내에게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토비의 극성팬을 쫓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어떻게든 아내와 다시 시작해보고팠던 토비는 이 일을 계기로 재기를 노리고, 팬으로 보이는 남자는 토비와 이야기를 나눈 뒤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처럼 진행되는 것 같았던 일은 팬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시 아내의 곁을 맴돌고 이에 항의하는 토비에게 그의 연극무대가 시작되는 8시에 단둘이 만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후 토비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몰리게 된다. 그의 무기는 '끝까지 연기하는 것'뿐. 잇단 의문과 죽음을 토비는 어떻게 헤쳐갈 수 있을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은 상황에 떨어져 일주일 동안 편안히 잠 잘 새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토비의 모습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지만, 한편으로는 대체 어떻게 마무리하려고 일을 이렇게 벌이는 건가 걱정도 됐다. 토비라는 캐릭터가 연극배우이면서 탐정의 자질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일을 자기 딴으로 수습하기도 바쁜 판인데 어쩌자고 대기업의 비밀까지 파고들어가는 건가 했는데, 결국 막판에 제삼자가 사건을 마무리짓는 모습을 보며 이게 어떤 의미로는 반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겪으면서도 토비는 대기업의 음모를 위해 버티는 것이 아니라 별거중인 아내 제니의 관심(또는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좇을 뿐이다. 그가 맞선 것은 운명이나 유령 같은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단 한 번의 기회는 아니었을까.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어쩌면 미래 역시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이야기 초반에 얘기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미래를 다른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손에 넣는다.

 

  기대했던 형태의 반전은 없어서 아쉬웠지만 지문 사이, 대화 사이에 살짝 녹아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시각은 좋았다. 예를 들어, 토비는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가식의 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상황이 변했다. 완전히"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책을 읽는 독자 또한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대가 아닌 현실에 발을 디딘 채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토비는 자신이 "처한 곤경을 이치에 맞게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토로했지만, 어차피 타인을 이해시키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일뿐이 아닐까. 어이없을 정도로 뒤통수 때리는 반전이 아니라 맥이 좀 풀릴 수 있지만, 슈퍼히어로가 아닌 평범남이 등장하는 속도감 있는 스릴러 정도로 읽는다면 분량에 관계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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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2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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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함이……."
"도라고 합니다. 존 도."
-16쪽

갈림길에 다다른 남자와 여자가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시간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 잘못 선택했다가는 끝장임을 알기에…… 살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기에. 1962년의 그 잔인하고 우울했던 겨울에 새디와 내가 그랬다. -97쪽

디크 시먼스는 슬픈 영화를 볼 때마다 손수건을 한 장 더 챙기는 사람답게 우리의 재결합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엘리 도커티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그때 알아차린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이 있다. 비밀을 잘 지키는 쪽은 여자들이지만,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쪽은 남자들이라는 것. -262쪽

"이런 일본 속담이 있었어요. '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보이든 당신 얼굴을 사랑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 얼굴이니까."-347~8쪽

모든 게 퍼뜩 선명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세상에는 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사실이겠지만, 이 세상은 외침과 메아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 톱니와 바퀴로 이루어진 척하지만,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신비로운 유리 덮개 밑에서 시간을 알리는 꿈의 시계인 척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 뒤에는 뭐가 있을까? 그 밑에는, 그 주변에는 뭐가 있을까? 혼돈, 폭풍, 망치를 휘두르는 남자들, 칼을 휘두르는 남자들, 총을 쏘는 남자들. 군림할 수 없는 게 있으면 왜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으면 비하하는 여자들. 조명 하나 외로이 비추는 무대에서 어둠을 무릅쓰고 춤을 추는 인간들, 그 주변을 에워싼 공포와 상실의 세계. -399~400쪽

현자들마저 믿을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도 사랑한다는 선언은 제 몫을 하는 법이다. -402쪽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또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과거가 고집이 센 이유는 거북 등껍질이 단단한 이유와 같다는 것. 그 안의 속살이 여리고 방어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이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것. 이것들이 기타 줄과 같다는 것. 우리는 이 줄들을 퉁기며 즐겁게 연주한다. 화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 줄을 추가한다. 10개, 100개, 1000개, 100만 개. 줄의 숫자는 곱절로 늘어나니까! 해리는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나는 안다. 그건 줄이 너무 늘어나서 화음이 너무 많이 만들어졌을 때 나는 소리다.
높은 도 음을 진성으로 우렁차게 내면 고급 크리스털이 깨질 수 있다. 음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화음을 스테레오로 크게 틀면 유리창이 깨질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악기의 줄이 너무 많아지면 현실이 깨질 수 있다(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7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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