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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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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동전처럼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을 때 지금이 그런 순간인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인간이 무슨 수로 알 수가 있을까. -14쪽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향수를 느끼는 이유는 악취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잊어버렸거나, 50년대 황금기를 운운할 때 그런 측면은 아예 감안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61쪽

역사라는 강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러 분수령 중에서도 변화를 일으킬 여지가 가장 다분한 사건이 암살이야. 성공한 경우도 그렇고, 실패한 경우도 그렇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별 볼일 없는 정신병자의 손에 암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지. 반대로 1944년에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성공할 뻔했지만 실패로 끝났지.) 계속된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영화라면 나도 본 적이 있었다.
앨이 말을 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나 아돌프 히틀러는 어쩔 방법이 없어. 우리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
나는 우리라는 대명사를 내세워 가설을 세울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주 섬뜩한 소설을 읽는 듯한 심정이었다. 예컨대 토머스 하디의 작품이랄까? 어떤 식으로 결말이 맺어질지 알고는 있지만, 그로 인해 흥이 깨지기는커녕 더욱 고조되는 긴장감. 모퉁이에서 탈선하길 바라며 전차의 속력을 더욱 높이는 아이를 보는 것과 비슷한 이 기분. -92~3쪽

나도 서스펜스 소설의 기본을 아는데(한평생 스릴러를 수도 없이 읽었으니 그럴 수밖에) 독자의 궁금증을 계속 유발해야 한다는 것이 제1원칙이다. -94쪽

아, 스텝 좀 꼬이면 어때. 이렇게 아름다운걸. 나는 7번 도로를 달려 켄두스케그 서안에 떡하니 자리 잡은 데리를 접한 이래 처음으로 행복해졌다. 나는 그 기분을 간직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옮기며 오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돌아보지 마, 절대 돌아보지 마. 유난히 좋았던 일(혹은 유난히 나빴던 일)을 겪은 뒤에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간은 돌아보게 되어 있다. 목에 회전이 되는 관절이 달린 이유가 그 때문이다. -223쪽

나는 교단에서 늘 단순의 미학을 강조했다. 소설이건 비소설이건 딱 한 가지 질문, 딱 한 가지 대답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라고. 독자가 어떤 일들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작가가 이런 일이 잇었다고 대답하는 식인 거라고. 그리고…… 이런 일…… 이런 일도 있었다고 대답하는 식인 거라고. 군더더기를 배제하라고.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도 노력하겠지만, 데리에서 겉으로 보이는 현실은 시커멓고 깊은 호수를 덮은 얇은 얼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노력을 하자면.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도. 또 이런 일도. -230쪽

"과거는 고집이 세요, 앨. 과거는 바뀌길 원치 않아요."
"나도 알아. 내가 자네한테 한 말이잖아."
"맞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과거가 변화에 저항하는 강도는 어떤 행위에 따라 미래가 얼마나 달라지는가에 정비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346쪽

어느 방 안에 들어갔는데, 카드로 복잡하게 만든 여러 층짜리 집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걸 쓰러뜨리는 게 당신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뿐이라면 쉬울 것이다. 발을 세게 구르든지 생일 촛불을 한꺼번에 끄려고 만반의 준비를 할 때처럼 힘껏 입김을 불면 될 테니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문제는 그 카드 집을 특정한 시점에 쓰러뜨려야 한다는 거다. 그 전까지는 잘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379쪽

나는 이런 일에 무작정 끌어들인 앨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 보면 시간이 더 주어졌던들 뭐가 달라졌을까 싶었다. 오히려 상황만 더 안 좋아졌을 가능성이 지대하고, 어쩌면 앨은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이 기껏해야 1, 2주에 불과했을 텐데, 댈러스의 그날과 연쇄적으로 연결된 사건들을 다룬 책이 몇 권이나 될까? 100권? 300권? 어쩌면 1000권에 육박할지 모른다. 어떤 이는 앨처럼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배후에 정교한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했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총을 쏜 게 아니라 체포된 이후에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덤터기를 쓴 거라고 못을 박았다. 앨은 자살이라는 방식을 통해 학자의 가장 큰 약점을 제거했다. 자료 조사라는 미명 아래 미적대지 않았던 것이다.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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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절판


이제 연극에 대한 이야기는 집어치우자. 동료 연기자들과 나는 우리 연극의 잠재력과 문제점에 대해 지겨울 만큼 분석했다. 신물이 나고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내 연기 인생은 몇 년 전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본궤도에서 이탈해 옆길로 들어섰다. 이 연극이 나를 정상 궤도로 되돌려놓아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옆길에서 어느 정도 끌어내기라도 해야 했다. 나는 로저 무어의 뒤를 이어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될 뻔했던 사람이다. 나조차도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여하간 사실이다. 내리막에 이르기 전까지는 오르막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11~2쪽

우리는 서로를 탓했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지 말고 함께 나누어야 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어쩌면 미래 역시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를 망가뜨릴 수는 있다. 그렇다. 현재를 철저히 파괴할 수는 있다. -18쪽

"순서란 중요해요, 그렇지 않나요?"
"뭐, 어느 정도까지는."
"하지만 적정선이 어딜까요? 그게 문제겠죠."
"답을 알고 있소?"
"각자가 찾아야죠. 그런 다음, 그걸 고수해야죠. 즉, 위기 상황이 오면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에요."-92쪽

그의 제안이 내가 베푼 호의에 대한 보답이든, 신발 속의 돌멩이를 빼내는 수단이든,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우리 둘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는 것이다. 문득, 이게 바로 사업가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력적인 제안. 생산적인 거래. 비용 효율성. 이익률. 최종 결산.
"우리가 서로를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토비. 서로 존중하는 걸로 충분하죠."
"승자가 될 수 있는데 굳이 뭐하러 패자가 되려 하느냐, 그런 뜻입니까?"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군요."
"그렇죠. 나는 어리석은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제안을 면전에서 거절하는 사람을 자주 보죠."-150쪽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지독히 낯선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도달하는 순간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심장이 고동을 멈춘다. 몸이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결국 뇌가 천천히 기능을 정지한다. 정확히 언제 데니스 메이플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몇 분 몇 초에 데니스가 최종적으로 눈을 감았는지 논의하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내가 데니스를 발견하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데니스를 붙들고 헛되이 발버둥 치는 동안이었을까? 아니면, 구급차 안에서? 아니면, 이후 병원에서? 나도 모른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173~4쪽

제니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대체 어떤 인간일까? 평상시에 제니는 사람의 인성을 잘 파악한다. 따라서 제니는 로저 콜본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로저 콜본은 제니를 그렇게 완벽하게 속일 수 없다. 아닌가?
모르겠다.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 문제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곁눈으로 무언가를 본 듯한 느낌이 들지만, 고개를 돌려 똑바로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다. 로저 콜본의 더러운 속임수와 추잡한 거래 너머에서 분명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껏 나는 너무도 상반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따라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나는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진실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242쪽

현실이 연기자의 삶을 침범하는 경우는 드물다.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가식의 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상황이 변했다. 완전히.
어떻게 하면 내가 처한 곤경을 이치에 맞게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252쪽

나는 로열 퍼빌리언 궁전의 뾰족탑과 양파 모양 지붕들을 건너다보며, 가련하고 뚱뚱했던 왕, 조지 4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아내 피츠허버트와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싶어 했지만, 결국 둘은 갈라서고 말았다. 그들의 이별은 여러 면에서 조지의 잘못이었고, 내가 제니를 잃은 것도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삶의 과오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268쪽

상황은 인간보다 더 교활한 공모자다. 상황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어놓는다.-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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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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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버드가 처음으로 산 실용적인 아프리카 지도였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아프리카 땅을 밟아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아프리카의 하늘을 올려다볼 날이 찾아와 줄까? 하고 버드는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로 출발할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잃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요컨대 나는 지금 자신의 청춘에서 유일하며 마지막인 눈부신 긴장으로 충만한 기회에 속절없이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한들, 이제 그것을 면할 길은 없는 것이다. -10쪽

버드는 고개를 돌리고 주저앉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사라져가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사이렌에 놀란 통행인들은 버드가 등 뒤에 두고 온 임산부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호기심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대를 드러내며 구급차를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필름이 갑자기 정지한 화면과도 같은 부자연스런 동작 정지라는 인상이 있다. 그들은 지금 평범한 일상생활의 극히 미세한 금을 들여다본 참이다. 그들은 순진한 경건함을 또한 표현하고 있다. 내 아들은 전장에서 부상당한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정장에서 내 아들은 머리를 다친 것이다. 그리고 아폴리네르처럼 붕대를 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48쪽

느닷없이 버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라는 이미지가 버드의 감정을 단번에 단순화하여 방향을 지워준 것이다. 버드는 센티멘털로 질척질척해진 자신이 허용되고 정당화되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눈물에서 단맛조차 발견했다. 내 아들은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찾아왔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하여. 나는 아들을 전사자처럼 매장해야만 한다. 버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48쪽

버드는 머리가 둘 달린 것처럼 보이는 자기 아이와 언젠가 보았던 방사능 장애로 인한 장애아의 사진을 비교해 보려 했다. 하지만 버드에게 있어 아이의 이상(異常)은 그것을 둘러싸고 타인과 이야기를 하긴커녕 혼자서 다시 생각해 보려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뜨거운 수치의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올라오는 버드만의 고유한 불행이었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타인들과 공통의, 인류 모두에게 걸려 있는 문제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73쪽

버드는 여자 친구에게 자신이 뻔뻔스런 젊은 제비같이 엉기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히미코의 남자 친구들은 대개들 그녀에 대해 이렇게 구는 것이다. 히미코와 결혼했던 남자는 버드를 위시한 다른 어떤 남자들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남동생 같은 태도로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목을 매어버린 것이다. -73쪽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버드. 우리에겐 우선 이 현실 세계가 하나 있는 거지" 하고 히미코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버드는 새로 따른 위스키 잔을 아이의 장난감처럼 소중하게 손바닥에 올려놓고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나 자기나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로서 포함되어 있는, 이곳과는 별개의 수많은 다른 우주가 있는 거야, 버드. 우리는 과거의 여러 시간 속에서 자신이 사느냐 죽느냐가 피프티-피프티(fifty-fifty)였던 기억을 갖고 있지. 예컨대, 나는 어릴 때 발진티푸스로 거의 죽었었어. 난 자신이 죽음을 향해 떨어지느냐 아니면 회복으로 가는 비탈을 올라가느냐 하는 인터체인지에 섰던 순간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걸. 그리고 지금 목하 너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에 있는 나는 되살아날 방향을 선택한 거야. 그런데 그 순간에 또 하나의 내가 죽음을 골랐어. 그리고 빨간 발진투성이인 나의 어린 주검 주변에는 죽어 버린 나에 관해 약간의 추억을 지닌 사람들의 우주가 진행하기 시작한 거야."-80쪽

"있잖아 버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인간은 그가 죽어버려서 그와는 관계가 없어진 우주와 그가 여전히 살아 나가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우주라는 두 개의 우주를 앞에 두게 되는 거야. 그리고 옷을 벗어 버리듯이 그는 자신이 죽은 자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뒤에 버려두고 그가 계속 살아가는 쪽 우주로 찾아오는 거지. 그래서 한 사람의 인간을 둘러싸고 마치 나무줄기에서 가지와 잎이 갈라지듯이 갖가지 우주가 튀어 나오게 되는 거고. 내 남편이 자살했을 때도 그와 같은 우주의 세포 분열이 있었던 거야. 여기 있는 나는 남편이 죽어버린 쪽 우주에 남았지만, 남편이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너편 우주엔 또 하나의 내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거지. 한 인간이 요절하면서 뒤에 남겨 두는 우주와 그가 죽음을 면해 살아가고 있는 우주라는 형태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끊임없이 증식해 가는 거야. 내가 다원적인 우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의미지."-80~1쪽

"서둘 건 없어" 하고 히미코가 달랬다.
"그럼, 서둘 거야 없지, 나는 꽤나 오랫동안 참으로 서둘러야만 할 일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 어린아이 땐 항상 서둘고 있었는데. 그건 왜 그랬을까?"
"금세 아이가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그런 거겠지?"
"정말 나는 금세 아이가 아니게 되었어.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 나이지.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제대로 된 아이를 만나지 못한 거야. 내가 규격에 맞는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언젤까? 나는 자신이 없어" 하고 버드는 감상적으로 말했다.
"그런 건 누구도 자신할 수 없어, 버드. 다음 번 아이가 튼튼한 아이일 때, 자기 역시 제대로 된 아버지였다는 것을 확실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갖는 거야."-92~3쪽

아아, 나는 어쩌면 좋을까, 하고 버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이런 최악의 함정이 입을 벌리고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설상가상으로 아프리카에서 내가 만났을 모험적인 생활의 위기와 달라 나는 이 함정에 빠진다 해도 기절조차 못하고 사고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언제까지나 멍하니 함정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야말로 전보를 치고 싶어, AM RATHER IN TROUBLE, 하지만 누구에게? -115쪽

"사모님께는 신생아의 뇌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내장이 좋지 않다고 해 두었습니다. 뭐, 뇌도 내장임에는 분명하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완전히 거짓말로 급한 불을 끄려다가는 그 거짓말이 탄로 났을 때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네" 하고 버드는 말했다.
"자,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버드와 의안을 한 의사는 예의 바르게 머리를 숙이고 서로를 외면한 채 스쳐 지나갔다. 그건 다행이네요! 하고 버드는 의사의 인사를 되새김질했다. 수술이 가능해지기 전에 쇠약해져서 죽는다. 다시 말하자면 수술 후의 식물인간 아기를 끌어안을 일도 없고, 또 자기 손을 더럽혀 갓난이를 죽일 것도 없고, 그저 아기가 근대적인 병실에서 청결하게 쇠약사하는 것을 기다린다. 더구나 그동안 아기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버드가 할 일이다. 그건 다행이네요! 깊고 어두운 수치심의 감각이 되살아나서 그에게 온몸이 굳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했다. -157쪽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 하고 버드가 말했다.
"개인적인 체험 중에도 혼자서 그 체험의 동굴을 자꾸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인간 일반에 관련된 진실의 전망이 열리는 샛길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체험이 있지? 그런 경우, 어쨌든 고통스런 개인에게는 고통 뒤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고. 흑암의 동굴에서 괴로운 경험을 했지만 땅 위로 나올 수가 있음과 동시에 금화 주머니를 손에 넣었던 톰 소여처럼! 그런데 지금 내가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고역이란 놈은 다른 어떤 인간 세계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는 자기 혼자만의 수혈을 ㅈ러망적으로 깊숙이 파들어 가는 것에 불과해. 같은 암흑 속 동굴에서 고통스레 땀을 흘리지만 나의 체험으로부터는 인간적인 의미는 단 한 조각도 만들어지지 않지. 불모의, 수치스러울 따름인 지긋지긋한 웅덩이 파기야. 나의 톰 소여는 끝없이 깊은 수혈 밑바닥에서 미쳐 버릴지도 몰라."-204쪽

"어째서 수술을 하지 않고 쇠약사하기를 기다리는 거지?" 하고 델체프 씨가 미소를 거두더니 용맹해 보일 정도로 남자답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아이가 수술을 받아 정상적으로 자랄 가능성은 백분의 일도 안 돼요" 하고 버드는 당황하며 말했다.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있는 말이지만, 아이에 대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찾아오는 아기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랍니다. 자네는 아기를 맞아주는 대신 그를 거부하고 있는 건가요? 아버지라고 해서 타인의 생명을 거부하는 에고이즘이 허용되는 걸까?"-218쪽

타인들의 공통된 세계에서 인간 일반을 위한 오직 하나의 시간이 진행되고, 온 세상 인간이 한 가지로 겪게 될 나쁜 운명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버드는 그의 개인적인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아기 괴물의 요람에만 매달려 있다. -252쪽

나는 스무 살이 아냐. 내가 지금 잃지 않고 소유하고 있는 스무 살 때와 같은 거라고는 버드라는 어린애 같은 별명뿐이지. -269쪽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대체 어떤 나 자신을 지켜 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기가 막혔다. 답은 제로였다. -269~270쪽

"자넨 이번 불행과 정면으로 맞서 잘 싸웠군 그래" 하고 교수가 말했다.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어요. 거의 도망쳐 버릴 뻔했었죠" 하고 버드는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원망스러움을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 되어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
"그렇게 하지 않고 현실의 삶을 살 수도 있다네, 버드. 기만에서 기만으로 개구리 뜀 뛰듯이 죽을 때까지 가는 인간도 있지" 하고 교수는 말했다. -27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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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 검은숲 / 2013년 2월
절판


카렐라가 다시 연락을 취하기까지 시간이 걸린 까닭은, 경찰 조직은 작은 군대와 비슷하며 그중에서도 살인 사건은 끝없는 전쟁 중 벌어지는 큰 전투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군대에서라면 작은 전투들도 심각한 고려 사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 조직 같은 작은 군대에서는 살인 사건 같은 커다란 전투가 발생하면 일선에서 싸우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당한 주의와 참여가 요구된다. 그들이 최전선에 배치된 이 도시에서는 살인 사건에 배정된 분서 소속 형사는 대개 원래 담당하던 사건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가 새 사건을 담당하는 동시에 원래 사건은 같은 팀 내의 다른 형사들이 떠맡게 된다. 한 형사가 "그 사건은 내가 맡지" 혹은 "내가 굴려보겠어" 같은 말을 하거나 그러한 취지의 다채로운 전문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그 사건은 공식적으로 그 형사의 담당이 된다. 그리고 사건이 해결되거나 상부의 결재가 끝날 때까지(이 둘은 사건을 해결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사항이 아니다.), 아니면 자포자기해서 두 손을 놓아버릴 때까지 그 형사는 여기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50~1쪽

그러나 살인 사건은 매우 중대한 공격적인 태세로 취급되기 때문에, 수사반 내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경찰 조직 내에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분서 수사반 소속 형사가 '제대로 된' 살인 사건을 담당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해야만 했다.

1. 경찰청장
2. 경찰청 국장
3. 지방경찰청장
4. 시체가 발견된 지역에 따라 동부 살인반, 혹은 서부 살인반
5. 시체가 발견된 지역 분서의 형사들 및 형사 반장
6. 검시관
7. 지방검사
8. 본부 정보통신과
9. 경찰 감식반
10. 경찰 사진반-51쪽

번스는 그의 모습을 이해하려 심리학 지식을 짜냈다. 심리학이야말로 경찰 업무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다. 세상에는 불행한 사람들만 있을 뿐, 더 이상 악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좀도둑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이기 전까지는 심리학은 굉장히 유용한 도구였다. 하지만 일단 한번 차이게 되면, 그 좀도둑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은 상처받은 영혼이라고 상상하는 일이 조금 더 어려워졌다. 같은 이치로 번스는 클링의 행동에는 그 사건의 트라우마가 작용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거 몇 년 전 이야기야? 카렐라는 문득 궁금했다.) 그렇긴 해도 카렐라는 클링이 스스로 나락에 빠지는 경찰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클링은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169~170쪽

브라운은 자신이 경찰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자신을 피하는 진짜 이유가 백인들은 흑인이 모두 도둑 아니면 살인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형사로 승진한 일을 자주 후회하곤 했다. 자신의 갈색 피부와는 달리 경찰임을 증명하는 푸른색 제복을 더 이상 입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자신과 같은 인종인 사람들을 불시 단속하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흑인 녀석들이 그에게 "에이, 친구. 한 번만 봐달라고" 같은 말을 하는 걸 특히 좋아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브라운의 친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브라운과 하마와의 관계보다 더 먼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브라운의 세계에는 좋은 놈과 나쁜 놈이 존재하듯 백인과 흑인이 존재했고, 두 구분 방법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브라운은 좋은 놈들 중 하나였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은 모두 나쁜 놈이었다. -179쪽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뭘 받으셨습니까?"
"살인 사건."-192쪽

많은 사람들은 하루는 자정에 끝난다고 믿지 않는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는 여전히 같은 날인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비로소 다음 날이 시작된다. -233쪽

미치광이들은 경찰 업무를 더욱 힘들게 했다. 미치광이를 상대하게 되면 교범 따위는 내던져버리고 감으로 사건을 파헤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미치광이가 행동하는 방식이 딱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는 수많은 미친놈들이 살고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대부분은 지구 종말을 알리는 팻말을 들고 다니거나 시장이나 날씨에 대해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홀 애버뉴를 떠돌아다니는 정도에 만족하며 지냈다. 이 도시의 미치광이들은 날씨에 대한 책임은 시장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시장 책임일 수도 있었지만. -291쪽

그는 보통 때에는 철학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가장 두꺼운 코트를 입고(그 아래에는 재킷을, 그 아래에는 스웨터를, 그 아래에는 플란넬 셔츠를, 그 아래에는 양모 속옷을 입고 있었다.)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경찰 일이란 겨울과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은 사람을 닳게 만들었다. 눈이나 얼음, 진눈깨비,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비 같은 것들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의사를 표시할 때까지 계속해서 들이닥쳤다. 그러나 봄이 찾아와 얼음을 녹이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면 다음 겨울이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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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구판절판


사진이나 교과서에서 현실의 금각을 이따금 접하기는 하였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아버지가 들려 준 금각의 환상이 훨씬 멋진 것처럼 여겨졌다. 아버지는 결코 현실의 금각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고, 또한 금각이라는 글자, 그 음운으로부터 내 마음이 그려 낸 금각은 터무니없이 멋진 것이었다. -7~8쪽

금각은 넓은 연못-경호지-에 면한 3층 누각의 건축으로서, 1398년경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 2층은 침전 모양으로 만들어 덧문을 달았고, 3층은 4면 3자의 순수한 선당, 불당식으로 만들어, 중앙에 잔당호(틀을 짠 다음 얇은 판자를 붙인 문), 좌우에 화두창(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창)을 달았다.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이은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금동의 봉황이 올려져 있다. 또한 연못에는 ㅅ자형 지붕을 올린 수청이라는 낚시터를 돌출시켜, 전체의 단조로움을 없앴다. 지붕의 경사는 완만하며, 처마는 산뜻하게, 가느다란 나무로 경쾌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내는 등, 주택식 건축에 불당 양식을 가미하여 조화를 이룬 정원 건축의 수작으로서, 귀족 문화를 도입한 요시미쓰의 취미와 당시의 분위기를 잘 전하여 주고 있다.
요시미쓰의 사후, 기타야마 저택은 유언에 따라 선찰로 바뀌어, 녹원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곳의 건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황폐되거나 했지만, 금각만은 다행히도 남아 있다. -24쪽

밤하늘의 달처럼, 금각은 암흑 시대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꿈꾸는 금각은, 그 주위에 몰려드는 어둠을 배경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름답고 갸날픈 기둥의 구조가, 안으로부터 희미한 빛을 발하며 고요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이 건축에게 어떠한 말을 건네더라도 아름다운 금각은 잠자코 섬세한 구조를 드러내 보이며 주위의 어둠을 참고 견디어야 했다.
나는 또한 그 지붕 꼭대기에서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시달려온 금동 봉황을 생각했다. 이 신비스러운 금빛 새는 새벽을 알리지도 않고 날갯짓도 하지 않고, 자신이 새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날지 못할 듯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다. 다른 새들이 공간을 난다면, 이 금으로 만든 봉황은 번쩍이는 날개를 펴고 영원히 시간 속을 나는 것이다.-24~5쪽

금각은 내 손 안에 잡히는 작고 정교한 세공물처럼 생각되는 때도 있었고, 혹은, 하늘 높이 끝없이 솟은 거대한 괴물과도 흡사한 건물이라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미라는 것은 작지도 크지도 않고, 적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소년인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여름철의 꽃들이 아침 이슬에 젖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구름이 산 저편을 가로막고 천둥을 머금은 채 암담한 테두리만을 금빛으로 번쩍일 때에도, 그 웅대한 광경을 보며 금각을 연상했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을 보아도 마음속으로,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형용하기에 이르렀다. -26쪽

그리하여 그토록 꿈에 그리던 금각은 너무도 싱겁게 내 앞에 그 전모를 드러내었다.
나는 연못의 이쪽에 서 있었고, 금각은 연못 건너편의, 기울기 시작하는 햇빛에 그 정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청은 왼쪽 저 건너에 절반 가려져 있었다. 물풀 잎사귀가 드문드문 떠 있는 연못에는, 금각의 정교한 투영이 비치어, 그 투영이 오히려 완전한 모습으로 보였다. 연못 물에 반사된 석양이 각층의 추녀 밑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원근법을 과장시킨 그림처럼 고압적인 금각은, 몸을 약간 뒤로 젖힌 듯한 느낌을 주었다. -28~9쪽

패전의 충격, 민족적 비애 따위에는, 금각은 초연하였다. 혹은 초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금각은 이렇지 않았다. 결국 공습으로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 오늘 이후로는 이미 그러한 걱정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이 금각으로 하여금, 다시금,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는 표정을 되찾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내부의 낡은 금박도 그대로, 외벽에 칠한, 여름 햇빛에 빛나는 옻의 보호를 받으며, 금각은 쓸데없이 고귀한 가구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타는 듯이 푸른 숲 앞에 놓인, 거대하고 텅 빈 장식 선반, 이 선반의 크기에 맞는 장식품은, 터무니없이 커다란 향로라든지, 터무니없이 방대한 허무라든지, 그러한 것들밖에 없으리라. 금각은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잃고, 실질을 즉각 씻어 버린 채, 이상하게도 공허한 형태를 그곳에 쌓고 있었다. 더욱 기묘한 것은, 금각이 이따금 보여 주는 미 가운데서도, 이날만큼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내 심상으로부터, 아니, 현실 세계로부터도 초탈하여, 변하기 쉬운 모든 것들과는 무관하게, 금각이 이토록 견고한 미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68~9쪽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내 독창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메이지 30년대에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내가 불태운다면, 그것은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이 된다. -204~5쪽

생각하는 도중에, 해학적인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금각을 불태운다면'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교육적인 효과는 각별하겠지. 그 덕분에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단지 그냥 지속되어 왔던, 550년 동안에 연못가에 계속하여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지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명히 우리들의 생존은,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된 시간의 응고물에 둘러싸여 유지되고 있었다. -205쪽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210쪽

그 무렵 불과 불은 서로 친밀하였다. 불은 이처럼 세분되어, 멸시당하는 일도 없이, 언제나 불은 다른 불과 손을 잡고, 무수한 불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인간도 아마 그러하리라. 불은 어디에 있거나 다른 불을 부를 수 있었고, 그 소리는 곧바로 전하여졌다. 절의 화재가 실화나 비화 혹은 전쟁에 의한 것일 뿐, 방화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설령 나와 같은 사내가 옛날의 어느 시절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단지 숨을 죽이고 몸을 숨기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절은 언젠가 반드시 불탔다. 불은 풍부하고, 방자하였다. 기다리기만 하면, 기회를 노리던 불이 반드시 봉기하여, 불과 불은 손을 마주 잡고, 해야 할 일을 해치웠다. 금각은 실로 보기 드문 우연으로 불을 모면하였을 뿐이다. 불은 자연히 일어났고, 멸망과 부정은 정상이며, 세워진 건물은 반드시 불에 타, 불교적인 원리와 원칙은 엄밀하게 지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설령 방화라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불의 힘에 호소한 것이었기에, 역사가들은 아무도 그것을 방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216쪽

"지금 생각하면, 이 불행한 연애도 나의 불행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날 때부터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다. 내 마음은, 환하게 밝은 세계를 전혀 몰랐던 듯이 여겨진다."-224쪽

"남들에게 보이는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걸까요?"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아. 하지만 유별난 짓을 저지르면, 또 남들은 그렇게 봐 주지. 세상은 건망증이 심하니까."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어느 쪽이 오래 지속될까요?"
"어느 쪽이건 곧 멈추지. 무리하게 결심하고 지속시켜도, 언젠가는 멈추게 되지. 기차가 달리는 동안, 승객은 멈추고 있지. 기차가 멈추면, 승객들은 거기서부터 걸어가야만 돼. 달리는 것도 멈추고, 숨도 멈추지. 죽음은 최후의 휴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거든."
"저를 꿰뚫어봐 주십시오"라고 결국 나는 말했다. "저는,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제 본심을 꿰뚫어봐 주십시오."
스님은 술을 입에 부어 넣고는, 나를 잠자코 보았다. 비에 젖은 녹원사의 크고 검은 기와지붕처럼 침묵의 무게가 내 위에 있었다. 나는 전율하였다. 갑자기 스님이, 더없이 맑고 쾌활한 웃음소리를 발하였다.
"꿰뚫어볼 필요는 없어. 전부 네 얼굴에 나타나 있거든."-2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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