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에 걸려온 전화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2
아즈마 나오미 지음, 현정수 옮김 / 포레 / 2012년 1월
절판


곤노 교코에게 일곱시에 전화가 왔다. 홀쭉한 마스터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분노의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분노에 몸을 맡기는 건 교양 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확실히 인류는 지구상에 서식하는 동물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천박하고 바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설명하고, 자신의 감정을 적확하게 전하고, 온화하게 대화하는 것.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나도 할 수 있다. 어쨌든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올바르게 들을 수 있다'와 '올바르게 알아듣게 이야기 할 수 있다'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고 국어는 수였다. 그러고 보니 '행동발달사항'에는 '단어 사용이나 인사를 올바르게 할 수 있다'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여보세요, 곤도 교코입니다."
"야! 너 이놈!"-42쪽

확실히 나는 변했는지도 모른다. 최근 일 년 이상 요란한 싸움은 하지 않았다. 저자세로 얌전히 살아왔다. 직접적인 계기는 아마도 일 년 전 연말에 있었던 사건일 것이다. 그때 나는 각성제의 플래시백으로 맛이 가버린 양아치 때문에 옥상에서 떨어질 뻔했다. 진심으로 죽기 싫다고 생각했다. 무서웠다. 그전까지는 얻어맞아봐야 아플 뿐이고, 죽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로 나는 폭력을 두려워하게 됐다. -75쪽

그리고 조직적인 폭력에 대한 공포는 독특한 뭔가가 있다. 술기운 때문에 길바닥에서 우연히 치고 박는다거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생기는 폭력과는 달리, 어느 조직이(그것은 폭력단이든 '삿포로음흥'이든 우익 당파 쪽이든 군대든 경찰이든 마찬가지지만)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누군가의 말살을 결정하고, 그것을 수행한다는 것은 아주 기분 나쁘다. 이런 표현은 좋아하지 않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 통감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주의나 비폭력주의로 전환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결국 무력하다는 것은, 간디의 최종적 패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비폭력이나 무저항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양식이나 품위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유효하지만,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은 양식이나 품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법이다.
따라서 남겨진 일은,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 도逃폭력주의밖에 없다. -75~6쪽

나는 통화에 질려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른 채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말도 안 되는 얼간이가 된 느낌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있다. 끙끙 고민해봤자 소용없다. -114쪽

나는 지금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이용하고 있다. 이게 옳은 일일까? 아니, '옳다' '옳지 않다' 하는 문제는, 평면적 가치체계에서 자의적으로 끄집어낸 인공적인 말이니까 묻지 말자. 하지만 내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일까? 곤도 교코의 표현을 빌리면 '불명예'스러운 방법은 아닐까?
……아니,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 우선은 이 방법이 어떤 성과를 도출하는가 보기로 하자.
……정말 그래도 괜찮은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순간, 마음속 깊은 곳의 단단한 무언가에 금이 가며 여자의 모습이 보인 기분이 들었다. 십 년 전에 죽은 여자. 나를 지키려고 하다가 죽은 여자. "결과가 문제는 아니야"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방법으로 만족해?"라고 그녀는 물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에 생긴 금을 우격다짐으로 이어 맞추는 데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삽으로 흙을 퍼서 틈을 메웠다. -116~7쪽

인생을 포기해버린, 그러나 자신이 인생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련 어린 허세를 부리며 어떻게든 인간다운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바라면서 점점 바닥으로 떨어져가는 태만한 남자. 그것이 고헤이라는 남자가 주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변변찮은 인간이라도 진심은 있다. 인간의 진심은 그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형태로 외부에 표출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아들 역시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 같다. -237쪽

학생운동의 투사가 '졸업'하고 나서 사상 노선을 하루 아침에 싹 바꿔버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벼락부자 취향의 양복을 입고 벤츠를 타면서 "이래 봬도 나도 젊었을 때는 화염병 좀 던졌다고, 와하하" 하고 자랑하는 아저씨들이 세상에 널려 있다. 타인을 지배하고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인종은,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공장처럼 트렌드가 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법이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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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바에 있다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1
아즈마 나오미 지음, 현정수 옮김 / 포레 / 2011년 12월
절판


그는 결혼해서 아이도 있지만, 원래 동성애자다. 나는 그게 뭐 어떠냐며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아 학대자나 도착 살인상습범 같은 예외는 제쳐두고, 어른끼리 서로가 납득한다면야…… 즉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한 개인의 취향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본적으로 그의 고민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전후 민주주의 교육의 황혼기에 교육을 받은 세대의 일원으로서, 나는 가치 상대적인 시점을 주입받은 탓에 인생 상담 코너를 담당하기엔 부적합한 인간으로 자랐다. 그 점은 마쓰오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발음되는 '변태'라는 말에는 아주 민감해서, 때로는 나에게까지 싸움을 걸기도 한다. 그것은 물론 나에게는 유익한 체험으로, 내 안의 차별의식을 새삼 인식하게 되는 적당한 기회가 되지만. -70~1쪽

"들어봐, 나는 알코올중독은 아니라고, 그냥 알코올의존증이야. 알코올중독이 아니라고. 그 둘은 큰 차이가 있어."-124쪽

전화의 좋은 점은 친한 친구가 손을 흔들거나 등을 돌리거나 걸어서 떠나가거나 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도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47~8쪽

"살 빼려고 해본 적은 있어?"
"아니."
"보디빌딩 같은 것을 해본 적은?"
"없지."
"마찬가지야. 다들."
"응?"
"한 달 만에 통장 잔액이 50만 엔을 넘기거나 체중이 단번에 5킬로그램 줄거나 하면, 그걸로 완전히 푹 빠져버려. 그런 타입의 인간이 있어."
"아, 그렇구나."
"재미있어져. 돈은 모으면 늘어나고, 밥은 안 먹으면 체중이 줄지. 그리고 버린 욕망과 아껴둔 시간이 눈에 보이는 형태가 되어서 남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 뒤로는 돈이나 체중의 노예가 되지. 인생의 보람이 없으면, 예금통장이나 체중계의 숫자에 쉽게 점령당하는 거야."
"……"
"그렇게 보면 인생의 보람을 갖는 것도 좀 생각해볼 문제지. 그게 무너지면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되거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는 거지."-329~330쪽

나는 살아 있는 것이 귀찮은데, 죽는 것은 두려운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이다. 발치에서 하루가 비참한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 도시의 소음이 하루의 고함소리를 감싸 밤하늘로 올라간다. 그 밤하늘은 새까맣고 조용했다. 인공의 빛도 인공의 소음도 하루의 비명도 하늘에는 닿지 않는다. 하늘은 지상에 무관심한 것이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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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섬의 기적 - 쓰나미가 휩쓸고 간 외딴 섬마을 고양이 이야기
이시마루 가즈미 지음, 오지은 옮김, 고경원 해설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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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고양이를 살리자, 그러려면 사람을 살리자, 그러려면 섬을 살리자, 이렇게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고양이를 통해서 너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 되었고 그로 인해 타인을 도울 힘이 생겨났다. 그리고 결국 섬이 살아났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가끔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그 매개가 나에게는 음악, 다시로지마 섬에게는 고양이였다. 무엇이 매개가 되었든 마음이 오갈 때, 세상은 빛이 난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빛이다. -7쪽

'냥이 프로젝트'는 1구좌 1만 엔으로 한 구좌 이상 지원하는 주주를 모집한다는 형식을 갖췄다. 목표는 '1만 5천 구좌, 1억 5천만 엔'으로 잡았다.
산리쿠 굴 프로젝트와 다른 점은 모인 자금을 굴 양식업에만 쓰는 것이 아닌, 쓰나미로 사라진 어업 전반에 필요한 자재 구입비와 통신비, 유지관리비, 그리고 경비로 '고양이 사료비, 수의사비'로도 쓴다는 점이었다.
고양이에 대한 부분은 전체 프로젝트의 1할을 차지하지만, 이 때문에 '냥이 프로젝트'는 일본 전국 애묘인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의 '답례'는 다시로지마 섬 특산물인 굴을 1킬로그램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단, 굴은 1년 만에 수확을 할 수 없고, 빨라야 4년 정도는 걸리지만, 그 사실도 물론 명시되어 있었다. -50쪽

옛날부터 함께 생활하던 고양이가 손님을 불러왔고 재난 후에는 복구 지원모금까지 불러왔다. 그리고 '섬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된다'는 섬사람들의 의식을 '섬을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로 바꾸었다.
오른발을 들어 손짓하는 고양이는 '돈과 복을 부른다'고 하고, 왼발을 들어 손짓하는 고양이는 '사람을 부른다'고 한다. 아무래도 다시로지마 섬의 고양이는 양발을 들고 손짓하는 마네키네고인 것 같다. -77쪽

앞서 말한 것처럼 다시로지마 섬에는 지금도 재건과는 아직 조금 먼 '광경'이 펼쳐져 있다. 니토다 항에 도착하기 전, 배가 항구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눈앞에서 커지는 항구의 폐자재 산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면 그곳에 고양이가 있다. 내가 있는 곳을 응시하면서 처음엔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곧 일직선으로 뛰어온다. 아마도 재난 후에 태어난 듯한 몸집이 작은 턱시도 고양이가 다리에 감겨오길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듯 눈을 감는다. 여기 고양이들은 길고양이이지만, 실제로는 고양이들에게 섬 전체가 커다란 집이다. 따라서 집에서 길러지는 고양이처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사람 목소리를 들으면 다가온다.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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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절판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온종일 입 한번 열지 않을 때도 많다. 역의 매표소 직원이나 버스 승무원에게 고작 몇 마디 할까. 그걸 빼면 숙소로 들어올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는 날도 있다.
그런 외로움은 할머니와 얘기한들 할아버지와 얘기한들 달래지지 않는다.
이때 요긴한 방법이 멋진 남자에게 다가서서,
'저어…… 실례지만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묻는 것이다.
'저어……' 또는 '실례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이면 반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몇 시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니, 누구든 그런 질문을 받으면 시계가 있는 한 대답해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까지 가죠? ㅇㅇ온천? 서두르지 않으면 비가 올 거예요"라는 말도 해준다.
그렇다고 혼자 여행하는 여자의 그 말이 인연이 돼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일로 발전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아방튀르(모험)는 세상의 스캔들이나 주간지의 기사처럼 손쉽게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저어…… 지금 몇 시예요?'로부터 안개가 낀 듯 야릇해지다가 드디어 의기투합해서 한 여관에 묵는 일 따위는 있을 리 없다. -15쪽

나는 혼자 사는 서른한 살의 여자다.
특별히 혼자인 게 좋아서 혼자 지내는 건 아니다. 부득이하게 혼자인 것이다.
뭘 하든 혼자다. 혼잣말, 홀로 잠, 홀로 웃기, 홀로 울기, 홀로 먹기, 홀로 텔레비전(그런 말이 있다면), 홀로 끄덕이기, 홀로 신음하기(이상한 걸 상상하면 곤란하지만).
혼자 산다는 건 어렵다.
오해받기 쉽다. 고영오연하게 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한다.
그러나 또한 어딘지 조금 애처로운 데가 없으면 얄밉게 보인다.
그러나 또한 너무 애처로운 태를 내면 색기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균형이 어렵다. -63~4쪽

그리고 혼자인 게 좋아서 홀로 사는 게 아닌 이상 여러 가지로 바쁘다. 물론 결혼 상대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남자가 다가와주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미묘한 부분이 있다.
남자가 건드려주길 기다리다가도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의연하게 퇴짜 놓는 자세를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 기다렸습니다 하는 구석을 보여서는 안 된다.
건드리길 기다린다는 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면 남자는 다가오지 않는다. 남자라는 물고기를 낚아올리려면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한 법. 적당히 해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첫째로,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아무나 좋다고 하면 안 된다. 상대도 그렇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신은 여러모로 바쁜 것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호박이 저절로 굴러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공상 속에서는 버젓이 행세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엉덩이가 무거운 애들이 많다. 그러면서 해마다 주문이 까다로워진다. -64쪽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못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안정되고 좋을 것이다. -75쪽

정말 내 주위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 이 사람이다 싶은 남자가 없다. 있었으면 벌써 옛날에 결혼했겠지. -81쪽

"외로워."
"외롭지, 외로워."
"역시 혼자는 재미없고."
"재미없지, 재미없어."-82쪽

미카코는 냉랭한 집 안으로 들어가 봄코트를 입은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이 어지르지 않으면 영원히 깔끔하게 치워진 채로 있을 실내.
그건 대자연의 정적. 말하자면 북극과 같은 정적과 비정을 생각나게 했다. 미카코는 결국 자신이 얼마나 엄마게에 의존하는 존재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만든 요리, 엄마의 배려, 엄마의 수다, 엄마의 냄새로부터 아직 멀리 벗어나지 못한 의지가지없는 아이 같은 존재.
자신의 인생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컸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자신의 발로 굳건히 서 있다고 생각했건만…… 엄마의 보호 속에 따뜻하게 몸을 웅크리고 입으로만 잘난 듯이 떠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110쪽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남자에게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추상능력, 분석능력, 표현능력이 있는 남자를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바로 여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134~5쪽

나는 다카하타 씨가 건축금속물 부서에서 가정금속물 부서로 옮겨 왔을 때부터 얘기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자란 얘기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좋다.
아무리 훌륭하고 멋진 남자라도 말 붙이기 힘든 사람은 나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는 부류다. -139쪽

'여보, 즐거웠어요. 재밌었어요. 덕분에 잘살았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나얏코의 눈에 처음으로 진심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부부로서의 인생이 끝날 때,
'즐거운 삶이었어. 재밌었어. 고마워'라고 상대에게 말할 정도의 행복이 또 있을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를 인생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172쪽

"함께 살지 않을래?"
쓰루가 씨는 성실한 사람이라 그 말을 할 때도 성실하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수습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재미있는 친구로 지내왔는데 아까워요. 결혼 같은 거 해버리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럴까?"
쓰루가 씨가 말했다.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다케우치 씨하고는 오래 만나와서 서로 마음도 잘 알고."
오래 만나왔다는 점이 수상쩍은 것이다.
너무 오래 만나와서,
'그래, 가는 거야!' 하는 데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로맨티스트라 결혼이라는 건 '그래, 가는 거야!' 하고 점프하는 것 같은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구식 여자라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자의 가슴에 뛰어드는 격정 같은 것을 기대한다.
나는 쓰루가 씨와 마음이 잘 맞고 좋긴 하지만 그의 가슴에 안겨 여자로서의 기쁨에 몸을 떠는 나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난처하다. -197~8쪽

남녀 사이란 어느 쪽이 됐든 한 쪽이 억지로라도 끈을 꽉 묶어놓고 있지 않으면 자연히 풀려버리는 허망한 면이 있다.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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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2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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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함이……."
"도라고 합니다. 존 도."
-16쪽

갈림길에 다다른 남자와 여자가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시간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 잘못 선택했다가는 끝장임을 알기에…… 살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기에. 1962년의 그 잔인하고 우울했던 겨울에 새디와 내가 그랬다. -97쪽

디크 시먼스는 슬픈 영화를 볼 때마다 손수건을 한 장 더 챙기는 사람답게 우리의 재결합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엘리 도커티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그때 알아차린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이 있다. 비밀을 잘 지키는 쪽은 여자들이지만,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쪽은 남자들이라는 것. -262쪽

"이런 일본 속담이 있었어요. '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보이든 당신 얼굴을 사랑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 얼굴이니까."-347~8쪽

모든 게 퍼뜩 선명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세상에는 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사실이겠지만, 이 세상은 외침과 메아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 톱니와 바퀴로 이루어진 척하지만,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신비로운 유리 덮개 밑에서 시간을 알리는 꿈의 시계인 척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 뒤에는 뭐가 있을까? 그 밑에는, 그 주변에는 뭐가 있을까? 혼돈, 폭풍, 망치를 휘두르는 남자들, 칼을 휘두르는 남자들, 총을 쏘는 남자들. 군림할 수 없는 게 있으면 왜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으면 비하하는 여자들. 조명 하나 외로이 비추는 무대에서 어둠을 무릅쓰고 춤을 추는 인간들, 그 주변을 에워싼 공포와 상실의 세계. -399~400쪽

현자들마저 믿을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도 사랑한다는 선언은 제 몫을 하는 법이다. -402쪽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또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과거가 고집이 센 이유는 거북 등껍질이 단단한 이유와 같다는 것. 그 안의 속살이 여리고 방어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이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것. 이것들이 기타 줄과 같다는 것. 우리는 이 줄들을 퉁기며 즐겁게 연주한다. 화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 줄을 추가한다. 10개, 100개, 1000개, 100만 개. 줄의 숫자는 곱절로 늘어나니까! 해리는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나는 안다. 그건 줄이 너무 늘어나서 화음이 너무 많이 만들어졌을 때 나는 소리다.
높은 도 음을 진성으로 우렁차게 내면 고급 크리스털이 깨질 수 있다. 음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화음을 스테레오로 크게 틀면 유리창이 깨질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악기의 줄이 너무 많아지면 현실이 깨질 수 있다(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7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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