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꾸눈 소녀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8
마야 유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품절


"그럼 당신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하늘을 바라볼 때는 다 그러는 법 아닌가?"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모르나보군요."
소녀는 눈을 한 번 커다랗게 떴다가 마치 한숨을 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제야 시즈마는 소녀의 양쪽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응달에 있어서 몰랐는데, 오른쪽 눈은 머리카락과 똑같이 칠흑빛이지만 왼쪽 눈은 약간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 눈이 촉촉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데 비해 초록빛을 띤 왼쪽 눈은 인공적이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의안인 듯했다. -25~6쪽

"……혹시 야마시나 씨가 용의 연못에 남은 게 그것 때문이야?"
"그래요. 아버지는 내가 슬슬 데뷔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나도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와 같은 탐정의 세계에 뛰어들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고토노유에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요."
"그럼 미카게가 탐정으로 데뷔를 하느냐 마느냐가 야마시나 씨의 교섭 능력에 달려 있다는 말이네. 살인현장에서 비지니스라. 어쩐지 굉장히 현실적이군."
"원래 탐정이 그런 거예요. 묘한 환상 같은 건 버리는 게 나아요.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뒤를 잇기 위해 태어난걸요. 이래봬도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요."-62쪽

예민한 시기를 스가루 후보의 대역으로 보낸 사나코는 자신만의 길을 찾고 싶은 것이리라. 그런 심정은 이와쿠라가 평한 '자유'라는 말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한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카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돌아가신 어머니의 뒤를 이어 탐정이 되기 위해 수련해왔어요. 5년 전부터는 경험을 쌓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녔죠. 여러 마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생각을 접했고요. 그런 과정에서 저는 제가 나아가려는 길이 옳다는 걸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됐어요. 사나코 씨도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찾고 있던 자신의 길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미카게는 마치 연장자 같은 말투로 말했다. 열일곱 소녀가 스물네 살 여자한테 하는 말이니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하지만 미카게의 목소리에는 그러한 나이차를 뛰어넘은 진실미가 담겨 있었다. -147~8쪽

"내 왼쪽 눈은 미사사기 미카게의 증표야. 하지만 이 눈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건 아니지."
"그건 무슨 소리야? 요전에는 꿰뚫어본다고 큰소리친 것 같은데."
며칠 전의 광경이 되살아났다. 용의 연못에서 수정 눈을 뜨고 침묵으로 주위를 압도하던 아름다운 모습. 그건 거짓이었던 걸까.
"그냥 퍼포먼스야. 나는 점쟁이도 초능력자도 아니고,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탐정이거든.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어머니의 뒤를 이을 탐정으로 자라왔고." (중략)
"중요한 건 오른쪽 눈이야. 실은 이 오른쪽 눈이 내게 힘을 줘. 시즈마는 우뇌와 좌뇌의 활동에 관해 알아? 우뇌는 감성, 좌뇌는 언어를 관할한다고 해. 그리고 뇌는 각각 반대쪽의 감각을 다스리지. 우뇌가 불완전하면 좌반신에 마비가 오는 식으로."
"즉 오른쪽 눈으로 본 걸 좌뇌가 판단한다는 말이야?"
"그런 셈이야. 그러니 내 머리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는 불완전하고 상황에 좌우되기 쉬운 감성이 아니라, 합리성을 필요로 하는 말로 처리되는 거야. 나는 모든 것을 말로 처리할 수 있어. 거기에는 전혀 애매함이 없지."-158~9쪽

"그럼 미카게는 컴퓨터에 수식을 쳐넣는 것처럼 사물을 본다는 거야? 못 믿겠는데. 바로 에러가 날 거야." (중략)
"그러니까 오히려 탐정활동에는 수월해. 합리적이지 않으면 반드시 좌뇌가 반응하지. 모순된 현상이라고 말이야. 특히 인간은 우뇌 탓에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에만 반응하도록 되어 있어. 어중간하지. 하지만 말로 처리할 때는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야 해. 어중간한 건 원래 나쁜 일은 아니지만, 탐정한테는 마이너스 요소일 뿐이야."-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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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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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13쪽

곰곰이 생각해 봐도 신기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는 심오한 비밀을 간직한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밤에 대도시에 갈 때면,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집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집 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 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두려운 어떤 것, 심지어 죽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나는 애지중지하는 책을 펼칠 수도 없고 끝까지 읽겠다는 희망도 품지 않는다. -25쪽

내 친구도 죽고, 내 이웃도 죽고, 내가 목숨 바쳐 사랑한 연인도 죽는다. 죽음은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밀을 변함없이 공고화하고 영속화한다. 나 역시 내 비밀을 죽는 날까지 가져갈 것이다. 그렇다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내가 지나가는 이 도시의 무덤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니, 나 자신도 이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25~6쪽

때가 오고 있었다. 또다시 포도주가 거리의 자갈 틈으로 쏟아지고, 그 흔적이 그곳의 많은 사람을 붉게 물들일 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탕투안, 그 성스러운 얼굴 뒤로 어슴푸레한 빛은 자취를 감추고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그 성스러운 존재를 시중드는 추위와 더러움과 무지와 빈곤은 마치 대단한 권세를 지닌 귀족처럼 모든 것을 지배했는데 그중에서 빈곤이 가장 그러했다. 늙은이를 젊은이로 바꿔주는 마법의 맷돌은 분명히 아닌 맷돌 속에서 끔찍하게 갈리고 또 갈린 적이 있는 몇몇은 모퉁이에서 떨었다. 그들은 모든 집을 들락날락했고, 창문으로 낡은 옷자락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을 갈았던 맷돌은 젊은이를 늙은이로 만들어주는 맷돌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찌들었고 목소리에는 근심이 배었으며 그들의 얼굴에나 어른들의 얼굴에나 세월의 고랑이 파였고, 새로 생긴 고랑은 굶주림의 표시였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49쪽

움직이지 않고 영원한 별들의 아치 아래-학자들이 말하기를 어떤 별은 이 작은 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고통받고 죽어가는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우리를 비추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밤 그림자는 커다랗고 시커멨다. 새벽이 오기 전 춥고 불안한 시간 동안 유령들은 또다시 자르비스 로리의 귀에 대고 예전 질문을 속삭였다. 로리는 묻혀 있다가 파내어진 지 얼마 안 된 이의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서 섬세한 감각이 사라졌는지, 회복될 수는 있을지 궁금해하던 터였다.
"되살아나고 싶은가?"
대답은 그때와 같았다.
"잘 모르겠소."-74~5쪽

"나는 말이오, 무엇보다 내가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을 잊고 싶다오. 이렇게술을 마실 때가 아니면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거든. 하긴 세상도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겠지. 우리는 특히 그 점에서 아주 다르오. 솔직히 난, 당신과 나, 우리가 어떤 점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오."-121쪽

기력은 모두 소진되었고 사방은 황량했다. 남자는 조용한 언덕을 가로질러 가만히 멈춰 서 있다 문득 앞에 펼쳐진 황무지에서 명예에 대한 야망과 자기부정, 불굴의 의지 같은 신기루를 보았다. 그 공평한 도시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신중한 사람들이 그를 올려다보는 상상 속의 화랑이 있고, 탐스럽게 익은 삶의 열매가 열린 밭이 있고, 눈을 반짝이게 하는 희망의 샘이 잇었다. 하지만 그 순간뿐, 환상은 사라져버렸다. (중략) 슬프고 슬프게도 태양은 떠올랐다. 햇빛이 비친 광경에서 무엇이 그 남자의 일생보다 더 슬프겠는가. 뛰어난 능력과 선량한 심성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쓰지 못하며, 자신을 파먹는 해충인지 알면서도 그 해충이 자신을 먹어치우도록 보고만 있는 남자였다. -132~3쪽

나리에게는 일반 국사에 관해 참으로 고결한 생각이 한 가지 있었으니 모든 것이 저절로 굴러가게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수한 공무에 관해서도 고결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반드시그에게, 이를테면 그의 권력과 주머니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이든 특수하든 자신의 만족에 대해 또하나 고결한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온 세상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계급의 성스러운 경전은 (많이도 아니고 원본에서 대명사만 살짝 바꿨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리께서 이르시되, 이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니라."-152쪽

"오래 걸리지요." 아내가 되풀이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 있나요? 특히 복수와 응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요. 그건 자연법칙이에요."
"번개가 사람을 내려칠 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그 번개가 만들어져 저장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죠? 말해 봐요." 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드파르주는 아내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진이 도시를 집어삼키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부인이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하지만 지진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죠?"
"아마도 오래 걸리겠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하짐나 준비가 끝나고 실행에 옮겨지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리죠.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언제나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마음을 편히 가져요. 흔들리지 말고."-255~6쪽

죄수라고 하면 치욕스러운 범죄나 부정을 연상했던 신참 죄수는 감옥의 사람들을 보고 놀라서 멈칫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내내 느꼈던 비현실감은 온갖 세련된 매너와, 몸에 밴 예절과 품위 있는 태도로 자신을 맞는 수감자들을 보는 순간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의 세련된 태도는 음침한 감옥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유령에게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찰스 다네이가 죽음의 무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유령, 위엄 넘치는 유령, 우아한 유령, 자부심 넘치는 유령, 천박한 유령, 위트 있는 유령, 젊은 유령, 늙은 유령할 것 없이 모두 황량한 해안에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들어왔다 죽어 나간 사람들을 목격한 다음 바뀐 눈빛으로 멍하니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샤를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옆에 서 있는 간수라든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간수들의 모습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들, 활짝 핀 젊고 고혹적인 딸들, 젊은 미인, 점잖고 성숙한 여인과 너무도 터무니없이 대비되어 보였다. 이런 환영은 모든 경험과 가능성이 전도된 현실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365~6쪽

하지만 박사가 다네이를 석방시키려고, 아니, 최소한 재판은 받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게 당시 여론은 너무 강경했고, 급격하게 변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국왕은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공화국은 세상을 상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전쟁을 선포했다. 노트르담의 높은 탑에는 밤낮으로 검은 깃발이 나부꼈고 삼십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프랑스 곳곳에서 지상의 압제자에 대항해 총궐기를 했다. 마치 용의 이빨을 널리 뿌려놓은 듯 언덕과 평원, 바위와 자갈, 충적토에서, 남쪽의 환한 하늘 아래, 북부의 구름 아래, 가을과 겨울 할 것 없이,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에서, 짧게 깎은 풀과 옥수수 그루터기에서, 넓은 강의 비옥한 강둑, 해안의 모래밭에서도 똑같이 열매를 맺은 듯했다. 그런데 어찌 사사로운 근심으로 인민 공화국 원년의 범람하는 물결을 거스르려 하겠는가. 그것도 하늘의 창문도 닫힌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홍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대홍수를 말이다.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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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절판


피아노 연주를 계속한다는 건 글렌보다 더 잘해야 된다는 걸 의미했는데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난 피아노를 포기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4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난 스스로에게 말했다, 피아노는 이제 그만. 그러고는 더 이상 악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12쪽

글렌은 베르트하이머를 친애하는 몰락자라는 말로 맞이했다. 북미인답게 냉정했던 그는 베르트하이머를 늘 몰락하는 자라고 불렀고 나한테는 아주 무미건조하게 철학자라고만 했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베르트하이머는 늘 몰락의 와중에 있었는가 하면, 나는 철학자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에 글렌의 눈에는 우리가 몰락하는 자와 철학자로 보였을 거야, 난 여관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19쪽

모차르테움은 형편없는 학교지만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줬다는 점에서는 가장 좋은 학교였어, 여관에 들어서면서 난 생각했다. 대학이란 무조건 나쁜 곳이긴 하지만 우리의 눈을 열어주지 못하는 학교는 가장 나쁜 학교다. 얼마나 형편없는 선생들을 겪어내야 하며 그들은 또 우리 머리를 얼마나 망쳐놓았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예술을 쫓아내는 자들이었고 예술 파괴자이며 정신의 살해자, 대학생들을 파멸시키는 자들이었다. 호로비츠는 예외였고 마르케비치와 베그도 예외였어, 난 생각했다. 하지만 호로비츠 한 사람이 일류 아카데미를 만드는 건 아니다. -20~1쪽

글렌은 몰락하는 자라는 말이나 개념을 아주 좋아했는데, 지그문트 하프너 골목 거리에서 글렌이 그 말을 만들어내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는 병신밖에 안 보여, 라고 언젠가 글렌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부 병신이야, 병신 아닌 사람이 없어, 오래 바라볼수록 더 병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병신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상은 병신투성이야, 거리에 나가면 병신들만 만나게 된다고, 집에 누구를 초대하면 병신을 맞이하는 셈이야, 라던 글렌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비슷한 것을 여러 번 눈치챘기 때문에 글렌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베르트하이머와 글렌과 나, 우리 모두가 병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정, 예술주의라니! 이런 생각을 했다. 맙소사, 얼마나 미친 짓이야!-34쪽

베르트하이머처럼 자기 친척을 지독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묘사만으로 깔아뭉갤 줄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까지 증오했던 그는 자신이 불행한 건 그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자기가 살아야 하는 건 순전히 가족의 잘못이라고 끊임없이 책망했으며, 가족이 자신을 이처럼 끔찍한 실존이라는 기계 속으로 던져넣고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다시 기계에서 나오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저항은 소용없어, 라고 그는 늘 말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실존기계 속으로 던져 넣으면 아버지가 아이를 부지런히 토막 내는 그 기계를 평생 가동시켜온 것이라 했다. 부모들은 자기네가 바로 불행이고 그 불행을 자식에게 대물림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도 아이를 잔인하게 실존기계 속에 던져 넣지, 라던 베르트하이머의 말을 생각하며 여관 식당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45쪽

자살을 못 한 이유는 끊임없는 내 호기심 때문이야, 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부친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친은 우리를 세상 속에 내던졌기 때문에, 그리고 여동생은 우리가 겪는 불행의 산증인이기 때문에 용서 못 하는 거야. 존재한다는 건 돌려 말하면 이런 거잖아, 우리는 절망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이렇게 말했다. 눈을 뜨면 나 자신이 혐오스럽고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자려고 누우면 죽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소원밖에 없는데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된 지 벌써 50년이 됐어, 라고 베르트하이머는 말했다. 50년 동안 오직 죽기만을 바랐지만 아직도 살아 있고, 그걸 어떻게든 바꿔볼 수 없는 건 순전히 우리에게 철두철미한 일관성이 없어서라고 생각해보면 말이야, 라고 베르트하이머는 말했다. 그건 우리가 비참함과 비열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야, 라고 그는 말했다. 음악에 재능이 없어서야! 사는 데 소질이 없어서라구! 그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살 능력조차 없으면서, 살아 있을 능력조차 안 되면서 거만이나 떨면서 음악 공부를 하다니! -49쪽

우리는 누군가를 친구라고 믿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잖아,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어, 사실이 그렇다고, 라고 그는 말했다. -49~50쪽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공부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난 생각했다. 오로지 생각만 하고 생각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세계를 관조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지, 난 생각했다. -52쪽

흔적을 남기면 안 돼, 베르트하이머가 곧잘 하던 말이다. 친구가 죽으면 우리는 그 친구가 잘 쓰던 표현이나 발언으로 그를 못 박고 친구가 즐겨 사용했던 무기로 그 친구를 죽인다. 살아 있을 때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건넸던 말 속에서 계속 살아남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친구가 한 말로 그 친구를 죽일 수도 있다. 친구가 했던 말이나 기록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 친구에 대해서!) 아주 가차 없이 굴지, 그리고 만약 기록이 없다면, 그러니까 친구가 예방 조치로 기록을 미리 없애버려서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친구가 했던 말로 그를 파멸시키지, 난 생각했다. -56쪽

베르트하이머는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끌렸는데, 그 사람들에게 끌렸다기보다는 그들의 불행에 이끌렸던 셈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행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는 불행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한테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바로 불행이야,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야, 라고 베르트하이머가 곧잘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불행한 일이야, 살아 있는 동안 불행은 지속되고 죽음만이 그걸 그치게 할 수 있어, 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우리가 늘 불행하다는 얘기는 아니야, 행복도 불행을 전제로 하니까, 불행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만 행복할 수 있잖아, 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65쪽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신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 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 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들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는 언제나 모방자였어, 자기보다 여건이 유리하다 싶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따라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기본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꼭 예술가이길 바랐기 때문에 재앙을 자초한 거야, 난 생각했다. 그의 불안,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걷고 또 걷고, 뛰고 또 뛰었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야, 난 생각했다. -92쪽

글렌은 행복한 사람이야, 나는 불행한 사람이고, 라고 그는 곧잘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불행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글렌이 행복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대꾸했다. 이런저런 사람이 불행하다는 말은 항상 맞는 말이지만, 이런저런 사람이 행복하다는 건 절대 맞는 말이 아니야, 난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의 눈에는 글렌 굴드가 항상 행복한 인간으로 보였고 나도 그렇게 보였다는 건 그에게서 여러 차례 들어 알고 있지, 난 생각했다. 자기를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여겼던 베르트하이머는 늘 나보고 행복하겠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불행하기 위해, 자기가 말하는 그런 불행한 사람이 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고 난 생각했다. -99쪽

우리는 머리로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상대하며 자기 입장에서만 그들을 대하지, 난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입장에서만 그들을 바라봐서는 안 되고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 거야, 사람들을 대할 때, 아무런 선입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지, 난 생각했다. -127쪽

사람은 신경 쓰이는 일을 잠깐 피해보겠다고 다른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등 부당하게 행동하지, 불편한 대면을 피하겠다고 말이야, 난 생각했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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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아가씨 - 근현대 여성 공간의 탄생
김미선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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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 -7쪽

이러한 작업을 통해, 여성의 소비 공간인 양장점과 미장원이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노동 공간이자 배움의 공간이었음을 알았다. 또한 다양한 여성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그들의 일상을 접할 수 있는 창구임을 깨달았다. 일련의 작업은 내게 새로운 연구 지평을 열어주었다.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소비문화가 해방 이후에 연속되거나 단절되는 '변화성'을 주목해야 하며, 특히 이것을 식민지 근대 도시의 '공간성'과 관계 지으며 조망할 때 한국의 근대성을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식민지 주선의 중심지였던 본정이 한국전쟁 이후 소비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으로 바뀌는 과정과 그 결과의 의미를 논의한 배경은 여기에 있다. -10~11쪽

명동은 식민지 시기 일본인에 의해 새로운 소비 공간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였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남산 기슭이었다. 이 일대는 원래 '남촌'이라 불렸는데, 가난한 양반이나 하급 관료들이 주로 거주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인들은 남산골 진고개에 일본 공사관을 세우고 이 일대를 독점적인 거류지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진고개 일대를 일본 또는 본국을 의미하는 본정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이곳에 통감부를 세웠는데, 조선이 강점당한 이후 이름이 조선총독부로 바뀌어 1926년까지 있었다. 일본은 서울역과 가깝고 조선 정치의 중심지인 경복궁과 마주한 본정통과 그 일대를 거점으로 새로운 상권을 개발하고 조선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39쪽

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 서울에서 으뜸가는 번화가인 명동 거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로운 지대이기도 하다. (…) 이 땅의 냉한지대와는 아랑곳없이 명동의 하루는 낮이면은 낮대로, 밤이면 밤대로 온갖 사치와 유행과 오락과 술과 여자로 그칠 사이 없는 소란 속에 그래도 한국 최고의 호사로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오백 환, 천 환짜리 지폐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마구 난무하는 곳, 명동 거리. 넓이 약 2평방키로의 이 유흥 지대는 어느 일면으론 바로 서울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60쪽

명동에 즐비하게 차려놓은 양품점, 양복점, 양장점은 도합 50개소가 넘으며, 모두가 최신의 첨단을 걷는 것으로 자처하여 이 점으로 해서 일반 상점의 그것보다 약 이 할 이상이 비싼 것도 특징. 하긴 대지 한 평에 이십만 환서부터 삼십만 환이니 우리나라 판도 안에서 가장 비싼 땅이 바로 명동 일대. -61쪽

'명동 족속'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남자건 여자건 간에 겉보기에 일목요연하다. 최신, 최고…… 무엇이든 이 두 가지 요건이 구비된 것만을 몸에 붙이고 또 가까이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신조인데 여하간에 한국의 유행은 서울에서 퍼지고 서울의 유행은 명동에서 시작된다. 모던 여성의 복장 스타일을 좌우한 A라인, H라인, 후레야, 타이트, 헵번 스타일, 복스 타잎, 맘보 스타일…… 가지가지 유행이 파리에서 뉴욕에서 동경에서 뒤늦게 수입되어 항상 그 쌤플을 보여주는 것이 명동 거리…… 또 쌤플 노릇을 한다는 것이 명동 뽀이나 껄들의 자랑. -61~2쪽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양재와 미용 기술 관련 학원과 학교는 전쟁으로 문을 닫았다가 전후 명동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명동에 양장점과 미장원이 증가하면서 양재사와 미용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 시설이 필요해졌다. 이렇게 명동은 여성들의 공간, 즉 성별화한 소비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이처럼 전후 명동을 중심으로 여성과 관련된 소비 공간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에는 한국전쟁 기간에 피난민이 대거 몰린 부산을 비롯한 대구에서 소비문화가 번성했던 요인이 있다. 여성들은 전쟁 중에도 양재와 미용 기술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하고 돈을 벌었다. 그 경험은 전후 여성들이 기술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하거나 교육 시설을 운영하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81~3쪽

미용이란 다시 말하면 화단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추리고 의지를 만들어주는 가꿈이라 하겠읍니다. 소박한 미를 정리된, 그리고 조화되고 세련된 미로 이끌어올리는 길이 아니겠읍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에의 역행이 아니라 자연을 정리하고 보조하며 살리는 길이요 방법이라 하겠읍니다. 젊은 여성이 미용(미장원 출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에나 악세사리에 관심이 없다면 그 인생은 오히려 어딘지 부자연하고 병적이고, 기형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읍니다. 인생에 패배하고 절망한 약자가 남을 증오하고 남과 싸울 기력도 없이 그 채찍을 자신에게 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읍니다. 몸을 가꾼다거나, 장식한다는 일은 여성에게 있어선 산다는 열의와 근면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117~8쪽

당시를 살아가던 여성에게 명동은 소비 공간과 노동 공간인 동시에, 그 이상의 공간이었다. 자신들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곳이었으며, 심정적으로 더욱 유착된 공간이었다. 이들은 명동의 양장점에서 새로 옷을 맞춰 입고 미용실에서 최신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178쪽

명동에는 양재사와 미용사와 같은 직업여성, 이곳을 드나들며 소비하는 여성들, 성적 서비스를 하는 여성들 등 다양한 부류의 여성들이 공존하였다. 이 다양한 여성들은 명동을 여성의 공간으로, 즉 소비 공간, 노동 공간,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이곳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으며, 국극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를 통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소비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은 여성들에게 해방 공간과도 같았다. 여성들은 명동이라는 공간을 드나들면서, 서로 달랐음에도 용광로처럼 하나의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어냈다. -202쪽

다양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조건에 처한 여성들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명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측면이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허무'가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은 부딪쳐 싸웠고 도전하였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명동에 모여들어 이곳에서 많은 것들을 공유하였다. 동시에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그 간극을 알아가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1950년대와 1960년의 명동처럼 다양한 연령대와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보이는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한데 만날 수 있던 공간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연령과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따라 공간적 분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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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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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 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쪽

사랑의 시작은 그래요.
어떤 이상적인 호감의 대상이 한번 내 눈을 망쳐놓은 이후로,
자꾸 내 눈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그 사람 주변을 맴돌아요.
한 번 본 게 다인데 내 눈은 몹쓸 것으로 중독된 무엇처럼
그 한 사람으로 내 눈을 축축하게 만들지 않으면
눈이 바싹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거죠.

하지만 이 그림은 혼자서만 애태우는 사랑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존재 때문에 애달파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부딪치고 나면 아마도 두 사람은
마음을 터놓으면서 자신의 감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르죠.
"사실, 난…… 오래전부터,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이 말을 동시에, 둘이서, 상대방이 똑같은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 말이 골목 가득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거예요. --쪽

당신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를 100이라고 친다면
나는 얼마쯤이었을까.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많은 숫자가 1000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가운데 얼마였을까.
당신은… 당신의 만 개쯤이나 되는 생각 속에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얼마쯤이었을까. --쪽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서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쪽

무엇 때문에 난 사랑하지 못하는가, 하고 함부로 생각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사랑을 '누구나, 언제나 하는 흔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잘하는 것 하나 없으면서 사랑조차도 못하는가,
하고 자신을 못마땅해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사랑을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흔한 것도 의무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다.

사랑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잃어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랑해라, 사랑하고 있을 때만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며,
아름다운 유일한 한 사람이다. --쪽

발걸음을 멈춰 서서 자주 뒤를 돌아다본다.
그건 내가 앞을 향하면서 봤던 풍경들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지나온 것이 저거였구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아예 멈춰 선 채로 멍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일도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버린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를 뒤집어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나에게 찾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쪽

간혹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다녀야만 하냐고. 피의 문제라고 대답도 했다가 결핍의 문제라고도 했다가 나도 잘 모른다, 라고 대답을 해왔다. 상상력을 위해서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폼 잡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더 가난한 시대에, 사람들은 함부로 남을 이야기할 때만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 뻔한 상상력만으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사는 눈치다.
진정으로 남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해서, 낯선 공간으로 끌려들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먹먹해지고 막막해져서 조금 나은 상상력의 밑천을 짊어지고 돌아오기 위해 나는 먼 길에 머무르기를 좋아한다. --쪽

여행은, 12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곳'을 찾아내는 일이며
언젠가 그곳을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키우는 일이며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그때 그 기억만으로 눈이 매워지는 일이다. --쪽

힌두교도의 말 중에는 '중요한 것은 우주를 한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한바퀴 도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쟝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중심'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고, 무엇을 이해하는지의 핵심은 항상 '중심'에 있다. --쪽

거기, 길이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고, 운수 좋은 일이 닥칠 것 같은 길이었다. 애초부터 그 길을 가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다른 길로 가려 했지만 뭔가 자꾸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던 길. 그래도 그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다른 길로 가다 보니 어느새 길은, 이쪽 길로 이어져 있었다. 다른 길로 가도 한 길이 되는 길의 운명. 길의 자유. 그 길 위에 나는 서 있었다. 그 길에 서 있음으로써 나는 살 것 같았다. --쪽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처 때문에 떠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사람으로부터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떠나 눈발이 된다. 사는 일 또한 그랬다. 차곡차곡 쌓인 사람과 희망에 대한 환상으로 살면서, 때론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뭔가가 닥치는 일이 인생이고, 그 닥치는 일을 잘 맞이하고, 헤치고 그러다 다시 처음인 듯 끌리고 하는 게 인생의 길이란 생각이 든다. 나 또한 모든 이들의 바람처럼 그 인생을 통째로 느끼고 싶었고, 느끼며 살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책의 바탕은 그것이 된다. 조금 욕심을 낸다면 그 느낌들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이 가주었음 한다. 내 길에 당신도 함께해줬으면 한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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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1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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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17: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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