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묘점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월
장바구니담기


편집 회의를 주도하는 것은 언제나 시라이 편집장이었다. 경험도 많고 기획력도 나쁘지 않아 불평하는 부원도 없었다. 노리코는 잡지 편집장이 '원맨'으로 나서지 않는 한 잡지의 특색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수의 의견을 모아 봐야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독도, 약도 안 된다. 최대 공약수적인 평범함에 지나지 않는다. 번뜩이는 무엇인가가 없다. -224쪽

짧은 여행이었지만 노리코는 다양한 인생의 단편을 엿본 기분이었다. 이누야마에 사는 하타나카 젠이치의 여동생과 기소가와 강변에서 청춘을 즐기던 청년들, 도요하시의 택시 기사, 히로코의 아버지와 계모, 모두 각자의 생활과 인생이 있다-.-288~9쪽

"나도 어젯밤 내내 고민해 봤어. 하지만 추리는 실제와는 다르니까 여러 가지 모순이 생기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실제로 부딪쳐 가면서 이쪽이 생각하던 모순과 새롭게 발견한 내용을 선으로 연결해 조정해 나가다 보면, 진실의 선이 점처 드러나게 될 거야. 뭐, 앞으로의 일은 후지사와에 가서 다쿠라의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다음의 문제지."-307쪽

"아는 사람이야?"
다쓰오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당연히 모르지."
"맞아, 모르는 사람이지?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자기와 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리고 방금 그 사람이 우연히 여기에 왔어. 그저 우연일 뿐이지. 하지만 제삼자에겐, 그 사람이 여기에 마침 그 시간에 왔다는 게 의미심장하게 비칠지도 몰라. 즉 그것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의미를 지닌 행동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어."-451~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마키메 마나부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3월
절판


"그래도…… 어떻게 좀 잘 설명드릴 수 없겠냐?"
"설명? 어떻게? 호루모 규칙이라도 조목조목 친절하게 해설해드리랴? '양 팀에서 귀신을 천 마리씩 끌고 나와서 교토 시내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거예요. 교토대학 청룡회, 리쓰 메이칸대학 백호대, 교토산업대학 현무파, 류코쿠대학 피닉스에서 각각 500대 회원들이 겨루죠.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경기지만 귀신이 전멸해 버리면 조금 곤란한 일이 벌어져요.' 이렇게? 아서라, 얘기해봐야 공연히 불안감만 부채질하지. 애당초 보통 사람들 눈에는 귀신이 보이지도 않잖아. 인간은 결국 제 눈으로 본 것만 믿게 돼 있어. 네가 호루모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봐. 내가 너한테 '동아리에서 이런 걸 합니다' 하면서 불쑥 호루모를 설명하면, 너라면 믿겠냐?"-14~5쪽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쯤 모짱은 내 하숙방에 불쑥 찾아왔다. 모짱 같은 개성 넘치는 친구가 왜 나처럼 사교성 없고 문학이나 음악도 모르는 재미없는 인간을 만나러 오는지 이해되지 않아서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모짱은 냉큼 대답했다.
"아베는 강하거든."
이어서 맥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약해."
"강해? 내가? 어디가?"
"아베는 빈말로라도 얼굴이 잘생겼다고 할 수 없지. 애인도 없고 돈도 없고 머리도 그저 그렇고. 어딜 보나 나처럼 모자란 것뿐이지만 늘 낙천적이거든. 나는 그런 점을 정말 존경해."-153쪽

모짱은 산조, 시조, 가와라마치 외곽 지리에 이상할 만큼 밝았다. 모짱이 열렬한 '골목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종횡무진으로 얽히고설킨 갈림길들을 지나다가 낯선 골목을 발견하면 모짱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피지도 않고 "이쪽이야, 이쪽" 하며 등을 구부리고 정신없이 걸어갔다. 이렇게 골목을 지날 때 전혀 모르는 동네가 나오지는 않을까, 상상하는 순간이 못 견디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좁은 골목 끝에 난데없이 음식점 문살문이 나타나거나 더 안쪽으로 골목이 또 이어지거나 지장보살 사당이 조용히 서서 기다리는 둥 교토의 골목은 신비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때 나는 모짱이 품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대로 계속 가다가 원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아마 그런 불안마저도 모짱에게는 흥분의 소재일 것이다. 모짱은 '여기에는 없는 분위기'나 '여기에는 없는 느낌' 같은 것을 아주 좋아했다. 평소 익히 보던 것이 전혀 다른 무언가로 느껴지는 순간을 그 좁은 눈으로 열심히 찾았다. -162~3쪽

모짱이 여성의 얼굴 가운데 '이마'에 꽂히듯 실은 나에게도 나도 모르게 주목하고 마는 얼굴 부위가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불가항력이고 인간의 이성과 역사를 초월하는 숙명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습성이다, 라고 하면 너무 요란할까? 여하튼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그 존재가 놀랍게도 책 차례에 한 글자의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167쪽

물론 녀석의 애인 이야기는 딱 질색이었다. 질투니 뭐니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애인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는 모순된 마음은 한구석에는 있었다. 방심해서 애인 이야기를 꺼낸 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이런 이상한 기분, 이건 또 뭘까?-24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의의 쐐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절판


그에게 있어 용기나 영웅적인 삶은 현실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이 방에 있는 형사 모두가 숱한 현장에서 용기 있고 영웅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기라는 것은 순간적인 필요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 확실한 죽음과 직면하여 이 친구들이 불가능한 도박을 기꺼이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목숨과 카렐라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카렐라의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이기적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비인간적이라고? 아마도. 그러나 목숨이라는 것은 다 썼거나 닳았다고 해서 잡화점에 가서 다시 하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목숨은 끈질기게 고수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카렐라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말은 번스 같은 사람이 하기 힘든 말이지만) 카렐라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번스 역시 자신과 카렐라의 목숨을 놓고 '선택'이라는 물음에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두려웠다. -45~6쪽

참을성이란 보답이 따르는 미덕일지도 모른다.
참을성은 관용과 일맥상통한다. 참을성이 강한 사람은 느긋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분노는 반드시 어딘가로 분출시켜야만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육체가 그것을 분출시키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리라. -70~1쪽

그에게 87분서는 낯선 구역이었고, 낯선 수사반이었다. 87분서로 전근을 오게 되었을 때, 그는 이곳에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빈민가와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었고, 이 형사실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기도 전에 환멸만 주는 냉소적인 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는 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매우 빨리 알게 되었다.
빈민가에서 사는 사람들도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와 똑같은 기쁨으로 즐거워했고, 그가 겪어본 적도 없는 불행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과 존경을 원했고, 공동주택의 벽이 동물 우리의 철창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87분서 수사반 형사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배웠다. 모든 형사들과 형사 개개인의 행동을 통해서 배웠다.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장밋빛 환상을 품지 않았고, 범죄 발생률 역시 낮았다. 형사들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도둑을 때려눕히고 나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범죄는 범죄였고, 범죄의 악을 합리화하려는 87분서 형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124~5쪽

호스는 87분서 형사들이 법을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데 있어서 제한을 두지 않는 어떤 개념을 고수하는 것에 놀랐다. 그 어떤 개념은 공정성이었다. 이러한 개념 안에서 형사들은 폭력을 쓸 때와 쓰지 않을 때를 알았다. 그들은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범죄자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도둑은 도둑이었으나 사람은 또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공정성이었다. 폭력과 갑작스러운 죽음을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도 이해했다. -125쪽

도시는 여자다. 밤의 쾌락을 위하여 치장을 시작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새틴 옷에 연붉은빛 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별처럼 빛나는 보석을 두른다. 밤을 지새우는 직사각형의 사무실이 스카이라인 너머 대기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처럼 어둠에 저항하듯 눈을 깜빡인다.-1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클락
케네스 피어링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11월
장바구니담기


시간이라.
시간은 생쥐처럼 달려 빅 클락의 낡고 천천히 움직이는 추 위로 오른다. 커다란 시곗바늘을 건너 종종걸음 치다가, 옆길로 새어 안으로 들어가 복잡한 톱니바퀴와 기계장치 속 천칭과 용수철을 누비고 다닌다. 진짜 출구와 진정한 보상을 찾아, 가짜 출구와 막다른 골목, 경사가 가파른 길로 구성된 거미줄이 쳐진 미로 사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24쪽

물론 빅 클락은 시대를 구분해 낼 줄 알았고, 이 때문에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었다. 조지아가 숨쉬는 공기, 조젯의 기력, 내 몸 속 계기판의 눈금이 떨리는 모습 등등. 질서를 잡고 혼돈 속에서 패턴을 만들어 내는 이 거대한 시계는 이제껏 아무 것도 바꾼 적이 없었고,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며,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24쪽

우리들이 이 방에서 결정하는 기사는 앞으로 석 달 후에 시민들이 읽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읽은 내용을 최종 결론으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리라는 사실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가 내릴 결정에 짧게 이의를 제기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제시한 추론을 따르고, 기사 속의 구절과 권위를 갖춘 논조를 기억하며, 종국에는 우리가 제시한 대로 확고하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 자신의 논리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는 물론 다른 문제였다. 거대한 시계가 대중을 향하게 되면, 그들은 단순히 충동적으로 그 시계를 보고 기준이 되는 시간을 맞출 뿐이었다.
그 거대한 시계가 수없이 많은 인생을 형성하고, 인도하는 척도가 된다는 사실은 때때로 우리에게 이상한 망상을 선사했다. -39~40쪽

월요일 아침에 느끼는 끔찍함은 만국의 공통분모이다. 백만장자에서부터 막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더이상 최악의 상황은 없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었다. -113쪽

나 역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수많은 영토가 존재했다. 국가 안에 또 국가가 있는 셈이었다. 만일 내가 이 일에 알맞은 부하들을 선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지점에서 조사 결과를 왜곡하며, 그래야 하는 지점에서 훼방을 놓고, 안전한 지점에서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그들이 조지 스트라우드를 발견하기까지는 아주,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123쪽

회사와 경찰, 이렇게 양쪽에서 각각 진행되고 있는 조사는 펜치의 양쪽 턱처럼 착실하게 한곳으로 조여들고 있었다. 양쪽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든 경찰이든 거대 조직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고 그런 조직은 장님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러나 나는 그 치명적인 무게와 힘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미친 짓이었다. 그런 거대 조직에는 저항할 수 없다. 양쪽 모두 빙하와도 같은 냉정한 비인간성으로 창조와 말살을 수행한다. 돈을 세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계량하며, 나무의 성장과 모기의 수명을 한 기준에 놓고 비교하며, 도덕 역시 시간의 흐름에 결부시켜 파악하는 것이다. 빅 클락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을, 정확한 하루하루를 새겨 나간다. 빅 클락이 한 인간을 옳다고 판정하면 그 인간은 옳은 것이고, 그가 옳지 않다고 선언하면 항소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의 인생은 끝나 버린다. 빅 클락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는 것이다. -200~1쪽

이런 말을 해 봐야 우는 소리밖에는 안 되겠지만, 나는 지구상에서 자신의 모든 인생이 갈기갈기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무언의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이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정말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뛰어들었다가 지고 만 커다란 도박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란 분명 거짓말이거나 신화일 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26쪽

빅 클락은 어디에서든 작동한다. 빅 클락은 아무도 간과하지 않고, 아무도 빠뜨리지 않고,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말을 더하고 싶었지만, 그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빅 클락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23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36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구판절판


비밀 하나 털어놓으리다. 좋은 공연에 대한 작은 비밀이라오. 한 사람의 프로가 또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오. 아주 간단한 거요.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그 음악을 들을 청중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다만 마음속에서 전날 만났던 청중과 현재의 청중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오. 당신이 밀워키에서 연주를 한다고 해봅시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하오. 밀워키의 청중은 무엇이 다른가,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메디슨의 청중과 밀워키의 청중은 어떻게 다른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생각날 때까지 붙잡고 있어야 한다오. 밀워키, 밀워키라고 말이오. (중략)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소? 그렇게 되면 그 청중은 당신이 아는 누군가, 당신이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특별한 대상이 되는 거요. 이게 바로 나의 비결이라오. 한 사람의 프로가 또 한 ㅅ람에게 해주는 말이오.-26~7쪽

우리 어머니는 종종 슬픔에 빠지곤 하셨지요. 지금 당신처럼 말입니다. 누군가를 만난 다음 어머니는 그 사실에 무척 행복해하시면서 그 사람이 새 아빠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몇 번은 어머니의 말씀을 믿었지요. 그후에는 사태가 그렇게 잘되어 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오늘 밤의 당신처럼 의기소침해지실 때마다, 어떻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어머니는 당신 레코드를 전축에 올려놓고 노래를 따라 불렀답니다. 긴 겨울 동안 그 비좁은 아파트에서 어머니는 무릎에 턱을 올려놓고 손에는 뭔가가 담긴 잔을 들고 나지막하게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중략) 가드너 씨, 당신의 음악이 제 어머니가 그 시기를 견디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 음악은 당신 자신에게도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겁니다.-34쪽

아까 말한 대로 나는 린디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소. 하지만 당시 그녀도 나를 사랑했을까? 사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질문이 떠올랐는지조차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소. 나는 스타였고 그녀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으니 말이오. 나는 그녀가 꿈꾸던 존재였소. 그녀가 그 작은 식당에서 쟁취하려고 계획했던 대상이었던 거요. 나에게 사랑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소. 하지만 27년간의 결혼생활은 재미있는 결과를 낳는다오. 많은 커플들이 처음에는 상대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피곤해져서 상대를 증오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오. 하지만 때때로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 여러 해가 걸리긴 했지만 린디는 점차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소. 처음엔 나는 감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소. 앉았던 테이블에서 일어날 때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손길, 웃을 이유가 없는데 방 저편에서 보내는 가벼운 미소, 엉뚱하고 바보스러운 행동들 같은 것으로 미루어 말이오. 장담하건대 이 일에 놀란 건 누구보다도 린디 자신이었소.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 거요. 5~6년 후 우리는 아주 편안해졌소. -40쪽

나는 그해 봄을 런던에서 보냈다. 그리고 계획했던 것을 모두 성취하지는 못했다 해도 그 시기는 전체적으로 보아 흥미진진한 막간인 셈이었다. -103쪽

브래들리의 말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옳다. 나는 이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뮤지션들보다 두 배는 더 재능이 있다. 하지만 요즘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닌 것 같다. 이미지, 마케팅 능력, 잡지에 기사가 실린다거나 텔레비전 쇼에 출연한다거나 파티에 참석하는 것, 누구와 점심을 먹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염증이 난다. 나는 뮤지션이다. 어째서 이런 게임에 동조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아는 최고의 방식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부족하단 말인가? 내 골방에서만 연주하는데도 내 음악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순수한 음악 애호가들이 내 노래를 즐기고 내 방식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성형수술 따위로 얻는 것이 뭐란 말인가? -149~150쪽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적절한 연애, 적절한 결혼, 적절한 이혼 같은 뻔한 방식을 통해서가 아닌가. 이 모든 것이 적절한 잡지 화보와 적절한 토크쇼로 이어진다. 최근 그녀는 이혼 후에 처음으로 하는 근사한 데이트에는 어떤 차림을 해야 하는가, 남편이 게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조언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스타 자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 매력이란 것을 분석해 보면 텔레비전 출연과 패션 잡지의 표지 모델, 전설적인 인물들과 팔짱을 끼고 시사회나 파티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을 거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7쪽

이봐요, 스티브, 내 말 잘 들어요. 난 당신 아내가 돌아오기를 바라요. 정말로 그러면 좋겠어요.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해도 당신에게는 전망이 생길 거예요. 당신 아내는 멋진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삶이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크답니다. 당신은 이제 그 단계에 이르렀어요. -20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