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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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만들다 보면 정말 좋은 책인데 시기가 맞지 않아, 그 진가가 알려지지 않아 묻혀버리는 책이 있다. 하루에도 몇 십 권의 책이 출간되고, 그보다 더 많은 책들이 사람들의 관심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옮겨간다. 몇 개월, 몇 년에 걸쳐 만든 책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라 한편으로는 쓸쓸해지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팔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지 하고 씁쓸해진다. 일본 서점에서 선정하는 '서점 대상'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독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비운의 걸작(걸작이라니 조금 표현이 과하다 싶지만), 독자들은 잘 모르지만(혹은 아직 진가를 몰라주지만) 내가 정말 아끼는 작품 등의 이유로 선정했을 '서점 대상' 수상작들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대개는 그 선택이 만족스러워 자주 찾아 읽는 편이었다. 이번엔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라니 더 기대가 됐다.

 

  300페이지 남짓의 그리 두껍지 않은 <배를 엮다>에는 <대도해>라는 한 권의 사전 편찬을 둘러싼 10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 만드는 데 시간과 공이 많이 듦에도 큰 매출을 기대할 수 없지만 일단 만들면 누군가 유용하게 사용하는 사전. 사전을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편집자 아라키가 정년을 앞두고 자신의 뒤를 이어 사전을 만들 사람을 찾다가 영업부 사원인 마지메를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어수룩하고 사회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이름처럼 성실한 마지메는 눈앞의 일을 하나씩 하나씩 묵묵히 해나가며 '언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넌다. 하지만 이 항해는 마지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일생을 사전과 함께해온 편집자 아라키와 감수자 마쓰모토, 겉보기에는 가벼워 사전과 잘 맞지 않는 듯한 니시오카, 패션지를 만들다 사전을 만들게 된 기시베, 마지메의 든든한 닻이 되어주는 가구야와 디자이너와 제지사까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긴 시간 함께 호흡을 맞춰 배를 저어나간다.


  사전 편집과 단행본 편집은 비슷한 면도 다른 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언어'가 중요하고, 묵묵히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배를 엮다> 속 인물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무리 잡고, 또 잡아도 마치 실체가 없는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가는 말을 묵묵히 다듬을 수밖에 없는 과정. 편집이 뭔지 뭣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편집이 단순히 오탈자와 띄어쓰기를 점검하는 과정이 아니라 원문의 의미(혹은 원저작자의 의미)를 최대한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돕는 과정이라는 것을, "글씨 크기며 서체며 행간의 여백은 이것으로 좋은가. 도판 위치는 적당한가. 숫자와 기호는 알기 쉬운가. 읽기 쉽고 보기 쉬운" 책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책이 하나의 유기체 같다 싶었는데, <배를 엮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배를 저어간다는 점에서 책을 만드는 일, 아니 우리 인생은 긴 항해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나야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라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몰입했지만, 사실 <배를 엮다>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도 하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끝이라고 생각한 곳이 다시 시작점이 되어버리는 인생이지만 <배를 엮다>를 읽으며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봤을 때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 그리고 위안을 다시 한 번 얻었다.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에만 집중했다면 지루했을지도 모르지만 외골수 같은 마지메가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 사회생활에 대한 고민을 하는 기시베의 고민 등이 잘 어우러져 '말'의 소중함을 아는,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뜻하게 읽을 수 있을 책이 된 것 같다. 잘 담근 차 한 잔을 마신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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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3-06-0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노사이드를 제치고 서점대상을 수상했군요. 제노사이드도 재미있었는데 말이죠. ^^
저도 서점대상 수상 책들은 대부분이 좋더라구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상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근데 서점이 모두 없어지고 있으니 힘들려나요?
이매지님 오랫만에 인사드리는데 잘 지내셨죠? ^^

이매지 2013-06-07 11:33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제노사이드를 못 읽었는데 평이 좋아서 조만간 읽어보려구요. ㅎㅎㅎ
저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상이 있으면 좋겠다 싶긴 한데,
우리나라와 일본의 서점 문화가 좀 달라서 애매한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은 아무래도 남은 서점이 대부분 대형서점이라 서점 직원 개인의 취향이 상대적으로 덜 반영되는 듯해요.
인터넷 서점 MD들을 대상으로 하자니 수가 많지 않아서 뭔가 공인(?)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ㅎㅎ
아무튼 바람돌이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니 반갑네요!
자주 와야지 하면서 바쁘고 게을러서 그만. 흑흑.
 
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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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편집 작접이 최종 국면을 맞이할 무렵에는 이미 전체 페이지 수가 정해져 있다. 조본(造本)이나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페이지 수의 변경이 허락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사전 내용을 규정 페이지에 딱 맞게 앚힐 수 있을지, 편집자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재빨리 판단해야 한다. 때로는 울며 용례를 지우기도 하고, 때로는 뜻풀이 문장을 효율성 있게 줄이기도 해서 정연하게 페이지에 끼워 넣는다. 그야말로 남자가 지금 책장 앞에서 보인 퍼즐 맞추기 같은 센스를 요구한다. -20쪽

"전철에서 플랫폼에 내려서면 저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갑니다. 다른 승객들은 저를 추월해서 에컬레이터로 몰려가죠. 하지만 난투극이나 혼란 상황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두 줄로 서서 차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죠. 왼쪽은 서서 가는 줄, 오른쪽은 걸어서 올라가는 줄, 정확히 나눠져서. 아무리 러시아워여도 걱정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정경이랍니다."
(중략)
플랫폼에 넘쳐 나는 사람들이 빨려들듯이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줄을 서서 내려간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무수한 말이 분류되고 연관 지어지면서 질서 정연하게 사전의 페이지에 알맞게 들어가듯이. -34~5쪽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36쪽

마지메는 지금까지 줄곧 '특이한 녀석'이라는 부류에 있었다. 학교 생활에서도 회사 생활에서도 늘 따로 놀았다. 가끔 호기심과 호의로 말을 거는 살마이 있어도, 마지메의 응답이 너무 엉뚱한 탓인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바로 가 버린다. 마지메 본인은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응대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잘되지 않았다.
그것이 고통스러워서 책을 읽게 되었다. 아무리 말을 못해도 상대가 책이라면 침착하게 깊고 조용히 대화할 수 있다. 또 하나,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펴 놓고 있으면 친구들이 괜히 말을 걸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독서 덕분에 마지메의 성적은 쑥쑥 올랐다.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인 '말'에 흥미를 느껴 대학에서는 언어학을 전공했다.
아무리 지식으로서의 말을 모아 보아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허무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지메는 자신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포기와 함께 반쯤 받아들였지만, 사전편집부로 이동한 뒤로 욕심이 났다. -45~6쪽

【연애】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고양된 기분으로 둘이서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어 하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길 바라면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거나 드물게는 이루어져서 환희하는 상태에 있는 것. -53쪽

하나의 말을 정의하고 설명하려면 반드시 다른 말을 써야 한다. 말이라는 것을 이미지화 할 때마다 마지메의 뇌리에는 목제 도쿄타워 같은 것이 떠오른다. 서로 보충하고 서로 지탱하며 절묘한 균형으로 선 흔들리기 쉬운 탑. 이미 존재하는 사전을 아무리 비교해도, 아무리 많은 자료를 조사해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말은 마지메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위태롭게 무너져 실체를 무산시킨다. -80~1쪽

아무리 말을 모으고 뜻풀이를 하고 정의를 내려도 사전에 진정한 의미의 완성은 없다. 한 권의 사전으로 정리했다고 생각한 순간, 말은 다시 꿈틀거리며 빠져나가서 형태를 바꿔 버린다. 사전 만들기에 참여한 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가볍게 비웃으며, 한 번 더 잡아 보시지 하고 도발하듯이.
마지메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끊임없이 운동하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방대한 열량이 한순간에 보여 주는 사물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건져 내 문자로 옮기는 일이다. -92쪽

뭔가에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인다면 기대치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하는 상대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181쪽

많은 말을 가능한 한 정확히 모으는 것은 일그러짐이 적은 거울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일그러짐이 적으면 적을수록 거기에 마음을 비추어 상대에게 내밀 때, 기분이나 생각이 깊고 또렷하게 전해진다.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울고 화를 낼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건 의외로 즐겁고 소중한 일일지도 모른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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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는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5월
품절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갖가지 '만약'의 수가 하나도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나는 법이다. -8쪽

사람은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는 줄 알지만 실은 무엇 하나 모르는 것 아닐까. 당신의 이웃이 니토와 같은 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정체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알았을 때는 이미 일이 터져 버린 뒤다. -12쪽

아주 큰 일이 계기가 아니라도 되잖아요. 혼노지의 변도 아케치 미쓰히데가 어째서 모반을 일으켰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잖아요. 남이 보기에는 '고작 그 정도의 일로?'라고 치부할 일이라도 당사자에게는 상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용서하지 못할 일도 있는 거죠. 작은 일이 쌓이고 쌓여서 니토 씨는 가지와라 씨를 용서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몰라요. -149쪽

동기는 통상적인 감각으로는 밝혀낼 수 없다. 하지만 니토는 이미 책을 둘 곳을 마련하려고 아내와 딸을 죽였다고 고백한 인간이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인물이라면 가지와라에게도 이상한 동기로 살의를 느끼고 있던 것은 아닐까. (중략)
세상에는 살인이라는 금기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결여된 인간도 있다. 그러한 인간에게 살인은 사태를 해결하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 죄악감이라는 억제 장치가 없으면 인간은 얼마든지 쉽게 결단을 내리는 법이다. -154쪽

속단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조차 상황에 유리하도록 바꾸는 법이다. 그럴 가능성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나카자토 씨의 증언은 신뢰가 갔다. -173쪽

"선생님을 책망할 생각은 없어요. 선생님이 아니라 세상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를 원하죠. 이해하지 못하면 찜찜하거든요."
"누구든 그렇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살해당한다니 무섭잖아."
"그렇게 말씀하셔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325~6쪽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잖아요. 살인귀는 물론 가까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실은 모른다고요.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남편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요? 부모는요? 자식은요? 연인이나 친구의 생각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초능력자죠. 누군가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왜 살인범의 심리만은 이해하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걸까요?"-326쪽

상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남을 본다. 어떤 사람은 니토를 선한 사람으로 보았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살인귀로 보았다. 나는 니토를 이해하지 못할 가치관의 소유자로 보았다. (중략) 전부 나라는 필터를 거친 허상이다. 허상은 허상일 뿐 진실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니토뿐만이 아니라고 쇼코는 지적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해한 척하며 살고 있다. 자신들이 이해한 척한다는 사실조차 보통은 잊고 있다. 안심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바로 불안해지니까. 그 눈속임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니토라는 존재에 우리는 이상한 흥미를 보였다. 전부 자신의 불안을 억누르고 싶기 때문이었다.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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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4월
절판


"어떤 경우에도 이노우에 씨에게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큰일을 겪을 것만 같군. 형사들에게 원죄 사건만큼 곤란한 일은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가지의 말에 이노우에는 상냥하게 웃었다.
"바로 그거야. 신문기사다운 말투.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럴 가능성은 절대 없을 걸세. 그러니까 나도 안심하고 비망록을 넘겨줄 수 있는 거고. 그래서 말인데,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나도 조금 심심했어. 그래서 도자이 신문에서 시작한 탐정 놀이에 동참할 생각이네."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다……"
탐정 놀이란 말에 살짝 반감이 든 가지가 말했다.
"맞아.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어."
이노우에는 놓여 있던 찻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능성 제로라는 것은 없는 법이지."-58쪽

예를 들면 네가 외신부에 들어간다고 하지. 거기는 이십사 시간 근무 태세로 로이터, AP, AFP, 타스, 신화사 등 전 세계 통신사에서 홍수처럼 정보가 밀려들어. 데스크에서 헤드라인을 살펴보고 필요하다고 판단한 뉴스를 번역시키지. 기자들은 사전과 씨름하면서 번역을 하겠지만 데스크에서는 좀처럼 기사로 인정하지 않아. 때로 오역이 나타나면 야단도 맞게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가 되는 것은 개중 극히 일부고 태반은 쓰레기통으로 가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네 아버지가 어떠니 하고 생각할 여유 따위는 전혀 없어. 그게 직장이고 그게 신문사라는 곳이야."-89쪽

"이노우에 경감님, 이 사건 혹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을 꺼낸 사사키는 다음 말을 삼켰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젊은 형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았다.
미궁에 빠진다는 말을 하면 정말 그렇게 돼 버린다.
고토다마(言靈, 고대에 말속에 깃든다고 믿었던 이상한 힘)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형사라는 족속은 마음 깊숙이 조금이나마 미신 같은 것을 믿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어지간한 것이 아닌 한 금기시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미궁, 시효, 오인 체포, 그리고 원죄……-174쪽

"마음을 다잡는 데에는 몇 년이나 걸렸소. 나도 그랬고, 아이가 유괴당해서 죽은 일을 당한 부모의 마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지."-217쪽

그때였다. 가지는 무릎을 꿇고 있던 자신의 발밑에 빨간 무언가가 구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딸랑이였다.
가지는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돌기 시작할 것 같은 분홍색 회전목마 모빌이 걸려 있다. 목제 아기 침대,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아기 옷장, 토끼와 고양이 봉제 인형, 작은 조립식 미끄럼틀, 색색의 나무 블록, 그리고 아기 의자에는 손때로 더러워진 아기 인형이 앉아 있었고 인형 앞에는 두부가 앞에 담긴 작은 접시와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아사코의 울음소리는 언제까지나 계속됐다.
소이치는 기세를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끄러움과 자기혐오의 격한 감정이 가지를 감쌌다.
"뭐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죄송합니다……"
얼굴을 들 수 없는 가지는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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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바에 있다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1
아즈마 나오미 지음, 현정수 옮김 / 포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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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러브레터>다. 첫 장면인 장례식 장면부터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오겡끼데스까"까지 <러브레터>의 배경에는 눈이 하염없이 날린다. 당연히 홋카이도도 여느 도시처럼 사람 사는 곳이건만 <러브레터>의 이미지 때문인지 나에게 홋카이도는 범죄 같은 어둠 없이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순수한 사랑만이 남은 순백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쩐지 동화 속의 도시 같다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오해를 이 스스키노 시리즈가 유쾌하게 깨부쉈다.

 

  '알코올 중독'이 아닌 '알코올 의존증'인 '나'. 여느 날처럼 스스키노의 바 '켈러 오하타'에서 위장약을 털어넣은 뒤 술을 벗삼아 밤에 젖어들려는 차에 누군가 '나'의 성씨에 '선배'라는 "뒷맛 나쁜 단어를 붙여" 불렀다. 평범하게 생긴 대학생인 그는 동거하고 있는 여자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나'에게 여자친구의 행방을 찾아달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별로 흥미가 동하는 의뢰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동정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조사. 하지만 단서를 쫓다 보니 얼마 전 한 모텔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의 접점이 떠오른다. 이에 나는 처음의 마음가짐과 달리 진지하게 후배의 여자친구를 찾기 시작하고 살인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실질적인 정의는 차치하고 하드보일드 하면 비정한 도시에서의 사건, 그리고 진지하게 폼잡는 탐정, 건조한 서술방식 같은 키워드가 떠오른다. 하지만 <탐정은 바에 있다>는 여느 하드보일드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떠올리는 하드보일드 키워드에 플러스알파로 '유머'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올해도 스물여덟 늙은이"인, "언뜻 보면 야쿠자 같은 옷차림을 하고" 주로 바에서 술을 마시고 오셀로게임이 소소한 부수입인 주인공의 캐릭터부터가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대놓고 쉴새없이 웃기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볼 때는 너무 진지한 캐릭터인데 알고 보면 허당이라 그 간극에서 오는 매력과 웃음이 있다. 내가 갭모에라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주인공 '나'에 홀딱 반해버렸다. 마음이 드는 사람이 아무리 시덥잖은 농담을 해도 실없이 터지는 것처럼 나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빵빵 텨저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건 자체는 우연적이고, 이야기의 얼개도 좀 산만한 면이 있지만 그런 스토리의 아쉬움을 '나'란 캐릭터의 힘으로 모두 커버해낸다. 물론 탄탄한 개별 사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캐릭터가 힘있게 자리매김한 시리즈가 롱런 하는 걸 보면 '스스키노 시리즈'도 꽤 나왔겠구나 싶었는데 2011년까지 총 12편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국내에도 이미 세 권의 책이 출간되었으니 앞으로 몇 번 더 '나'와 스스키노 거리를 누빌 수 있을 듯해 기뻤다. 스토리 외에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을 꼽자면, '나'는 줄창 마시는데 소설 밖에 나는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책을 읽어 힘들었다. 다음 권인 <바에 걸려온 전화>는 맥주를 구비해놓고 함께 마시면서 스스키노 거리를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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