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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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사람들은 독기나 오기를 품으라고 말하지. 마치 싸움을 할 때 독기를 품으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뜨거운 것들은 결코 힘이 되지 않아. 그렇게 뜨거운 것들을 들고 싸우면 다치는 건 너밖에 없어. 정작 투지는 아주 차갑고 조용한 거지. 상대방은 화가 나 있어. 네가 자기 땅에 함부로 들어왔으니까. 네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으니까. 상대방은 아주 뜨거워졌지. 하지만 너는 차가워. 너는 그저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가져오고 있는 중이니까. 툭툭, 방울토마토 하나. 툭툭, 방울토마토 두 개. 툭툭, 방울토마토 세 개. 상대방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가볍게 가져올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거지. 싸움은 그렇게 잔인한 거야. 어때? 너는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25~6쪽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못 되면요?"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26쪽

금고 속의 정적이, 기묘하다. 천장의 할로겐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는 수십억 혹은 수백억 원이 넘는 보석과 골동품이, 금세 무감각하다. 저것들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 마냥 행복해질 거라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저 반짝반짝하는 것들을 가지려고 훔치고, 사기치고, 속이고, 거짓말하면서 살았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고 당장 손에 쥘 수 있어도 결국 금고 밖으로 못 가지고 나간다.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다른 놈들 인생도 비슷할 것이다. 사실 아무도 금고 밖으로 저 반짝이는 것들을 손에 쥐고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저 보석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고 밖에 놔두면 불안하니까. 불안하니까. -42~3쪽

사람들은 사기꾼이 거짓을 파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사기꾼은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거짓보다 진실에 훨씬 가깝다. 진실에 가까운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에 가려 하고, 자신이 움켜쥘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사기꾼과 손을 잡는다. (중략) 환상은 욕망이 되고 욕망은 금세 진실이 된다. -47쪽

장지구는 벽시계를 봤다. 오후 5시였다. 벌써 5시다. 오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일곱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장지구가 반드시 자정까지 섹스를 끝내고 호박 마차 같은 것을 타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꼭 일곱 시간이 남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섹스는 새벽 1시에 해도 되고 2시에 해도 된다. 33년이나 묵은 동정을 걷어차버리고 훨씬 홀가분해지고 긍정적인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 발제문을 완성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건 섹스가 러닝머신이나 벤치 프레스처럼 혼자 우쌰우쌰 땀 흘리며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섹스는 반드시 둘이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랑 한단 말인가? 장지구는 '누구?'라는 질문에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그러자 절로 '인생의 쇠털처럼 많은 나날들 동안 나는 대체 뭘 하고 산 건가? 남들은 그렇게 쉽게도 하더니만, 나에게는 왜 단 한 명의 그 '누구'도 없는 것일까?' 따위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154쪽

"나 같으면 지금 당장 아프리카로 날아가겠다. 복잡하고, 땅값 비싸고, 사람 많고, 이 콧구멍만한 명동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거 이제 지겹지도 않냐?"
"지겹지. 터무니없이 지겹지. 매번 같은 사람들에, 같은 일에, 같은 농담에, 같은 술자리에, 정말 지겨워. 가끔은 섹스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지겨워서 하품이 다 나온다니까" 하며 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겨우면 그만해도 되잖아?" 내가 물었다.
"외로우니까. 그런 짓이라도 안 하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거든." 안이 말했다. -199~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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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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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밥상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183쪽

빨간 눈은 원인 균이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전염 방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의료팀이 할 수 있는 조처는 거의 없었다. 해열제, 항생제, 수액이나 산소 공급 등 효과가 거의 없는 몇 가지 처방이 전부였다. 박남철 과장은 치료자 자신에 대한 보호를 강조했다. '접촉'이라는 같은 조건에서 발현하지 않은 사람들은 병원체에 감수성이 없는 행운아일 테지만, 무감수성의 조건이 무엇인지 현재로써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그 행운아이기를 바라지는 말자고 했다. 수진은 자신이 혹시 그 행운아가 아닐까, 생각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은지는 그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은지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다 죽어도 나는 죽고 싶지 않아. -190쪽

빨간 눈의 원흉이 개라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들리도록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개에게'라는 부분을 생략하고 '개 한 마리가 수백 명의 사람에게'를 부각시킨 탓이었다. '살 처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생략이요, 과장이었다. 이 교묘한 말장난이 사람들 사이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두 번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재형은 망연한 심정으로 구급차 뒤 칸에 실린 개들을 돌아봤다. 모처럼 드라이브를 하게 됐다고 즐거워하는 개들 사이에서 대장 츄이의 푸른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고 차분한 눈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던, 우리만큼은 안전하게 보호받으리라 믿는 것처럼. -213쪽

여론은 화양 봉쇄의 당위성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른다는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전 국민을 종교적 수준의 공포와 공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각 언론사와 방송의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0퍼센트가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군을 동원해서라도 빨간 눈의 서울 상륙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화양시민 29만의 문제가 아니라 5천만의 생명이 걸린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에겐 화양과 빨간 눈이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230쪽

언론은 여론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임기 2년 차에 돌입한 대통령의 정치력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논평하고, 화양시민은 원인 균이 규명돼 진단 시약이나 치료제 및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돌출 행동을 자제하며 정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발병에서 치사에 이르는 기간이 짧아 화양을 철저하게 격리한다면 대유행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사스처럼 자연 소멸될 수도 있다는 낙관론을 폈다. -231쪽

인터넷과 SNS에선 수십만 개의 손가락들이 수십만 개의 훈수를 뒀다. 세계보건기구와 손잡고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둥, 이 전염병에 '빨간 눈' 괴질이 아닌 보다 적절한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는 둥, 정체 모를 병의 유행으로 대중이 막연한 공포를 느낄 때 정부와 언론은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고 공중과는 어떤 내용으로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을 만들어 실행하라는 둥. 더하여 희한한 풍문들이 'RT'를 통해 무한 확산됐다. 빨간 눈은 개와 사람의 바이러스가 합방해 낳은 이종 변이 바이러스라느니, 화양에 내린 이 새빨간 저주는 사악한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신이 보낸 최후의 불벼락이라느니, 생마늘과 홍삼을 많이 먹으면 빨간 눈에 걸리지 않는다느니……. -231쪽

고글과 마스크 같은 방역 물품, 기본 생필품이 순식간에 동나버렸다. 카드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됐고, 화양시내의 현금인출기는 모조리 빈 깡통이 됐다. 도로에선 차들이 폭주하고, 사람들은 라면 한 상자를 놓고 주먹다짐을 벌이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쇠 파이프로 상점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다. 동네 골목길과 도로에는 하룻밤 새 버림받은 개들이 떼를 지어 나돌아 다녔다. (중략) 화양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불이었으나 불을 대하는 안팎의 태도는 이렇듯 확연하게 달랐다. 두려움으로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만 똑같았다. 안쪽은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갇혔다는 사실에, 바깥쪽은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뻗어 올까 봐. -232~3쪽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345~6쪽

윤주는 종종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가만있지 않는지. 안전한 자기 집을 두고 감염의 위험과 무장 군인, 추위와 허기가 기다리는 광장에 모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이 방에 홀로 남은 지금에야 그녀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줄 누군가, 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누군가, 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404쪽

대원들 대부분이 기준처럼 혼자가 됐거나 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소방차를 타는 건 도망치기 위함일 거라고, 기준은 생각했다. 현재에 이르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로부터, 매일 매 순간 밀려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으로부터, 다시는 일상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으로부터. 저 많은 사람들이 이 광장에 모여 앉아 울분을 토하고, 박수를 치고, 내일을 희망하며 삶을 확인하듯. -409~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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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 - 시오리코 씨와 미스터리한 일상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2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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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카와 씨에게는 책에 대한 막대한 지식 말고도 또 하나의 특기가 있다. 오래된 책에 얽힌 수수께끼라면 아무리 실마리가 사소하든, 누군가에게 곁가지로 들은 이야기든 개의치 않고 멋지게 해결하는 것이다. -31쪽

"고인은 책의 구입과 보관 방법에 독특한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중략)
"이쪽에 있는 책들은 매입하지 않을 책인데, 이런 책을 굳이 보관하는 분들은 거의 없죠. 그렇다고 여러 번 읽은 것 같지도 않고요. 아마도 책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셨던 모양이에요.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분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책을 통해 책 주인의 성격까지 알 수 있는 겁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취미는 물론, 직업이나 나이까지……. 책장만 보고도 그런 걸 알아맞히는 사람도 있거든요."-145~6쪽

어떤 감정이든 그대로 놓아두면 서서히 멀어지다 언젠가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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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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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오래된 책 몇 권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된 책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오래된 책에는 내용뿐 아니라 책 자체에도 이야기가 존재한다. 나도 어떤 이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단, 하나 덧붙이자면 그 '이야기'가 반드시 아름다우리라는 법은 없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는 추한 내용도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13쪽

"전 오래된 책을 좋아해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꼭 안에 담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62쪽

"고서점에서 일하려면 책의 내용보다 시장 가치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해요. 책을 많이 읽으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읽지 않아도 배우면 돼요. 실제로 퇴근하면 책은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거든요. 저처럼 무슨 책이든 가리지 않고 읽는 게 드물지도 몰라요."-92쪽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짝지근하지만 가슴을 저미는 말 아니더냐? 가슴에 쌓인 게 있으면 뭐든 말해도 좋다.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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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3-06-2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노카와짱~

이매지 2013-06-26 11:09   좋아요 0 | URL
재미있어서 후딱 읽었어요. ㅎㅎ
오늘 2권 읽으려구요 ㅎㅎ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구판절판


"다른 누군가가 너희들에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 주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문제는 너희가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너희는 사태가 어떻게 될 건지 듣긴 했지만, 아무도 진짜 분명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척 만족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중략)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118~9쪽

우리는 온갖 사소한 문제를 두고 줄곧 싸워 댔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루스와 나는 특히 잠자리에 들기 직전 블랙 반의 다락에 있는 내 방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헤일셤의 공동 침실에서 소등 후 나누었던 그런 밀담의 후속타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낮 동안 아무리 사이가 툴어졌었다 해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루스와 나는 변함없이 내 매트리스에 나란히 앉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뜨거운 음료를 홀짝이며 새로운 생활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이런 밀담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런 때 서로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든 간에 상대가 그것을 깊이 배려하고 존중해 주리라는 믿음이었다. -178쪽

그리고 고독이라는 문제가 있다.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하는 것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간병사가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혼자 차를 몰고 이 센터에서 저 센터로,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먼 길을 다녀야 하고, 토막잠을 자야 하고, 누구에게도 걱정거리를 털어놓을 수 없고, 누구와도 소리 내어 웃을 수 없다. 이따금 옛날에 알던 학생, 지금은 간병사나 기증자가 된 사람을 만나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충분한 기회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늘 시간에 쫓기든가 그렇지 않을 때는 극도로 지쳐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 근무 시간과 여행, 수면 부족은 존재의 내면으로 슬며시 들어와 당신의 일부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태도와 시선과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그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285~6쪽

"이상해. 그 모든 게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려 다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래, 정말 이상해. 그 시절이 자나가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
"정말 이상해. 이제 와선 그런 게 전혀 상관없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상관이 있는걸."
"무슨 말인지 알아."-291쪽

루스는 눈길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 같은 것이 지나갔다. 영화에서 보면 상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동안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실수로 싸움이 일어나 총이 상대에게 넘어간다. 그러면 조금 전에 자기를 위협하던 사람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빛에는 온갖 종류의 복수가 가능해진 지금의 행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루스의 눈길이 바로 그러했다. -317쪽

"혹시 그 소문이 진짜라 해도 당신은 이런 일, 그러니까 당신을 찾아와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커플들에 진력이 나셨을 겁니다. 저희가 정말로 확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와서 번거롭게 해 드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확신이라고?" 마담이 아주 한참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으므로 우리는 둘 다 깜짝 놀라서 조금 뒤로 물러섰다. "'확신한다'고 했지, 너희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말인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사랑이 그렇게 간단한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너희는 사랑하고 있다는 거지,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야. 요컨대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빈정대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 눈길을 주는 그녀의 눈에는 놀랍게도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너희는 그걸 믿는다는 거지? 너희가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그…… 집행 연기를 얻어 내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는 거지? 하지만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찾아온 거지?"-345~6쪽

네번째 기증이 끝나면 기술적으로는 목숨이 다했다 해도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 남아서 더 많은 기증이 이루어지리라는 사것을 본인이 안다. 그 경계 너머에서 여러 차례 기증이 이루어진다는 것, 더이상 회복 센터도 간병사도 친구도 없다는 것, 그들이 자기 몸에서 손을 뗄 때까지 기증이 연달아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은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흰 가운을 입은 이들도 그랬고 간병사들도 그랬다. 그리고 대개의 기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토미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어떤 기증자가 그 문제를 화제에 올린다면 이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말을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그 문제 전체에서 한발 물러선 셈이었다. -382쪽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속에서 두 사람은 온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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