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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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의 밤>으로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정유정이 2년 3개월 만에 <28>로 돌아왔다. <7년의 밤>이 세령호를 둘러싼 이야기라면 이번 <28>은 '불볕'이라는 뜻의 도시 '화양'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모두가 평범한 일상을 영유하던 겨울날, 인구 29만의 서울 근교 도시 화양에 '빨간 눈' 괴질이 돌기 시작했다. "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전염방식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이 전염병은 화양이라는 도시 안팎을 뒤흔든다.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갇혔다는 사실에" 두려워하는 안쪽과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뻗어 올까 봐" 두려워하는 바깥쪽.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게. <28>은 28일간 화양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본성 대한 뜨거운 이야기다.

 

  <7년의 밤>이 꽤 괜찮았기 때문에 <28> 어느 정도 기대감을 걸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7년의 밤>에 비해 <28>은 자극적이긴 하나 독보적이지는 않았다. 전염병, 폐쇄된 공간, 그곳에서 일어나는 공포와 무질서,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빨간 눈' 괴질의 시작점인 개를 죽이거나 생매장하는 모습은 수많은 소돼지를 살처분한 구제역 사태가 떠오르게 했고 폐쇄된 공간에서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가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연상케했다. 물론, 작가도 후기에서 밝혔듯이 "만약 소나 돼지가 아닌 반려동물, 이를테면 개와 인간 사이에 구제역보다 더 치명적인 인수공통전염병이 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이야기였으니 이런 연상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서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소돼지를 개로 치환해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에 그쳐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28>을 읽으며 나 또한 작가처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인간이 서슴지 않고 '가족'처럼 여기는 반려동물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반려동물뿐이겠는가. 화양 밖의 사람들의 모습처럼 다른 인간의 삶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정유정은 '빨간 눈' 괴질이라는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를 통해 이런 인간의 가장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알 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서슴 없이 타인의 삶을 딛고 서려는 모습을 보며 오싹해졌다.

 

  다섯 명의 사람과 한 마리 개의 관점에서 사건을 전개하다보니 다양하게 사건을 조망할 수 있었지만, 이야기는 다소 산만해졌다. 119 구조대원 기준의 이야기나 개썰매 레이스에 참가한 이력이 있으나 유기견 구조센터를 운영하는 재형의 이야기, 그리고 늑대개 링고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전개나 인물의 묘사 등이 적절히 배치된 느낌이었지만 간호사 수진과 기자 윤주 그리고 사이코패스 동해와 관련된 부분은 인물이 주체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느낌보다는 관찰자(또는 구경꾼)에 그치는 것 같아 아쉬웠다. 특히 동해라는 캐릭터는 화양을 한층 광기의 도시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해라는 인물이 전체 이야기의 본질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듯해서 꼭 들어가야 했을까 고개가 갸웃했다. (차라리 동해를 중심에 둔 사이코패스 소설이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지만 그랬다면 짜증나서 덮었을지도.)

 

  '빨간 눈' 괴질 자체가 원인도 해결책도 알 수 없는 병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가족들은 희생됐지만) 주인공들은 어떤 이유에서 원인균에 감수성이 약해 그 누구도 빨간 눈 괴질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나 화양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점도 좀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싶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걸고 넘어지면 피해갈 작품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이래저래 불평을 토로했지만 <28>은 흡입력 있는 소설이다. 500쪽에 가까운 이야기를 바쁜 와중에도 한 호흡에 읽은 것도 참 오랜만이니 이야기꾼으로 정유정의 능력은 높이 사고 싶다. <7년의 밤>을 읽을 때처럼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28>을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그려갔다. 장면 하나하나를 생동감 있게, 캐릭터 하나하나를 맘껏 뛰놀 수 있게 하는 것은 정유정이 가진 최대의 무기가 아닐까. <28>을 읽는 동안 화양에서 그랬듯이 소설 안팎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생명이 죽어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삶은 지금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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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7-04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흡입력이 있어 읽어봐야 될듯 싶더군요^^

이매지 2013-07-05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스피님 말씀처럼 흡입력은 있어요. ㅎㅎ 이만큼 쓰기도 힘들죠.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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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름다운 정원> <달의 제단> <이현의 연애>로 홀딱 반해버린 심윤경. 과작인 탓에 동화를 제외하고 가장 최근에 쓴 <서라벌 사람들>이 벌써 4년 전 이야기다. 작년 가을 느닷없이 동화 '은지와 호찬이 시리즈'를 냈을 때 인터뷰에서 '새 소설이 출간 임박'했다는 언급이 있어서 언제 나온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해를 지나 마하 39의 속도로 <사랑이 달리다>가 찾아왔다. 책을 손에 쥐자마자 심한 독서 침체기 중이었음에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심지어는 걸어다니면서도(!) 홀리듯 읽었다. 일단 책장을 넘기는 순간, 주인공 김혜나와 함께 앞뒤 보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는 소설 <사랑이 달리다>이다.


  생일이면 아빠가 옷을 차려입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금이야 옥이야 자란 김혜나. 그녀는 맨날 제정신 못 차리고 대형사고만 치는 작은 오빠 김학원, 돈과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큰오빠와 어린 시절부터 아옹다옹 삐걱삐걱했지만 풍족한 환경 탓에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아쉬움 없이 살아왔다. 그런 어쨌거나 소소한 사고들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무사평온하게 지낸 그녀가 부모의 이혼(그것도 믿었던 아빠가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아버려 새 살림을 차리면서 벌어진)을 경험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빠에게 재산 분할 소송도 걸지 않고 엄마가 순순히 이혼 도장을 찍으며 아빠의 화수분 같은 재력을 잃게 된 삼남매. 작은 오빠야 전처럼 누군가의 등을 쳐먹으며 살고, 큰오빠야 자기 사업을 한다고 해도 내일모레면 마흔이지만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김혜나는 아빠의 신용카드 유효기간 만료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불안해진다. 게다가 동갑내기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까지 나자 김혜나는 비로소 난생처음으로 제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부잣집 철부지딸인 김혜나가 대형 산부인과 보육실 김혜나로 새 지위를 얻으며 벌어지는 일들이 김혜나의 통통 튀는 매력과 함께 그려진다. 


  '사랑'이 달리다, 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단순히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에 중심에는 사랑이 놓이지만 사랑'만' 다루지는 않는다. <사랑이 달리다>는 어떻게 보면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어떻게 보면 모두가 성공을 외치는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항변이며, 어떻게 보면 귀엽지만 어떻게 보면 막장일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어떤 관점에서 이 책을 읽던지 간에 이 책은 캐릭터가 살아 있는 소설이다. 이런 캐릭터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비현실적인데 싶다가도 어느샌가 아니 뭐 또 이런 사람들이 없으란 법이 어디 있나 싶어지며 친숙하게 다가왔다. 자신을 지탱하던 기반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든 그것을 다시 붙잡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우왕좌왕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희극 같았다. 이야기 초반에 혜나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전하느냐였다"라고 작은 오빠 학원의 운전실력을 언급하는데, <사랑이 달리다>도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어떻게' 가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등장인물 각자의 종착지보다는 그들이 나아가는 방식 자체에 더 주목했고 그랬기에 그 종착지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수긍할 수 있었다. 


  다른 인물들이 변모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주인공 김혜나가 교주라 해도 믿길 정도로 모든 이에게 칭송받는 산부인과 원장 정욱연과 관계를 쌓아가며 변해가는 모습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정욱연과 김혜나의 관계는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한 편의 성장소설에 가깝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본질은 미성숙한 두 남녀가 서로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것을 함께 끌어안고 성장해가는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특히 김혜나가 "이상하게 정욱연을 보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사실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미미했다. 이렇게 덮칠까, 저렇게 덮칠까 호시탐탐 궁리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에 나도 그 방법을 한번 고려했을 뿐이고, 정작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섹스가 아니라 울음이었다"(203쪽) 같이 고백할 때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김혜나가 정욱연을 사랑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나의 내면에는 이전까지 살아온 김혜나와는 다른 무언가 괜찮은 것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우리는 닮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을까. 정욱연의 모습을 누군가와 겹쳐 보다가 어느샌가 정욱연까지도 사랑하게 되버렸다. 


  <사랑이 달리다>를 구성하는 한 축이 '사랑'(혹은 성장)이라면 다른 한 축은 '돈'이다. 돈으로 표상되는 김혜나 가족의 욕망은 현대사회의 일면을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윤기를 잃어가는 우리의 끝물 젊음처럼, 애초부터 거창하지도 않았던 나의 모든 꿈들은 터벅터벅하게 메말라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인 우리의 아이도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아이는 자궁에서부터 손익계산서를 들고 튀어나와서 금융인과 법조인과 의사 이외의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돈독이 올라서 반질반질해진 내 아이의 모습 앞에서 그대로 폭발했다"(268쪽)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겠지만, 김혜나 가족은 영어유치원이나 입학사정관제 등으로 드러나는 불타는 교육열, '의대 갈 걸'로 표상되는 전문직종에 대한 선망, 돈과 지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져내리는 자존심, 그리고 돈이든 성공이든 조금이라도 더 손에 쥐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모습 등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욕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불안의 변형인 이 욕망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지 입 안에 씁쓸함이 감돈다. 대체 이렇게 악다구니를 써서 손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허망함만 남는 것이다. 


  사랑이건 욕망이건 뭘로 읽던 간에 <사랑이 달리다>는 간만에 심윤경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즐겁게 해줬다. 그녀를 이런 작품으로 다시 만나 더없이 기쁘다. 분명 이전 작품과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지만 심윤경이 이런 글도 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놀랐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찾아올까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미래조차 까마득한 저 뒤에 내팽겨쳐버리고, 내 눈먼 사랑은 그저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란 훈장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후련함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눈이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작은 금속은 영원히 그의 명예다. 훗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죽든"(354쪽). 지금 이 순간 마하 40으로 달리고 있을 김혜나와 혜나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달리고 있을 심윤경을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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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8-2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반가와요. 히죽.

이매지 2012-08-21 01:20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또 오랜만에 빼꼼 나타났는데 ㅎㅎㅎ
조선인님 반가워요. 히죽.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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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니가 보고 싶어』로 오랜만에 생동감 있는 '지금-여기'의 이야기를 만나게 해준 정세랑의 두번째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보다 늦게 출간됐지만 그보다 먼저 집필된 작품이라 그런지 『덧니가 보고 싶어』보다 더 풋풋한 느낌이었다. 두 작품 모두 기본적으로 '연애'를 소재로 다루지만, 『덧니가 보고 싶어』가 여러 이야기가 잘 어우러진 패치워크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구에서 한아뿐』은 잘 직조된 모직원단 같은 느낌이라 비교해가며 즐길 수 있었다. 느닷없지만, 최근 에피톤 프로젝트의 2집 중 <이제, 여기에서>를 들으며 "열한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널 찾아왔어"라는 부분에 어쩐지 가슴이 두근, 했었다. 누군가 나를 만나기 위해 열한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면 그게 누구든 간에(아, 스토커는 논외로 하자) 어쩐지 감동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여기에서>와 뉘앙스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지구에서 한아뿐』도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얘기다. 오직 한아를 만나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큰 빚까지 져가며 2억 광년(!) 우주를 횡단해 지구에 온 외계인의 사랑 이야기니 말이다. 이렇게 요약하자니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지' 싶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연은 조금 더 복잡하다.

  일류대 의상디자인학과를 나왔지만 절친 유리와 함께 사연이 있는 옷을 리폼하는 친환경 옷수선집 '환생'을 꾸려가는 한아. "평일 오후 2시의 6호선 전철 한 칸에서 가장 예쁠 정도"(곧 "출퇴근 시간 2호선 한 칸에선 20위권에도 못 들 수준")의 외모인 한아는 조그만 가게에서 행복하게 일하며 정착하지 못하며 철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는 남자친구 경민과 어쨌거나 그럭저럭 무탈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느닷없이 캐나다에 별똥별을 보러 간 경민이 소형 운석 폭발에 며칠 연락이 두절됐다가 무사히 귀국한 이후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캐나다에 다녀온 후 경민은 전에 먹지 않던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집까지 배웅을 해주는 등 평소보다 더 다정해진다. 내심 싫지는 않지만 뭔.가.이.상.하.다. 대체 경민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궁금증이 커져가던 차에 밝혀진 비밀. 응? 경민이 경민이 아.니.라.고?! 캐나다에서 소형 운석이 폭발했을 때 진짜 경민은 한아를 만나기 위해 2억 광년을 날아온 외계인에게 신분을 넘기고 우주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 경민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 정체를 밝히자 처음엔 당황한 한아. 하지만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라고 말하는 데 두근, 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이렇게 시작된 한아와 경민(의 모습을 한 외계인)의 범우주적 사랑은 시작된다. 

  "자신들의 사랑이 온 우주에서 단 하나뿐임을 바라는 연인을 위한 순도 100프로 무공해 소설이 떴다!"라는 조현의 추천사처럼 『지구에서 한아뿐』은 사랑을 꿈꾸는 모든 연인들의 '로망'을 담은, 유무형의 빚을 지면서까지 사랑을 하는 지구상 아니 우주의 모든 연인을 위한 다디단 책이다. 하지만 마냥 달콤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범우주적 사랑' 외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름, 얼굴,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하고 있지만 마인드는 전혀 다른 존재로 갈음되었을 때 그는 어디까지 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껍데기만 빌릴 뿐 전혀 다른 존재가 되버리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우주를 여행하던 진짜 경민(엑스)이 돌아오면서 더 커진다. 이 지구상에 두 개여서는 안 되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엑스와 경민의 간극은 분명 존재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이처럼 무엇이 존재를 존재로 만드는가라는 물음도 있지만, 인간과 지구의 관계에 대한 물음도 담겨 있다.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고 있는 이 끔찍한 별에서"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한아라는 존재를 통해 자본주의나 인간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이 지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봤지만, 뭐 궁극적으로 『지구에서 한아뿐』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SF 연애물이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여전히 말맛과 현실감이 살아 있고, 『덧니가 보고 싶어』에서 밝힌 "농담이 되고 싶다"는 포부 또한 유효하다. 이제 갓 두번째 발걸음을 내딛었기에 아직은 그의 농담이 어디로(혹은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 농담을 기꺼이 또 한 번 즐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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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초 : 연인들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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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20대의 마지막 해.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고, 이러다 나만 남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조금씩 찾아왔다. 잇속 따지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조금씩 깨달아가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조건 없이 '그냥' 잘 통하는 사람과 연애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를 몇 달이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얘기에 누군가는 철이 덜 들었다고 핀잔을 줬고, 누군가는 나도 그런 두근거림을 느껴보고 싶다며 설레했다. 카페에 앉아 가만히 창밖에 오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하게 된 걸까 하는, 똑 부러진 정답이 없는 호기심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사랑의 기초>를 만났다. 알랭 드 보통과 정이현의 공동 작업이라는 점도 관심을 끌었지만 "첫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의 사랑"이라는 띠지 문구에 '남의 사랑 이야기'를 '내 사랑 이야기'처럼 읽고 싶어 연애를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82년생 준호와 84년생 민아. "애인을 사귀려는 목적으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를 두 사람이 준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 사람이 내 짝이었으면 좋겠다는 얕은 희망 혹은 기대를 품고 나간 자리.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둘은 순조로운 첫만남에 우여곡절을 거쳐 '연인'으로 발전한다. 하나씩 서로의 과거를 나누고, 현재를 공유하며, 미래까지 꿈꾸는 두 사람. 하지만 여느 커플이 그러하듯 둘의 연애도 마냥 핑크빛은 아니다. 요양원에 모셔진 할머니의 존재 같이 때로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감정의 공유를 시도하고, 내색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불만이나 짜증도 조금씩 쌓여간다.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연애 초반부를 거쳐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중반부를 지나 "나눌 것은커녕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는" 종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준호와 민아는 함께 걸어간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담기에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은 결코 길지 않다. 하지만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서 둘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감정의 뒤섞임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쓰다 비슷한 반경에서 생활해왔다는 것을 알게 돼 안도하는 준호와 민아처럼 초반부에 나 또한 이들의 연애와 나의 연애를 겹쳐보고 공통점을 찾으려 애썼다. 동갑에다가 비슷한 고민까지 하는 여주인공이라니. 100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이거 내 얘기 같잖아' 싶었다. 아니, 어쩌면 민아는 직장생활을 하는 20대 후반의 미혼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어느 정도 투영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실감 있는 인물 설정은 사십대인 작가 본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실제 이십대와 소통한 것에서 연유한다. 정이현은 알랭 드 보통과의 대담(<사랑의 기초: 한 남자> 뒤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이십대 남녀들을 만나 그들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솔직한 생각들을 물어"보는 과정을 거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요즘 이십대의 연애관이 자신의 이십대 때와는 사뭇 달라 "어느 순간엔 세대차이 같은 것도 느꼈"다고 술회한다. 이런 사전 인터뷰 과정 덕분인지 "모든 이십대 남녀를 일반화해선 안 되겠지만" 정이현은 이십대와의 간극을 좁히는 데 성공했고, <사랑의 기초: 연인들> 속의 민아와 준호는 "분명 지금 이십대의 방식으로, 이십대들이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인물상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만남도, 사랑도, 이별도 그 모습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겠지만, 모두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보편적인 연애"를 하면서 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리며 살아온 두 사람이 하나의 점으로 겹쳐졌다가 다시 각자의 포물선을 그리는 과정. 기적 같은 찰나의 교차. 이 과정을 한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사랑의 기초: 연인들>에는 존재한다. 그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유의 연애판타지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읽고 나면 기어이 맥주 한 캔을 따게 하는 결말이기에 더 공감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치정 때문에 죽고 죽이는 고대 희랍식 드라마는 자주 일어나지 않으며, 드라마 퀸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그저 함께 걷던 두 사람이 어느새 점점 멀어져 각자의 길을 걷는 과정은 불꽃 튀는 격정적인 사랑이나 이별보다야 더 현실감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명색이 연애소설이니 말랑말랑하고 몸이 배배 꼬이는 듯한 달달함을 기대한 독자는 이 무덤덤한 연애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이현이 섬세하게 그려낸 별것 아닌 담담한 연애가 마냥 달콤한 사탕 같은 연애소설보다 더 매력적이다. 읽고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연애를 했으면, 하고 꿈꾸게 하니 말이다.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두 사람처럼 이 책과, 그리고 민아와 준호 두 사람과 이별하며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나눌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완벽한 작별인사"를 건네고 싶다. "안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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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5-2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게 20대의 마지막 해에 쓴 리뷰란 말이죠...? ㅋ
정이현에 묻어가지 마시고... 꿈 꾸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ㅎㅎㅎ

이매지 2012-05-27 14:43   좋아요 0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는 게 사랑이고 연애고 낭만이죠. ㅎㅎ
이십대도 반년 남짓 남았군요. 뭐 좀 아쉽기도 하고 삼십대가 기대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ㅎㅎ

하늘바람 2012-05-28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이현 작가의 최근 책이군요.
우아 이매지님이 벌써 그렇게 되셨나요?
우리가 안 세월이 그런가요 벌써
대학교 다니시면서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매지 2012-05-28 11:57   좋아요 0 | URL
제가 서재생활을 한 게 한 2004년 정도부터니까 정말 오래됐죠. ㅎㅎ
나이가 변하니 고민도 변하고 그렇게 되네요. 하하핫.
(아 뭔가 부끄럽구요.ㅎㅎ)

Kitty 2012-05-2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리뷰 좋다...

Kitty 2012-05-2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 달고 보니 반말 ㅋㅋㅋ 리뷰 넘 좋아요 ㅎㅎ

이매지 2012-05-28 11:59   좋아요 0 | URL
아니 반말이 뭐 어때서요. ㅎㅎ
이거 너무 사적인 얘기를 많이 쓴 것 같아 민망하구요. ㅎㅎ
 
덧니가 보고 싶어 tam, 난다의 탐나는 이야기 1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를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르는, 글이라고는 시덥잖은 리뷰 정도만 남기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풀어가는 사람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작가가 나와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을 때면 더 그랬다. '얜 대체 뭘 읽고 컸지' 하는 생각에 슬쩍 질투가 나는 것이다. 동갑내기인 <덧니가 보고 싶어>의 작가 정세랑도 그랬다. 재화와 용기의 희한한 러브스토리에 낄낄거리다가도 괜시리 질투가 났던 책, <덧니가 보고 싶어>다.

 

  <덧니가 보고 싶어>는 장르소설가인 재화와 그의 전 남자친구인 용기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재화에게 용기는 "평생을 함께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지만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 하루를 함께하고 싶은 남자"였다. 용기에게 재화는 "불법 선팅 차량처럼" "막이 하나 씌워져 있는 것 같"은,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덧니만이 이 세계에 속하는 것"같은 여자였다. 작가와 경비업체 직원이라는 직업상의 이미지만큼 갭이 큰 두 사람. 중간에 연결된 인물이 있지만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희한하게도 '텍스트'로 연결이 된다. 자신의 소설 속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용기를 모델로 한 남자 주인공을 아홉 번 죽인 재화. 단행본 작업차 재화가 작품을 퇴고를 시작하자 뜬금없이 용기의 몸에 그가 소설 속에서 죽은 방식이 문신처럼 새겨진다. 어긋난 좌표를 가진 두 사람은 재화의 소설이라는 보이지 않는 매개체를 통해 다시 조금씩 좌표가 수정된다. 이 두 사람의 좌표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런지. 

 

  <덧니가 보고 싶어>는 다층 구성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마릴린 먼로를 닮은 소녀 로봇도 나오고 처녀 공물을 요구하는 용도 나오고, 양치기를 사랑하는 알파카 양도 나오고, 워프를 못 하게 된 우주 항해사도 나오고, 얼음에 갇힌 여왕도 나온다. 판형도 아담하고 250페이지 남짓한 가벼운 장편소설인 <덧니가 보고 싶어> 속에는 크게 열 편(아홉 편의 삽화와 용기와 재화의 이야기)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산만하지 않다. 오히려 각각의 이야기와 큰 줄기의 이야기를 '농담처럼' 웃어 넘길 수 있어서 신선하기까지 했다. 


  소설을 읽으며 가끔 '누가 현실에서 이런 대사를 쳐'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문체가 책을 읽는 독자와 이야기 속의 인물을 투명한 막으로 막아놓는 것이 아닌가 싶어질 때가 있다. 이야기를 통해 감정의 변화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리얼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외국소설에 더 몰입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외국소설은 어차피 '내 주변의 이야기'라는 가정을 내려놓고 시작할 수 있으니...) 그런데 <덧니를 보고 싶어>를 읽으며 한국소설에도 이렇게 생생한 목소리로 발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아는(그것도 지루하지 않게!) 작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하는 경계를 지을 필요도 없이, 이 책은 어쨌거나 사랑스럽다. 용기와 재화 두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터프한 선이 언니도, 서슴없이 직구를 던지는 용기의 여자친구도, 재화의 지원군인 편집자 조선배도, 심지어는 재화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매력적이다. 이야기 속에 있지만 마치 독자 곁에 있는 것 같이 살아서 숨쉬는 등장인물들. 활어처럼 펄떡펄떡 뛰는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지 싶었다. 첫 작가의 말에서 앞으로의 포부를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 간절히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정세랑. 그의 말처럼 앞으로의 행보가 세기를 뛰어넘는 '농담'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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