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품절


"처음 상담을 시작한 것은 이 근처 아이들과의 말장난 때문이었어요. 나미야라는 우리 잡화점 이름을 짖궂게 '나야미, 나야미' 하면서 놀리더라고요. 간판에 '상품 주문 가능. 상담해드립니다'라고 써 있는데, 아이들이 그럼 나야미(고민) 상담도 해주느냐고 자꾸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야 물론이다, 어떤 것이든 다 받아주겠다, 라고 했더니 정말로 아이들이 고민을 상담하겠다고 찾아오더군요.
우스갯소리처럼 시작된 일이라서 그런지 처음에는 장난기 가득한 상담만 들어왔어요. 공부는 하기 싫은데 성적표에는 모두 '수'를 받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라는 식이에요. 하지만 나도 고집이 있는지라 그런 상담에도 진지하게 답을 써서 벽에 붙여줬죠. 그랬더니 차츰 진지한 내용이 많아지더군요. 아버지 어머니가 자꾸 싸워서 힘들다든가, 하는 것이었어요. 나중에는 상담 내용을 가게 앞 셔터의 우편함에 넣도록 했습니다. 답장은 가게 뒤쪽 출입문에 달린 목제 우유 상자에 넣어줍니다. 그러면 익명으로 상담하려는 사람들도 마음 편히 편지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랬더니 언제부터인지 어른들도 고민거리를 편지로 써서 넣어주더라고요."-24쪽

"아니, 몇 마디만 써 보내도 그쪽은 느낌이 크게 다를 거야. 내 얘기를 누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일, 자주 있었잖아? 이 사람도 자기 얘기를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거야. 별로 대단한 충고는 못해주더라도, 당신이 힘들어한다는 건 충분히 잘 알겠다, 어떻든 열심히 살아달라, 그런 대답만 해줘도 틀림없이 조금쯤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31~2쪽

"해코지가 됐든 못된 장난질이 됐든 나미야 잡화점에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다른 상담자들과 근본적으로는 똑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 거야. 증거를 대볼까?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러 찾아와. 우유 상자 안을 들여다보러 온단 말이야. 자신이 보낸 편지에 나미야 영감이 어떤 답장을 해줄지 너무 궁금한 거야. 생각 좀 해봐라. 설령 엉터리 같은 내용이라도 서른 통이나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편지를 써 보낼 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냐. 그런 수고를 하고서도 답장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그래서 내가 답장을 써주려는 거야. 물론 착실히 답을 내려줘야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158~9쪽

"내가 몇 년째 상담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상담자 중에는 답장을 받은 뒤에 다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많아. 답장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지."-167쪽

하긴 이별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고스케는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 아니다. 아니,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이미 단절된 뒤에 생겨난 것,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변명 같은 게 아닐까.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인연이 끊길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어떻게든 회복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인연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몰하는 배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네 명의 멤버들은 비틀스를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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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절판


'이런 마을에 살고 싶다'는 마음은 늘 이방인의 달콤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마을이 실제로 있긴 있다. -48쪽

구도가 카운터 안쪽에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이야기를 해도 될지 생각에 빠져 있는 그 모습이 붉은 에이프런에 수놓인 요크셔테리어와 매우 닮았다. 아주 짧은 순간, 손님과 시간을 포함하여 가게의 움직임이 모두 멈춘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삼나무 문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격리된 이 장소가 구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단, 이 가게의 맹주는 그런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결코 과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조차 못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농락당하는 것도 모른 채 단지 이곳에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뿐이다. -70쪽

자유는 혼자 된 자신을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혼자서 집을 나설 때, 기다릴 사람 없는 집으로 돌아올 때, 부재중 전화 하나 없는 자동 응답기를 볼 때, 욕조에 몸을 담그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자유가 고독으로 바뀐 순간부터 노다에게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
공포와 한없이 닮아 있었다.
'나 이외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생각은 가나리야를 드나드는 지금도 노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응어리로 남아 욱신거리고 있다.
누구나 얼굴 뒤편에 슬픔을 담아 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동시에 누구나 자신의 슬픔이 최악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도 괴로운 법이다."-90~1쪽

이번에는 자신의 전용 고블릿을 비어서버 꼭지에 대었다. 구도가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천천히 이야기를 듣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가게의 손님들이 안고 있는 작은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101쪽

'기원, 소원, 소망, 희망, 절망, 동경.'
사람이 살면서 하는 이런 말들 중 몇 개가 현실이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신앙을 찾는 것이다.
점술이 그렇고 주술이 그렇다. -130쪽

히즈루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 룰을 간신히 이해했다. 이 가게에는 특유의 게임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참가 조건은 명쾌하다.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 양쪽을 겸하는 사람, 셋 중 하나면 된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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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이든 필포츠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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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은 사실들이 변변치 않다고 해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마크는 격해진 감정을 살짝 드러내며 항변했다.
"그것들은 무쇠처럼 단단합니다. 제 눈과 관찰력은 정확하고 빈틈없이 사실을 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아무리 종합적 사고로 본다고 해도 일 더하기 이가 삼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건스씨."
"그러지 않아. 일 더하기 이는 이십일이 될 수도 있고 십이가 될 수도 있어. 아니면 이분의 일이 될 수도 있고. 왜 무작정 결론부터 내리나? 자네는 사건에 관련된 사실을 찾았어. 하지만 유용한 사실을 전부 찾아낸 것은 아니야. 아니면 전부 찾은 것처럼 보이는 거겠지. 벽도 세우기 전에 지붕부터 올릴 셈인가? 게다가 자네가 말하는 '무쇠처럼 단단한' 사실들은 사실도 뭣도 아니야."
"그럼 대체 뭐란 말입니까?"
"정교하게 조작된 허구라네, 마크."-260~1쪽

헌신적인 우정의 유일한 단점이 뭔지 아나, 마크. 아무리 좋은 우정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일세. 그 늙은 책벌레에게 '잘 있게'라고 인사를 하고 헤어지면 아마도 우리는 다시 못 볼 거야. 하지만 그런 이별이 두려워서 진정한 우정을 거부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우의를 다지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과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경험이라네. 사랑은 우정보다 더 멋진 모험일 걸세. 하지만 젊은이, 사랑의 장밋빛 마차 곁에는 뇌성벽력이 도사리고 있다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을 쟁취했다면 기꺼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지. 그러니 내게는 이런 차분한 우정이면 족하네! -271쪽

"사실 '오직 인간만이 비도덕적이지'."
그는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이 말에 씁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마크의 가슴을 적셨다.
마크가 대꾸를 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인간의 비도덕성을 맴돌죠. 저는 가끔 제가 싫습니다. 식료품 가겐 포목점을 하거나 군인이나 선원이 되었다면 차라리 더 좋지 않았을까요? 건스 씨, 제 인생을 건 일이 누군가의 사악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모멸감을 느낍니다. 우리 기술이 활과 화살처럼 진부한 것이 될 날이 오기만 바랄 뿐입니다."-282~3쪽

"괴테가 뭐라고 했던가? 인간이 백만 년을 살아도 성가신 장애물이나, 그 장애물을 정복하도록 몰아붙이는 압박감은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리고 그 누구보다 현명했던 몽테뉴도, 자네 꼭 몽테뉴를 읽어 보게, 이런 말을 했지. 인간의 지혜는 자신이 정한 완벽한 이상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고 말이야. 설령 그곳에 도달하더라도 다시 그 너머의 또 다른 이상을 넘어서도록 자신을 몰아붙인다는 거야. 다시 말해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 나쁜 놈들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런 놈들을 다 잡아들이도록 사람들을 훈련할 수도 없어. 어떤 형태로든 범죄는 계속될 걸세. 인류가 존재하는 한 말이야. 게다가 범죄자들은 나날이 영리해질 거야. 그러니 우리도 분발해야겠지."-283쪽

뛰어난 탐정이나 형사는 무엇보다 어떤 문제든지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양쪽 입장을 다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수사 과정에서 마주치는 문제의 열에 아홉은 오로지 한 가지 면밖에 없다. 그런데 탐정이든 형사든 이런 능력이 부족한 탓에 엉뚱한 사람을 교수대로 보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다시 말해 그럴듯한 가설을 따라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명백하고 뻔한 결론만 좇다 보니 논리적인 전제는 끝장이 나 버리는 것이다. -299쪽

"내일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는 하루라면 좋겠군."
그러자 주제페가 대꾸했다.
"탐정이라면 모름지기 희망을 품어야죠. 때로 탐정에게 가진 것이라곤 희망뿐일 수도 있으니까요."-3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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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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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지키는 게 실은 머리로 이해하는 이상으로 힘들다는 것을 나는 곧 통감하게 된다. 사람은 시야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 느껴지는 기척에 아무래도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불안을 떨치기 위해서는 그쪽을 보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작은 공포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 처음에는 불안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미미했던 느낌이 자꾸자꾸 쌓이면서 어느새 커다란 진짜 공포로 자라난다. 그게 얼마나 불안하고 무섭고 쓸쓸하고 꺼림칙한 느낌인지는 체험을 한 사람만이 실감할 수 있으리라. -39쪽

'게다가 뭣보다도 논리적 사고를 토대로 괴이에 임한다고 반드시 완전히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보장도 없고.'
겐야는 이전의 설명에 의거해 그렇게 섦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비합리, 흑과 백. 세상 많은 사람들이 매사가 그런 식으로 명쾌하게 구분된다고 무의식중에 믿는다는 것도, 지긋지긋하리만큼 겪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80쪽

"물론 실제로 사건이 벌어진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장소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잊히기 쉽단 말이지. 예컨대 같은 마을 사람이 조금 서둘러 뒤를 지나쳤을 뿐인 상황도 여기선 어떤 요사스러운 존재하고 마주친 것처럼 느껴지거든. 또 잠깐 다른 데 들렀다 가느라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인데도 신령한테 납치됐다고 여겨지고. 그런 게 아닐까. 난 처음엔 마을 곳곳에 허수아비님이 모셔진 광경이 무섭게 느껴졌어. 그리고 이런 환경을 스스로들 만들었기 때문에 섬뜩한 전승이 생겨나는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도야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건 자위를 위한 방어책인 거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혼자 길을 다닐 수 없을 만큼 사위스러운 느낌이 있는 거지, 이 마을의 지형엔."-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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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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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하는 온갖 작업과 계산도 잊고, 소설 예술이 제공한 기어, 핸드 브레이크, 버튼 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중에 새로 발명된 것도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씁니다. 소설 쓰기에(그리고 독서에도)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릅시다.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성,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 -20쪽

실러에 의하면 성찰적인 시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단어들이 실재를 규명할지, 실재에 도달할지, 말들이 그가 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 등등의 문제로 불안해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자신이 쓴 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사용한 방법과 기법 들의 인위성도 자각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시인은 자신이 인지하는 세계와 세계 자체를 그다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현대적이고 성찰적인 시인은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지각마저 의심합니다. 게다가 자신이 지각한 것을 시로 옮길 때도 교육적, 도덕적, 사상적 원칙들로 고민합니다. -23쪽

우리는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풍경을 걸어가며 모든 잎사귀를, 모든 부러진 가지를 어떤 신호처럼 여기고 의심하며 주의 깊에 살피는 사냥꾼처럼 행동합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새로운 단어, 사물, 캐릭터, 주인공, 대화, 묘사, 세부 사항, 소설의 언어적, 형식적 특징, 이야기의 예상 밖 진행 등이 표면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한다고 느끼면서 읽어 나갑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은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32쪽

세부 사항들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아름답게 묘사될 때면 우리는 "맞아, 정확히 이래, 바로 이거야"라고 감탄합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상상 속에서 장면을 떠올리고 작가에게 열광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가 모든 것을 마치 실제 경험한 것처럼 설명할 수 있으며, 전혀 경험하지 않았던 것도 실제 경험한 것처럼 우리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도 느낍니다. 이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작가의 '역량'이라고 합시다. 이 역량은 정말로 멋진 것이며, 소설가의 존재를 잠깐이 아니라 전적으로 잊고 소설을 읽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재미없는 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환기하고자 합니다. 그 어떤 소설을 읽건 내내 작가를 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설의 감각적 세부 사항들을 항상 우리의 경험과 비교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51쪽

우리가 어떤 소설에 전적으로 몰입했을 때, 소설 표면에 있는 복잡한 풍경 가운데 깊숙이 내재된 의미를 찾고, 주인공들의 감각적인 경험으로부터(사람들의 대화와 일상의 사소한 세부 사항들을 통해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발견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때 작가의 존재를 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손에 들린 소설이 어떤 작가에 의해 계산되고 계획되어 쓰였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소박하게 잊을 수도 있습니다. 소설 예술의 강력한 특징은, 우리가 작가를 가장 많이 잊는 순간, 그가 텍스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를 잊는 순간, 작가의 세계가 자연스럽고 실재라고 느끼며, 작가의 '거울'을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거울(여기서 유행이 지난 비유를 사용하고 싶습니다)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완벽한 거울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거울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모든 독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하나의 거울을 선택합니다. -52쪽

소설의 등장인물은 필연적으로 이 지점에서 풍경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소설 읽기는 세상을 등장인물의 눈과 정신과 영혼을 통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낭만시, 서사시, 메스네비, 장시 같은 현대 이전의 서사들은 세상을 독자의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이러한 전통 서사에서 주인공은 어떤 풍경 속에 있고, 우리 독자들은 외부에 있습니다. 소설은 우리를 풍경 속으로 초대하고, 우리는 세상을 그 안에 있는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그의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단어를 통해서 봅니다. 등장인물의 눈으로 볼수록 세계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쉽게 이해됩니다. 소설 예술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은 이 친근함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주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아니라, 세계의 속성입니다. 주인공들의 삶, 세상 속에서 그들이 차지한 위치,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순간순간 보고 느끼는 방식 등이 순문학 소설의 소재가 됩니다. -62쪽

소설을 다른 장편 서사들과 구별하고,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장르로 만든 기본 특징은 선 안에 있는 이 작은 점들(신경관) 각각을 통해 이야기 속 인물 가운데 한 명의 눈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관찰한 결과를 주인공의 감정과 지각과 결부시킬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사건이 일인칭 관점으로 서술되든 삼인칭 관점으로 서술되든, 소설가 또는 서술자가 이 관련성을 알든 모르든, 독자는 전체 풍경 속 모든 세부 사항을 사건과 관련된 주인공의 감정, 심리 상태와 연관지어 읽습니다. 소설 예술의 내부 구조에서 비롯된 황금의 법칙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야기와 별로 관계가 없고 사람이나 사물이 없는 풍경 묘사라 할지라도 소설 독자들은 주인공의 감정적, 정신적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79쪽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입니다. 소설은 주로 우리의 시각적 지능, 즉 사물들을 눈앞에 떠올리고 단어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호소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문학 장르와 비교했을 때, 소설은 우리의 평범한 인생 경험과 때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감각에 대한 기억에 의존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소설은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냄새, 소리, 맛, 감촉에 의해 일깨워진 느낌들도-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흉내낼 수 없는 풍부함으로-묘사합니다. 소설의 전체 풍경은 주인공들이 보는 것 외에도 세상의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순간들이 있어 활기를 띱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존재하면서, 매 순간 우리 나름대로 느꼈던 경험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당연히, 보는 것입니다. 소설 쓰기는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소설 읽기는 다른 사람의 단어를 가지고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92~3쪽

소설가는 주인공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에 대해 주인공만큼이나 관심이 있으며, 소설 속 세계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사물'들을 필요한 만큼 화가처럼 묘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플로베르가 말한 '적절한 단어'를 찾기에 앞서 소설가들이 찾아야 하는 '적절한 심상' 역시 풍경, 사건, 소설 속 세계에 완전히 들어간 뒤에야 찾을 수 있습니다. 소설가가 주인공에게 느끼는 애정도 이렇게 해야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사물에 대한 묘사는 주인공들에게 느끼는 애정의 결과이며 표현입니다. -112쪽

소설이 일상생활의 경험과 감각을 묘사하고, 삶의 본질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을 통해 독자를 일깨운다는 얘기는 앞에서 여러 차례 했습니다. 동시에 소설은 인간적인 감정,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일상, 제스처, 말, 태도 들에 대한 강력하고 풍부한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리, 단어, 일상 구어, 냄새, 모습, 맛, 물건, 색깔은 오로지 소서가들이 이것들을 인식하고 단어로써 주의 깊게 배치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어떤 사물 또는 그림을 봤을 때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이야기와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카탈로그의 도움으로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이미지, 대화, 냄새, 이야기, 신념, 감각 등이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묘사되고 보존됩니다. -125쪽

어떤 소설을 완성하고, '실현'하려면 작가의 의도 못지않게 독자의 의도도 중요합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나 자신을 언급하자면, 아이셰처럼 그리고 다른 많은 독자처럼, 아무도 그 소설을 읽지 않을 때 나 혼자만이 발견한 것 같은 느낌으로 읽으며 불운하게도 사람들이 작가의 진가를 몰라준다고 상상하는 것을 나도 좋아합니다. 그런 순간이면 이해받지 못하는 소설의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을 나 혼자만이 이해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주인공들과 동일화되는 것이 자랑스러워질 뿐만 아니라 작가가 소설을 내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다는 착각이 듭니다. 이러한 자긍심이 극에 달하면, 심지어 자신이 그 소설을 썼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중략)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 열심히, 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익게 됩니다. -136~7쪽

어떤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반응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텍스트 속 지식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고 텍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소설가는 독자가 이래저래 해석하리라 추측하며 썼겠지 하고 추측하며 텍스트를 쓰고, 독자 역시 소서가가 이래저래 추측하면서 썼겠지 하고 추측하면서 읽는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독자들이 스스로 작가가 된 기분에 젖거나, 작가가 이해받지 못해 불행해한다고 여기면서 읽을 거라는 것도 소설가는 미리 예상하고, 거기에 맞춰 소설을 씁니다. 어쩌면 지금 나는 직업상의 비밀을 너무 많이 털어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협회에서 제명당할지도 모르겠군요! -137쪽

소설의 중심부는 처음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 사고, 지식 등등입니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중심부의 장소와 형태가 바뀐다는 것도 압니다. 대부분 중심부는 소설을 써 나갈수록 모습이 드러납니다. 많은 소설가가 처음 글을 시작하면서 중심부를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될 주제 정도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소설을 쓸수록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한 중심부의 심오한 의미를 발견해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소설이 진행되고 풍부해질수록, 각각의 나무뿐만 아니라, 뒤엉킨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정성스럽게 묘사되어 그림이 되어 드러날수록, 작가도 독자도 '감춰진 중심부'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소설 읽기는 진짜 중심부와 진짜 주제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표면의 세부 사항에서 묘미를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짜 중심부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합니다. 때로 독자에게는 중심부, 즉 소설의 진정한 주제를 탐색하는 것이 그 세부 사항들보다 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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